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1
로버트 J. C. 영 지음, 김용규 옮김 / 현암사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위하여! 각자의 주권을 찾길!

 

 

18, 19세기는 경쟁적으로 세계를 점령하던 유럽 제국들의 식민지 개척의 시대였다. 유럽 제국의 붕괴 이후 많은 국가들이 해방을 이룬 시기를 새로운 역사단계라 하여. 흔히 탈식민주의(脫植民主義), 후식민주의(後植民主義)라고 한다. 탈식민주의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명료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비해 포스트식민주의는 ‘포스트(post)’라는 접두사의 양가적 의미(후기·탈)로 인해 용어의 의미론적 범주가 탈식민주의보다 더 넓다.

 

식민주의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받는 것이고 탈식민주의는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것을 말하며 포스트 식민주의는 모든 식민주의적 잔재와 근성을 벗어나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물질적, 문화적 복지를 누릴 권리를 찾자는 주장이다. 아직도 세계는 유럽에 권력과 경제력, 정치력이 90%이상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탈식민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권력구도는 여전히 그대로인 상태다. 이제는 그런 구도를 벗어나 식민주의를 영원히 청산하고 정리하자는 주장이 포스트식민주의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의 저자 로버트 J. C. 영.

그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의 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하위주체들의 민중적 저항과 이산 난민들의 의분에 찬 모습, 희생과 고통을 감당하면서도 독립을 구하는 지속적인 구체적인 정치운동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식민지 시절을 살아 온 우리도 세계중심에서 벗어나 늘 주변국 신세였다. 부당함과 억울함을 알면서도 세계질서의 논리에, 강대국들의 힘에 억눌려 발언다운 발언을 해 본적이 없을 정도다, 이제 경제력이 부각되면서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간 듯하지만 사실은 열강들의 힘의 논리에 샌드위치 같은 역할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세계에는 아직도 식민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곳도 있고 겉으로는 식민주의를 청산했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그 잔재가 남아 있는 지역도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아일랜드와 영국, 한국과 일본, 중국과 티베트, 아프리카와 유럽들......

 

 

1949년에 중국에 침략당한 티베트. 조국을 찾기 위해 분신하는 승려들이나 일반 국민들을 보고 있으면 세계는 약육강식임을 절실히 느낀다. 분명 주인인 티베트인들에게 돌려 줘야 할 그들의 땅인데....

우리의 독도와 대마도 문제, 조선족과 재일동포의 문제도 피식민지 시절과 연속선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서발턴 (하위 주체) 즉. 수탈당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일어나 변혁을 이루어 가는 아래로 부터의 반격으로 보고 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서발턴이라는 관점이다. 지속적인 난민 상태인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

 

나의 아들이 나무에 올라 무화과나무를 발견할 때마다

금발의 대영제국신사는 위험에 처하게 되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계속해서 가장 소망했던 것은

그들 없이 우리 자신의 독립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디크 아마드 (본문 중에서)

 

포스트식민 페미니즘은 포스트식민지에서의 사회적 억압이든 구식민 종주국에서의 사회적 억압이든, 포스트식민적 환경에서 여성이 처한 조건이 남성보다 더 불안하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그리고 관심분야도 개인을 벗어나 사회 공동체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사회정치적 운동을 할 때나, 법과 교육의 현장에서 운동을 벌일 때 남성보다 더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마도 여성들의 모성본능이 사회적이거나 생태적인 문제에 쏠리게 하지 않았을까.

 

어떤 세계는 부유하고 어떤 세계는 가난하다.

오늘날 세계에는 2000만 명의 난민과 자국 내의 실향민들이 존재한다.

세계 인구의 나머지는 가난에서 부유함에 이르는

길게 늘어진 스펙트럼의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다.

세계의 국민국가들은 불평등, 자원과 상품에 대한 불공정한 접근을

제도화하는 거대한 체제를 구축했다.

세계의 모든 국가가 미국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원을 소비한다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본문 중에서)

 

식민주의란 타인에 대한 체계적인 부정이자

타인에게서 인간성의 모든 속성을 부정하는 폭력적인 결정이기 때문에

식민주의는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프란츠 파농 (본문 중에서)

 

 

맞는 말이다. 이전가지 빼앗겼던 주체적인 본래의 권리와 자신의 목소리를 찾자는 주장은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역사의 주체라는 인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위로부터가 안되고 있기에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가 절실하다. 더 세월이 가기 전에 말이다. 이를 위해서 포스트 식민주의 문학의 대두는 반가운 일이다. 의식을 개혁해서라도 필요한 일이기에...

 

대표적으로 인도 출신의 영국 작가 샐먼 루시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작가 V. S. 네이폴, 케냐 출신 작가 제임스 시옹고 응구기 등이 있다. 특히, 프랑스령(領) 마르티니크섬 출신의 평론가이자 혁명가인 프란츠 파농의 《지상의 저주받은 사람들 》(1961)은 토착민의 관점에서 식민지의 경험을 분석하여 작품화하여 제3세계에 진보적 정치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문학들은 모두 제국주의 세력에게 자신들도 동일한 권리가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한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서양인과 비서양인간의 관계, 유럽과 비유럽의 관계, 그 속에서 진행되어온 눈에 보이지 않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뒤집어 제자리에 놓는 것이다. 원래 각자의 주인에게로 돌려 줘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주장을 자세히 들어 보면 그 속에 우리의 목소리도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의 내용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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