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페이퍼 엘레지/이언 샌섬/반비]종이의 탄생과 종말에 대한 문화사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가 부제다. 제목이나 부제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위로 때문일까. 장중하고 엄숙한 기분으로 펼친 책이다. 엘레지는 비가(悲歌), 슬픔의 시,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의 시니까.

   

 

 

 

 

 

참고로, 엘레지는 음악에서는 슬픔을 나타내는 악곡의 표제로 많이 쓰이고 있고 문학에서는 애도와 철학적 논고, 죽은 사람의 위로로 구성된 시다. 흔히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계기로 의미와 죽음에 대한 각오 등 작자의 생사관을 토로하는 시를 말한다. 괴테의 로마 엘레지, 밀턴의 리시더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등이 있다.

 

그래도 제목은 너무했다. 엘레지라면 종이가 죽었기에 애도한다는 말인데. 수천 년을 살고 있는 종이의 입장에서 듣는 기분은 어떨까. 물론 존재감이 예전만 못하겠지만 아직은 종이 없는 지구, 종이 없는 인간을 상상할 수 없는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데, 혹시 종이의 운명도 백악기의 공룡처럼 종말이 올까. 아니면 종이가 변형과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남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만감이 교차되는 책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눈으로 종이책을 만진다. 밤에 종이책을 덮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일상이 종이와 함께 하기에 TV 예능 <인간의 조건>처럼 종이 없이 살기가 오늘의 미션이라면 난 얼마나 답답할까. , 휴지, 신문, 편지, 영수증, 통지서, 세금영수증, 달력, 노트, 다이어리, 서류, 지폐 등이 하루 동안 사라진다면……. 가장 필요한 것은 휴지일 테고, 허공에다 책표지를 넘기듯 헛짓을 하지 않을까. 허공에다 날짜를 적고 시간을 적고 메모를 하지 않을까. 스마트한 기기들이 있지만 몸의 기억은 종이를 더듬을 텐데.

우리는 종이로, 종이를 통해, 종이를 이용해서 상상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받았다. (중략) 이 책은 우리가 왜, 어떻게 종이에 밀착되고 봉합되어 우리 존재 자체가 종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보이고자 한다. (서문 중에서)

 

2000년 전 중국 후한의 환관이었던 채윤이 종이를 발명한 이래로 활자술, 제지술도 급격하게 발전해왔다. 종이를 통한 기록이 자유로워지면서 지식전파 및 교육이 수월해졌다. 지식전파와 교육은 인류발전에 기여했고 그 밑바탕에는 종이의 존재가 있었다.

 

스마트한 최첨단 기기의 등장으로 전자책을 읽는 시대가 되고, 종이 없이도 돈이 오고가고, 종이 없이도 서류가 오고가며, 종이 없이도 모든 예약과 결제가 가능해졌다. 종이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종이의 존재감은 역시 예전 같지 않다. 미래의 종이 운명은 과연 어떨까.

 

저자인 이언 샌섬은 종이란 작가의 취향에 따라 기획된 상상의 박물관이고 모든 중요한 것은 종이에 기록되었기에 종이의 중요성은 영속적이라고 한다.

 

종이는 실체는 보잘것없어도 그 안에 의미를 가득 담는다. 물질이면서 환영이다. 망가지기 쉽지만 영속적이다. (서문에서)

종이를 만들던 방법이 채윤이 만들었던 방법과 별 차이가 없다니, 놀랍다.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나무의 껍질을 벗겨 펄프를 준비하고, 틀이나 망 위에 종이 형태를 만들고, 체로 걸러 형태를 잡으며 건조하고 마무리 한다.

 

책에서는 제지법의 발달, 1799년 로베르의 제지기 발명, 종이와 나무, 종이와 숲, 종이와 지도, 종이와 책, 종이와 돈, 종이와 광고, 종이와 건축. 종이와 예술, 종이와 장난감, 종이와 종이접기, 종이와 정치, 종이와 영화 등에 대한 이야기가 300여 쪽에 걸쳐 펼쳐진다.

 

종이가 대량생산, 사진, 풀 바른 우표, 종이봉투, 종이 접시, 냅킨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해 온 과정은 그대로 인류 문명의 역사다.

 

종이에서 시작해 종이의 고향인 숲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묵직해진다. 예전부터 숲은 많은 동화와 신화, 설화가 탄생한 곳이다. 현인들은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숲으로 갔다.

 

나는 제대로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삶에서 본질적인 것만을 마주 대하고, 삶으로부터 배워야만 하는 것을 못 배우지는 않았는지 알기 위해서, 또 죽음을 앞두고야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지 않으려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본문에서)

 

나무에서 뽑은 종이는 친환경적이지만 종이를 만들기 위해, , 광물, 금속, 화석연료의 사용이 불가피하기에 환경오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다. 더구나 지금은 숲이 사라지는 시대다. 종이의 아버지는 나무, 종이의 고향은 숲이기에, 인류 생존을 위해서, 종이의 생존을 위해서 숲을 잘 가꿔야 할 텐데.

 

책과 종이는 오래된 한 쌍이다. 완벽한 결혼이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는 역동적인 하이퍼텍스트에 잠깐 한눈을 팔며 재미를 보긴 했지만, 요즘 전자책이나 독서용 장비들은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종이 책을 닮아간다. 모양, 크기, 느낌, 기능까지도. 신기술을 선도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한 목소리로 전자책은 놀랍고 충격적이게도 개념과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종이 책과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았다. 종이 냄새가 나는 전자책 리더기만 아직 안 나왔을 뿐이다. (본문 중에서)

 

결국 종이는 종이책과 연결되지 않을까. 종이의 힘은 종이 위에 적힌 글의 힘이니까. 글의 파워에 따라 종이의 존재감도 달라진다. 그렇게 종이는 글의 힘에 기대어 자신을 드러낸다. 글이 없는 백지는 무기력하다.

 

지금까지 종이의 묶음인 책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터널이었다. 종이 책은 지식과 정보의 상징, 지혜의 산물로 여겨졌다. 현재는 무거운 종이 책의 자리에 점점 전자책이 비집고 들어온다. 늘어가는 책의 보관에 대한 문제해결책으로 전자책이 제기될 정도다. 미래엔 결국 전자책일까.

    

종이라는 두 글자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신화, 문학, 동서양의 역사, 환경의 문제, 인쇄, 지도, 도서관, 건축, 지폐의 힘 등으로 광대하게 펼쳐진다. 종이의 문화사니까.

 

지금은 종이의 정점일까. 종이의 미래는 무엇일까. 기적 같은 종이의 발명 이래로 값싸고 흔해진 종이가 되었다. 늘 곁에 있으리라 믿었던 공기 같던 종이가 세상을 하직할 날이 올까. 만약 종이가 사라진다면……. 그래도 제목은 너무했다. 엘레지라니. 아직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살아 있는 종이인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