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 오늘을 위해 밝히는 역사의 진실
김태훈 지음 / 일상이상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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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김태훈/일상이상]이순신의 두 얼굴

 

저자 김태훈은 10년 전에 이순신이라는 인간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의 두 얼굴>을 펴냈다. <이순신의 두 얼굴>을 통해 객관적 입장, 날 것 그대로의 이순신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처한 상황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동서양의 해전사와 이순신의 해전을 비교하는 작업도 병행하면서 말이다.

세월이 흐름 지금, 그 당시에 미처 밝히지 못한 것들을 정리해서 개정증보판을 냈다. 다시 이순신 장군을 살려낸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영화 <명량>도 봤고, 소설도 읽었다. 이젠 더 깊이 알고 싶었다. 이 책에서는 난중일기, 실록, 다른 기록들을 비교하며 이순신의 여러 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결혼을 하고, 무과시험에 합격하고, 전쟁을 치루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모두 보여준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장점과 단점까지도.

1591년 2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선조는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을 진도 군수로 발령했고, 진도에 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무려 7단계를 뛰어 오른 것이다. 사간원들은 종6품의 수령에서 정3품의 수군 최고위직으로의 승진이 적절치 않다며 선조에게 간언을 했다. 하지만 선조는 인재가 부족하다며 강한 의지로 이순신의 승진을 관철시켰다. 그 바탕에는 서애 류성룡의 천거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이순신의 강직한 성품,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성품을 보았던 류승룡이었기에 그를 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 정세에 왜 그리 무지했을까.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랫동안 노렸던 전쟁이었다. 그는 일본통일 전쟁을 이뤄내면서 명예롭고 훌륭한 과업을 이루고 싶었는데, 그 대상이 중국정벌이었다. 정명가도의 명분으로 명으로 가는 길을 조선에 터달라는 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통일 전쟁을 통해 정예화된 무사들이 실직 상태였고 신식무기인 조총까지 있었다. 토요토미는 전쟁의 승리를 자신했으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전쟁이었다. 죽더라도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다.

조선통신사는 무엇을 했을까.

조선은 그의 끈질긴 요청으로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보낼 때, 일본의 전쟁 야욕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통신사로 간 황윤길(서인)은 일본의 침략이 감지된다고 보고했고, 김성일(동인)은 그런 낌새가 없다고 보고했다. 결국 집권세력인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의견이 받아 들여졌고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모두 역사책에서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에 휩싸여 있던 정치권, 집단 이기주의에 휩쓸린 집권층의 작태를 보면 어쩜 지금과 그리 유사할까.

 

일본 통일의 기세를 모아 중국 정복의 원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을 알아 본 쓰시마 도주 다치바나 야스히로. 그는 일본의 야욕을 알았고 전쟁을 막으려고 조선에 알렸지만 조선은 무시했다는 <징비록>의 기록이 있다.

730여쪽에 이르는 책에서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이 실각하고 하옥되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실패한 장문포전투도 밝히고 있다. 장문포전투는 적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 수군이 심각한 전력 손실을 입은 전투라고 한다. 심지어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문포전투 보고서가 진실과 들어맞지 않아 조정에 압송될 뻔했고 선조가 이를 막은 사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사실과 다르게 적혀 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다.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를 그만두겠다고 사임을 원했을 때 내부의 적인 경상우수사 원균을 제거하기 위한 극단의 조처였다고 한다. 이에 조정은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출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고 한다.

 

이덕형이 이순신을 모함해서 이순신이 실각하고 하옥되었다는 이야기는 <선조실록>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명량해전이 대승을 거둔 해전은 맞지만 그 승리가 일본 육군의 퇴각을 초래했다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조선의 조정은 일본 육군의 퇴각 사실을 9월 14일에 이미 접하고 있었고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 발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 상황, 이순신 장군이 싸웠던 해전들, 역사적인 세계 해전들, 잘못 해석한 역사들 사실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역사적 기록이 모두 진실일까, 역사적 해석에 오류는 없는 걸까.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도 대단한 장군이라고 생각되었는지, 아직도 초록 표지의 그 책이 기억이 난다. 그땐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를 못했던 탓에 그저 위대한 장군,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시절의 국가적 상황을 알게 되면서 이순신 장군의 존재가 더욱 대단해 보인다. 어느 것 하나 이순신에게 유리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해석에 소소한 오류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충정과 용감무쌍은 대단한 것 같다. 생각할수록 든든한 우리의 선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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