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나는 신뢰의 즐거움 -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신뢰로의 여행
알폰소 링기스 지음, 김창규 옮김 / 오늘의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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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나는 신뢰의 즐거움]여행은 시간·공간·인간에 대한 신뢰다!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다. 많은 여행 에세이를 읽었다. 같은 장소를 여행해도 작가에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를 보면서 역시 세상은 제 멋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를 담은 책은 또 처음이다.

 

철학자다운 길 위에서의 사유, 여정 중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 세계 각지의 역사와 고유 정신을 접할 수 있는 색다른 여행 에세이니까. 실존주의자, 프로이트 학파, 막시스트, 이성주의자, 구조주의 비평가, 포스트모던의 우화까지 만날 수 있다. 세계의 유적과 만나고 세계의 정신과 만난다고 할까. 의미 있고 매력적이어서 자꾸만 빨려들게 된다. 쏘~옥.

 

저자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인 알폰소 링기스다. 그는 세계 각지를 여행한 이야기에 철학적 논리를 담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에세이 역시 그러하다.

 

 

 

신뢰란 다른 생명체와 맺어지는 관계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준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릴 때면 위험이라는 요소와 함께 신뢰도 생겨나며, 그 결과 즐거움은 환희의 경계를 향해 치닫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중략)......신뢰란 죽음만큼이나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이들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대상을 신뢰한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다. (책에서)

 

아프리카의 아라오유안.

저자가 만난 첫 번째 신뢰는 차량을 준비한 투아레그 부족인 25세의 청년 아지마, 운전사 아자흐, 정비와 요리 담당인 모하메드, 안내 담당 아마두였다.

통북투의 모랫길을 따라 대상이 아닌 랜드 크루저를 타고 가는 길은 차바퀴가 빠지는 연속이었다. 소금이 덮인 곳은 하얀 모래, 한 때 물이 있던 웅덩이는 검은 모래, 사하라의 나머지 모래들이 만들어내는 잔물결은 황금빛 모래들..... 그 길은 투아레그의 대상들인 '아잘라이'가 1천 년 동안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건물은커녕 어떤 흔적도 없는 사막 길, 사방팔방 모래뿐인 사막을 안내하는 아마두의 길 안내가 신기하다. 안내 담당인 아마두의 머릿속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모리타니아와 리비아와 니제르를 향하는 보이지 않는 길까지 들어 있다는데...... 밤이면 별에 의지해 이동하고 낮에는 해를 보며 이동하고, 하늘이 구름에 가려있다면 모래의 맛을 보고 길을 찾는다니......헐~ 대단한 방향감각이다. 밤사이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는 아마두의 머리는 단언컨대 신의 나침반이다.

모래 속에 잠긴 고대 도시 아라오유안에서 만난 베르베르 족 율법학자의 모습은 초기 이슬람 모습 그대로였다. 모래가 섞인 쌀과 기장 주먹밥, 나무판에 적어둔 코란 구절 암송, 기도와 금식, 성자에 대한 연구가 일상인 율법학자.

 

바람 때문에 모래에 덮였다가 바람 덕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대 마을 다르 다렉 순례는 슬픈 흔적에 대한 순례였다. 20년 전에서야 사라졌다는 노예시장 벨라. 아라오유안의 투아레그 족은 타고난 전사 기질을 갖췄다고 한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들, 말리 정부 관리들의 약탈과 파괴, 대기근, 최근 미국 광물 조사단의 석유탐방조사들에 대한 저항은 조상들의 땅이자 신들의 땅인 고향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외부의 침략은 신성한 지역에 대한 세계의 신성모독 같은 것이었으니까.

 

우리는 우리 내부의 다양한 문화나 다른 곳에서 마주치는 문화가 성역으로 취급해 온 것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정보로 풍부한 문화의 하나로 변환시킨다. 즉 더 높은 신성 모독을 저지르는 것이다. (책에서)

 

우림을 걷다가 난을 만난 이야기, 남극지방의 해안 절벽에서 펭귄이 자기 새끼를 구별해내는 광경을 관찰한 이야기, 사막한가운데에서 모래와 바람에 잠긴 고대 도시 아라오유안의 복원에 대한 이야기, 시리아 북쪽의 노리아, 대륙의 갈라진 틈을 볼 수 있는 협곡, 그 곁에서 중개무역을 했던 도시 레켐, 남미의 거대한 미스터리 나스카 문명과 미스터리 기하학 무늬들, 몽골, 티베트, 리우데자네이루, 이스탄불, 아이티, 카이로...... 신비한 역사, 아픈 자취, 아련한 흔적들과 마주하는 만남들.......

그렇다. 여행은 신뢰다. 여행은 시간·공간·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믿지 못한다면, 공간을 믿지 못한다면, 시간을 믿지 못한다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타지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우주적 신뢰 같은 것이 아닐까. 일말의 불신과 위험에 대한 불안감에도 신뢰한다는 건 인간의 선한 일면에 대한 이기적인 기대일 것이다. 신뢰하지 않으면 여행은 불가다. 그래서 여행에서 만나는 신뢰는 위험을 무릅쓴 짜릿함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찰하는 세계 여행에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철학자의 본능을 잘 드러낸  깊이가 남다른 에세이랄까. 여행의 품격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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