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세상을 바꾸는 것은 생각이다!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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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시대의 저항아, 마광수 교수의 생각을 담은 책~

 

<2013 즐거운 사라>를 시작으로 마광수 교수의 작품들을 읽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단골손님처럼 야한 여자에 대한 생각들이 공통으로 들어 있다. 그의 야한 여자에 대한 생각들이 너무나 적나라하고 위태롭기까지 해서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지나치게 가학적인 부분은 끔찍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쩌면 그의 솔직한 생각들이 위선이 가득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 메타포라면 의미를 달리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늘 마광수의 생각을 정리한 책을 만났기에 다른 분야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궁금해진다.

이 책에는 시대 생각, 문화 생각,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이상한 생각, 야한 생각, 오늘 생각, 내일 생각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부분은 문화 생각이다. 영화와 문학,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가장 궁금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은 사회적 불평등이 없으면 여가를 가진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아 '문화'를 극력 배척했다. 특히 루소의 생각이 그랬는데, 그는 문화를 '지식계급이 저지르는 악'으로 간주하여 문화의 발달은 인간의 불평등을 확대시킨다고 시킨다고 주장했다. 문화란 귀족계급의 사치스런 여가 이용 방법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였다.(책에서)

 

이에 대해 저자는 문화를 고급스런 철학이나 예술문화 뿐만 아니라 저급한 민중문화까지 끌어 들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천박한 아름다움'이나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까지 예술의 특징으로 선언한 19세기의 빅토르 위고, 민중적 저급성과 상상력이 결합된 중세의 서민문화를 재평가한 20세기의 문화평론가 호이징하의 주장도 끌어 들인다.

 

예로부터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인 예술로 개발된 '춤'은 그 기본 골격이 성교와 애무의 몸짓으로 되어 있다. 또한 모든 노래 역시 '사랑'이 주제로 되어 있는데, 노래의 소재가 육체적 사랑일 때는 저급한 예술로 취급되고 정신적 사랑일 때는 고급한 예술로 취급됐을 뿐이다.(책에서)

 

정직한 대리욕구배설과 순진한 창조성이 혼연일체가 될 때 거기서 민중적인 예술과 문화가 생겨나는 것이며, 모든 예술이 그런 성격을 지닐 수 있을 때 비로소 촌스러운 '엄숙주의 문화'가 사라질 수 있다.(책에서)

 

그의 주장은 인간의 문화욕구의 출발점이 '성적 쾌락'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이 민중들의 솔직한 통속물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포르노니, 외설이니 무시되어왔다는 것이다.

애초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존재는 여유의 차이를 만들었고 놀이의 종류를 다르게 만들었겠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부림으로써 남는 시간의 여유가 문화생활이었으니까. 하지만 한때는 고급만 문화로 간주했겠지만 지금은 고급이든 저급이든 모두가 문화의 범주에 포함되고 있지 않나. 아직은 대중문화나 민중문화가 저급취급당하지만 점차 문화의 한 영역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한마디로 말해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다. 문학은 도덕적 설교가 아니고 당대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계몽서도 아니다. 문학은 언제나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이어야 하고,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창조적 불복종'이요, '창조적 반항'이어야 한다.(책에서)

 

문학이 꼭 반항과 저항으로서의 문학이어야 할까. 고급과 저급을 모두 문화의 범주에 수용하듯 반항과 순응도 모두 문학의 범주에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명작이 명작인 이유가 구성과 문체의 완벽성보다 오히려 창작자의 집필의도가 내포된 '참신한 도전성'에 있다고 한다. 입세의 <인형의 집>, D. H. 로렌스의 소설들, 에밀 졸라의 작품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도 당대에는 '창조적 반항'을 가진 문제작들이었다. 당대에 경박해 보였던 작품들이 시대가 흐르면서 후대에 가서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가 시대를 앞서간 반항정신, 미래 사회를 예고한 창조적 가치관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품으로 인한 작가의 사회적 책임은 없는 걸까.

 

현 사회의 지배적이고 유용한 가치가 정말 옳은 것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책임이다. (중략) 기성도덕과 기성 가치관에 추종하며 스스로 '점잖은 교사'를 가장하는 것은 작가로서 가장 자질이 나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문학은 무식한 백성들을 훈도하여 순치시키는 도덕 교과서가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책에서)

 

문학의 참된 목적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이요, 창조적 일탈이다. 문학은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는 본능적 욕구들을 리얼하게 드러내어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참된 가치를 지닌다.(책에서)

 

윤동주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 윤동주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윤동주를 저항시인이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중략) 그러나 윤동주를 투쟁적 이미지의 저항시인으로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깎이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스로에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윤동주의 저항은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책에서)

 

지독히도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아주 짧은 생인 28년을 살다간 민족시인 윤동주. <자화상>, <참회록>, <또 다른 고향>,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쉽게 씌어진 시> 등에서 그는 양심적 내적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헛되이 살지 않기 위한 고민들, 부끄럽게 살지 않기 위한 번민들을 자연을 통해 상징적으로 고백했기에 우리는 더욱 그를 순수한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뼛속까지 부끄러워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후안무치의 내가 더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그의 시는 읽는 이들 모두를 죄송하고 부끄럽게 만든 시였다.

인간의 이중적 잣대, 다중성에 대한 마광수의 날선 비판이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스스로의 관능에 대해 솔직하게 글을 쓰고 싶었던 작가로서의 양심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획일성과 도덕성을 내세운 폭력에 처절하게 절망한다는 저자의 말, 우리문학의 엄숙주의와 경건주의에 절망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아직은 섣부른 작품들, 대중적으로 수긍이 어려운 작품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질탕한 성희묘사가 천박하고 음란한 것이 아닌 진솔한 민중적 표현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아직은 그의 작품 속 야한 여자에 대한 생각에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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