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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 - 순수 저항 비판
조지 A. 던 외 지음, 윌리엄 어윈 엮음, 이석연 옮김 / 한문화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한문화]‘헝거 게임’에 대한 순수 이성 비판...
《헝거게임》은 캣니스 에버딘이라는 한 용감한 소녀가 자신의 세계를 겹겹이 둘러싼 거짓을 벗겨내고, 그 기만적인 얼굴 뒤 진실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캐피톨 시민은 짙은 화장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내면에 자리한 추함을 온전히 감추지는 못한다. 캐피톨뿐만 아니라 판엠 전체에 그러한 허위가 넘쳐난다. 가짜 겉모습이 판치는 세상에서 캣니스는 철학자처럼 진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모든 사람, 모든 사물에 의문을 제기한다. (5쪽)
수잔 콜린스의 소설 《헝거 게임》 3부작을 읽은 후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돌려 읽던 인기 책이었고 그 덕분에 어느 학생이 나에게 빌려준 책이었다. 무심코 펼쳤다가 그 잔인함에, 그 날카로운 비유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십대들을 생존 게임의 장으로 내모는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우리 사회를 비유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뜨끔하기도 했다.
이후 영화로도 만나 본 《헝거게임》이다. 영화에서도 소설의 내용을 잘 살렸지만 그래도 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이젠 《헝거 게임》에 대한 철학책이다.
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
《헝거 게임》의 대략적인 내용을 보자.
근미래 사회의 독재국가는 판엠이다. 판엠의 수도 ‘캐피톨’은 온 나라의 부와 권력과 인재가 집중된 곳이다. 캐피톨 주변에는 12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서로 교류할 수 없고 폐쇄적이다. 각 구역은 스크린을 통해서 판엠의 권력자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다.
판엠의 정권이 유지되는 비결은 ‘헝거 게임’이라는 축제를 만들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헝거 게임’은 12개 구역을 대신해 나온 어린 소년소녀들이 조공인이 되어 판엠에 바쳐진다. 십대의 조공인들은 캐피톨에서 정해준 생존 게임의 장에서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피터지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옛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처럼 말이다.
때로는 서로 동맹을 맺어 협력을 통해 상대를 죽여야 생존의 확률이 높아지는 게임이다. 마지막에는 그 동맹마저 깨지고 살벌한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이 살아남으면 헝거 게임은 끝나게 된다. 물론 마지막 승자에게는 평생을 먹고 남을 부와 명예가 주어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캣니스 에버딘은 활쏘기의 명수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캐피톨에서 금지하는 숲으로 가서 금지하는 사냥을 하며 비밀스럽게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하지만 74회 헝거 게임에서 동생을 대신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녀는 헝거 게임을 치르는 동안 여러 번의 위험과 유혹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생각을 펼치며 불의에 맞서고 지혜롭게 대처한다. 게임에서 승자가 된 그녀는 불타오르는 혁명의 전사가 되어 판엠 전복을 위해 사람들을 모으게 된다.
이 책에서 브라이언 맥도널드, 앤 토켈슨, 질 울트하우스, 조지 A. 던 , 앤드류 시퍼, 제니퍼 컬버, 아비게일 맨, 제이슨 T. 에벌, 아비게일 E. 마이어스, 제시카 밀러, 린지 이소우 애버릴, 데릭 코트니, 니콜라스 미슈 등 19명의 학자들은 《헝거 게임》에 대한 순수 저항 비판을 담아 철학적 통찰을 한다.
이 중에서 애덤 바크맨의 비판 ‘이 모두가 잘못 되었다.’가 가장 인상적이다.
판엠의 시민 이름에는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 로물루스, 브루투스, 아우렐리우스, 캐시도르 등의 라틴 이름이 있다. ‘판엠’이란 말도 라틴어에서 가져왔는데 ‘빵과 서커스’라는 의미다. ‘빵과 서커스’는 오마가 순종적인 시민을 만들기 위해 내건 방식이었다. 로마의 검투사 같은 헝거 게임이나 영화 <글라디에이터>에서의 전차 장면 등이 연상되는 장면들도 있다. 결국 헝거 게임은 로마 같은 강대국을 비유하는 것이다.
바크맨은 판엠의 타락과 로마의 타락을 비교하며 스토아학파였던 세네카의 말을 끄집어낸다.
세네카에 따르면, 이해 없는 참된 덕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행동 뒤 동기가 올곧지 않으면 올곧은 행동이 아니다. 행동은 동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정신 상태기 올곧지 않으면 올곧은 동기가 아니다. 정신 상태가 동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이 생명 법칙 전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정신이 모든 것을 진실에 따라 이해하지 않으면 최선의 상태가 되지 못할 것이다.”(337~338쪽)
바크맨은 말한다. 세네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캣니스는 그 일부를 보여주기에 희망적이라고. 캣니스가 그녀의 여동생을 대신해 조공인으로 자청하는 희생정신을 보여준 점, 캐피톨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는 용기는 가치 있는 삶이라고. 캐피톨의 타락과 캣니스의 정의감과 복수,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선명한 대비는 그녀의 올곧은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용기와 용서를 두루 갖춘 캣니스의 생각과 행동은 로마 제국의 검투사와 다르고 판엠의 캐피톨 지배자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죽음의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정의감은 소설 전체에 위로를 주기도 한다.
로마 콜로세움에서의 헝거 게임과 유사한 잔인한 생존 게임의 의미, 타인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인간 심리, 지배세력의 여가를 위해 십대의 아이들이 동원되고 싸움을 붙인다는 살벌한 내용들, 악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 가능한 묘사들이 잔인하지만 실제 같은 느낌도 든다. 우린 모두 보이지 않는 헝거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생존은 분명 확률게임이다. 생존의 확률이 높은 쪽을 골라야 하는 선택 게임이다. 헝거 게임이 미래의 디스토피아 내지는 오늘날의 우리 세계의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에서 시사 하는바가 많을 것이다.
‘헝거 게임’에 대한 순수 이성 비판, 토론 주제로 좋은 내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