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 - 연필이 사각거리는 순간
정희재 지음 / 예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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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정희재/예담]연필 테라피를 아시나요?

 

흑연은 다이아몬드와 성분이 같지만 결정구조가 달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가 할 수 없는 것을 흑연은 해냅니다. 연필로 쓰면서 우리는 내면의 고유하고 빛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죠. 연필 테라피에는 분명 그런 힘이 있습니다. (15)

 

연필 테라피, 처음 듣는 말이지만 동감이다.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단어에 동그라미 하거나 감동적인 문장에 밑줄을 쓱쓱 칠 때 나 역시도 마음이 편해진다. 책에 나온 그림을 백지 위에 연필로 베낄 때에도 사각거리는 느낌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 푸근해진다. 커터 칼을 들고 직접 연필을 깎을 때면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기도 해서 흐뭇해진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로 잘 사용하지 않는 연필이지만 가끔 연필 사용을 즐기는 이유는 나 역시 연필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주는 평안 때문이다

 

   

 

핸드백에 연필을 넣어 다니기 위해 연필집도 만들었다. 광목으로 만든 에코 연필집이랄까.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게 하려고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연필집이다. 사진 찍을 일이 있는 줄 알았으면 자수도 넣을 걸......

 

 

  

이면지가 비어 있는 날에는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짧은 시나 책속의 구절이라도 옮겨 적는다.

어느 날은 앙드레 지드가 <지상의 양식> 맨 앞에 붙인 제사를 쓰기도 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나의 게으른 행복은 이제 눈을 뜨도다. -하피즈

 

다 쓴 뒤 게으른 행복밑에 두 줄을 그을 때, 그야말로 고양이처럼 느긋한 만족감이 뼛속까지 차올랐다. 게으른 행복은 아무것도 기대하는 바 없이 행위 그 자체를 즐길 때 찾아온다. (49)

    

다이어리나 공책보다 하얀 이면지에 쓰는 걸 나도 좋아한다. 오죽했으면 프린트 용지를 몇 박스나 샀을까. 연필로 쓰기도 하고 볼펜으로 그리기도 하며 여백을 채우는 기쁨을 즐긴다. 그런 날은 여백이 꽉 차오르듯 온 몸에 세로토닌도 꽉 채워짐을 느낀다.

 

연필의 역사는 처음 접한다.

흑연이 처음 발견된 시기는 1500년대 초반이다. 영국 컴벌랜드 지역에 태풍이 불면서 나무들이 뽑혔고 그 밑에 있는 검은 액체를 발견한 목동이 자신의 양에게 흑연으로 표시를 했다거 한다. 그리고 1610년까지 문구처럼 흑연을 팔았다. 연필심의 원조는 프랑스인 콩테가 발명한 콩테기법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는 흑연과 점토를 혼합해 고온에서 구운 흑연 심을 만들었다. 그땐 대단한 발명이었을 테니, 콩테는 얼마나 전율했을까.

 

연필의 종류, 연필의 역사, 작가와 연필의 인연에 대한 것도 처음 접한다. 작가나 화가처럼 연필을 오래 쥐고 작업하는 사람들은 각진 연필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하루 여섯 시간씩 연필로 글을 썼다. 그는 육각형 연필로 하루 종일 쓰고 나면 손가락이 갈라진다.”며 원통형 연필을 선호했다. (166)

 

존 스타인벡이 하루에 부러뜨린 연필이 60자루가 될 정도로 엄청난 연필을 사용했다니, 대단한 작가다.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부러진 연필들에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에른하르트 파버사의 블랙윙과 몽골 연필원통형 480 2를 최고로 쳤다고 한다. 몽골 연필과 블랙윙을 저자도 있다고 하니, 정말 연필마니아다. 개인적으로 구경도 못해본 연필들이다.

 

헤밍웨이도 하루에 연필 두 자루는 닳아 없어져야 하루 일을 충분히 한 것 같았다고 한다. 대단한 작가들의 엄청난 습작 분량이다.

 

오래두어도 변함이 없는 연필은 많은 예술가들의 창작 시간과 함께 했을 것이다. 인간의 변심이 없다면 늘 곁에 있어주는 의리의 연필은 많은 작가들의 습작 시간과 함께 했을 것이다. 연필은 그렇게 문학 작품과 그림, 제품과 건축물, 노래와 연극의 탄생 순간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연필 끝에서 위대한 인류 고전이, 유물이, 유산이 만들어 졌을까. 연필은 지구 역사와 예술, 위대한 유산과 함께한 인간의 동반자였지만 앞으로도 미래의 인류와 함께 하지 않을까. 절대 시시한 연필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어마무시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연필 마니아의 연필 테라피를 읽고 있으면 곁에 있는 연필을 다시 보게 된다.

소박하지만 추억이 서린 존재인 연필을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때로는 괄시받기도 하는 존재지만 때로는 향수를 자극하는 물과 공기 같은 사물인 연필이 그저 든든해 보인다. 때로는 마음 속 깊은 곳의 감성을 끌어올리는 재주가 있는 물건이기에 기특해 보인다.

    

개인적으로도 연필로 쓸 때의 경쾌한 또각거리는 소리, 연필심 깎을 때의 씩씩한 서걱거리는소리에 진정 위로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연필을 통해 위로와 평안을 느꼈기에 나로서도 연필 테라피를 해왔던 셈이다. 이젠 연필에 대한 공학과 디자인의 역사를 추적한 헨리 페트로스키 박사의 <연필> 읽고 싶다. 연필에 대한 오마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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