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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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개성존중 하는 행복한 학교, 영원히 불가능한 무리수일까요?

 

여고시절에 읽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 크눌프…….

늘 틀에 박힌 일상, 정형화된 생각과 목표 속에서 막연히 탈출을 꿈 꿀 뿐 나는 늘 제자리걸음만 하는 용기 없는 학생이었고 도전과 일탈을 겁내던 학생이었으니까. 그래서 책 속 주인공들의 고뇌와 갈등에 동화되어 같이 우울해하기도 했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책 속에서 찾아 낸 명문장들은 나의 지적유희수단이 되었고 화가 이중섭인 양 껌 은박지에 깨알같이 적어서 친구들과 서로 나누기도 했고 한지나 수채화 용지에 거창하게 적어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들어간 대학에서 나는 희망과 꿈을 보기 보단 왠지 모를 싱겁고 밋밋한 대학생활의 허탈함에 헛웃음을 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했다. 그 때는 정보도 없었고 먹고 사느라 모두가 바쁜 시절이라고 쳐도 한 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꿈 꿔야 하나 갈팡질팡했던 기억이 있다.

 

 

아,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애써 왔던가. 무슨 고민을 해 왔고 무슨 미래를 그려 봤던가 .그 고민들을 제대로 해보기나 했던가. 왜 스스로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에 대해 실망했고 아이들을 이끌어 주는 선생님과 부모들의 태도와 방법에 불만을 토로했었다.

 

 

왜 좀 더 희망과 도전을 심어주지 못할까?

왜 여러 길이 있으니 갔다가 돌아와도 된다고 하지 않을까?

왜 가슴이 펄떡일 정도로 뛰는 일을 찾아보라고 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이 없을까? 왜?

 

 

그리고 20 여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읽어 본 수레바퀴 아래서.

예나 지금이나 가슴 깊이 아려오는 먹먹함은 여전하다.

권위주의적인 사회관습이나 획일적인 사회가치, 억압적인 종교, 물질만능의 풍조 앞에 각자의 개성은 상실되고 일탈하는 인격은 존중 받지 못한다는 현실이 헤세가 살던 그 시절 독일이나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음에 놀랍고 통탄스럽다.

 

 

마을의 자랑이고 미래가 창창하던 기품 있고 영리하던 천재소년 한스 기벤라트. 신학교, 튀빙겐 대학입학, 대학졸업 후 교사나 목사의 안정되고 존경받는 생활이 보장된 규격화된 엘리트코스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그였다. 보통의 평범한 시골 범부에 지나지 않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집안의 자랑이자 집안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귀하고 소중한 아들 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사회의 획일적 관습과 가치, 어른들의 욕망에 휩쓸려 자기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며 꽃다운 나이에 어이없이 죽어 갔다. 그가 진짜로 죽은 이유를, 그의 속내를 아무도 모른 채. 신학교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 시를 좋아하던 친구, 자기 주장이 있고 개성이 강하던 친구 헤르만 하일너가 떠나 버린 후 그 헛헛함에 그는 생활의 활력을 잃었다. 그로 인해 무기력과 신경쇠약으로 어렵게 공부해서 입학한 신학교마저 그만 두고 방향감각 잃은 돛단배가 되어 마음의 중심을 못 잡고 무의미한 생활 속에서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기벤라트의 죽음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는 어른들의 탓이 크지 않을까. 마을에서는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가, 학교에서는 복습교사가, 친구 중에서는 헤르만 하일너와 어릴 적 친구 아우구스트가 유일하게 그를 이해해 주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10세~15세가 일생 중 기억력이 가장 왕성하기에 배움의 시기인 것은 맞지만 마을 분위기가, 학교가, 가정이, 친구들이 그에게 공부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이 많은 세상임을 가르쳐줬더라면 어땠을까. 가던 길이 아니면 돌아 올 수도 있음을, 최고가 아니어도 소중한 가치임을 일깨웠더라면 어땠을까.

주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한 뒤 그에게 주어진 달콤한 휴식들에 그제야 은밀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슴이 쿵쿵 뛴다는 말이 왜 이리도 눈물겨운지.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점차 공부에 집중하게 되고 그로 인해 두통과 걱정이 생겼다는 부분에서는 슬픈 전조같아 울적하게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기계견습공의 일을 시작하면서 그래도 적응해 보고자 애쓰는 그의 모습은 백척간두에 서 있는 느낌이었고 꿈과 목표를 상실한 채 마을을 헤매는 모습은 곧 폭발할 것만 같은 시한폭탄을 품에 안은 듯 불안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문득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는 청소년들의 고민과 방황. 나는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 라는 생각에 뜨끔했다. 평소 청소년들과 자주 접하는 생활이기에 더 더욱 나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됐다. 저러지 말아야지, 그러지 말아야 해 라고 수 없이 다짐했다.

청소년과 기성세대와의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스승과 제자의 충돌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 갈등의 차이를 줄일 수는 없는 걸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각자가 다른 환경, 다른 소질들을 지니고 있음을 모두가 이해하고 배려했더라면, 천재적이고 기품 있던 기벤라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수레의 무게로 ,그 속도로 인해 깔릴 수밖에 없는 현실. 전도유망한 한 젊은이가 자신의 꿈이 뭔지도 모른 채, 그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꺾이고 스러져 갔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우리의 아이들이 힘들다고 아우성치며 헉헉대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잠시 쉬었다 가자고 손잡아 줄 여유가 아쉽다. 자신이 끌고 가는 수레가 평지든 언덕이든 독촉하지 말고 어차피 자신의 몫이기에 응당 부모라면 어른이라면 뒤에서 밀어주고 때론 휴식도 주고 방향과 속도를 의논하게 해야 한다.

앞으로 인생 100세, 150세 까지 살지도 모른다. 긴 인생에서 청소년기는 지극히 짧고 소중하다. 스스로 결심하고 가슴 펄떡이며 하는 일, 뜨겁게 즐겁게 희열을 누리며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언제나 주체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주변은 배려와 사랑으로 지원해 준다면 행복하게 자신의 몫을 해 낼 수가 있으니까.

 

 

우리는 말한다. 오늘의 교육이 내일의 희망이라고. 청소년이 미래의 대한민국의 꿈이요 자화상이라고. 그러나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스스로 찾은 꿈도, 스스로 갈구하는 목적도 없이 주입되고 강요된 미래 앞에서 우리의 청소년들은 행복을 그리고 있을까?

 

 

헤르만 헤세 자신의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는 작가의 분신이라고 한다. 그가 소설 속에서 외쳐 되던 개성존중이 지금 이 시대에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오랜 만에 다시 읽어도 감동과 생각이 흘러넘친다.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감동의 여운이 만리향 같은 소설. 시대를 넘나드는 고전의 가치에 절로 고개 숙인다.

 

 

마지막으로 헤르만 헤세가 남긴 말을 나누고 싶다.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을 보고 그를 존중하고 각각의 다른 사람들을 보고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서로가 서로 다른 부분을 인정해주고 서로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배울 수 있다. 하나의 그림에는 수많은 색채가 담겨져 있다. 하나의 색깔로만 칠해진 그림은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색채들이 어울려서 하나의 명작을 만들어 낸다.'

 

 

* 인상 깊은 구절

동정심 많은 복습지도교사 비트리히를 제외하면 그들 중 아무도 소년의 여윈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미소 뒤에 물에 빠져 가라앉는 영혼이 아파하고 있으며, 그 영혼이 두려움과 절망에 차 죽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본문 141쪽

 

그럼, 그래야지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테니까.― 본문 11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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