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진수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6
플라톤 지음, 원창화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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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현자의 논리~~

 

 

 

너 자신을 알라.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말이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소크라테스.

그의 최후의 변론을 읽으며 지혜 있는 자의 논리, 소신 있는 자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그의 마지막 재판에서의 변론을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기록한 것이다. 

플라톤은 스승의 변론과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진리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애를 느끼지 않았을까. 

 

 

 

 

이 책의 저자는 플라톤이다.

기원전 427년경 그리스에서 태어난 철학자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한때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소크라테스가 정치적인 오해로 처형을 당하자 큰 충격을 받고 당시의 정치 체계에 회의를 품게 된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자주 외국 여행길에 오르기도 하면서 정치보다는 교육에 뜻을 두며 철학 중심의 종합대학인 아카데미아를 창설한다.

플라톤의 저서들은 거의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국가>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파이돈> <크리톤> <프로타고라스> 등에서 모두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의 첫 시작은 "아테네 시민 여러분."이다

관례적인 호칭인 '재판관 여러분'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의 굳건한 의지와 몽매한 자들에 대한 훈계임을 예감하게 한다.

이 글은 70세 노인의 유죄에 대한 변명.....일종의 최후 진술인 셈인데.... 읽고 있노라면 기력이 쇠한 노인의 변명이 전혀 아니다. 500인의 배심원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혈기 왕성한 청춘의 목소리 같다.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한 논리 정연함, 죽음 앞에 당당하고 권력 앞에 떳떳한 자의 용기, 지혜로운 자의 훈계란 이런 것임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다. 시공을 초월한 감동이란 이런 것인가.....

 

 

이 변론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500명의 배심원 앞에서 자기에게 제기된 혐의에 대해 변론한 부분과 

유무죄에 대한 평결이 끝난 후 형량을 결정하기 위한 변론, 

그리고 사형이 결정된 후 마지막 했던 말들이다. 

 

 

그 당시의 부유한 정치가인 아니토스 일파와 멜레토스가 작성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소장.

 

소크라테스는 죄인이다.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령 따위를 믿고 있다.

 

 

자신에 대한 지도층, 권력층의 모함과 오해, 뿌리 깊은 편견은 터무니없지만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해 억울하다는 변명을 하지 않는다. 억울하다고 호소하기 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잘못 알고 있고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있는지를 일깨우고 있다. 고소장의 내용들이 잘못 되었음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풀어주고 따진다. 논리의 반전에 그를 고소한 자들과 유죄에 투표한 자들은 뜨끔했을 것이다.

 

그는 애시 당초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변명을 하기보다는 재판의 자리까지 오게 된 것도 신의 뜻으로 여기며 성실히 이행한다. 권력에 눈이 어둡고 진리를 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시민들을  호통 칠 수 있는 마지막 자리임을 알아서였을까. 긴 시간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논리의 허점이 없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란 다름 아닌 여러분 중에 노인이건 젊은이건 누구에게나

내 힘이 미치는 데까지 훌륭한 정신을 가지도록 열심히 마음을 써야 하고,

신체나 재물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을 쌓아 올려도 거기서 훌륭한 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물 또는 사람에게 좋은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공사 간에

훌륭한 정신에서 생긴다고

여러분들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법보다 신의 사명이 더 상위의 법이라는 입장이었나 보다.

그는 이번 기회가 신의 뜻임을 여러 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말이 깨어 있도록 따끔한 훈계를 하는 말 등의 등에 같은 존재임을, 그래서 시민을 깨우치고 나무라고 타이르라고 신이 보낸 인물임을 강조한다. 그러니 자신이 이대로 죽는다면 그것은 시민들의 손해요, 그의 죽음 이후에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죽음을 면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비굴함을 면하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빨리 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은 신이 보낸 사람이므로 그의 사형이야말로 시민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악과 부정에 가까이 가게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나서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부탁의 말을 남긴다. 

 

"만약 여러분들 생각에,

내 자식들이 장성해서 덕성보다도 재산이나 그 밖의 것에 더 마음을 쓰는 듯 하거든,

내가 여러분을 괴롭힌 것과 똑같이 그 애들을 괴롭혀서 보복을 해주기 바랍니다.

또 그 애들이 만약 아무것도 아니면서 마치 굉장한 사람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거든,

내가 여러분을 나무랐듯이,

'마음을 써야 할 데에 마음을 쓰지 않고 또 아무 값어치도 없으면서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그들을 꾸짖어 주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해준다면,

나도 내 자식들도 여러분에게서 정당한 대접을 받은 셈이 될 것입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군요.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중에 어는 편이 더욱 좋은 일을 만날지 그건 신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30표 차이로 그는 죽음을 맞지만 정의를 어기면서까지 굽실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구속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법률과 정의에 편에 서서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배심원들과 재판관들에게 호통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도덕성을 높이도록 이야기했을 뿐이다. 자신을 잘 알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이야기 했을 뿐이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진리를 설파했을 뿐이다.

 

누가 죄인일까.

우리는 그 당시, 그 자리에 없었지만 분명히 판단할 수 있다.

지금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호통치고 있다.

지혜가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라고, 부정을 보고도 권력에 빌붙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혼자 살기 위해 무고한 자에게 덤터기 씌우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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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덕 2013-06-01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원전에 살던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아직도 쩌렁쩌렁 울리는 듯 해요. 철학이 있는 현자의 힘있는 항변에 속이 후련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네요. 예전에는 읽다 말았던 책인데 지금은 가슴에 와 닿네요..... 10년 뒤에 읽으면 또 어떤 느낌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