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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말 ㅣ 소울메이트 고전 시리즈 - 소울클래식 7
영조 지음, 강현규 엮음, 박승원 옮김 / 소울메이트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영조의 말]탕평책과 개혁정치를 펼친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어록…….
영조는 비록 개인사적으로는 출신에 따른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친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등 굴곡이 많았지만, 정치적으로는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정립해 수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한 개혁군주였다. 또한 조선의 왕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위민과 애민의 군주로서 민생문제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해소하며 손자인 정조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11쪽)
개혁과 위민의 군주인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장수한 임금이요, 가장 오래 재위한 임금이다. 천한 태생 콤플렉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이었을까? 그는 생활이 검소하고 눈물 많고 인간적이며 백성의 삶을 잘 헤아린 임금이다.
영조의 출생과정은 조선 역사상 가장 미천할 정도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숙종의 총애로 후궁 자리에 올라 아들을 낳아 정1품의 ‘빈’ 자리에 올랐다. 사실 숙빈 최씨는 궁녀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 궁녀의 시중을 들며 물을 길러주던 무수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핏줄에 대한 배경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영조를 더욱 괴롭힌 것은 경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영조가 경종에게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죽음에 따른 죄책감과 출신성분에서 오는 자격지심이 더욱 그를 검소하고 강한 임금으로 키웠을 것이다. 그런 충정으로 노론과 소론을 두루 중용하는 탕평정치를 펼쳤지만 노론의 계락으로 아들인 사도세자를 믿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것 또한 영조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위민 애민의 강력한 정치를 펼치던 영조는 장수한 세월만큼 많은 어록을 남겼다. 영조는 80종이 넘는 어제에는 백성에 대한 사랑, 치열한 자기수양, 과거에 대한 회고와 개탄 등을 적기도 했다.
그의 어록에는 왕이 농사를 짓는 친경의 실시하고, 준천 공사에 백성의 의견을 듣고, 홍수와 가뭄에는 백성들을 걱정하고, 방만한 국가 재정을 막기 위해 새로운 회계법을 만들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신문고를 부활해 백성의 억울함을 듣고, 균역법을 시행해 양역의 불균형을 잡고, 오늘날의 청계천을 준설해 하수처리를 해결하고,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통첩을 만들고, 여종의 공납을 정지하고, 붕당의 폐해를 막기 위해 ‘탕평’을 고민하고, 사도세자에 대한 고민한 모습들이 담겨 있다.
도량을 파내는 하나의 일은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다. 한번 명령을 내려 시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와 같은 큰 역사는 즉위한 뒤에 처음이다.(이하 생략) (88쪽)
영조 35년에 영조 임금이 명정전 월대에서 준천을 주관하는 관리와 백성들을 만나 준천에 대해 하교하는 말이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백성들을 격려하고 직접 공사에서 삽을 뜨며 일꾼들을 독려하던 영조였다.
두루 사귀면서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않는 것은 실로 소인의 사사로운 의도다. (105쪽)
당쟁의 중심인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에 있는 말이다.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물든 붕당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왕의 노력이 보인다. 노론과 소론의 분탕질 같은 붕당 싸움에서 백성을 위해 탕평을 생각하고, 백성을 위해 양역을 생각하고, 백성을 위해 정치를 생각했던 왕의 노심초사도 담겨 있다.
네가 왕손의 어미(사도세자의 후궁인 경빈 박씨)룰 때려죽이고, 비구니를 궁으로 들였으며, 평양으로 여행가고, 북한산성으로 놀러 나갔으니, 이것이 어찌 세자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들을 수 있었겠는가? (중략) 이와 같이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194쪽)
영조 38년 왕이 사도세자의 악행을 꾸짖는 대목이다. 늘 아버지의 눈에 들지 못했던 사도세자의 악행은 진짜 사도세자의 짓일까? 아니면 노론이나 소론의 음모일까? 궁금하다.
지금 세손을 보니, 진실로 성취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226쪽)
영조 37년 세손(정조)과의 강연 후 강관들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아버지를 잃은 세손에게 그 슬픔을 잊고 백성을 위해 정치하기를 늘 강조하는 대목이다. 정조의 선정에도 할아버지 영조의 가르침이 컸으리라.
이 책의 사료는 영조 재위 52년 9개월간의 기록인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최고의결기관이던 비변사의 매일 업무를 기록한 책인 『비변사등록』, 『정조실록』,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 영조가 지은 글(어제) 등이라고 한다.
위민 애민의 강력한 정치를 펼쳤던 영조의 어록을 보니, 미처 몰랐던 영조의 삶과 가르침을 알 수 있었다. 역사책 한 자락에서 탕평책과 균역법으로 만났던 영조에게 이리도 기구한 사연이 많을 줄이야.
일찍이 할아버지인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노론의 역할로 왕이 될 수 있었던 영조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왕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더구나 유약한 아들 사도세자에게 만큼은 누구보다 엄하게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만고에 없던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세손을 훌륭한 성군으로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어록들, 가정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먹먹함을 더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