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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벌거벗음/아감벤/인간사랑]벌거벗은 인간은 왜 부끄러워해야 하나?
세상이 벌거벗은 시절은 땅이 생겨나던 창조의 시절이었다. 인간이 벌거벗은 시절도 조물주가 빚어낸 첫 인류의 탄생 순간이었다. 이후 세상과 인간은 부지런히 옷을 입고 또 입었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가 한 겹 두 겹을 벗겨낸 민낯, 벗은 몸은 수치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벌거벗음은 부끄러움이라는 공식이 적용된 걸까?
2005년 4월 8일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서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가 열렸다. 이 박물관 1층에서 백 여 명의 벌거벗은 여성들이 가만히 서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투명한 팬티스타킹을 입었다지만 나신들을 마주한 관객들의 첫 인상은 분명 낯선 것이고 금기를 깬 모습이었다.
일어날 수 있었던 어떤 일이, 그리고 아마도 일어났어야만 하는 어떤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옷 입은 남자들이 벌거벗은 육체를 바라보는 장면은 사드-마조히즘적 권력 의식을 떠오르게 한다. 파솔리니의 살로 도입부에는 별장에 칩거하는 네 명의 권력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완전히 착의한 상태에서 장단점을 평가한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을 벌거벗기고 면밀히 조사한다. (94쪽)
호기심을 가진 관객들의 시선과 나신들의 도발적이고 무례한 시선은 대조적이었고 역전이었다고 한다. 도발적인 포즈의 나신과 옷을 입고 머뭇거리는 관객들의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다.
우리는 나신을 보는 순간 호기심도 일지만 부끄러움도 느낀다. 그런 부끄러움은 본능일까? 샤르트르는 벌거벗음을 외설과 사디즘으로 연결시켰다고 한다.
과거 옷을 입은 자 앞에서의 벌거벗음은 수치이자 고문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신의 뜻을 어기면서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인간은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깨달았다. 그런 육체적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후 옷은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는 옷이 된 것이다.
타락 이전에 아담과 이브가 인간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신의 은총이라는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이에 대한 유대교 해석으로, 우리는 ‘빛으로 만든 옷’이라는 예를 조하르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죄 때문에 박탈당한 것은 바로 이 초자연적인 옷이다. (96~97쪽)
빛으로 만든 옷, 초자연적인 옷, 은총의 옷을 태초부터 입고 있었다니. 순정에서 부정으로 변하는 순간, 인간은 벌거벗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니.
벌거벗음은 의복의 부재를 전제하나 그것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벌거벗음을 인식하는 것은 성경에서 ‘개인’이라 정의하는 종교적 행위와 연관된다. 우리는 벌거벗음을 알아채지만 옷의 부재는 간과한다. 벌거벗음은 그렇기에 죄 이후에 오로지 인간의 존재가 변화한 이후에나 발견된다. 타락에 의해 발생한 이 변화는 아담과 이브의 본성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요컨대 단순한 도덕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 양식에 영향을 주는 형이상학적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99쪽)
아감벤의 사유를 정리해 보자.
성스런 벌거벗음이 죄스런 벌거벗음으로 변하는 순간은 은총의 옷인 벌거벗음이 상실한 순간이었다. 타락 이전의 벌거벗음을 벌거벗음 인식 이전의 것이고 타락으로 인해 벌거벗음을 인지함으로써 진정한 벌거벗음이 시작되었다. 느끼지 못하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식이 없으면 벌거벗음이 아니다.
아이들의 벌거벗음은 부끄럽지 않은 상태다. 아이들의 부끄럽지 않은 벌거벗음은 천국의 순수와 통하기에 종교 의식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소년에게 주어진 관례가 생겼다니. 종교 음악사에서 사춘기 전의 소년 성가대원의 거세 시술도 변성기 이전의 ‘흰’ 목소는 에덴동산에 대한 향수라니. 원죄, 벌거벗음 , 부끄러움이라는 공식에 대한 철학과 종교의 이야기가 몹시 흥미롭다.
민낯을 드러내는 일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지만 세상 본연의 모습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다. 쑥스러움을 견디며 마주하는 『벌거벗음』에는 창조와 구원,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K, 유령에 둘러싸인 삶의 의의와 불편함에 대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 벌거벗은, 영광스러운 몸, 황소의 굶주림,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벌거벗음이라는 하나의 제목 아래에 다양한 소재를 지닌 10개의 에세이의 모음집이다.
저자는 현대 유럽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이다. 그는 ‘호모 사케르’ 연작으로 전 세계 지성계에 반향을 일으키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시몬느 베이유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마르틴 하이데거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1979년부터 하이데거와 비판적 거리를 두었다. 그 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교류하며 활발한 사유의 실험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벌거벗은 인간은 왜 부끄러워해야 하나? 단순한 벌거벗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죄와 타락, 의복과 벌거벗음, 신의 은총과 심판, 누드와 사디즘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벌거벗음에 대한 역사적 인식, 종교적 관점, 철학자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들이다.
벌거벗음과 옷 입음, 인간 본성과 신의 은총의 관계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벌거벗음도 인식하지 않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상일 뿐일까. 누드마을? 누드해변에서의 삶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인간과 다르게 동물의 벌거벗음도 신의 은총의 결과일까?
완전한 벌거벗음, 민낯, 솔직함은 두렵기는 한데……. 그래도 내 몸의 옷, 얼굴의 화장, 의식의 가면을 모두 벗겨 버린다면 인간은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