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존재에 대한 통찰, 그래서 더욱 슬프다.

 

 

에밀 시오랑은 1911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난 허무주의 철학자요, 수필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조국의 헝가리 화에 저항감을 가졌다.

1928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심취하게 된다.

1934년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로 루마니아 왕립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으며,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는 '생의 가장 비극적인 의미를 조명한, 고뇌의 주옥같은 글들'이라는 <르몽드>의 격찬도 받았다.

어렸을 적, 조국의 우울한 분위기 및 가정의 저항적인 분위기가 에밀 시오랑에게 우울한 기질, 반항적 기질을 물려주었을까. 저명한 문학상도 거부하고 문단과의 교류도 사양하고 철저한 고독을 즐겼던 에밀 시오랑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그 재앙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면서 그 사실을 잊으려 안간힘을 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태어나는 첫 순간에 근원을 둔 어떤 공포가 미래에 투사된 것일 뿐이다.

 

물론 태어남을 재앙으로 취급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태어남이야말로 최고의 선이고, 최악의 것은 우리 생애의 시초가 아닌 종말에 있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불행, 진정한 불행은 우리 앞이 아니라 우리 뒤에 있다.(책에서)

 

태어나는 순간 인간은 재앙이 되고 고통 속에 살아간다는 말이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공감은 간다. 불교에서도 삶은 번뇌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아무리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해도, 삶이 죽음을 향해가는 고통의 바다라고 해도 , 그렇기에 더욱 태어남은 축복하고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유전에 대해 항의하는 것, 그것은 바로 수백만 년이라는 세월에 대해, 최초의 '세포'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다.(책에서)

 

유전에 대한 항의는 사춘기 아이들을 보는 듯하다. '왜 나를 낳으셨나요, 왜 이런 유전자를 주셨나요.'라는 투정은 사춘기 아이들의 투정에 고상한 철학을 입혔을 뿐이다.

최초의 세포에 항의한 들 무슨 뾰족한 해답이 나올까. 최초의 세포이전에 어떤 물질이나 창조자의 섭리가 있었다면 또 어쩌겠는가. 수억만 년 전의 시절에 항의해야 할지도 모를 일인데. 불가항력의 일에 항의해봤자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 답이 없는 질문일 뿐이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저 지금 여기 있음에, 더불어 살아감에 감사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살아가다 보면 불가항력이 너무 많음을 절감한다. 부모를 선택하고 조국을 선택하는 길, 태어날 장소를 선택하는 일 등이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다. 점점 자라면서 학교에 가고, 반을 선택하는 것, 선생님을 선택하는 것도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 잘 할 수 있어도 다행인 세상인 걸.

태어남이 우발적 사건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애초에 정자와 난자의 만남은 어려운 확률게임을 이겨낸 수억만 분의 하나인 것을. 태어남의 필연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저자에겐 허무였을까. 나의 존재가 세상의 균형과 발전에 기여하지 않더라도, 모퉁이에 선 작은 돌처럼 보통의 삶이더라도, 난 그저 우연을 필연으로 여기며 살고 싶다.

긍정적인 면보단 부정적인 면이 많은 세상, 평화보단 전쟁이 많은 세상, 이해보단 시기와 질투가 많은 세상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작은 부분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게 살맛을 느끼게 할 텐데.

 

저자는 세상에 대한 혐오감, 태생에 대한 허무를 바탕으로 존재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하고 있다. 우연하게 태어난 인간이 필연처럼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실존에 대한 질문을 하다보면 모두 허무주의자가 되는 걸까. 실존의 실상을 알면 삶이 헛헛하기만 할까.

만약 저자의 유년 시절, 조국의 환경이 달랐다면 어떠했을까. 그래도 유전된 세포에 담긴 고독한 허무주의의 기질을 바꾸지 못했을까. 저자의 존재에 대한 통찰은 너무 허무 쪽으로만 기우는 듯해서, 지금 나는 슬프다. 분명 저자의 유전자에 우울한 기질이 많은 듯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부정보다는 긍정이 행복의 바탕이라고 믿고 있기에, 허무보다는 환희가 하루를 지탱해 준다고 알고 있기에, 이런 허무주의의 글은 공감이 덜 간다. 비록 삶이 동굴의 우상이라고 해도, 삶이 번뇌와 고통이라고 해도 오늘 여기 있음에 나는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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