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귀신의 노래 - 지상을 걷는 쓸쓸한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편지
곽재구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길귀신의 노래]길에서 만난 이야기가 이토록 따뜻하고 정겨울 줄이야~

 

 

 

다른 사람이 쓴 글에 길귀신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었다면 분명 오해했을 것이다. 오싹하고 섬뜩한 기운마저 느꼈을 것이다. 귀신의 노래니까.

하지만 곽재구 작가가 썼다면 길 여행에 대해서 쓴 글이 아닐까 싶었다. 예전에 그의 작품인 <포구 여행>을 읽으면서 작가가 길을 정말 좋아 하는구나 싶었으니까.

 

 

 

 

길귀신은 내게 시의 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지상의 내 모든 여행을 따뜻이 지켜주었다. (책에서)

 

 

 

누구나 걷는 길, 어제도 걷고 오늘도 걷는 길이다. 하지만 작가의 길에 대한 노래는 끝없는 길 실타래가 되어 따뜻한 온기로 여기저기 풀어놓고 있다. 그만의 유별난 길 사랑이 어렴풋한 풍경화가 되어 훈훈함을 주고, 잔잔한 가락이 되어 울림을 준다.

 

 

 

언젠가 지상에서 내가 쓴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글들이 한 송이 포도와 같은 질감과 푸른 빛의 꿈을 지녔으면 싶다. 여기 모인 글들은 지난 십 수 년 간 와온 바다 언저리에 머물며 빚은 기억의 포도송이에 관한 것이다. 이곳의 길 위에서 나는 매일매일 사랑스런 길귀신들의 숨소리와 목소리들을 들었다.(책에서)

 

 

포도송이를 이리도 좋아하는 작가라니, 나도 포도를 좋아하는데. 지금은 겨울철이라 포도보다는 귤이 후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갑자기 포도 생각이 간절해진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아이는 자신이 선생님의 도시락을 깔고 앉아 있는 것이 민망했다. 그런데 엉덩이가 따뜻하고 좋았다. 학교로 가는 길 내내 엉덩이가 행복했다.(책에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 별로 없는데, 작가는 선생님의 도시락에 대한 기억이 유난한가 보다. 아직도 기억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소설 습작을 하셨던 선생님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1학년 꼬마가 얼마나 기특했을까. 선생님은 학교 갈 때마다 꼬마를 불러서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간다. 선생님 도시락을 깔고 앉았기에 아이의 엉덩이가 행복했다는 표현들. 선생님 도시락을 엉덩이에 대고 갔으니 얼마나 죄송했을까. 하지만 옷이 변변찮던 시절이었으니 미안하면서도 따뜻한 엉덩이로 인해 행복에 겨웠을 꼬마의 마음이 느껴진다.

 

 

 

내가 쓴 시에 어쩌다 한 줌의 온기가 스며있다면 그것은 선생님의 도시락에서 느껴졌던 그 온기에서 비롯된 것이다.(책에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아이에게 보인 선생님의 미소는 너무나 환했고 추위에 떨던 아이에게 베푼 배려는 너무도 따뜻했다. 지금은 그런 풍경자체가 어려운 시절인데.

 

시각장애인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을 준다.

목욕탕에서 시각장애인이 전혀 불편함 없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며 작가는 신기해한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듯 너무나 능숙한 손놀림으로 목욕하고 나가는 모습은 분명 감탄의 경지다. 며칠 뒤 길에서 만난 장애인은 검은 안경을 쓴 채 프레지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내가 좋아해요." 그 한마디에 정서적 충격을 받게 되는데. 하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는 부부가 둘 다 시각장애인임을 알고 더 큰 충격을 받는다. 비록 달방에서의 삶, 시야가 보이지 않는 삶, 남 보기에는 누추한 삶일지라도 본인이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그가 능숙한 솜씨로 목욕을 끝내는 것을 조심스레 지켜보면서 나는 삶이란 그것을 가꿔갈 정직하고 따뜻한 능력이 있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어떤 꽃다발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책에서)

 

 

 

 

저자가 길에서 만난 추억들이 때로는 꽃다발처럼 향기롭고, 때로는 포도송이처럼 알차게 영글었다. 데면데면하면서 그냥 스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환한 꽃으로 피고 탐스런 열매로 맺었다는 것은 작가의 세밀한 관찰과 따뜻한 마음이 있기에 가능하겠지. 똑 같은 길을 걷는데, 달라도 너무 다르다. 끝이 없는 길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에 빠져 길여행의 묘미를 맛보았다고 할까. 나도 이런 길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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