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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도피 ㅣ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평점 :
사랑의 도피-소녀와 도마뱀, 그리고 소년
저자는 베른하르트 슐링크다.
<책 읽어주는 남자>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작가가 감정묘사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데 이 소설에서도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a/r/ary68017/20130623_182446_resized[1].jpg)
<사랑의 도피>는 모두 7편의 이야기들이 한데 묶인 소설집이다.
그 중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소녀와 도마뱀>이다.
그림에 얽힌 한 가족사가 어둡고 칙칙하고 슬프다.
소년의 아버지 서재에 걸려있던 그림에 숨겨진 비밀이란 무엇일까.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그 그림을 보며 소년은 성장하고 있는데.....
그 그림에는 소녀와 도마뱀이 있었다. 서로 쳐다보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소녀는 꿈에 취한 듯이 도마뱀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도마뱀은 유리알 같은 멍한 눈을 소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인지 소녀는 묵묵한 모습이었다. 도마뱀 역시 이끼가 낀 바위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소녀는 배를 깔고 상체를 바위에 기댄 채였고, 도마뱀은 머리를 바짝 세우고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었다. (본문 중에서)
그 놈의 유태인 여자애!
소년의 어머니는 그 그림 속 소녀를 보며 그렇게 경멸조를 보냈고. 아버지는 아니라고 반박 했다. 그 그림을 보며 소년은 부모님이 뭔가를 숨기며 조심스러워한다는 걸 직감했지만 부모님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처음엔 소녀아래였던 키가 차츰 소녀와 눈을 마주칠 정도가 되더니 금세 소녀를 내려다보게 되면서 그림 속 소녀와 대화를 하게 된다.
판사였던 아버지가 점점 몰락의 길을 걷다가 돌아가시자, 소년도 그 그림을 들고 집을 떠나게 된다.
이사를 할 때마다 자신의 소중한 보물처럼 그림을 다루며, 소녀와 도마뱀과 소년은 그렇게 함께한다. 그림과 함께 있을 때에만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사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그림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가고..... 도대체 누가 그렸을까.
어린 소녀 속에 숨겨진 성숙한 여인의 열정과 유혹이 담긴 아이러니한 미스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알게 된 르네 발만.
아버지가 스트라스 군법회의의 재판관일 때 자신이 묶고 있던 집 사람들이 위조 신분증을 지닌 유대인임을 알고 그들을 도와준 감사표시로 그림을 선물로 받았다는 엄마의 설명은 왠지 시원치 않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비밀로 했던 그 그림은 진짜 발만의 그림이었다. 발만부부가 가지고 도망치려한 그림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이 유대인은 완벽한 붓질로 독일의 기업가를 자본주의의 탕아로 그리고, 독일의 소녀를 그의 음탕한 창녀로 묘사할 줄 안다. 이 유대인의 그림에서는 추잡한 것과 마르크시즘에 토대를 둔 계급투쟁의 성향이 함께 나타난다.(본문 중에서)
르네 발만의 원래 그림에는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커다란 도마뱀이고 바위 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것은 작은 소녀였다. 자신의 그림과 반대되는 발만의 <소녀와 도마뱀>. 자신의 그림 뒤에는 분명 발만의 사인이 있는데.....
아버지의 과거에 숨겨진 어둠을 발견한 소년의 마음은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지나간 과거를 돌이킬 수만 있다면.... 소녀의 고통은 없었을 텐데...부부로서 살아왔지만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한 어머니의 상처는 또 어쩌란 말인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던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리도 냉정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고통 속에 헤매다 결국 그림을 불태우게 되고 마지막 짧은 순간에 그림 속에 숨겨진, 르네 달만이 숨기고 있다가 갖고 도망치려 했던 그 그림을 보게 된다.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a/r/ary68017/20130623_182337_resized[2].jpg)
흘러간 과거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될까.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란 어떤 것일까.
드러나지 않으면 거짓이 진실이 되기도 하고, 진실이 거짓이 되기도 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 소설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인정은 하지만 법적 책임은 피하고 싶은 아버지의 내면처럼 이중적인 인간의 마음들도 잘 표현한 것 같고......시대의 광기가 가져온 희생도 가슴 아프다.
이 소설은 우리 내면에 숨겨진 과거의 어두운 면을, 그로인해 받는 가족들의 고통을 잘 포착해서 섬세하게 그렸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엄연한 법인데....불태운다고 사라지는 그림이 아닌데...역사 앞에 선 진실을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