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투성이에서 꽃피다 - 신데렐라처럼 사랑하기 이야기나무 오리진 Origin : 스토리텔링을 위한 이야기의 원형 1
이시스 지음, 봄바람 엮음 / 이야기나무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재투성이에서 꽃 피다] 신데렐라에서 이야기 원형을 찾다.

 

 

 

얼마 전에 재미있게 읽은 <신더>는 신데렐라의 SF소설 버전이다. 곧 영화로 나올 정도로 인기가 있다는 것을 보면, 신데렐라가 이야기의 원형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모든 여성 안에는 신데렐라가 있다. 맞는 말이다.

신데렐라의 꿈은 언제 들어도 지겹지가 않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시대가 흐르고 버전을 바꾸어도 흥미진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적 아름다움, 인내의 근원, 선악의 구조가 분명하기 때문일까.

현실을 탈피하고픈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일까.

그냥 왕자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좋기 때문일까.

아마도 신데렐라가 재투성이의 부엌데기 시절을 견뎌내고 마녀의 주술에서 깨어나듯 왕자를 만나 신분 상승한 이야기에서 여성들의 심리를 위로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본능적으로 여성들이 갖는 백마 탄 왕자님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재의 시기, 괴물의 극복기, 나무의 시기, 새의 시기, 자아를 꽃 피우는 시기,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시기로 나누고 있다.

 

신데렐라에게 있어서 재의 시기는 자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고 한다. 내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근원적인 해답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이는 다른 원형적 이야기나 동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데 심청이가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심연, 인당수로 뛰어드는 시기이고 프시케가 페르세포네의 사랑의 묘약이 든 상자를 얻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는 시간이며 오르페우스가 저승으로 에우리디케를 찾아가는 시기이고 요나가 고래 뱃속에 삼켜지는 시간이며 불사조가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는 시기이다. (책에서)

 

재는 나무를 다 태우고 난 뒤의 찌꺼기요, 끝을 보이는 잔해다.

작가의 말처럼 신데렐라가 자아의 성장 스토리라면, 자아의 미성숙으로 인한 콤플렉스는 못생긴 여자 콤플렉스, 착한 여자 콤플렉스와 같은 것이다.

 

신데렐라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생명력을 회복한 뒤, 재의 시기 끝에 오는 부활의 과정을 걷는다.

이 부분 부터는 독자들을 설레게 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를 괴물의 시기 극복단계라고 한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깨어나 마녀의 주술에서 벗어나는 신데렐라

방관적이고 무지한 아버지의 그림자를 넘게 되고 질투와 욕심으로 가득한 의붓언니들의 자기 안의 부정성을 넘어서고 드디어 미성숙한 계모의 의심과 불안의 사슬마저 끊어 버리는 신데렐라다.

 

그리고 나무의 시기에서는 눈물로 뿌리를 적시고 무럭무럭 자아가 자라는 시기요, 새의 시기는 커다랗게 자란 나무 같은 든든한 자아에 대한 우정을 말한다.

이 시기는 내면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전체와 자아가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파티는 자기다움을 드러낸 것이라면, 왕자는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이즈가 맞는 구두는 나만의 왕국으로 가는 길이고, 신성한 왕자와의 신성한 결혼은 분리 이전의 완전한 세계로의 통합이다.

 

미성숙과 성숙, 추함과 아름다움, 순수와 허영, 가치와 기회에 대한 생각을 하는 이야기 원형인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우리의 고전 <콩쥐 팥쥐>가 떠오른다.

비슷한 이야기 구조, 비슷한 결말이 어쩜, 그리도 비슷할까.

 

모든 이야기의 원형들은 인간의 본능을 이야기 하고 있기에 지루함을 모르고 읽게 되는 게 아닐까.

신데렐라 이야기는 단순한 스토리 속에 희망이 있어서 좋다.

획기적인 사건이 전개되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고,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진실한 왕자의 눈빛이 있어서 좋다.

인생에 있어서 한 번 쯤 찾아온다는 기회의 이야기가 설레게 해서 좋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분명,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하고 팍팍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치유가 되는 판타지다.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기적들은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기에.

착하기만 한 여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기 사랑을 찾아 나서는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원형을 찾는다는 발상이 흥미롭다.

 

 

<신더>를 읽으면서 신데렐라를 우리 식으로 버전을 바꾼다면 어떨까, 현대의 아이들 버전으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을 했는데…….

습작은 그렇게 시작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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