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향기/필립 클로델/샘터]장자크 루소 상을 받은 프랑스가 인정한 산문…….

 

 

시대와 장소, 정치성을 넘어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을 특유의 간결하고도 섬세한 문체, 강렬한 심리 묘사를 통해 추구해온 필립 클로델. 그는 냄새와 기억에 대한 향수와 삶을 다룬 산문집 <향기>에서 다시 한 번 그 공감각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이 책으로, 그해 가장 뛰어난 산문에 수여되는 장자크 루소 상을 수상(2013)했다. - 저자 소개에서

 

필립 클로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다. 프랑스 낭시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그는 2002년 아카데미 콩쿠르 회원이 되었고, 마르셸 파뇰 상, 텔리비지옹 상, 콩쿠르드 라 누벨 상, 르노도 상, 콩쿠르드 데 리세엥 상 등을 받았다. 그는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며 신인감독상과 외국어영화상을 받기도 한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이라고 한다.

 

  

알코올이라는 태양 옆에서 비틀거리는 나방 같은 우리. 왜냐하면 거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깊은 신비 속에, 달궈진 꾸불꾸불 구리 미로 속에서 독한 술로 변하는 것은 바로 태양이니까. 금색 연보라색 과일들, 미라벨, , 퀘치, 야생자두라는 태양 말이다. (17)

 

술을 만들기 위한 증류기와 그 옆에 놓인 태양을 먹은 과일들만 봐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더구나 과일 향이 알코올로 변하면서 술 향에 취하는 어른들은 아찔한 기분에 젖어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과일로 만든 술 향은 그대로 태양의 향기다. 잘 익은 술에 취하는 농부들의 모습은 태양의 열기를 품은 행복한 모습이다. 태양의 기를 받은 술의 향기, 그 술을 마시고 얼빠진 목신이 되어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타는 풍경을 보니, 읽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돈다.

눈을 감아버렸다. 그 애는 여전히 제 얼굴을 내 얼굴에 갖다 대고 입술을 찾고 있다.

찾았다.

입을 맞춘다.

우리 집에 있는 것과 같은 도프 샴푸로 감은 윤기 나는 머리카락.

하지만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달콤한 식물성 잼 같은 것, 사탕과 과자, 풀줄기와 대초원의 향기.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나를 덮쳐오는 그것.

나는 목으로, 입술로 행복하게 들이마신다. 내가 다시 키스한 바로 그 입술 위로. (23)

    

열두 살의 소년이 예쁜 소녀를 보고 숭배하듯 열병을 앓는다. 그러다가 친구네 생일파티에서 다른 아이인 뚱보 프랑지와 눈을 마주친다. 소년은 예쁜 소녀를 잊고 첫 키스를 한다. 초딩인데도 유럽 아이들은 빠르네. 빨라. 한국 아이들도 그럴까. 어쨌든 제법 어른 흉내를 낸 키스지만 첫 키스엔 아이다운 과일 향, 잼 향, 샴푸 향이 어우러진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맛이 아니라 잼 같이 달콤하고 풀잎처럼 푸른 향기가 도는 첫 키스다.

    

아이의 잠은 가장 자연스런 향기 속으로의 눈부신 추락과도 같았다. 연약하기만 했던, 애무와 젖, 웃음과 노랫소리, 밤새 지켜주고 달래주고 보호해주는 손으로 키워졌던 요람 속, 삶의 향기 속으로의 추락.

최초의 시간들의 향기, 부드러운 살결과 크림과 파우더의 향기. 달콤하게 재잘대던, 고요하고 평온하던, 늘 보호받았던 먼 유년기의 향기. (110)

 

자신의 딸이 잠드는 모습을 보며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여인의 세 시기> 속 잠든 아이를 떠올린 저자의 향기예찬이다. 그 속에는 아기 특유의 살갗의 향과 젖내의 향이 연약해서 부드러운 향으로, 편안해서 달콤한 향으로 그려져 있다. 유년의 향은 오래 전 누구나 가졌던 전설 같은 향기다. 아직도 조금은 남아 우리를 추억으로 이끄는 포근한 향기다.

 

 

모든 페이지에는 각각의 향기가 난다. 달콤한 과일의 향도 있지만 쿰쿰한 퇴비의 향도 있다. 향긋한 풀꽃의 향도 있지만 구릿한 외양간의 향도 있다. 농촌 들녘의 향도 있지만 도심 지하철의 향도 있다. 아기의 냄새도 있고 여성 성기의 냄새도 있다.

 

후각에 예민한 작가일까. 모든 삶을 향기로 표현해내는 작가다. 장자크 루소 상을 받은 프랑스가 인정한 산문이라니, 대단한 향기 에세이다.

 

냄새가 없는 사물도 있을까. 사물의 향기는 왜 존재하게 된 걸까. 향기에 대한 에세이를 읽으니 여기저기서 향기가 진동하는 것 같다. 계속 코를 벌름대거나 킁킁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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