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기억도 가물가물한 20년 전의 사람이 편지를 보냈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 편지가 일상을 흔들며 치유의 길로 인도했다면…….

그 길 위에 가려진 추억의 편린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면…….

 

 

 

한 통의 편지가 모든 걸 바꿔 놓았다. 45년간 다니던 양조회사를 퇴직한 65세 헤럴드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바꿔 버린 것이다.

 

퀴니 헤네시가 세인트버나딘 요양원에서 보낸 편지에는 그녀가 암으로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양조 회사에 다닐 때 경리과에 있던 퀴니가 마지막 생의 작별인사를 하러 보낸 편지였다.

 

 

해럴드는 20년 전에 알던,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착했던 추억의 동료에게 마지막 위로의 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생각에 잠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옛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면서 우체통을 놓치게 되고 그래서 그는 자꾸만 걷게 된다.

집에서 있을 때는 생각나지도 않던 일들이 한 걸음씩 떼어 놓을 때마다 놀랍게도 살아 돌아오는 기억들…….

 

 

버거를 먹으러 들른 주유소에서 자신의 고모가 암에 걸렸다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약보다는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병을 고친다는 소녀의 말을 듣고 그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희망도 없이 살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늘 구부정한 자세로 살았고 살면서 포기해 버린 것들, 하지 못하고 놓친 것들이 너무 많다고 깨달은 순간 요양원으로 전화를 걸게 된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삶,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존재였던 해럴드의 삶에 꼭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달라지지 않으면, 미치지 않으면 희망도 없는 게 인생인가 보다.

 

 

 

해럴드 프라이가 가는 길이라고 전해 주세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내가 구해 줄 거니까. 나는 계속 걸을 테니, 퀴니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전해 주겠어요? (본문에서)

 

 

 

45년 동안 영업 사원으로 똑같은 일만 성실히 하다가 정년퇴직한 헤럴드 프라이. 오래 전 퀴니가 해럴드의 잘못을 뒤집어 쓴 채 회사를 그만둔 것에 대해 여태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이제 미안하고 고맙다는 못 다한 말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길을 걸으며 퀴니에게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서.

해럴드는 자신의 걸음이 퀴니를 구할 거라고 믿으며 800km를 걸어 퀴니에게 가기로 한 것이다.

노인의 걸음으로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까. 800km를.

시간이 흐르면서 해럴드의 걸음에 박자도 생기고 자신감이 붙는다.

 

 

 

자신이 이런 것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걷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차에서 내려 발을 이용하면 땅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이 보이게 되는지도 몰랐다. (본문에서)

 

 

 

그는 원래 차 있는 데까지만 걷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잊고 살아온 과거들이 걸을 때마다 길모퉁이마다 되살아 나온다. 하나씩 꺼내 맞춰보는 잃어버린 퍼즐조각들.....

 

 

어린 시절의 내성적인 모습, 술주정뱅이 아버지, 어느 날 뉴질랜드로 떠나버린 어머니, 머리좋고 잘 생긴 아들의 죽음, 아내와의 만남에서 지금의 냉랭한 집안분위기, 퀴니의 친절까지 ...

 

외면하고 살았던 자신을 만나고,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퍼즐조각을 맞추어 가다가 같이 걸을 사람들을 만나고 .....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가 남부 킹스브리지에서 북부 버픽어폰트위드까지 간다는 말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응원해주기도 하고 동참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 과거가 있지요. 이랬으면 어떨까 하고, 또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아쉬워하는 게 있단 말이죠. 행운을 빌겠어요. 그 여자를 찾기를 바라요. (본문에서)

 

 

돌아서지 않았던, 멈추지 않았던 해럴드의 걸음이 퀴니에게도 마음을 전하게 되고, 아내와도 화해하게 된다.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걸었던 남부 킹스브릿지에서 북부 버윅어폰트위드까지 1000km은 그대로 걷기 여행이 되고 순례여행이 되었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걸으면서 깨우치는 삶이 아닐까.

걷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지도 모른다.

화해와 치유를 위한 제일 빠른 방법인지도 모른다.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은 홀가분해지고 상쾌해지는 치유의 걷기여행이다.

 

 

 

87일간의 걷기 여행은 87년의 삶을 되돌아보는 회고록 같다.

자신의 깊은 속내를 끄집어내놓는 참회록 같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처럼 해럴드의 순례도 치유와 평안, 용서와 화해가 있는 길 걷기다.

그래서 해럴드 프라이의 걷기는 놀랍고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걷기가 주는 치유의 힘을 잘 보여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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