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겹으로 만나다 - 왜 쓰는가
한국작가회의 4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회 엮음 / 삼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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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겹으로 만나다 왜 쓰는가]고은 시인의 대표작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한국작가회의 40주년 기념으로 나온 책이다. 문학과 희망의 백년대계를 위해 희망을 담은 책이다. 시 낭독회, 소설가-평론가들 상호 세미나를 위해 모은 레퍼토리들이다. 시 낭독과 세미나 문화를 위해 마련된 책이다.

 

 

 

  

 

맨 앞에 나온 고은 시인의 시를 온전히 읽은 적이 없기에 가장 끌린다. 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으로 자작나무숲으로 가서를 꼽았다.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에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는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중략)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 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15)

 

    

고은 시인이 한 여성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선뜻 꼽은 자신의 대표시다.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 면에 있는 이월마을 칠현산 기슭은 자작나무 천지다. 하얀 나무껍질이 아름다운 자작나무는 겨울이면 입고 있던 나뭇잎마저 떨친 채 벗고 서있다. 헐벗은 나신 같은 풍경 앞에 선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연히 등산길에서 만난 자작나무 숲에서 불경한 죄를 짓기 전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생각한 것일까. 바람결에 부딪치는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림에서 우리나라 어머니 세대와 할머니 세대, 아니면 그 이전 여인들의 애달픈 삶과 희생에 대한 소곤거림으로 들었을까. 어쩌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마음을 정화하고 또 정화한 것이리라. 자연을 보고 자작나무를 보며 삶에 대한 통찰을 하는 시인, 이후 새롭게 태어나서 새 출발을 다짐하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자연의 질서 앞에서, 자작나무 숲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의식을 치른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 말에서 새 삶에 대한 설렘이 느껴진다. 지난 삶에 대한 의례를 치르듯 자작나무를 제물 삶아 추억하고 반성하고 애도하면서 삶의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기분으로 힘차게 험한 산을 오르는 풍경이다. 한 겨울 이맘때쯤 어울릴 시라는 생각이 불쑥 든다.

 

 

    (옛날 문의마을의 풍경)

 

고은 시인이 뽑은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시는 문의마을에 가서이다.

 

문의마을에 가서

 

(생략)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정의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문의마을에 가서, 청하, 1988.

 

 

1970년대 중반에 쓴 시다. 당시 고은 시인은 눈 내리는 겨울날, 모친상을 당한 신동문 시인의 고향 마을인 충북 청원군 문의마을에 문상을 간다. 이 시는 그 장례식을 치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다. 문의마을은 당시 대청댐 건설로 수몰 직전의 마을이었기에 더욱 아련한 마을이다.

시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의 그 모호함을 에둘러 연속된 하나로 본 것일까. 삶 뒤에 오는 죽음의 숙명성,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보면 결국 죽음은 또 다른 삶이 아닐까. 젊은 시절 죽음에 대한 시를 자주 썼다는 시인은 한때 승려이기도 했다. 그러니 불교의 윤회설에 바탕을 둔 시이기도 할 것이다. 삶도 죽음도 결국 하나의 수직선 위에서 공존하는 무한의 세계의 일부일 뿐이겠지. 눈은 운명처럼 자연의 섭리를 따라 이 겨울에도 부지런히 내리다 그친다. 경건한 의식처럼.

 

         (물에 잠긴  문의마을의 현재 모습)

 

 

책에는 책의 제목처럼 여러 생각, 여러 학파, 여러 진영, 여러 세대의 생각을 모으고 문학 작품을 모았다. 시인들에게 질문을 던져 받은 시들을 순서대로 실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시, 낭독하기에 좋은 시 순서로 되어 있다. 젊은 소설가와 젊은 평론가들에게 왜 쓰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평론이 발표된 소설을 읽으며 소설가와 평론가가 서로를 들여다보는 공간적 방식을 선택해서 그 답변을 담았다.

 

 

시인 (60), 소설가(8), 평론가(4)의 글이 담겨 있다.

고은, 민영, 신경림, 천양희, 강은교, 한창훈, 정희성, 문인수, 김준태, 이하석, 정호승, 조재룡, 최정례, 이성복, 강형철, 김혜순, 김형중, 백무산, 이진명, 김사인, 채호기, 황인숙, 안도현, 나희덕, 이병률, 문태준, 김숨, 손택수 등 72인의 작품들이다. 모두 귀중하고 매력적인 문학 작품이다. 매일 곁에 두고 읽고픈 책이다. 진정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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