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공허한 십자가/히가시노 게이고/자음과모음]속죄의 십자가를 지는 방법?

 

 

십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도서관에서 우연히 펼친 <용의자 X의 헌신>을 통해서였다. 일본 추리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기에 무심코 고른 책이었다. 영화로 나왔던 제목 정도로만 기억할 정도로 일본 작가들에 대해서는 무심했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반해 버렸다고 할까. 수학을 좋아했기에 천재 수학자 대 천재 수학자의 수학 논리 대결에 넋 빠져 읽었다. 수학의 난제들을 풀어가는 천재들의 논리에 홀려 읽었다. 그 이후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 되어 버렸다.

<백야행>, <매스커레이드 호텔>, <레몬>, <예지몽>, <다잉 아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방황하는 칼날>, <몽환화>, <질풍론도> 등 다작을 하는 작가이지만 언제나 읽는 맛이 있는 작가니까.

 

추리소설의 경우 대개 첫 부분에 사건의 단초들을 넌지시 제시한다. 더구나 히가시노의 경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에 첫 부분이 더욱 의미 있게 작용한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 이구치 사오리와 그녀의 남자 친구 니시야 후미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오리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녀가 3살이 되던 해에 뇌종양으로 31 살로 생을 마감한 엄마. 그런 사실을 안 것도 그녀가 5학년이 되어서였다. 아빠 요스케는 화학공업 제품 회사의 기술자였기에 사오리는 늘 편의점 도시락, 피자 배달, 직접 음식을 해 먹는 것으로 홀로 저녁을 해결했다. 식사, 청소, 빨래까지 그녀의 몫이 되면서 아빠의 귀가 시간을 늦어졌고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채우려 그녀는 비디오점에 들렀고, 그곳에서 니시야 후미야를 만나게 된다. 후미야는 평소 그녀가 짝사랑하던 같은 중학교 선배였다. 비디오점에서 만나 <히든>이란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면서 친하게 된 이후로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3이 되었을 때 사오리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자 둘은 태아를 죽이고 후지산 숲 속에 아기를 묻게 된다. 하지만 살인에 대한 추억은 평생을 악몽 속에 살게 했고 이들의 삶마저 꼬이게 하는데.

 

한편, 광고회사에서 디자인 일을 하다가 반려동물의 장례업자가 된 나카하라 미치마사.

어느 날 그에게 경시청 수사1과의 사야마 형사가 찾아와서 헤어진 아내 사요코의 죽음을 알려준다. 서로를 위해 이혼했는데, 살인으로 죽음을 맞다니.

아내는 그녀가 사는 원룸 아파트 근처에서 무자비하게 날카로운 칼로 찔러 죽었다고 했다. 범인은 다음 날 자수했고 왜소한 노인이었다고 한다. 전혀 관련이 없는 노인이 왜 그녀를 죽인 것일까.

 

11년 전 딸의 죽음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준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마나미가 살해된 것이었다. 그녀가 저녁거리를 사러 10분 거리의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사이에 딸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외부침입자에 의한 강도 살인이라니.

 

당시 아내인 사요코가 발견하고 신고를 했는데, 경찰은 모든 가족들을 사정청취라는 명목으로 취조해서 괴롭힌 적이 있다.

범인은 체포되었지만 이들 부부는 살인자가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드물다는 말에 황당해 한다. 재판에서는 살인자가 반성의 기미가 보인다, 갱생의 여지가 있다, 계획적인 범죄가 아니다, 동정할 만한 점이 있다는 등으로 감형을 내릴 구실을 찾는 것 같고 그 누구도 피해자의 억울한 심정은 헤아려주지 않는다. 모두 가해자의 입장에서 변호를 하고 재판을 한다고 느낀다. 살인자에 대한 법의 잣대가 너무나 물렁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부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딸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나카하라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살아오면서 아내의 죽음에 가려진 비밀이 있을 거라는 직감을 한다. 그리고 아내의 유품을 보고, 이혼 후의 아내의 삶을 추적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아내 사요코는 결혼 전 카피라이터를 했기에 이혼 후에도 잡지사 기자를 했으며, 살인 피해자 가족 모임 등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형 폐지론이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폭력임을 알리는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나카하라는 아내의 장례식 전날 쓰야에 이구치 사오리라는 여자, 아내의 유품, 원고, 사진들, 후미야 의사와의 관계를 파헤쳐 나가는데…….

 

피해자 참가제도가 있다면 덜 억울할까. 피해자 참가제도란 피해자나 유족이 검찰처럼 구형 의견을 말하거나 피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제도다.

재판에서 제3자의 개입(재판관, 변호인 검찰 등)이 아닌 피해자와 유족의 생생한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을까. 재판을 피해자와 유족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걸까. 날마다 슬퍼하고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는 유족들의 아픔을 안다면 이런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카하라의 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재판이 가해자의 편임을, 법이 살인자의 편임을 느끼게 된다.

 

사형폐지는 또 다른 이름의 피해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말에도 공감하게 된다.

 

난 당신 남편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겠지요. 지금의 법은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하니까요.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십자가라도, 적어도 감옥 안에서 등에 지고 있어야 해요. 당신 남편을 그냥 봐주면 모든 살인을 봐줘야 할 여지가 생기게 돼요.

 

(중략) 그래도 남편이 지금까지 속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런 무게가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남편은 지금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나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예요. 나카하라 씨, 아이를 살해당한 유족으로서 대답해 보세요.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제 남편처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본문 중에서)

   

죄는 밉지만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사형판결로 범죄자를 개전시킬 수 없다는 말, 어려운 형편에서 자랐으니 속죄의 기회를 주자는 정에 호소하는 변호들, 형벌은 모순투성이라는 말, 재판도 모순덩어리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완벽한 심판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정의가 있다면 이들에 대한 심판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을 죽인 자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동기와 관계없이 피해자와 유족의 마음은 풀리지 않는 법인데. 평생을 지옥에서 헤맬 유족들의 마음을 누가 위로해 줄까.

 

이에는 이로 갚는 게 진리일까. 범죄 사건의 경우 살인죄에는 사형이 해답일까. 속죄의 기회를 주는 게 정답일까. 계속되는 살인사건들을 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문제들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을까. 살인자가 속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살인자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가족들의 고통은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사형제도에 대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법의 모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 소설이다.

 

술에 취한 경우에 양형을 하는데, 음주범죄가 더 중하지 않을까. 음주운전을 무겁게 두는 것과 비교한다면 분명 모순이다.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면 제 할 일을 못하는 국회의원들의 불체포특권도 모순이다.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면 동일한 범죄에 대해 더 무거운 책임을 지워야 정상이 아닐까. 법의 모순에 대해 대국민토론이 필요한 문제들임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