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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평점 :
'맛'을 보았느냐
생각해보니 내가 기억하는 생강의 맛은 ‘맵다’ 보다 ‘괴롭다’였다. 평소 매운 음식을 즐기는 나였지만 생강이 발산하는 특유의 향은 어쩐지 견디기 힘들었다. 양파보다는 아리고 마늘보다는 시리고 계피보다는 저린 香...꼭 알 수 없는 어떤 생물의 체취를 연상케 했달까. 그러니 생강차는 물론이고 일식을 먹을 때 곁들여 나오는 생강초절임이나 생강 센베이 과자 모두 부러 선택할 음식은 아니었다. 임신하여 한참 입덧으로 고생할 때 생강이 좋다는 말에 억지로 코를 막고 두어 번 생강차를 훌쩍 거려 보았지만 더 역겨워 크게 후회한 적도 있다. 손에 배이게 되는 잔향이 싫어 나는 육류와 생선요리에도 생강만은 양념에 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는 생강이라 해도 김치양념에 스며들어 다른 향이 더 앞서게 되는 음식정도였다. 음식에도 궁합이 있듯 그럭저럭 나와 생강은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일까. 주변에서 양파나 마늘, 계피가 좋다는 사람은 보았어도 생강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나 역시 웰빙음식으로 생강이 몸에 좋다는 정보는 익히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굳이 생강으로 내 피를 ‘정화’하고 몸의 세포를 ‘살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덮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강>은 참 ‘좋은 소설’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재미나거나 감동적이거나 놀랍다는 느낌에 앞서 맛과는 달리 몸에 좋다는 생강처럼 결국은 좋은 소설이라는 막연한 감별을 내린 것이다. 또 하나 작가도 언급했듯이 생강처럼 ‘달고 쓰고 맵고 아린’ 맛이 우리네 인생의 맛이라고 한다면 나는 생강맛 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여지껏 인생을 아는 체 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함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 <생강>은, 맛은 힘들었지만 몸에는 좋을 것 같은 내가 몰랐던 인생의 맛 하나를 친절히 가르쳐준 소설이라 할까.
인생의 맛을 하나 안다는 건 어떤 비밀을 알고 만다는 것인데 그 과정은 대개가 즐겁지가 않았던 듯하다. 어렸을 적 커피 자판기에 표시된 블랙커피가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밀크커피와 설탕커피는 알 것 같았는데 블랙커피는 무슨 맛일까. ‘블랙’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을 땐 모르는 대로 알고 나선 아는 대로 그 맛과 향은 참 근사해보였다. 어느 날 동전 하나를 넣고 친구들과 호기심에 뽑아 마셔본 블랙커피, 도대체 왜 어른들은 이렇게 쓰고 독한 맛의 블랙이라는 커피를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자판기가 분명 고장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평생 가도 다시 마시게 될 것 같지 않았던 블랙커피를 이제 하루라도 빼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돌이켜보니 그 후로 블랙커피의 참맛을 알게 되기까지 얼추 이십년이 흘렀지 싶다. 그 음식만이 가진 고유의 맛을 알고 좋아하게 된다는 건 결국 그동안 따끔한 세상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세상 속엔 세월이 있고 사람이 사건이 있었기에 맛이 더 깊어진 것은 아닐까. 이 소설도 그랬다. 세월은 무심했고 사람은 무정했고 사건은 무모해보였다.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보아도 아프기 짝이 없어 자꾸 한숨이 비어지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지난 세월, 떠들썩하게 벌어진 사건과 공포로 존재하던 실존인물위에 작가의 촘촘한 허구가 더해진 그야말로 깊고 쓴 맛의 작품이다. 소설에 언급된 ‘턱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1987)은 한창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우리 세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가서 절대로 데모를 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심어준 공포의 사건이었다. 박종철 사망후 이어지는 규탄대회에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죽음은 6월 항쟁을 이끌었고 당시 자고 일어나면 분신하는 대학생이 천지였던 것으로 나는 그 시절을 또렷이 기억한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져 있던 우리는 ‘데모는 곧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대학에 입학했고 곧이어 같은 또래인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사법경찰 백골단에 맞아 죽는 끔찍한 사건(1991)이 발생했다.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운나쁜(?) 내게 있어 강경대 학생이 맞아죽은 후 한쪽 눈이 튀어 나온 부패한 얼굴로 강가에 버려진 한 장의 사진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독재의 잔상으로 남았다. 작가가 졸업한 학교는 알다시피 8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우리시대 영웅 전대협 의장(임종석)을 배출한 학교였고 우연히도 당시 내 남자친구는 그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우리의 대학시절 절반은 늘 최루탄과 검문을 뚫고서도 (데모 때문에)정차하지 않는 지하철을 통과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작가는 혹시 그때 내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최루탄을 섬유유연제 삼아 그 학교로 향하고 있을 무렵 힘겹게 (고문 규탄의)대자보를 운반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만약 한번이라도 운동권 선배들의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면 그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을 터이다. 아니 운동권 선배들과 일면식이 없다 하더라도 같은 시기에 나처럼 들끓어 올랐던 증오심만은 잊을 수 없을 터이다. 그때 우린 많은 사람들이 미웠고 누구에게라도 복수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걸, 아니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니 있다고 해도 (또래 학생이 공권력에 맞아 죽는 학교에서)그것의 실행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웠던가. 우린 그 시절 각자가 마음속에 자신만의 다락방을 만들어 놓고 못다한 편지는 항시 그곳으로 부친 후 학교를 다녔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제와 다락방에서 무엇을 꺼내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십년이 지난 이 시점에 무엇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까. 곰팡이 핀 다락방을 화사하게 리모델링하여 오픈된 테라스라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새삼 들추어 확인해보고 싶었던 다락방 비밀상자는 스스로 떨쳐버리고 싶었던 무엇은 아닐까. 타임캡슐처럼 그때 묻어버린 다락방의 속내를 펼쳐 보이기 위해 자신처럼 하필 다락방에 숨었던 사람을 찾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작가와 주인공과의 공통점은 더욱 분명해 보였다. 세상에 나온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심장을 대신한 무엇이었다. 최고의 고문기술자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와 함께 자신의 다락방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 최고의 소설기술자로 걸음을 내딛게 한 문학의 탈출기, 그것은 다락방이라는 숨겨진 심장을 도망쳐 나온 시간에 대한 고백이었다.
'선'을 넘었느냐
이렇듯 소설은 얼핏 보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르포형의 세태소설 같으나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락방을 부수어야 드러나는 내면의 성찰로서 그리 단순 명료하지가 않았다. 우선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은 아버지 ‘안’과 그의 딸 ‘선’, 그리고 아버지의 상관 ‘박’, 선의 친구인 ‘진’, 선의 첫사랑 ‘민’, 그리고 미용실을 하는 어머니 ‘애자’정도이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줄임말로 생각되는 ‘안’은 딸의 이름이 굳이 ‘선’인 이유로 자꾸 그녀와 대비되는 ‘악’으로 읽혀졌다. 이 소설이 딸은 선하고 아버지는 악하다는 흑백의 가치대립을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버지는 악惡의 축에 딸은 선善의 축에 위치하여 끝까지 상대측을 끌어안지 못하고 밀어내는 것으로 보였다. ‘선線’의 ‘안內’이 아닌 바깥으로. 겉으로 보기엔 아버지 ‘안’이 이 나라의 대공, 방첩, 공안업무를 惡마적으로 수행해온 공권력의 일꾼이었다면 딸인 ‘선’은 그 나라의 청년들이 죽어가는 현실앞에서 청년으로서 해야만 하는 善, 무엇보다 가치있고 의미있어 자신들의 심장이 뛰는 일을 하고자 했다. 이 땅의 청년들이 바위같은 惡의 세력과 싸우는 善의 전사들이기에 ‘안’은 그러한 善의 돌멩이에서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딸에게는 천장이고 아버지에게는 바닥인 다락방의 기준 ‘선線’을 놓고 보면 서로의 기준점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인식함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 위치인식은 자기본위에서 이루어진다. ‘안’과 ‘선’은 동일한 공간을 두고 위치싸움을 벌이는 존재라 할 수 있었는데 딸인 ‘선’은 아버지 보다 먼저 다락방을 사용한 ‘선先’, 사실상의 다락방 前주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선先’의 가장 내밀한 ‘안’쪽 공간을 차지하자 ‘선先’은 ‘선線’ 밖에서 다락방의 파수꾼이 된다. ‘안’이 ‘선線’을 넘어 ‘선’의 ‘안內’에서 자신만의 ‘안(岸, 언덕)’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線’ 밖에서 ‘선’의 ‘안內’에 위치한 모든 것들을 지켜야 하는 선이의 모습은 지극히 물리적이면서도 깊숙이 심리적이었다. 사실 이 소설은 안이 다락방을 차지하면서부터는 우리에게 주도면밀하게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져준다. 바로 무엇을 기준으로 ‘선’을 긋느냐의 문제와 그 선을 기준으로 ‘안’쪽과 바깥에 무엇을 둘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과 악의 표피적 문제에서 선너머 그 안의 가장 어둡고도 내밀한 가치를 두드리고 있다. 작가가 ‘선’이와 ‘안’의 ‘선線’ 모두를 너머 그 ‘안內’쪽에 숨겨진 은밀한 것들을 두드리고 마침내 금가도록 하는 일은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허물어 뜨리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엔 지방의 감옥을 안옥(犴獄)이라 하였다. 아버지 ‘안’에겐 다락방이 은신처이자 자신의 ‘안’(犴,감옥)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선에겐 꼭꼭 숨겨둔 젊은 날 비밀의 은폐처이기도 했다. 그들 부녀가 다락방에 숨기고 묻어둔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오랜 세월 도망치고 숨기다 보니 결국 그것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락방이라는 감옥을 끝내 뛰쳐 나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안’은 실존이고 ‘선’은 허구였다. 더군다나 과거 실존이 아니라 현존이기까지 했다. ‘안’은 과거완료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므로 ‘선’도 미래완료 이상의 미래진행이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이 관계가 (과거가 아닌) 지금 현실인 세상과 (미래일지 모르는) 비현실인 소설, 드러난 인물과 보이지 않는 작가로 생각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은 딱 내 아버지(공권력)세대였고 ‘선’은 딱 우리(작가) 세대였다. 중도조율의 적절한 배합이었다. 이 실량의 실존과 정량의 허구의 믹스는 탄탄하게도 소설을 더욱 소설답게 그래서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실제 미용실을 했다는 이근안의 부인과 같이 초원 미용실을 운영한 ‘선’의 엄마, 대공경찰의 대부라 알려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줄임말로 보인 ‘박’등은 실존이면서, 진실한 친구로 남지 못한 학교친구 ‘진’과 선의 연인이기 보다는 선한 국민이길 바랐던 ‘민’은 허구로 생각되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중요한 배경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외양상 형식이 되어버린 시점이 더 중요해보였다. 이 작품은 화자인 소설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특이했던 건 바로 아버지 ‘안’과 딸 ‘선’이 교대로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이었다. 두 개의 시점은 종반부까지 치열하게 서로를 압박했다. ‘안’과 그의 딸 ‘선’의 목소리가 공평하게 교차되며 이어지던 독백의 고백은 시종일관 팽팽했고 막상막하였다. 자로 잰 듯한 아버지와 딸의 교대속에서 작가는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듯 양쪽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양방향의 고백에 중립과 객관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의식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달까. 하지만 내겐, 작가가 스스로 규정한 문체의 약속이 이미 작가가 객관적,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반증으로 느껴져 더 안타까와 보였다. 내 의심은 결국 마지막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소설의 마지막은 연재 때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건 신념의 문제였다. 자신을 속일 수 없었던 (속여서는 안되는)소설가는 딱 한번 화자로 기능했다. 마침내 '선線'을 넘은 것이다.
작가도 언급했듯이 연재당시엔 봄을 맞이하는 ‘선’이 (가위를 잡지 않고) 기지개를 펴는 장면이 소설의 마지막이었지만 출간할 땐 13장이 추가되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12장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와 딸의 시점이 동시에 등장하며 마치 화해를 한 것처럼 비쳐질 수 있었지만 13장에 깜짝 등장한 ‘선’의 엄마는 역시 ‘안’이 ‘믿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자’, 그가 사랑한 처 ‘애자’로서 ‘안’의 확실한 ‘안內’주인이었다. ‘안’의 ‘안內’에서 그의 믿음을 세상의 ‘선線’ 밖으로 알려준 여자. 그들은 뉘우치지 않았고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뉘우치길 바랐고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남았을 뿐. 결말이 수정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매듭지어졌으므로 작가로선 엄청난 반전이고 독자로선 충격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그래도 우리끼리는 희망을 ‘가지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진정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넘어 가자는 것이었다. 생강을 먹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맛을 알고 사는 것이 더 의미있듯이. 선 긋는 일보다 선 넘는 일의 의미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모두 원고를 탈고한 뒤 일어난 최후 심경변화가 작품의 방향성을 새롭게 결정지었다는 것이 나는 흥미로왔다. 독자인 입장에선 선의 봄이 엄마의 봄보다 더 반가운 게 사실이다. 그런데 왜 작가는 희망이라는 미래를 버리고 인식이라는 오늘을 택한 것일까. 혹시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하게 된 자신을 우리에게 굳이 자수하고 싶었던 것일까. 알려졌듯이 실존인물인 이근안은 현재 수감생활을 마치고 목사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기술자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은 채 자신의 죄는 시대가 만들었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종교적 삶을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추신과도 같았던 13장이 많이도 슬프고 머리가 쭈뼛할 만큼 화가 났다. 끝까지 소설이지 않은 이 작품이 야속했다. 작가는 그를 소설적으로도 용서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아니 그를 두려워한 자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생강의 맛을 알게 된 것이었지만.
'안'이 보이느냐
작가는 끝내 우리에게 ‘죄’의 범위와 죄를 짓게 하는 죄 아닌 ‘신념’에 대해 물음표를 남겼다.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인 것은 바로 그 물음표가 소설의 결말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확연한 죄인은 누구인가, 에 답하기 보다 그보다 더 명징한 죄는 무엇인가, 를 생각해보자는 것. 장의사집 둘째 주인, 반달곰이라 불리운 고문기술자 ‘안’에겐 두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자랑스럽지 않았던 아버지는 전쟁으로 의족을 달고서 참새를 잡아 읍내에 파는 일을 했고 선망하던 아버지는 왜정시대에 앞잡이 노릇을 한 군경출신 조직의 아버지였다. ‘안’이 진짜 아버지를 극복하고 만든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일은 참새가 아니라 빨갱이를 잡아 애국하는 일이었기에 그는 간첩단을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워 특진과 훈장으로 대공분야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소설 도입부에 그는 그의 자랑스러운 책상, ‘안案’에서 누구보다도 문학적이었다. ‘빛을 비추어라’, ‘물을 부어라’, ‘망설이지 마라’, ‘소금을 먹여라’ 로 시작되는 시적 명령구를 십분활용 해 독자에게 최면을 걸고 기선제압하기까지 한다. ‘안案’의 시점에서 자주 발휘되던 공권적 운율과 우월적 문체는 마치 극악무도한 고문기술자가 능수능란한 소설기술자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하며 그의 현상수배 사진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주로 남자들을 폭력과 공포로 몰아넣은 그에게도 모성으로의 회귀본능은 남아있어 여성에게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세상없어도 자신에게만은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던 아내를 비롯해 역 앞에서 좌판을 깔고 엿기름을 팔던 할머니, 붉은 유리집의 거울방에서 자신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쳐준 어린 계집, 월부책 장사시 ‘정의로운 시민상’을 받고 얻은 메달을 다락방 비밀상자에 보관해 놓은 딸 ‘선’은 모두 ‘안’에게 체온같은 ‘안安’ 온한 온기를 베풀어 주던 여인들이었다. 실제로도 도피중이던 이근안에게 박처언의 부인은 평소 이근안이 즐기던 음식을 건네주고 간 적이 있다하며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이근안에게 하루 두 끼 식사를 올려 준 것은 아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를 버리지 않은 자신의 며느리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죄인도 여성의 품안에선 아이처럼 ‘안安’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곰같은 덩치를 가진 중년의 사내도 ‘혼자 잘 살아 남으시라’는 조직의 전갈을 듣고는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하필 (아버지의 상처를 처절하게 확인하면서까지)상부의 목소리를 전한 당사자가 그의 딸이었다는 것은 어쩐지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었고 우리가 해야할 말이라는 생각이다. 작가도 나도 여성이다. 여성은 죄인을 비롯한 자신과 이질적인 타자를 남성보다 너그럽게 포용하는 감수성을 타고난 존재이다. 하지만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확인한 딸도 그 눈물을 자아낸 작가도 그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코자 한 것은 아닐까. 눈물을 후회나 반성으로 보지 않고 지독한 자기애와 미련으로 본 것이다. 곰의 눈물 때문에 그를 못본 척 하는 것도 죄스러운 일인 것이다. 이처럼 지독한 실제를 바탕으로 지켜야 할 허구의 진의를 간곡히 배열하고 끝까지 냉철함을 잃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력은 퍽이나 인상깊었다. 그것은 이 소설이 지향하는 고집스런 나침반과도 같았고 우리는 그 방향을 잊지 말아야 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죄인을 아버지로 둔 딸의 죄는 무엇인가. 아니 딸로 분신한 작가와 우리의 죄는 무엇인가. 많은 부분 작가의 목소리를 숨긴 ‘선’의 목소리는 흡사 조울증을 앓고 있는 청춘으로 보였다. ‘안’이 다락방에 은신하는 10년 11개월 동안 ‘선’은 열아홉에서 서른살이 된다. 돌이켜보면 같은 시기 나 역시 아주 좋거나 끔찍히 싫다 두가지였다. 그녀에게 있어 11년도 짧은 봄과 긴 겨울 두 개의 계절로만 보였다. 나는 이 기간을 작가 천운영이 2000년에 데뷔해서 약 11년 동안 문학의 다락방을 사수한 시간으로 보았다. 처절한 고민은 언제나 극과 극사이에서 생존한다. 이 책에서 아버지의 도피 행각과 딸의 대학 입학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다. 꿈많은 국문과 신입생인 ‘선’이는 과대표 ‘민’에게 첫사랑을 느끼면서 비로소 심장이 뛰고 살이 떨리는 경험을 한다. 여고시절 단짝이었던 ‘진’이와 대학에 가면 심장뛰는 일을 하자고 약속을 한 '선'이었음이다. 하지만 ‘선’은 친구와도 연인과도 비밀을 공유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상처와 짐만 안긴 채 외면당하고 만다. ‘민’은 선이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여주고 살아 숨쉬게 만든 아름다운 손을 가졌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청년들의 손에 가차없이 송곳을 찌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죄로부터 기인한 자신의 억울한 벌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하는 투사심리로 발전하고 아버지의 죄를 벌주기 위해 급기야 가위라는 흉기를 선택한다. 가위는 ‘선’이 학교를 그만두고 볼펜이라는 학업 대신에 집어든 최선의 방어용 무기였다. 똑같은 볼펜이었지만 아버지는 그것으로 딸의 송곳니를 뽑기도 하고 청년의 손톱을 공격하기도 했다. 중요한건 모나미 볼펜의 기능이 아니라 사용자의 목적에 있었음을 알게 된 ‘선’은 똑같은 방법으로 ‘가위’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가위를 아름답게 혹은 잔인하게 사용할 지의 선택은 ‘선’의 몫이었기에. 무엇이든 '선을 그으면 '안'과 밖이 생긴다. 다음에 놓을 것은 '선'그은 자의 특권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가위’를 이미 저지른 (아버지의)죄를 찾아내 조각조각 잘라서 빈 공간에 붙이며 속죄하는 정화기제로 승화시켰다. 이와 상반되게 마침 미용실을 하는 엄마의 특기가 소두마끼(바깥말음) 머리인지라 그녀에게 있어 불고데 기계는 이미 일어난 현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변형하는 도구로 이해되었다.
‘선’은 변형이 주특기인 엄마의 초원 미용실에서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햇살을 즐길’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 수 없었기에 차갑고 시린 가위질로 시간을 버텨낸다. 그녀의 가위는 손님 귀에 상처를 내는 실수를 하거나 신문기사를 오려 아버지의 프로파일을 만들기도 하지만 가위 날개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된다. 즉, ‘선線’을 자르지 않고도 ‘안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 하지만 ‘선’은 자신의 수호천사였던 가위로 결국 아버지의 머리칼을 잘라주며 그를 바깥세상으로 인도하는 구원행위를 하게 된다. 추악한 ‘선線’을 잘라 내어야 아름다운 ‘선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선’은 아버지의 ‘안(眼, 눈)’을 똑바로 보면서 자기 ‘안內(내면)’의 다락방에 숨겨진 공포를 바로 보게 된 것이다. ‘선’이 비로소 공포를 바로 볼 수 있게 된 시간은 꼭 자신의 청춘의 시간과 일치했다. ‘선’은 말한다. ‘모르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선이 바로 본 아버지는 더 당당히 대답한다. ‘그것들이 악이고 내가 선이’라고. ‘선아, 악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그러므로 ‘선’이 마주한 것은 아버지의 악이 아니라 자신이 선인줄 믿고 있었던 아버지의 착각, 그릇된 아버지의 ‘안(顔, 얼굴)’이었던 것이다. ‘선’은 11년 동안 아버지의 진짜 잘못, 잘못한줄 모르는 그 얼굴(顔)을 보지 못한 것이고 보지 못했으니 잘못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 ‘안’은 딸이 머리를 잘라준 후 거울을 보고 ‘거울 속 저 짐승(안犴, 들개)’은 무엇인지 자신을 쏘아보는 핏발선 저 ‘눈동자(안眼, 눈)’는 누구의 것인지, 저것은 내가 아니라 말하며 절규한다. 아버지는 지난 세월 붉은 유리집, 사방 벽이 거울된 방에서도 계집의 파닥거리는 심장만 느낄 뿐 절대 자신을 비추어 볼 수는 없었다. 두 사람 다 다락방에 숨긴 것이 자기 안에 숨겨진 공포인 것은 같았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달랐던 것이다. ‘선’은 공포에 비추어진 자신을 통해 자신의 몰랐던 죄를 깨우쳤지만 ‘안’은 공포를 느끼는 자신을 부정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작가는 우리에게 나머지 비교를 당부하는 것으로 보였다.
“너희가 싸우고 있는 것은 너희 속에 숨은 공포가 아니겠느냐”
'무엇'을 보았느냐
다락방 바깥에서 선의 거울이 되어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를 가해자로 둔 고문피해자였다. 미용실 건너편 레코드 점 앞에서 ‘선’과 ‘안’을 동시에 응시하던 남자. 그가 인상깊었던 것은 ‘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소설 후반부에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에 연루된 이 남자와 ‘선’이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처를 보듬는 연민의 관계로 그려져 화해와 용서를 암시하는 것일까 싶기도 했다. 절대 그 선을 넘지는 않는 선에서. 하지만 남자와 ‘선’이 선문답식으로 주고받는 대화는 서로에게 아무런 답을 바라지 않는 심정으로 던져지는 아름다운 내면의 고백이었기로 이 소설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마치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곧 새싹이 움트는 기운을 감지라도 하듯 나는 소설속의 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달까. 그도 그럴 것이 ‘선’의 생일은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였고 곡우를 가슴에 간직한 남자에 고개 끄덕이는 나 역시 하필 리뷰를 작성하는 오늘도 곡우이다. 아름다운 우연의 일치이다. ‘선’의 생일날 자리를 비운 ‘안’으로 인해 고문이 중단 된 그날을 기억하는 남자. ‘놈이 보호하고 싶었던 걸 꼭 찾아내 짓밟아 주리라’ 다짐했지만 ‘선’이 태어난 걸 누구보다 고마워 하게 된 남자. 남자가 가장 야속했던 건 자신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너무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봄비에 젖은 나뭇잎을 얘기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였다고 말한다. 자신과 ‘상관없이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는 저쪽 세상이 더 무서웠’다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선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벗삼아 누군가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울을 볼 수 있다고. 그런 게 아마도 ‘설탕을 입혀서 달기만 할 거 같은데 먹어보면’ 쓰디 쓴 생강과자와 같은 인생이 아니겠냐고. 그러니까 드디어 이 작품에서 맛으로 등장하던 생강을 말할 차례다. 남자는 ‘선’에게 말한다. 납북 어부 황씨네 할머니가 끓여주신 생강물의 맛을 잊지 못한다고, ‘선’은 기억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들은 대체로 ‘김치를 먹다가 생강을 씹은 느낌’ 으로 다가왔다고. 아버지도 ‘선’을 기억한다. 팽이과자를 좋아하던 ‘선’의 잠을 깨우기 위해 생강과자를 입에 넣어주면 잠을 깨던 그 순진한 모습을. 그 맛은 분명 ‘한고비 넘기고 다 피운 꽁초를 바닥에 탁 던지면서 숨을 들이마실 때 싸하게 도는 쌉쌀한 맛’의 짜릿한 기분일 거라고. ‘그네에서 떨어졌는데 그네를 밀었던 친구가 먼저 우는 바람에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당황스럽고도 야릇한 맛일 거라고. 분명 같은 생강인데 누구는 달달하게 누구는 씁쓸하게 또 어떨 땐 시원하게 또 뜨겁게 느끼는 것이 우리네 그렇고 그런 인생의 맛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다채로운 생강의 맛을 하나 배웠다고 달라질 것은 무엇인가. 맛을 알고 그것을 아는 것이 더 멋스런 인생을 살아가는데 과연 중요한 것일까.
내가 ‘선’의 목소리를 작가의 메아리로 인식한 것은 바로 모르는 것도 ‘죄’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였다. 나만 몰랐던 것도 죄가 될 수 있다니 어쩐지 서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말한 여성 철학자가 있다.(철학이 필요한 시간 中, 강신주, 2011)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 학살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던 관료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1906-1962)은 말했다. 자신은 준법과 근면을 철저하게 실천했던 충직한 관료였으며 조직이 부여한 임무만을 성실히 수행했다고. 아이히만은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일에 책임을 져야할 역사적 전범이었지만 그는 상부의 명령에만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1962년 교수형에 처형) 어쩐지 빨갱이 잡는 애국일에 매진하여 한 평생 이 나라의 정의를 실천해왔다는 ‘안’의 주장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안’은 자신이 저지른 유일한 실수라고는 ‘전기충격자국을 미처 지우지 못한’ 작은 허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저 유명한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을 부과했다.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 즉, 자신의 무사유가 인간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죄를 말한 것이었다. ’안‘은 인간 공포의 속성도 알았고 조직의 논리도 알았고 피해자의 나약함도 알았고 자신이 그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인간성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한 번도 타자와 세상의 시점에서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사유하고 성찰해보지 않았다. 만의 하나 했다 한다하면 시키는 대로만 했다는 말은 거짓인 것이다.
아버지의 변호사가 아닌 세상의 검사로서 역할을 다한 ‘선’이 생일을 맞은 날, 그 의미심장한 곡우의 봄날에 아버지는 자발적 검거를 시행한다. ‘안’이 바깥으로 나와야 ‘선’이 고개를 드는 두 사람의 관계.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평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불행히도 아버진 잠시 은신의 주소를 변경한 것에 불과했고 이주한 다락방에서도 앞으로 먹고 살 궁리는 다 해놓았다는 믿을만한 소식을 전해왔다. 아버지의 자진신고는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바꾸는 시간을 잠시 유보한 행위에 불과했다. 열심히 감옥안에서 세상전도의 전략을 짜기 위한 방편이었고 예상대로 충분한 계획의 시간을 마치고 지금은 (자신의 방식대로)세상을 바꾸는 실천에 여념이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유아닌 사유, 무사유가 슬퍼지는 오늘이다. 하지만 작가는 오늘이 곡우인 것을 잊지 말자고 조용히 눈짓을 하는 듯하다. 문득, ‘발레 인형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오르골 보석상자’에선 어떤 음악이 나왔을까 궁금해진다. 비록 죄인이 죄도 모르는 딸에게 선사한 것이지만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혹시 봄의 왈츠가 흘러나온 것은 아닐까.그렇다면 ‘선’의 생일날 작가는 다락방에서 다시 탄생한 것은 아닐까.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오늘, 하늘과 땅이 화합하는 곡우의 시간에 작가로서의 마지막 두려움을 떨쳐낸 것이리라. 이렇듯 소중한 오늘에 나 역시 곡우의 바람 한자락을 가슴에 새겨본다. 다시 보니 받아든 책 안표지에 예고도 없이 ‘쌉쌀한 단맛 달달한 쓴맛, 천운영’이라고 적혀있다. 이제야 생각하니 이 맛은 어쩐지 작가라는 직업, 소설이라는 문학과도 닮았다. 인생의 쌉쌀한 모든 기억도 달달한 문장으로 탄생할 수 있고 반대인 달콤함도 이렇듯 씁쓸한 여운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토록 변화무쌍한 인생의 맛이 결국은 깊고도 아린 문학의 멋이 되는 것일 테니까.
어쩐지 이 소설 여기서부터 빨간 줄로 금을 그어놓고 그 안쪽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문구를 넘어버린 느낌이다. 그 빨간 ‘선’을 넘어 시커멓던 어둠의 ‘안’을 바라본 오늘을 기억해야겠다. '선線'의 '안內'을 끌어 안는 것이 '선善'은 아니었다. ‘선’과 ‘안’은 모두 우리 자신들의 문제였다. 내가 안쪽에 숨겨둔 근원적인 두려움은 무엇인지, 과연 그 ‘안內’에 나의 ‘선善’은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인 것인지. ‘선線’을 넘어 마주한 거울속에 비친 나의 ‘안眼’은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것인지. '선'과 '안'의 함수관계는 늘 긴장되고 팽팽하다. 나 역시 늘 나만의 다락방속에 소설의 소재에 대한 불안, 재능에 대한 불신, 실패에 대한 부담등을 잘 겹쳐 넣고 도전을 유보하는 쪽이었다. 그곳은 나락인 것 같아도 시선만 바꾸면 곧 천국이 되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락방도 최고로 안온한 보금자리가 될 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누군가는 한평 남짓 다락방에서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십년이 넘게 걸리지 않았는가. 이 작품을 덮고 막연하고도 무모한 자신감 하나를 얻어간다. 거부하던 음식에 마침내 고집을 버리고 입을 벌리듯 마음을 열어본다.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내가 느껴온 ‘쌉쌀한 단맛’과 ‘달달한 쓴맛’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그것을 바늘처럼 촘촘히 기록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소설가가 자신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이 소설을 거울삼아 나도 내 도전의 여정길에 저릿한 첫걸음을 떼어 보고 싶어진다. 부디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만의 이야기로 펼칠 그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날을 위해 나는 오늘 느낀 ‘쌉쌀한 단맛’과 ‘달달한 쓴맛’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오늘 알게된 소중한 생강의 맛이야말로 내일 나만의 글맛이 될 것이기에. 그 맛이야말로 나만이 알고 있는 生의 비밀스런 고유한 멋일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