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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그마
김성령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에니그마]절대로 약점을 잡히지 마라, 그리고 암호를 해독하라!
표지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뿔 달린 사슴이 겁도 없이 우아하게 정면을 직시하고 있다. 왼쪽에는 기숙사 같은 3층짜리 고풍스런 건물이 있고 뒤쪽으로는 숲으로 이어진 듯 활엽수가 무성하다.
에니그마(enigma)는 수수께끼라는 뜻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 기계였다고 한다. 연합군이 독일에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에니그마의 해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레츨리 파크의 영국 천재 과학자들이 일궈낸 쾌거였다.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유럽 각국 부유층 학생들이 모인 영국 사립 기숙학교 세인트 커스버트 남자 고등학교가 배경이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10대 남자 아이들이 권력욕, 그에 다른 일탈과 왕따를 보고 있으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주인공인 클로드는 조용해서 비밀스럽기까지 한 소년이다. 낮은 자존심에 풀 죽어 있는 예민하고 선량한 소년 정도랄까, 어쨌든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다. 클로드는 제임스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괴롭힘을 받는 일에 이젠 내성이 생겼을 정도다. 구타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해서 기분이 상하지만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하루에도 여러 번 제임스 일당의 폭력을 겪다보니 익숙해진 걸까. 클로드는 자신의 흥미를 억누르고 감정을 조절하고 그렇게 속마음을 숨기는 일에 편하기까지 하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같은 방을 쓰는 독일인 요한이다. 요한 역시 다른 친구들에게 왕따를 받는 중 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이니까.
하지만 3명의 전학생이 오면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영국 총사령관을 아버지로 둔 리처드, 영국 해군 장교의 아들인 프레드릭, 폴란드 정보부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둔 데클런이 오면서 반전이 시작된다. 전학생 중에서 리처드는 아버지의 권세를 등에 업고 금세 학교의 독재자로 등극하게 된다. 리처드는 자신의 신분만큼이나 말과 행동에서 절대적인 위엄을 풍겼고, 위풍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말투까지 지녔다. 모두들 그와 친하고 싶어 하지만 악동 제임스는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리처드 곁에 있고 싶어 한다. 하지만 리처드는 클로드를 옆자리에 앉게 되는데…….
클로드가 리처드의 관심을 받은 이후 친구 요한에겐 더욱 가혹한 왕따가 가해진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의 피를 지닌 대가로 결국 요한은 학교를 떠나게 되고…….
절친 마저 사라진 학교에서 다시 클로드를 향한 제임스의 폭력은 시작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리처드는 구원의 손길을 보내온다. 제임스 아버지의 비리를 담은 봉투를 건네주면서 제임스를 궁지로 빠뜨리라는 것이다.
그 이후 클로드에게는 천국 같은 학교생활이 이어진다. 하지만 프레드릭이 밝힌 독재자 리처드의 속셈을 알고 경악하게 되는데……. 리처드는 친구들을 궁지에 몰았다가 구해주면서 절대 복종을 받아내거나, 집안 비리를 캐내어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전쟁과 함께 학교 역시 혼란하고 비참하고 무분별하고 비이성이 휘말아 치는 모습이 세상의 축소판 같다. 전쟁의 공포는 어린 학생들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각기 국적이 달라서일까. 소년들 사이에서도 어른들의 탐욕만큼이나 전쟁의 광기, 권력에의 탐욕이 서서히 지배해 가는 것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유 없는 괴롭힘, 장난감처럼 갖고 놀리는 존재. 왕따의 이야기, 학교 내 권력의 속성을 그려낸 이야기에서 어른들을 흉내 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잔인함 그 이상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상이다. 반전에 반전, 용기 있는 저항 정신을 만나게 되는 소설이다. 파워게임에 재미를 붙인 독재자들의 잔인함이 어떤 희생을 낳게 하는지, 그런 권력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캐릭터에 불안정한 사회를 투영시키거나 전쟁의 광기를 덧입히기도 하고, 전쟁과 갈등 상황을 왕따와 자살, 학교폭력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주제의식과 문제의식을 보면 십대 소녀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짜임새 있고 예리하며 깊이가 있다.
작가는 십대 작가 김성령이다. 십대 작가라니! 15살에 첫 장편소설 <바이슬시티>를 썼고 17살에 두 번째 장편소설 <에니그마>를 썼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녀의 작품에서는 역사의식, 문제의식, 심리묘사가 치밀하다는 점이다.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약점을 잡히지 마라, 아니면 독재자의 속셈을 읽어라. 암호를 해독하고 용기를 내어 역공하라. 뭐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잘 쓴 소설, 읽는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