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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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그해 겨울, 상처를 안고 침묵으로 통하던 영혼들…….

 

제목이 소소한 풍경이어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삶 또는 도시인의 평범한 하루를 이야기하나 싶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옛 도시의 외곽이어서 전원적인 풍경은 있지만 마음을 무겁게 하는 영혼들의 슬픈 이야기라서 말이다. 상처 없는 해맑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몸에 흉터 하나 없는 말간 몸뚱이가 어디 있으랴. 같은 시대, 하나의 공간에 산다지만 역사적 시점에 따라 공간적 좌표에 따라 겪어야 할 경험들은 각기 다른 법인데…….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얼마나 공감하며 살까. 과연 침묵으로도 통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없다. 이니셜도 아니다. 그저 ㄱ, ㄴ, ㄷ 일 뿐이다. 이름이 없는 무명씨들. 어디에서도 있으나 없으나 존재감이 없는 자들. 어리거나, 사회적 약자이거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 그래서 작가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걸까. 이름을 불러줘야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로 와 닿을 텐데……. 이름이 없어서 더욱 외롭고 슬픈 존재들이다.

소설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를 ㄱ의 집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한다. 한 때 ㄱ의 교수이기도 했던 소설가는 ㄱ의 전화를 받는 순간, 작가로서의 직감이 작동하게 된다.

 

대학시절 자신의 소설수업에서 악평을 받던 ㄱ의 소설은 <우물>이었다.

지금 ㄱ의 집 안에 있던 우물에서 무표정의 우울이 깃든 데스마스크, 즉 해골바가지가 발견되었고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다는데……. 우물은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아우르는 굵직한 줄기가 된다. 대학시절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걸까.

 

죽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선인장을 기르던 ㄱ은 선인장에 집착한다.

가시는 선인장의 잎이다. 물이 없어도 살아가기 위한 스스로의 생존전략인데, 선인장의 가시는 자신을 만지려는 이들에게 빨간 피의 고통을 주는 잎이다. 그녀가 선인장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가시 같은 존재일까.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일찍 깨쳤기에 선인장과 동류의식을 느낀 건 아닐까.

말더듬이 오빠의 이른 죽음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불러온다. ㄱ이 여고 2학년 때 일이다.

아픈 기억은 최종적으로 가시가 된다.(51쪽)

 

ㄱ은 결혼도 순탄치 못했다.

대학시절 만난 남자1은 ㄱ과 똑 같이 흰 운동화를 신었던 남자다. 졸업을 하면서 ㄱ은 남자1의 아내가 되고, ㄱ은 남자1의 독점적 지배권 앞에서 좌절하게 된다. 남자1은 뒷정리를 모르는 남자였다. 섬유회사 회장님을 아버지로 둔 탓일까. 부리는 일에 익숙한 남자다. 내 아내잖아! 이 한마디로 모든 걸 해결하려한 남자였다. 아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하거나 독재적이고 폭압적이기까지 한 남편이었다. ㄱ의 평화롭지 않은 결혼생활은 경제적 독점과도 같은 욕망의 독점이 빚어낸 결과였으리라. 모든 게 경제논리에 맞춰진 탓이다.

고귀한 '소유의 적합성'을 결혼이 '비천한 지배에의 욕망'으로 조금씩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53쪽)

 

혼자 사니 참 좋아!(60)

결국 남자1과 이혼한 ㄱ은 혼자 살게 된다.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던 그녀 집에 더플 백을 지닌 남루하지만 홀림을 가진 방랑자가 등장한다. 바로 ㄴ이다.

둘이 함께 사니 더 좋아.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감춘 남자. 얼굴 주름들 사이로 바람의 길이 생겨난 알 수 없는 얼굴을 지닌 남자의 등장은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는다. 하루만 신세지겠다는 남자는 마당청소를 하고 우물을 파면서 장기간 거주하게 된다. 그리고 왠지 모를 위안을 받게 된다.

남자1이 지배적 욕망을 과시하며 주인 행세를 했다면 ㄴ은 분명 차이가 나는 남자다. 배려와 보호본능을 가진 머슴 스타일이었으니까.

 

어느 날 이들의 삶에 조선족 불법 체류자 ㄷ이 끼어든다.

셋이 사니 진짜 좋아.

ㄱ은 왜 셋이 사니 더 좋다고 했을까.

분명 ㄴ이 들어와 마당이 정돈되고 ㄷ이 들어와 집안에 반짝반짝 윤이 난 점은 있다. 하지만 한 남자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불편하기도 했을 텐데…….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 두 여자 끼리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행복이란 말은 너무도 범속해서 우리들 언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때로 침묵으로 수평을 이루었고 우리는 때로 육체를 통해 원시로 돌아가기도 했어요. 우리가 경험했던 감정의 수평과 세계의 시원을 미적분 문제처럼 설명할 수는 없어요.(책에서)

 

ㄴ의 죽음으로 셋은 흩어지게 되고 ㄱ은 경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ㄴ과 ㄷ의 과거를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은 하나씩 있는 걸까. 하지만 너무나 어둡고 쓰라린 과거 뿐이다.

계엄령에 의해 죽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ㄴ의 기억은 차디찬 아픔이었으리라. 그 아픔을 달래려 유랑하며 방랑하며 기타를 배우며 운명에 젖어 살았으리라. 그렇게 일용직이 되고, 그렇게 인디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고…….

조선족 처녀로 위장한 탈북처녀 ㄷ, 몸을 팔아 번 돈을 엄마에게 부칠 때 희망이라곤 가졌을까.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왔지만 버겁고 힘든 삶뿐이었을 텐데...... ㄷ에게 실낱같은 희망은 있었을까.

 

우리……. 메아리 같아요.……. 어느 날 그가 한 말이다. 지나가고 나면 메아리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해 겨울 우리를 살렸던 숨은, 메아리다. (116~117쪽)

 

ㄱ의 집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휴식처였으리라. 상처가 깊어 사랑에 두려움을 갖는 세 사람이 통할 수 있는 안식처였으리라.

 

그러므로 사랑은, 두려워요.

모든 사랑에는 그런 위험이 다 깃들어 있어요. 훼손하기 위해 욕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적도 많아요. (179)

 

기계실 냉방설비 보수업체가 대형 아울렛 매장의 누출된 냉매가스 질식사 이야기는 대형마트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가슴 먹먹한 현실이다. 나비도감을 빌리러 친구 집에 가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은 ㄴ의 형, 세탁기를 돌리듯 자신의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ㄴ, 탈북자로서 호소할 길 없는 ㄷ의 피해는 절망가득하다.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아웃사이더들의 과거도 미래도 없는 삶. 현재라도 있기는 한 걸까. 결국 스스로의 우물, 자기 묘를 팔수밖에 없었던 ㄴ의 현실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나. 죽어 시멘트에 자신의 부조를 남긴 ㄴ, 그의 죽음은 분노였을까, 저항이었을까. 아니면 포기였을까.

 

셋이 모여 온전한 하나를 이룬 세 사람. 가족을 잃으면서 자신의 세계까지 잃은 세 사람의 이야기에 헛헛한 기분이 든다. 이들이 침묵으로도 서로에게 스며들던 시간과 공간들이 그저 소소한 풍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의 심연, 생의 의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철학적인 질문들을 하게 된다. 왜 세상은 공평하지 못한가, 왜 누구는 더 억울해야 하나는 사회적인 문제까지 생각하게 된다.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 청춘들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메아리쳐 온다. '이런 삶, 이해할 수 있나요. 이런 고통 공감할 수 있나요.' 라고……. 이건 그저 소소한 풍경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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