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 145년의 유랑, 20년의 협상
유복렬 지음 / 눌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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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조선 기록 문화의 상징인 의궤!

 

 

예전에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며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그때 굉장히 놀라며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우리의 문화재가 어떻게 그리 먼 나라의 국립박물관까지 가게 되었을까.

만약에 그분이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사서로 근무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의 것을 찾고자 애쓰지 않았다면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에 대해 우린 아직도 모르고 있지 않을까.

그 이후로 외규장각 의궤가 보도될 때마다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빼앗긴 우리 것에 대한 본능적 관심이었다.

그러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협상이 지지부진해진다느니, 양국 간의 문화재에 대한 사고의 차이가 많다느니, 그러다가 결국 지지부진하던 협상이 체결되어 아쉽게나마 대여형식으로 온다느니 하는 보도를 들었다.

그때 뉴스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문화민족이라는 프랑스는 국내법과 국제법을 들먹이며 굉장히 야만적인 사고를 하는구나, 이렇게 빼앗고 약탈해간 남의 나라 문화재들을 자신들의 국립박물관 창고에 얼마나 많이 쌓아 놓았을까.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했으니 그곳에서 빼앗은 문화재는 또 얼마나 있을까. 영국이나 미국, 일본의 박물관에서 꼭꼭 숨겨진 우리의 문화재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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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이다. 145년 동안 유랑을 하고 20년 동안의 협상 끝에 돌아와 있는 외규장각 의궤에 얽힌 이야기다.

 

우리에게 외규장각 의궤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의궤는 단지 한때에만 행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만세에 걸쳐 행해지도록 만든 것이다.― 세종실록

조선의 철저한 기록 문화는 의궤에서 그 빛을 발한다. 혼례, 세자책봉, 장례, 종묘에서의 제사와 같은 왕실의 의식부터 실록의 편찬, 성의 축조와 같은 국가적인 사업, 악기 제작이나 잔치를 베푸는 일처럼 다소 시시콜콜해 보이는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행사들이 의궤로 제작되었다. 의식과 행사의 선례를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법도에 맞게 의례를 치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의궤제작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다양한 의식의 과정과 사용한 물품,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행사에 쓰인 각종 기물과 복식 등을 그린 도설과 행사 장면을 그린 반차도도 함께 그려져 있어 그 가치를 더한다.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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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의 것이 그리도 멀리 가게 되었을까.

외규장각 의궤의 약탈 배경에는 병인양요와 프랑스군의 강화도 습격이 있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는 무엇인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8천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 9명도 함께 처형된다. 프랑스 신부의 죽음을 빌미로 당시 텐진에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에서 로즈 제독을 앞장세워 강화도를 침공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은괴와 외규장각에 있던 도서와 사료 등 을 가져가면서 나머지를 불태우게 된다.

당시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은 정조가 설치한 왕실서고이다. 창덕궁에 있던 규장각의 부속시설로, 외세의 한양 침략에 대비해 의궤 등 왕실의 귀중한 자료를 보관하기 위한 비상 서고였던 셈이다. 팔만대장경을 전국의 비밀서고에 보관한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는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우리가 가지지 못하도록 불태우는 정책…….

 

그때 강화도의 외규장각이 완전히 불탔기에 우리는 모든 책들이 불 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가,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박병선 박사가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냄으로써 1975년에 겨우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외규장각 의궤가 그리로 가게 된 역사적 배경도 알게 된 것이다.

원래 340권이던 의궤 중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있는 것은 297권이다. 소실된 나머지는 이리저리 팔리거나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왜 우리 땅에 오는 게 이리도 힘들었을까.

늦게나마 1991년에 서울대학교가 프랑스 정부에 의궤 반환요청을 했고 같은 해에 외무부가 프랑스 정부에 공식 요청했으나 그들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러다 고속철도 사업으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하면서 급물살을 탄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돌려주고 싶다고 했으나 일부 학자들과 프랑스 국민들은 자신들의 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를 절대로 돌려 줄 수 없다며 극단으로 반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미테랑 대통령이 의궤 한 권(수빈휘경원원소도 감의궤)을 한국에 두고 가게 된다. 단지 보여주기만 하겠다던 프랑스국립박물관과의 약속을 어기고 즉흥적으로 한국에 남겨두고 갔다고 한다.

그 당시에 '교류와 대여'라는 형식으로 양국 정상 간의 합의를 깨고 한국에 돌려 줬으니 프랑스 국내법을 어긴 대통령으로 몰아넣으며 공권력의 횡포니, 나치협력정부니 하는 기사까지 났다고 한다.

 

그 이후로 협상은 20년의 세월동안 두 나라 간의 의견차이로 팽팽한 줄다리기만 할 뿐, 늘 제자리걸음인 상태였다. 외교부에서 나서보기도 하고 당시 한국정신문화 연구원 원장이던 한상진 교수를 민간인 협상 대표로 세워 보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꼿꼿한 콧대를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2009년 주 프랑스 대사로 박홍신 대사가 임명되면서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열정과 끈기, 인내심 있는 설득으로 희망의 빛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2011년 8월 '145년 만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게 된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의궤 문제를 그대로 방치한 채 협상 자체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다....... 재임 기간 중 어떻게 해서든 양국 산 협상을 재개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프랑스로 부임했다....... 한국으로부터 어떤 문화재를 대가로 받는 대신에 한국 국민들의 영원한 사의를 받아라! - 박홍신 주 프랑스 대사 (본문에서)

 

1993년 양국 대통령 간에 합의된 대전제인 '교류와 대여'의 원칙을 내세우며 의궤 맞교환 방안에서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관례도 없거니와 그 배후에 프랑스국립도서관 책임자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반환이 아닌 대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프랑스 국내법을 우회하면서 우리 땅에 데려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었다고 한다.

 

책 속에는 협상의 현장에서 외교부 실무자로서 겪은 위협, 좌절, 갈등, 위기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재를 찾으려는 국민들의 관심, 정부의 노력, 지도자의 관심이 모여 힘으로 작용함을 느끼게 된다.

장기 대여라는 형식이어서 아쉽지만 노력한 모든 분들, 특히 고인이 된 박병선 박사와 저자, 외교부 담당자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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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직지>는 프랑스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이것은 또 언제 반환이 될지.....

기록으로는 구한 말 주한 프랑스 공사가 지방 시찰을 갔다가 우연히 구입한 <직지>를 나중에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자신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을 왜 구입한 걸까. 비록 약탈이 아닌 구입의 형식을 띠고 있기에 프랑스의 순순한 반환이 아니면 어려울텐데....

국민들이 촛불집회를 하면 통하려나......

 

실제로 박물관 담당자들은 외규장각 의궤도 중국의 문화재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남의 나라 국보급 문화재에 대한 안목은 있으나 남의 나라에 대한 배려는 없는 프랑스인들......

자신들은 필요도 없는 것을 왜 가져가는지..... 제국주의적인 근성 같다.

 

 

만약 한국이 경제력이나 국제적인 위치가 예전 그대로였다면 협상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힘이 있어야 우리의 것도 찾을 수 있는구나 싶어서 씁쓸하다.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재를 생각해 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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