조선상고사, 국사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역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상고사/역사의아침]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마주하며…….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 활동 상태에 대한 기록이다. (21쪽}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학창시절 역사책 한 자락에서 마주한 책이다. 우리 민족의 활동 반경을 중국 요서지역까지 넓힌 자주적 역사관을 보이는 점은 인정받았지만 주류 역사서로 인정받지 못한 우리의 고대사였다. 대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던 『조선상고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우선 단재 신채호에 대해 알아보자.

신채호(1880~1936)는 고종 17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태어난 신숙주의 후예다.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친 독립운동가과 언론인, 애국계몽운동가, 교육자다.

그는 어릴 적부터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0세에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었고, 시문에도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18세에 할아버지의 소개로 학부대신 신기선의 사저에 드나들면서 많은 서적을 섭렵했고,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고, 22세에는 향리 부근에서 신규식과 함께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25세에는 신규식, 신백우 등과 함께 산동학원을 설립해서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대한 뜻을 접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썼다. 이후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 되면서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주필이 되었다. 그는 신문에 시론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고, 우리나라의 역사관계를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한말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영웅을 열망하며 을지문덕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 등에 대한 책을 써서 영웅사관을 보이기도 했다.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에도 참여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중국 망명 이후에는 항일운동과 민족교육, 상고사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는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 고대사 체계화에 도움을 얻게 된다. 하지만 1928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한 죄로 대만에서 체포되었고 1930년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 이감되었다.

 

『조선상고사』는 그가 뤼순감옥에서 <조선사>란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이다. 1936년 그가 뇌일혈로 죽기까지 쓴 미완의 우리 고대사다. <조선사>는 1948년에 이르러 『조선상고사』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고려 때 묘청의 혁명을 진압한 김부식 사건을 ‘조선 역사 1천 년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우리 민족 중심의 역사책이 아니라 중국 변방의 사대주의적인 역사책이라고 비판했다. 삼국 고유의 특징들이 전혀 없고, 더구나 중국 역사책에 기록된 우리 조상들의 역사마저도 상당 부분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후 우리 역사에서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역사관이 사라지고 사대적이고 퇴보적인 역사관이 지배했다고 보았다. 『삼국사기』는 사대주의 사상에 절은 양반들과 유교 사상으로 뭉친 지배층들의 역사 왜곡을 보여준 책이라고 했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부터 2년간 군경을 동원하여 20여 만 권의 서적을 수거했다. 그 책의 상당수는 오늘날 일본 왕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렇게 고려·조선·일제강점기에 한국의 고대 역사서들은 계속해서 사라졌다. 세 시기에 사라진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한민족의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역사를 담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한국인의 가상에서 자주성이나 진취성이 감소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일의 시작이 김부식이었으니, 신채호는 묘청과 김부식의 투쟁을 조선 역사 1천 년 이래 최대 사건이라고 평했던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일제는 우리의 역사 왜곡을 위해 식민사관을 주입시켰고 우리나라의 역사책은 모조리 가져갔지만 유독 『삼국사기』만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일제의 속셈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상고사』의 중요성을 정리하면…….

단재는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삼국으로 이어지는 중국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대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우리의 자주적인 역사라고 강조한다.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다는 점,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만주 중심에서 벗어나 중국동북부 지역, 요서지방까지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종래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한사군을 한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고 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로 진출했다고 확대했다. 삼한의 이동설, 전후 삼한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조선상고사』가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 인식이었기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 했다는 비판도 하고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도 분명 의의가 있지만 고구려와 부여, 발해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니까.

 

주류 역사학자들은 『조선상고사』의 이런 내용에 대해서 자주적 역사서라는 의미를 둘 뿐 연구할 가치는 없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역사서로서의 실증이 부족하고 언어적인 유래를 살펴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까지 모아 역사를 다시 집필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단재 신채호가 역사학자도 아니고 독립운동가의 관점에서 이해관계에 얽혀 서술했다고 주장한다.

 

 

지금 주류 고대사학계는 여전히 식민사관 수호자들의 모임, 친일파 역사학자의 계보를 잇는 학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니 『조선상고사』를 근대 사학, 민족주의 사학의 출발이라는 긍정적 평가는 받았지만 민족주의 사상이 지나치게 투영되었다는 점, 실증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 한국사 고대인식이 교조적이고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겠지.

물론 감옥에서 이용할 수 있는 사료의 한정성, 상당 부분은 기억에 의존한 서술 등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철저한 조사와 고증과 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 역사서의 주류로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우리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사관의 후예들이 주축이라는 책을 읽은 적 있다. 다뉴세문경과 세형동검을 재현하러 중국 동북부 지역을 다니면서 고조선의 유물이 많다는 예술가의 증언을 실은 책도 읽은 적 있다. 『조선상고사』에서 실증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주류 학자들이 이런 증거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주면 좋겠다. 지나간 과거지만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역사 연구는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이 주축이 되어 우리의 고대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힘을 써도 되지 않을까. 고대사 연구 붐이 일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사망할 때까지 조선사를 집필했던 신채호의 열정,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휘둘려 왜곡된 우리 고대사를 제자리에 놓으려고 고군분투한 외로웠던 천재의 피와 땀을 보게 된다. 두고두고 보고 또 봐야할 귀중한 책이다.

 

 

단재 신채호 기념관 사이트 http://www.danjae.com/01his/his2.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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