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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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움베르토 에코/열린책들]움베르토 에코의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프라하의 묘지>를 곁에 두고도 아직 읽지도 못했다. 그가 우리 시대의 가장 권위적인 기호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라는 수식어들에 잔뜩 기가 죽어서 일까.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다 보니 아직도 고이, 깨끗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니 <적을 만들다>를 통해 움베르토 에코를 처음 만나는 셈이다.

    

 

처음에 나오는 글은 <적을 만들다>이다. 이 단순한 주제에서 에코는 문학과 역사, 사상과 정치를 넘나들며 열변을 토한다. 냉정하고 차분한 듯 같다가 어느새 사자후 같은 열변에 빨려들게 된다.

 

뉴욕에서의 일이다. 운전기사를 하는 파키스탄 사람이 이탈리아 사람인 에코에게 신기한 듯 질문을 한다. 분쟁과 전쟁이 아직도 끊이지 않은 조국의 현실이 마음 아파서 였을까.

그는 우리의 적은 누구냐, 이탈리아는 수세기를 거쳐 어느 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영토 분쟁이나 민족적인 대립, 끊임없는 국경 침략을 하거나 받은 적이 없는 지를 묻게 된다.

에코는 이탈리아는 이미 반세기 훨씬 이전에 그런 전쟁을 끝냈고 지금은 적이 없다고 말하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탈리아에는 그런 적들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13)

 

에코가 말하는 적이란 경쟁 상대요, 자극을 줄 수 있는 대상이다. 물론 전쟁 상태에서의 적이라면 긴장감이 최고일 테지만, 어쨌든 적은 긴장감을 주고 활력을 준다는 말에는 공감이다.

 

단순한 한 글자인 에서 에코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과연 언어의 능력자다.

에코는 적은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다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모든 적은 다름에서 시작해서 결국엔 악마로 간주한다. 차이에서 차별을 만들고 차별이 깊어지면 전쟁을 치르게 된다. 유대인들의 고난의 역사는 적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유대인들처럼 적은 기괴하고 냄새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지역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면 적을 만들기 쉽다. 다르다는 것은 적이 가진 위험인자니까.

 

에코는 도덕관, 민족, 피부색, 냄새, 용모, 풍습의 차이가 적을 만든다고 한다. 과거에는 여자를 악마로 만드는 풍자의 세계, 마녀 신드롬, 나병 환자, 호의적인 대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모두 적으로 만들어 졌다.

개구리를 먹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멸시, 마늘을 듬뿍 사용하는 이탈리아인들을 향한 독일인들의 비난, 피부색이 다른 인종 비하, 음식의 차이, 냄새 차이, 정치적인 정쟁, 영토 전쟁 등도 모두 적을 만드는 과정들이다.

 

에코는 말한다.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세상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정의 필요성은 본능이고 우리의 도덕적 관념은 적의 탄생을 예고한다고. 적을 만드는 것은 본능이고 적을 이해하려는 것은 다름을 부정하거나 고정 관념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가 강연을 했거나 칼럼으로 쓴 글들의 집합체다. 특별한 기회에 쓴 잡다한 글모음집이다. 여러 편의 글들을 하나로 묶기도 하고, 쓴 글들을 다시 요약하기도 한 글들이다.

   

절대와 상대, 불꽃의 아름다움, 보물찾기, 들끓는 기쁨, 천국 밖의 배아들, ,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검열과열과 침묵, 상상 천문학, 속담 따라 살기, 나는 에드몽 당테스요! 율리시스, 우린 그걸로 됐어요. 섬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키리크스에 대한 고찰 등 14편의 단편에세이를 통해 움베르토 에코를 약간이나마 알게 된 책이다.

 

에코는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과 풍부한 자료들을 가지고 매력적으로 글을 엮어가고 있다. 그가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열정적이 작가, 모든 것에 촉수를 뻗는 천재적인 작가라는 평가가 괜한 말이 아님을 절감한 책이다. 꼼꼼히 읽게 되는 책이다. 움베르토 에코, 알게 돼서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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