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향전.숙영낭자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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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전-3D 입체 로맨스 판타지 소설

 

화설이라.

조선 후기 가장 널리 읽힌 애정소설이라는 문구에 끌린 <숙향전>.

로맨스는 시대를 초월하고 세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인기주제가 아니던가. 평소 애정소설을 사랑하는 만큼 타임머신을 탄 기분으로 사백여 년 전 이 땅을 살던 여인들의 모습을 상상체험 해보자는 심정으로 펼쳐 들었다.

 

<숙향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만 3D영화 <아바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이 소설에서는 야광충 등 신기한 동식물들, 시공을 넘나드는 거리이동, 각종 생물들의 신기에 가까운 재주들, 신선이 인간으로 변신했다가 다시 신선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다반사다. 청학 한 쌍이 어린 숙향을 날개로 덮어주고 대추를 물어주며 추위와 허기를 달래준다거나, 파랑새 한 마리가 준 꽃을 먹었더니 천상에서의 경험이 되살아나 일순간 숙향은 선녀의 감정으로 되돌아가고, 사슴을 타고 먼 거리를 달리고 연엽주를 타고 수만리 길을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이동 한다.

하늘의 선경은 또 어떤가. 오색구름이 떠다니고 용과 봉황을 탄 신선들, 옥수레가 다니고 온갖 기이한 향내가 진동한다. 숙향이 이선과 결혼할 때의 장면이나 천태산 마고선녀가 파랑새로 변신했다가 할미로 돌아오는 장면, 숙향이 정렬부인이 되어 행차할 때 거느리는 엄청난 수의 시녀들은 거대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상상을 초월한다.

 

구름 같은 차일이 하늘 높이 솟아있고 안개 같은 병풍이 겹겹이 둘려 있었다. 사방에는 장막과 깔개 등이 화려하게 빛났으며, 색색의 그림으로 수놓은 휘장과 기구 등 온갖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좌우에 서 있는 손님들 역시 모두 요지연에서 본 선관과 선녀 같았다. …….(97-98쪽)

할미가 입고 있던 적삼을 벗어주고 두어 걸음 걷더니, 문득 간 곳 없더라.(113쪽)

상서가 각종 약을 가지고 황태후에게 다가가 먼저 옥가락지를 시신 위에 얹어두니, 얼마 뒤 살빛이 완연히 되살아났다. 또 귀에 벽이용을 넣고 눈을 계안주로 씻으니, 눈빛이 빛나면서 몸의 상태가 예전같이 되돌아왔다. 잠시 후 황태후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시니, 자던 사람이 태연하게 일어나 앉는 것 같았다. 이어 개언초를 드시게 하니, 마침내 말씀도 물 흐르듯이 하셨다.(204쪽)

 

로맨스에 판타지의 융합으로 시공을 초월한 이 소설을 조선시대 여인네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지금이야 공상과학이 현실이 되고 있는 시대니까 아마도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 라며 상상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그 시절엔 터무니없는 환상이었을 테니까.

제도와 신분에 속박된 답답한 현실을 잠시라도 벗어나 그 갈증을 해소하고 회포를 풀 수 있는 방법이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꿈, 욕망 등을 상상의 나래 속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었으리라.

 

각설이라.

이 소설은 규모에서 보듯이 인간의 사랑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은 드러내 놓고 남녀상열지사를 얘기하기가 쑥스럽고 발칙한 거라 여기던 시절이 아니던가. 이 소설은 인간으로 환생한 희노애락의 감정을 지닌 신선들의 사랑이야기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보다는 좀 더 기품 있고 의젓하지만 말이다.

천상에서 지은 죄로 인해 인간세상으로 귀양 온 달나라 선녀 숙향이 그 대가로 다섯 번의 액을 치른 후에야 사랑하는 이선을 만나고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천상으로 간다는 선녀와 신선들의 이야기.

잠시 인간의 몸을 빌리고 인간의 땅을 이용할 뿐이다. 그래서 이선이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재주가 남다른 귀인임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고 숙향이 태어날 때의 범상치 않는 기운과 그녀의 신기한 능력들을 그려주고 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사랑은 쉽지 않은가 보다. 이선이 운명의 여인 숙향을 찾기까지 그녀가 살아온 이력을 거쳐 가게 된다. 말로 듣는 것보다 상대방이 겪은 고초를 체험하게 해서 숙향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게 하기위한 장치 같아서 흥미롭다. 사랑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여럿 고비가 있고 그런 연후에 더욱 튼튼한 관계가 지어지는 것처럼, 비 온 뒤에 더욱 굳어지는 땅의 진리처럼. 또한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신선들의 희롱도 폭소를 자아내고 숙향과 이선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와주는 하늘도 반전이다. 벌은 내리지만 미워하지 않는다는 건가?

 

각설이라.

숙향전에는 세상 만사가 미리 정해 준 운명에 따라 인연을 만나고 살아가던 시절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운명이 프로그램으로 입력된 거라서 우연도 인연이 되고 필연이 된다고 믿던 시절. 그래서 노력하며 사는 것도 숙명임을 말하고 있다.

숙향과 혼사를 정한 뒤 양왕의 딸 설중매의 청혼에 양다리를 걸치기 싫어 요리조리 피하는 이선의 모습은 든든하면서도 귀엽다.

 

숙향전에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고전소설의 단골 주제들이 보인다. 아마도 유교사회였기에 정의에 대한 시대적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리라.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은혜를 갚는 것은 기본 예의임을 말하고 있다.

늙은 도적이 반야산에서 숙향을 구해 준 것을 나중에 정렬부인이 된 숙향이 보답한다거나 김전이 반하수를 지날 때 어부들의 손에서 구해준 거북이 김전과 그 가족을 수차례 위기에서 구해 준다는 내용, 숙향이 장승상 댁에 있을 때 종 사향의 음모로 쫓겨나게 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죽음에 이르는 사향 등 은혜 갚는 내용, 잘못에 대한 응징이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어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그 과정은 절대 녹록치 않은 역경들이 가득해서 현실의 힘듦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이겨내라는 메시지 같다.

 

조선시대에 나온 이 소설이 현대판 3D영화에 못지않게 장대한 스케일과 인간세상과 천상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판타지, 달콤한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들에게 주문을 거는 꿈결 같은 마술이 가득한 이야기라서 놀랍다.

 

*인상 깊은 구절

부부의 인연은 하늘이 정한 것이며, 애정에는 천하고 귀한 것이 없는지라.(107쪽)

할머니의 은혜는 이승에서는 다 갚지 못할 것이니, 저승에 가서라도 꼭 갚겠나이다.(112쪽)

이선이 어진 까닭에 사람마다 절개를 지키는 것이로다.(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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