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높고 푸른 사다리]사랑은 절망이 아니고 구원이야!~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오랜만에 접했다.

높고 푸른 사다리.

제목에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소설이다. 저자의 <수도원 기행>이 얼핏 생각나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지상에 머문다.(띠지에서)

 

신과의 사랑이든,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든 인생은 사랑의 연속이다. 신과의 사랑을 약속했지만 한 여자와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한 수도사의 현실적 번민은 어쩌면 영원한 고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사랑해서 생겨난 고통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니까.

누구나 아름다워서 잊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다. 고통스러워서 아름다워서 혹은 선연한 상처 자국이 아직도 시큰거려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뛰는 심장의 뒤편으로 차고 흰 버섯들이 돋는 것 같다. (책에서)

 

사랑의 순간은 언제나 찬란할 것 같지만 의외의 아픔을 동반한다. 그러니 인간은 사랑과 이별에 의연해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사랑과 이별의 연속이기에. 남녀 간의 사랑이든, 신과의 사랑이든 또 다른 사랑이든 말이다.

 

신부 서품을 앞둔 베네딕트 수도회의 젊은 수사인 정요한. 그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결혼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을 맹세하며 재산을 포기한 채 공동생활을 하는 수사의 삶을 선택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가장 심오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수도사였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도사들의 대열 속에 지금 그가 서 있다. 수도원에 들어온 이후 요한은 성경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싶었고 신을 통해 우주를 통찰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의 회오리 같은 사랑이 요한 수사의 삶을 흔들어 놓게 된다. 흔들리지 않고 신의 뜻대로 살기에 요한은 너무 젊었던 걸까.

어느 날 대수도원 원장인 아빠스님의 조카인 김소희가 종교인의 스트레스를 석사논문으로 쓰려고 수도원에 오게 된다.

소희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인터뷰를 수사들에게 하려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보다 못한 요한은 남녀 간의 사랑은 아니지만 다른 사랑은 이야기 할 수 있다며 소희의 인터뷰에 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한 마디, 손길 한 번에 요한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게 된다.

언제나 사랑은 소리 없이 시작되는 법이다. 요한의 첫사랑도 그렇게 와 버렸다.

 

멀리서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중략) 나는 처음으로 바람결이 내 머릿결을 매만지는 부드러움을 응시했고, 그날 처음으로 햇빛이 어린나무 잎사귀를 어루만지면서 사랑을 속삭인다고 느꼈다.(책에서)

 

요한은 그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호감 가는 이성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 자에 대한 연구'의 피실험자가 되어 간다.

 

죽음처럼 강하고 저승처럼 억센 것, 큰물로도 끌 수 없고 강물로도 휩쓸지 못하는, 그런 사랑이 우리 두 사람을 적시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에서)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세상이 기우뚱하고 흔들릴 수 있다는 건, 분명 사랑의 힘이다.

하지만 약혼자가 있는 그녀와 신과의 사랑을 맹세한 수도자의 길은 애초에 다른 길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바람처럼 왔듯이 바람처럼 떠나 버린다.

요한의 첫사랑은 그렇게 가랑비처럼 왔다가 소낙비처럼 가버린 것이다.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내던 미카엘과 안젤로 수사도 빗길에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죽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충격에 요한은 좌절한다. 자신의 삶 하나 제대로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절망스럽다.

그리고 먼 길을 돌아서 10년이 지난 후에 요한과 소희는 해후하게 된다. 그들의 해후는 무덤덤할 수 있을까.

한편, 요한은 미국 뉴저지 뉴튼수도원의 흥남철수 이야기가 들어간 한국전쟁사 자료수집에 참여하게 되면서 미국 뉴튼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님에게 미해군 선박이 흥남부두 수송선이 된 배경과 피란민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마리너스 수사의 빅토리아 메러디스 호와 원산 탈출 이야기, 6.25당시의 흥남부두 수송선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한다. 정말 눈물겨운 사연이다.

토마스 수사의 평양 감옥과 북한의 수용소 이야기, 아빠스님과 덕원 수도원 이야기, 요한 루드비히 신부 이야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이야기 등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들어 있다.

높고 푸른 사다리는 야곱이 꿈속에서 하늘을 오르던 사다리일 수도 있고, 흥남 부두의 배위를 오르기 위한 밧줄로 묶은 높은 사다리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에서 사다리는 인간이 오르고자 하는 구원의 도구가 아닐까. 사랑의 고통을 이겨내고 신이 주는 선물을 받으러 올라가는 구원의 사다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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