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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해변 빌라/전경린/자음과모음]부유물처럼 해변에 떠밀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엔 이런 삶도 있나보다. 소설 같은 세상이니까. 무심한 관계, 시크한 관계이면서도 끈질기게 얽혀 있다. 여섯 단계만 거치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던가. 소설을 읽으면서 관계 파악에 몰입하기는 생전 처음이다. 무슨 미스터리도 아닌데, 인물 관계를 도식화해야 한다. 외면적으론 단순해 보이지만 내면적으론 꽤나 복잡한 인물 관계다.
여자의 진짜 능력이란, 제 남자를 알아보는 거란다.
(중략) 남자란 세상의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 하지만 자기를 알아보고 계산 없이 인생을 내놓는 여자를 만나면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을 몽땅 주지. 거기에 제 생명을 쏟는 거다. 그게 남자와 여자의 비밀 논리야. (책에서)
주인공은 부모 없이 자라다가 어느 날 윤유지에서 손유지로 바뀌게 된다. 작은 고모 손이린이 자신의 생모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고모가 사는 바닷가의 해변빌라로 이사하게 된다.
엄마는 그렇다 치고 아빠는 또 누구일까. 유지는 늘 아빠의 존재가 궁금하지만 그 누구도 아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유지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늘 피아노를 치며 마음의 허기를 달랜다. 그녀는 아버지 부재에 대한 갈망에서 중년 남자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생물 선생님인 이사경이 눈에 들어온다. 늘 자신을 관찰하며 무심한 듯 말을 건네던 선생님이었기에.
어느 날, 생물실에서 새로 들여온 신체 모형을 구경하다가 모형 앞에서 벌거벗고 서게 된다. 이 일로 교사인 이사형과 추문에 휘말리고 급기야 이사형의 어머니인 노부인의 호출을 받게 된다.
네 나이에 피아노를 잘 치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말, 차라리 적게 치고 많이 들으라는 말,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치라는 말, 중요한 것은 네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말 등을 듣게 된다. 그리고 괴이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노부인 집에 와서 피아노를 배우라는 말을 듣게 된다.
노부인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되면서 이사경 선생님과 고모이자 생모인 손이린의 사이를 간파하지만 그저 속으로 삼킬 뿐이다. 사경 선생님에 대한 알 수 없는 끌림은 무엇일까. 이사경은 유지의 생부일까. 사경의 몸이 불편해진 시점에서 사경의 처로부터 사경과 이린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고......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이 멈추었다는 것이다.(책에서)
타인의 눈엔 제멋대로이거나 당찬 아이, 누구도 닳을 수 없는 아이, 중심에 고독을 담고 있는 아이, 그래서 때로는 제법 어른스런 소녀의 이야기가 무덤덤한 속에서 슬픔을 자아낸다.
생모를 사랑하는 이사경 선생님, 그런 사경에게 끌리는 유지, 사경의 아들인 연조와의 관계, 오랜 연인 오휘와의 이별과 만남의 반복, 이사경의 아들인 연조와의 관계, 해변의 소박한 가게들, 부유물처럼 해변에 떠밀려오는 사람들......
아빠라는 근원에 대한 무지가 그녀를 투명인간 같은 삶으로 이끌었을까. 투명인간처럼 행하는 시크한 아이의 성장 이야기다. 태생적인 슬픔을 지닌, 태생의 존재를 들은 적 없는 아이의 무덤덤한 외로움이 더욱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
파도를 통해 전해지는 바다 소리, 피아노 음률이 들리는 소설이다.
피아노에 대한 몰입으로 사랑의 허기를 채우거나 바닷가 산책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다. 모든 만남은 바닷가에서 이뤄지고 모든 헤어짐도 바닷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바닷가 옆에 있는 카페 ‘해변의 가능성‘처럼, 소설에서는 사랑도 이별도 모두에게 열려 있는 세상이다.
매사가 기회의 여신이 주는 운이 필요한 법이다. 매사에 밀물과 썰물처럼 때가 맞아야 되는 법이다. 그리고 관계는 언제나 조금씩 변해간다. 삶이 원래 그런 거다.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