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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만담 - 스마일 화가와 시크한 고양이의
이목을 지음, 김기연 사진 / 맥스미디어 / 2014년 10월
평점 :
[스마일 화가와 시크한 고양이의 청춘만담/이목을/맥스]일상의 시시껄렁함, 인생의 진중함까지 나누는 화가와 편집자의 편지, 명쾌하면서도 코믹해~
SPACE 木乙.
에스키모의 이글루 혹은 몽골의 이동 가옥 모양을 닮은 하얀 콘크리트 집에 들어서면 환한 스마일 표정들이 반긴다. 그렇게 목을의 공간은 큰 미소와 작은 미소, 노란 미소와 파란 미소, 함박 미소와 편안한 미소까지 온통 미소천국이다.
앉아보소.
여자라서 옵션이 있어요.
옵션이요? 그게 뭔가요?
자, 여기를 보소.
이게 고추인데 짧은 게 좋아요, 긴 게 좋아요?(20~21쪽)
첫 대화가 심상치 않다. 산전수전 다 겪은 화가여서일까. 난감한 질문을 던지며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는 미소 대마왕이다. 젊고 예쁜 아가씨에게 짓궂은 질문을 해대는 화가와 상대적으로 늙은 화가에 당당하게 맞서는 스물여섯 살 편집자와의 대화가 초반부터 팽팽한 긴장감과 소소한 웃음을 준다.
자칭 캡틴 스마일이라는 첫 만남에서 캡틴 기질을 여실히 보여준 화가와 자칭 시크한 고양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고양이 체셔같이 뜬금없는 질문을 쏘아대는 편집자의 편지는 코믹하면서도 설레게 한다.
시크한 고양이는 자신이 설렜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캡틴에게 가장 설레는 순간을 묻는다. 그러면 캡틴은 화답한다.
설렘이라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될 듯, 말 듯, 줄 듯, 말 듯.
나는 아직도 A에서부터 Z까지 모든 것에 설레. 사소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에 설레지. 막 시작한 연애처럼 가슴이 터질 듯 뛴단 말이야. (27쪽)
호기심과 설렘이 없다면 삶의 기쁨이 있을까. 설렘과 호기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버팀목이고 원동력인데. 입맛이 없다는 건 살아가는 기쁨이 없다는 것이듯, 궁금하지 않다는 건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인데. 막 연애처럼 가슴이 터질 듯 뛴다는 말에서 화가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래. 언제까지나 설렘 버튼을 작동시켜 보자.
그림을 그리면서 설레지 않는다면,
붓을 꺾는 것이 화가로서의 자존심 아닐까?
(중략)
그림 앞에서 내가 엉큼한 늑대라면,
캔버스는 내게 앙큼한 여인이지.
보슬비처럼 힌트 주듯이
앙큼하게~ (28쪽)
설렘, 참 좋은 말이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다른 일을 하든 설렘은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내 일을 사랑한다는 자존심이다. 설렘은 건조한 하루에 윤기를 더해줄 활력소다.
뱅크시가 벽에 그려놓은 아낙과 얼룩말을 보세요!
아낙이 얼룩말의 얼룩무늬를 빨랫줄에 널고 있어요. 얼룩무늬를 빼앗겨버린 얼룩말은 그저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에요. 얼룩말은 슬플 거예요. (중략) 얼룩말의 얼룩은 빨면 하얘질까요?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과 구분이 되는 특별함을 갖고 있어요. 그것이 때로는 정체성이 되기도 하고, 사회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구별되기도 해요. (중략) 캡틴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스마일인가요? (96쪽)
뱅크시는 거리의 벽이 캔버스였다.
거리의 누구라도 주인이 되는 작품을 그렸다.
그는 벽과 예술 사이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봐. 얼룩말을 보면 안 그래도 되는데 꼭 껍데기를 벗겨놨잖아. 일부러 정체성을 잃게 만든 거지. 왜냐고? 사람들에게 질문하려고, 나의 정체성도 똑같아.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 정체성은 타인에게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다. (97~98쪽)
영국의 예술 테러리스트인 뱅크시의 그림처럼, 캡틴도 무언가를 묻기 위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때론 무언의 표현이 강렬하게 어필하듯이 무언의 그림이 호소력이 짙을 수도 있겠지. 때로는 말보다 글이 여운을 깊게 남기듯이 말이지.
뭉크의 <절규>를 보며 캡틴도 마음속에 영혼을 숨겨두지 않았는지 체셔가 물으면, 캡틴은 대답한다.
그림에는 그 시절 그 사람의 세상이 담겨 있다고.
뭉크의 <절규>는 일기이고, 세상을 향한 편지이고, 자기 고백이라고.
예술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그 뒤에 숨겨놓은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고.
이젠 절규보다 스마일하라고.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뭉크가 공항장애라니. 당시 인도네시아의 화산폭발로 초미세먼지가 노르웨이 해안까지 덮쳤을 때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한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캡틴 스마일과 시크한 체셔의 대화는 알콩달콩이 아니다. 고소하고 구수한 인생의 숭늉 맛 나는 이야기들이다. 때로는 달콤하고 새콤한 젤리 같은 시시껄렁한 청춘 이야기를 던지고 받고 한다. 그림과 예술, 문학과 사랑을 진중한 편지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발칙하고 코믹한 대화다. 진중하고 유쾌한 대화다. 명쾌하고 속 시원한 화법에 가슴이 뻥~ 뚫리는 대화다. 다음엔 어떤 질문을 던질까 설레며 읽게 된다. 그런 청춘만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