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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구경꾼들-나도 그래요. 라며 끼어들게 만드는 이야기.
이 책을 통해 윤성희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올해의 예술상을 받은 작가의 이력에 내심 기대를 하면서 책을 펼치는데 만만치 않은 이야기 솜씨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이 책의 내용은 콜라처럼 톡 쏘는 달콤한 맛은 아니어도 막걸리같이 거칠고 구수하며 알싸한 맛을 지닌 이웃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거봐,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잖아.(108쪽)
평범한 일상 속에 들풀처럼 일어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은 이야기, 비바람에 쓰러져 꽃대 꺾인 이야기, 그러다 봄이 되면 새로 돋고 움트는 자연처럼 다시 순환하는 끝없는 이야기들이 책 속에는 가득하다. 결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구경하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공감 가는 이야기들이다.
누군가를 지켜보거나 훔쳐보는 일은 흥미롭기도 하고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 때면 때때로 묘한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남의 이야기로 수다를 떠나 보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구경꾼이 되기도 하고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나 보다.
그래. 사람 사는 건 어디에나 다 똑같지. 지구 어디에선가 나처럼 살거나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일부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묘한 호기심과 안도감이 든다.
우린 시선을 받거나 시선을 주거나 하면서 늘 그런 관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소소한 나의 일상이 남에게 일어나기도 하고 공감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의 3대 가족의 일상을 쭉 구경하다보니 불쑥불쑥 내 이야기가 하고 싶기도 하다. 나도 그래요 라든가, 그럴 땐 이렇게 해보시지 라든가, 인간이 참 용기 있네요 라든가, 허공에 대고 지껄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입 꼬리가 올라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나의 참견 본능을 일깨운 소설이다.
물론 나는 3대가족으로 살아 본 적이 없다. 우연히 도로를 달리다가 재수 없이 사고가 나거나 옥상에서 떨어지는 사람에 맞아 황당하게 죽은 가족도 없고 신문기사 하나 달랑 들고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냅다 비행기를 타고 기사의 주인공을 찾아가는 무모함도 없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살지도 않거니와 하고 싶은 대로 용기 있게 나서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그래요. 라며 끼어들고 싶어진다.
주인공가족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삼촌, 작은 삼촌, 고모, 나, 따로 사시는 외할머니까지 요즈음 보기 힘든 대가족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호기심이 많고 주관이 뚜렷하다. 궁금하면 물어 볼 수 있는 용기, 일상을 접고 과감히 떠날 용기를 지니고 있어서 때론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때론 유쾌, 상쾌, 통쾌한 스릴을 느끼게 하기도 하며 사소한 말 한마디로 배꼽잡고 웃게 만들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술술 해대는 조금은 엉뚱한 가족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이웃에 사는 누군가의 모습, 아니 나의 모습과 겹쳐질 때가 있어서 나도 그래요 라고 속삭이게 만든다.
사고나 죽음을 대하는 이들 가족들의 자세는 슬픔 속에서도 의연하다. 사는 건 어디나 다 똑같고 명대로 살다 가는 거니까 억울할 것도 없다는 듯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발버둥 쳐봤자 거기가 거기임을 체득한 것일까? 주어진 대로, 세월 가는 대로, 엮이는 대로 사는 인생임을,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은 인생임을 통달한 가족들 같다.
큰 삼촌은 처음으로 한 가족여행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그 병원의 옥상에서 떨어지는 여자에 깔려 죽는다. 그 사고 이후로 할머니는 식탁에 큰 삼촌의 밥그릇을 여전히 차린다. 기억하면 살아있는 듯 느껴지기 때문일까. 식구들은 큰 삼촌의 물건들을 나눠 가지며 추억한다. 할아버지는 강간범과 싸우다가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다. 그 소식이 뉴스에 나가고 많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지만 결국은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간다. 큰 삼촌의 죽음 이후로 아버지는 회사에 사표를 낸다. 부모님은 신문기사에 난 주인공을 찾아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신문에 실린 기사는 생활고에 비관한 미혼모가 삼층 건물에서 뛰어 내렸고 때마침 그 아래를 지나던 남자를 덮쳤는데도 둘 다 살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후 몇 번의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는 그때 찍은 사진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엮어 책을 출간하게 되고 전국사인회를 가지기도 한다. 삼십 년 동안 혼자 돌로 집을 짓고 있는 남자를 찾아 갔다가 그 돌무더기가 무너지는 바람에 깔려 죽는 부모님. 식구의 수가 점점 줄어가는 이야기에는 일상 속의 코믹함과 불행이, 기적과 우연이 교차하며 일어난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행과 불행이 겹쳐서 일어나기도 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중요한 순간에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과연 몇 가지가 될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겉으로 말하는 나와 속으로 말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그러게 집 떠나면 고생인 걸요. 앞만 보지 마요. 때론 옆도, 뒤도, 하늘도, 땅도 쳐다보며 살아야 해요. 사고는 예고가 없답니다. 평소의 행동패턴이 사고를 유발한다고 그러잖아요. 성추행 당하던 소녀를 지키려던 할아버지의 용기는 멋져요. 성추행이나 성 폭행 범은 엄벌로 다스려야 해요. 그런데 첨성대 같은 집은 왜 지어요. 에스키모처럼 돔형으로 짓든지 장군총처럼 짓지. 돌 사이에 시멘트로 접착하시지 않고. 오초 본드 그거 좋아요. 튼튼한 집이 되려면 안전점검은 필수죠. 여러분 세상구경 많이 하고 싶으면 외할머니처럼 족발 집을 해 봐요.
할머니, 저는 삼식 세끼가 주는 즐거움에 살아요. 간식은 물론 티타임도 기다려지죠. 물론 요리하는 즐거움도 있고요. 가족들이 먹는 모습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걸요. 아직 그 연세까지 살아보지 않아서 일까요?
이렇게 수런수런 거리는 나의 모습이 내 진짜 모습인가 보다.
작가의 맛깔 나는 이야기 솜씨에 빨려들 듯 참견하고 있는 나를 보며 속이 후련해짐을 느낀다.
작가만의 유머감각에 헤헤거리며 웃음을 흘리기도 하고 슬픈 죽음 앞에 애달파 하기도 한다. 어느 날 중요한 순간에 고민스런 일이 생긴다면 한 번 더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 인상 깊은 구절*
독자들을 만나면서 부모님은 여행을 하는 동안 보았던 기적 같은 일들이 실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는 먼 곳에만 있지 않았다.(236쪽)
음식 솜씨 없는 할머니는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하는 인간이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8쪽)
내게 부채질을 하면서 할머니는 속삭였다. '누가 뭐래도 니 맘대로 살아야 한다.'(36쪽)
네가 여기 있는 걸 니 엄마가 아이? 알면 여행이고 모르면 가출이야.(......) 며칠만 더 이러고 있다가 집에 갈 거예요. 집에 돌아갈 걸 알고 있으면 여행이에요.(......) 가출이면 아침밥을 사주려고 했는데 여행이니 네가 알아서 사 먹어라. 외할머니는 소녀의 침낭에 묻은 모래를 털어 주면서 말했다. (67쪽)
나중에 커서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읽어 보렴. 그러면 네가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 있을 거야.(93쪽)
어쩌면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181쪽)
어머니는 해외토픽에 나오는 황당한 죽음을 보면서 웃긴 죽음이라는 것이 실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늘 생각했다. 슬픈 죽음이란 거의 비슷비슷한 사연을 담고 있다. 하지만 웃긴 죽음이란 모두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돌고 돌게 될 것이다.(249-250쪽)
어머니가 어깨에 멍이 들 정도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지구를 헤맬 동안 외할머니는 주방 간이의자에 앉아서 어머니가 보았던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189쪽)
전학생은 꽃다발을 사가지고 문병을 왔다. 어울리지 않게 이게 무슨 짓이냐. 내 말에 전학생이 일 년에 한 번씩은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야 심심하지 않는 법이라고 말을 했다. (3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