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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수인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주원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천국의 수인-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
항상 책을 읽고 나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곤 한다.
어쩌면 그것을 즐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이토록 긴 여운을 남기는 소설은 아마도 오래간만 인 듯하다.
저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다.
이 소설만의 특유한 기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선과 악의 구도가 명확하면서도 예측불허의 반전이 곳곳에 지뢰처럼 숨겨져 있다. 추리적 서사구조가 매우 정밀한 느낌이다.
배신, 복수, 우정, 그리움, 은혜, 약속 등의 이야기에 모험과 추리가 보태진 소설이다. 읽을수록 태풍 급의 흡입력이랄까.
기대 이상이다.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도 따뜻함과 포근함이 흐르고, 정의와 의리가 빛을 발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을 전후한 바르셀로나이다.
그 어둠의 시대에 영혼과 이름과 사랑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구슬프게 전개된다.
바르셀로나에서 '셈페레와 아들' 이란 서점을 운영하는 셈페레와 그의 아들 다니엘.
서점 직원으로는 페르민 아저씨가 있다.
불황 탓인지, 외부의 알력 탓인지 서점의 재정난은 갈수록 위태로워진다.
다행히도 베아와 결혼한 다니엘에겐 훌리안이라는 귀여운 갓난아기가 있고 페르민은 곧 결혼할 예정이라서 어느 때보다 마음은 행복으로 분주하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험악한 표정의 사나이가 찾아오면서 긴장과 불안, 증오와 슬픔에 휩싸이는 다니엘과 페르민.
20년 전의 이야기가 추억이 아니라 충격과 상처의 역사이자 가족사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항상 열쇠로 채워져 있지"(22쪽)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거짓이요, 돈을 제외한 모든 것이."(22쪽)
열쇠와 돈을 강조하는 의족에 의수인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지만 범죄의 냄새가 나는 그의 오만한 태도는 나를 아마추어 탐정으로 만들어 놓았다. (28쪽)
페르민이 겪은 기분 더러운 시기는 언제일까. 무엇이 그의 미소를 앗아 간 걸까.
다니엘의 계속 되는 재촉에 드디어 이야기를 풀어 놓는 페르민.
20년 전 악명 높은 몬주익 교도소 13호 감방에 페르민 로메로 데 토레스가 들어가고, 다리가 없는 살가도도 들어온다.
그의 맞은편에는 작가인 다비드 마르틴, 12호에는 닥터 라몬 사나우하가 있다.
수상한 시절의 죄목이란 어찌 보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찮은 이유들이거나 억지 죄목일 때가 많다.
죄목 같지 않은 죄목이 통하던 암흑의 시대.
아무런 죄 없이 감옥에 들어온 수인들.
수인들은 다비드 마르틴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고 그에게 '천국의 수인' 이란 별명을 붙여 주게 된다.
어느 날 교도소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 낸 마르틴.
힌트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죽지 않고서는 살아 나갈 수 없는 몬주익 교도소에서 '죽음을 통한 도주 계획' 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페르민이 감방동료인 살가도를 죽이고 서로 옷을 바꿔 입은 채 시체 포대에 들어가 위장을 하면 탈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살가도의 보물 열쇠를 훔쳐서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공동묘지에 내던져 진 포대 속의 페르민. 그는 죽을힘을 다해 빈민촌으로 스며든다.
춥고 굶주리고 외로운 그에겐 오직 지켜야 할 약속만이 그의 하루를 지탱하게 한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탈출한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아는 이 없고 거지처럼 살고 있는 그가 하루에도 수십 번 죽고 싶었지만 죽을 수 없게 한 약속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비드 마르틴이 사랑한 이사벨라와 그의 아들 셈페레 다니엘을 지켜 주는 것.
그러나 이사벨라는 교도소장 발스의 독살에 의해 콜레라로 사망하게 되고 진실은 침묵 속에 고이 잠들게 된다.
침묵을 지켜야만 살아 갈 수 있던 시절.
이사벨라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페르민은 묵묵히 다니엘의 수호천사가 되어 그의 친구가 되어 준다.
다시 찾아 온 살가도에서 보물열쇠를 건네준다. 그를 추적한 결과 보물은 이미 누군가가 빼돌린 상태…….
도대체 누가 그의 보물을 훔쳐갔을까. 혹시 발스?
야망과 욕망이 큰 교도소 소장인 마우리우스 발스.
죄수 마르틴 의 글 쓰는 재능을 탐냈던 그는 마르틴의 필력으로 문인의 명성을 얻고자 애태운다.
어찌됐던 이후에 교도소장 발스는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고 권위 있고 지적인 권력가이자 재력가가 되어 간다.
'잊힌 책들의 묘지'를 찾아 마르틴의 흔적과 그의 편지를 전해 받은 다니엘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르틴이 멀리서 지켜주고 있음을 느낀다.
또 하나의 수호천사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닥터 사나우하는 마르틴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람들이 모여 앉아 마르틴에게 '천국의 수인' 이라는 별명을 붙이며 …….(126쪽)
그래서 세상에 아는 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이름 없는 거지가 되어, 모두가 미치광이로 오해하는 사람이 되어 거리로 돌아왔지요.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약속 때문에......(286쪽)
서점을 둘러싼 이야기, 책에 얽힌 이야기와 글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촘촘히 얽혀 있는데도 전혀 난잡한 느낌이 아니라 묘하다는 느낌이다.
'잊힌 책들의 묘지' 사부작 연작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인 <천국의 수인> 은 그 이전에 나온 <바람의 그림자>, <천사의 게임> 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데 얼른 보고 싶다.
시폰의 글에는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아서 독자들은 그의 책을 읽은 후에 바르셀로나로의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문학의 위력이란…….
나도 그곳으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