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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죽어가는 노예의 초상

지난 며칠간, 어느 재일 지식인이 한 평생 갇혀있던 언어의 ‘감옥’안에서 나는 독서라는 ‘해방’감을 한껏 맛보았다. 누군가의 처절한 감옥이 감옥안을 투시하는 사람에게는 극도의 자유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책이 가진 관전효과일까. 나처럼 책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사람들에겐 커다란 행운일 것이다. 읽는 내내 내가 감당한 쾌감은 절대 반론할 수 없는 논리의 짜릿함이었고 나는 이처럼 치밀한 논리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눈물날만큼 위대해보였다. 책을 덮고 서서히 차오르던 건 켜켜이 쌓여진 이성으로 허물어지던 감동이었다. 이 정도의 사유가 보장만 된다면 기꺼이 어떠한 감옥에라도 갇히고 싶을 정도였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얼마나 생각했으면, 얼마나 고민했으면 이런 결론이 나올까 싶어 짐짓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끄덕인 건 결론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단계의 완벽함이었다. 매순간 논리의 파편들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구조와 본질을 띤 미세한 칼날의 흔적과 같았다. 이 책은 반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낱낱이 증명하는 무혈투쟁, 비폭력의 사설집이다.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난민으로 살아가야 했던 고독한 학자의 평론, 아름다운 저항문학이다.

서경식.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한국에 제일 먼저 소개된『나의 서양미술 순례』(2002, 창비) 였던 듯하다. 서슬퍼런 군사정권하에서 서승, 서준식이라는 두 양심수 형제를 둔 지식인 동생.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건 불행했던 가족사를 지니고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작가 정도로 생각했다. 미술작품으로 이루어진 에세이였고 주로 절망의 기호들을 내면으로 승화하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제일먼저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다시 찾아보았다. 에필로그에 이런 글이 있다.

“지나간 20년의 세월에 배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희망이라는 것의 공허함일지도 모르겠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은 도리어 쉽게 절망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 할 수도 있다. 그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역사 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이행할 뿐이다.”

지난 20년은 형들이 체포되어 출옥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책에는 그의 가족사가 사실위주의 객관적인 신문기사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내 기억으로 형님들의 억울한 투옥과 이어지는 부모님의 사망은 거의 서교수의 사유가 시작되는 뼛속 상처의 시원이었던 것으로 느꼈었다. 알려졌듯이 그의 형님들은 아직 생존해 계시고 평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 형제보다 인생을 많이 살진 않았지만 서교수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가족이 아닌 내가 긴 세월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도 해본다. 이 번 책의 제목엔 ‘감옥’이라는 단어가 그의 인생을 표상하는 듯 세월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연 나는 형님들이 실제 머물렀던 서울의 '감옥'도 중첩되어 퍼뜩 (서교수 입장에서)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노예시리즈를 떠올렸다. 서교수가 <빈사의 노예 L’Esclave Mourant>(1513~15) 같은 작품을 보고 형님들을 연상했다면 나는 같은 이미지에서 서교수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돌 안에 갇혀있는 듯이 보이는 죽어가는 노예가 꼭 아직도 식민지에서 해방되지 못한 재일조선인으로 보였달까. 사실 직접적인 이미지는 '죽어간다'보다 '잠들어 있다'에 가깝지만  잠든 채로 그 상황을 유지할수 밖에 없어 어떠한 외부적 조건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느껴진다는 점이 노예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노예라 칭하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형상이다. 공교롭게도 미켈란젤로는 ‘나의 조각은 돌 속에 이미 들어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돌로 노예를 조각하는 미켈란젤로는 해방감을 느꼈겠지만 그 해방감으로 탄생한 노예는 어떨까. 노예가 처절하고 고통받을수록 절대 노예를 벗어나지 못할수록 관람자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터이다. 잔인한 현실이다. 돌 속에서조차 돌로서 돌만큼 해방되지 못한 서교수의 상처가 미안하게도 아름다워 보였던건 해방되고자 하는 염원의 에너지 때문이었을까. 돌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그 염원이 지독히도 숭고해 그것은 흡사 영혼의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필사의 몸부림이 자신이 표현하는 가장 매혹적인 자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필,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이다. 꼭 평면적인 초상畵의 영혼이 가두어 두기엔 너무 생생하고 절절하여 스스로 입체적인 인물상으로 주형된 느낌이다. 그러니 사람이 비춰진 초상(肖像)이 아니라 사람을 초월한 초상(超像)이다. 하지만 우린 이미 오래전에 재일조선인이라는 개념을 초상(初喪)치른 것이라면?  아마도 우리가 초상(初喪)을 치루었기에 그의 초상(肖像)은 초상(超像)으로 더욱 완벽해진 것이리라. 우리는 이제라도 그의 초상을 가만히 앉아서 고정된 자세로 관조할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한 바퀴 돌아 구석구석 관찰해야 하지 않을까. 그를 옥죄고 한평생 가두어버린 쇠사슬의 차가움을 온도로 체험하고 그 표면의 단단함을 직접 어루만져 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빈사의 노예 , 1513-15>                                 <반항하는 노예, 1513>


그런데 내게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이 생소했다. 아니 서경식 교수와 같은 분을 언급할 때 거의 쓰지 않는 단어에 가까웠다. 어렸을 땐 재일 ‘동포’라는 단어를 자주 접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재일, 재미 ‘교포’라는 단어에 더 익숙해진 듯하다. 언어라는 게 세월에 따라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동포’는 70년대에 그리운 식민지 시대 형제 자매를 연상케 하고 ‘교포’는 어쩐지 80년대 이민간 이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생각해보았는데 요즘은 방송에서도 ‘교포’라는 민족적 뉘앙스보다는 ‘해외파’라는 선진국 꼬리표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아이돌 그룹이 생기면서 더 심해졌다) 교포 2세니 3세니 하는 세대구분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신분이지만 ‘교포’라고 하면 타국에서 고생하며 자수성가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같고 ‘해외파’라 부르고 나면 어쩐지 유학이나 오랜 외국생활로 사고가 세련된 이미지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나이와 세대의 개념이 추가되면 교포는 우리가 자주 듣는 유명연예인과 몰래 결혼한 그 재미, 재일 ‘교포’로서 성공한 사업가나 국제 변호사 정도의 재력가를 연상하게 된다. 즉, ‘교포’는 더 이상 젊은 세대가 아닌 것이다. 정리하면 ‘동포’는 할아버지 세대, ‘교포’는 아버지 세대, 그리고 자식은 ‘해외파’로 이어지는 기분이다. ‘재일조선인’ 이라는 신분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시대와 사회적 변화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좋을 대로 우리 편한 대로 그들을 언어의 감옥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서교수가 고수, 주장하는 재일조선인의 ‘조선’은 지금의 나로선 너무 먼 시대이자 많이도 당황스런 언어이다. 솔직히 일제시대로 돌아간 느낌, 썩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독일가서 독일인과 대화할 때 굳이 나치시대를 화제로 삼아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대화의 매너가 아니듯 알고는 있지만 부러 꺼내어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서로가 주입할 필요가 없는,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교포한분이 줄곧 ‘조선’의 이야기만 들려주는 기분이랄까. 서교수는 이렇듯 한국땅에 살고 있는 나같은 한국인과 일본땅에 살고 있는 자신같은 한국인과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을 회피하지 말고 신랄하게 바로볼 것을 끈질기에 호소한다. 바로 서교수는 아직 재일조선인 2세로서 자신이 태어난 1951년에 별수 없이 재일조선인이 되어버린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머물러 계신 분이다. 세월은 60년이 흘렀고 식민지라는 치욕과 불행도 추억이나 망각의 선로를 향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시, 착각에 불과했다고 강조한다. 뒤돌아보지 않고 너무 많이 달려왔기에 그와의 거리는 꼭 세월과 비례했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섬에 고립된 그는 몇 십년 째 외치고 있었다. 누가 들어주지 않거나 듣고서 고개를 돌렸다 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그나마 글재라도 있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말하고 써야한다고. 그것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 자신이 걸어온 역사 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묵묵히 이행할뿐이라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언어

이 책은 서교수가 일본에서 나고 자라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했던 언어로부터의 ‘폭력’과 그로인해 갇혀있던 언어의 ‘감옥’에 대해 제일먼저 말하고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하는 일본의 해석에 숨은 식민주의적 권력관계를 예로 들며 독자로 하여금 민족감정을 자극한다. 윤동주 시인의 저항정신을 높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실존과 사랑을 주장하며 그들이 교과서에까지 <서시> 전문을 싣는 의도를 알고 있느냐 질문한다. 서시를 번역된 시로 읽으며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자는 것을 재일조선인의 자의식으로 여길만큼 윤동주를 읽었다는 서교수는 최초번역이 훗날 (일본의 입맛에 맞게)다르게 번역된 사실에 고통스러워 했다. 감쪽같이 묻혀지는 진실을 확인한 그에게 시 한구절의 의도된 오역은 식민지 종주국으로서의 계속되는 만행이었다. 그것은 ‘일본어를 모어로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밖에 없는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상징하는 단서이며 곧 ‘모어의 폭력’이라 말한다. 모어로부터 생기는 의심과 위화감이 곧 감옥인 것이다.

한때 나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의 식민지였다면 지금처럼 영어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물론, 우리 언어를 고수하려는 불굴의 정신으로 영어가 기대만큼 지배어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내 아버진 중학교시절 배운 일본어 덕에 훗날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직업에 종사하셨다. 부모님 모두 부산에서 오래 사셨는데 어린 시절엔 일상 대화속에 태반이 일본단어(벤또, 코프, 오까네, 라이방등등)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사용한 단어가 사투리가 아니라 일본어를 남도식으로 발음한 단어였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된 단어도(예를 들면 오봉-쟁반) 있다. 지금도 건축이나 인테리어, 영화나 광고, 출판 편집 현장에는 작업용어로 영어가 변형된 일본단어가 습관처럼 쓰이고 있고 무의식적인 식민지 잔재는 거의 내 세대까지 이어져 온 것 같다. 만약 이 모든 단어들이 오리지날 영어였다면 하는 (비굴한)생각, 나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재일교포보다는 재미교포가 더 부러웠고 (외국어를 습득한 교포로서)일본어에 대한 경쟁력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아왔다. 만약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서교수 가족이 재미조선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부질없지만 세계어를 모어로 두었기에 모어가 일본어인 아픔에는 미치지 못하지 않았을까. 이런 단순 도식적인 발상에 머물렀던 나는 그가 예로든 세 명의 유대계 지식인의 불행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모어인 독일어로 시를 썼던 파울 첼란 ,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장 아메리와 프리모 레비는 모두 언어의 균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궁극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표적 언어감옥 수감자였다. 모어가 어떤 나라의 언어이건 자신의 모어가 자신들을 지배한 옛 침략자의 언어였고 원래 모어였어야 할 언어를 태어나기 전부터 박탈당했다는 의식은 특히나 글이 자신의 대리인인 작가들에게 뼛속 응어리와도 같은 치명적인 폭력이었다. 모어를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구사할 줄 안다는 재능이 자신에게 형벌이 되는 사람들이다. 서교수는 ‘모어의 권리’가 ‘모국어의 권리’와 양립하는 새로운 다언어, 다문화 공동체와 같은 창의적인 언어개방 형태를 이상적으로 제시했는데 나같이 국어 내셔널리즘(국어사용=국민)에 익숙한 독자에겐 일종의 충격에 가까웠다. 올바른 국어사용을 국민교육의 절대가치 정도로 교육받아온 모국어 경력을 떠올리면 상당히 자유로운 발상이었다. 서교수가 제시하지 않았으면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문제였다, 고 해야 맞다. 서교수에게 자신의 의식을 형성한 일본어가 가장 의식적인 벽이 되었던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한 것은 당신들도 한국인이라면 한국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국민 자격검증 같은 일종의 무언의 폭압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동안 단일 민족, 단일 언어, 같은 이념이라는 국민적 감옥에 오랜 세월 갇혀 있었던 것은 우리가 아닐까.

또 하나 외양적으로 보면 재일조선인은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상황과는 멀리 떨어져있어 우리가 느끼는 안보, 평화의 실질적 부담감에서 자유로와 보인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덜할 것 같다. 그런데 재일조선인의 뇌리에 내면화된 분단이란 국토의 분할이라는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파고 들어가 보면 그들의 자기해방에는 반드시 본국의 통일과 민주화라는 과제가 하나의 몸뚱아리처럼 결속되어 있다. 재일조선인은 이미 ‘재일’이라는 외국인 신분과 ‘조선’이라는 전쟁이전 국적이라는 두 가지 불이익을 타고난 존재이다. 서교수의 형님들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 주모자로 몰려 20여년 간 옥살이를 했다. 언뜻보면 서교수 가족이 어쩌다가 특별한 사건에 연루된 예외적 상황으로 보이지만 당시 재일조선인은 옥살이만 하지 않았을 뿐 대부분 일본의 동화압력에 따른 일본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의 군사정권에는 불복종한 이중의 저항자들이었다. 서교수 가족의 불행은 1965년 한일수교 후 한국정부가 재일조선인을 한국 국민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한 후에 일어났다. 서교수는 이때 ‘조선적’과 ‘한국적’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한국을 오가기 위해서는 ‘한국적’을 얻어야 왕래가 가능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서교수 가족에게는 북한에 가족을 둔 지인들도 있었고 다행히 북한으로 귀환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당시 ‘조선적’이라 함은 조선의 북 또는 남에 대한 국가적 귀속이 아니라 조선민족 전체에 대한 민족적 귀속을 의미했다. 그런데 1965년 한일조약을 계기로 재일조선인은 강제로 분단을 맞은 것이고 ‘한국적’으로 편입하지 못한 나머지 ‘조선족’은 사실상의 난민으로 방치된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나는 조선의 스트라이커’라고 말했던 정대세 선수의 부모님도 당시 ‘조선족’에서 ‘한국적’으로 바꾼 경우이며 그래서 정대세 선수의 국적은 ‘대한민국’일 수 있었던 것이다. 서교수의 작은 아버지는 (식민지 시대)일본국적 소유자였지만 해방 후 다시 일본으로 역귀환하려 했을 때 입국을 거부당하고 수용소로 이송된 후 한국으로 강제송환 당했다. 연합군은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해 조선인의 이동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아버지는 전쟁 후 목숨을 걸고 일본에 밀입국에 오랜 세월 불법체류자인, 무국적자로 살다가 결국 자살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사회에 살면서 실은 조국의 분단상황으로 인한 실질적 피해는 더욱 극명하게 미치는 경우였다. 전쟁과 분리되어 있었던 이들에게 국적 선택은 강요된 억압이자 이차적인 민족 분열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사회에선 (귀화하지 않으면)재일한국인이라 멸시 당하고 한국사회로부터는 (국민 자격검증에 의해)무언의 차별을 당하고 (원래 하나의 조선이었던)북한과는 생이별을 하게 된 경우인 것이다. 오늘날 땅따먹기처럼 시행된 한국의 군사분계선이 내게 가지는 의미는 오로지 전쟁발발의 최후 평화선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분단이 가져온 재일사회의 파장은 실은 분단에 놓인 한국사회가 감당하는 표면적 고통보다 더 오래된 암울한 상처였다.

그가 자신들의 환부를 예로 들어 논리를 완성해 나가는 모습은 시종일관 엄숙하고 차분하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의 언어경험을 섬세하게 서술해 나가는 어떤 증언의 현장에 동참한 느낌이랄까. 증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덕택에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증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단절의 세상에 절망하며 자살을 선택한 프리모 레비의 고통은 어쩐지 서교수가 감당하는 언어 감옥살이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먹먹한 기분이 든다. 강제 수용자 생존자로서 증언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은 증언을 들어주고 증언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그의 증언이 뼈아프게 들리는 것은 바로 서교수의 자기 生의 증언이 재일조선인의 지겹고도 진부한 피해의식이라 여길지 모르는 한국청취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어로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그가, 그것이 모국어를 습득하는 자신의 목표이자 소원이라는 그가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미 한국어로 문학작품을 집필하지 않아도 모국어인 한국어를 모어가 한국어인 우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지.


감옥에서 탈출한 진실

언어가 ‘의식’의 감옥이었다면 식민지는 ‘신분’의 감옥이었다. 언어의 감옥에서 심리적 분열증이 발생했다면 식민지의 감옥에서는 물리적 희생이 파생된 것이었다. 서교수는 한일간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양국간의 화해도 연출된 폭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화해를 하려면 먼저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주보아야 하는데 일본은 ‘이해하지 않으려는’ 다수자를 변호하면서 소수자에게만 ‘이해를 받기 위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의 사죄와 보상을 오랜 세월 묵살해온 일본은 늘상 ‘도의적’ 책임은 있지만 ‘법적’인 책임은 없으므로 자신들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논리이다. 침략전쟁이라는 의미를 불문율로 부치고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자기만족적 미학에 빠져 강렬한 자기애를 실현하고 있는 일본지식인, 리버럴파를 자국의 국가범죄와 공범관계를 맺은 이기적 주체라 비난한다. 논리적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는 답으로 구체적인 답을 회피하고 책임소재 문제에는 불가피했던 당시 정황을 물고 늘어지며 미국과 책임을 나누려는 비겁한 태도를 보이거나 혹은 미국등의 열강에 책임을 지우려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덕지게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측을 오히려 화해를 방해하는 평화반대주의자로 몰아 세운다. 서교수가 보기에 문제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의 불신에 있다는 박유하의 가짜 화해론이야말로 일본 리버럴파가 대환영하는 화해 컨텐츠라는 것이다. 서교수는 언뜻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일본 학자들의 논리를 샅샅이 해체하고 분석하여 문장단위로 깔끔하게 반박하는 논조를 펼치셨다. 적확한 근거와 심리적 배경, 의미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매 순간 일본의 허점과 정곡을 찔렀다. 서교수의 냉철하고도 예리한 비판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들이고 당장이라도 좇아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그중에 숙연해지기까지 했던 사유의 결정은 베트남 국민에 대한 죄책감을 말하는 부분이었다. 서교수는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던 한국군의 잔인성을 잊지 않았다. 우리에겐 늘 희생의 대명사로 각인된 베트남 파병(한국)군인이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교수는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과 같은 세대로서 자신이 베트남 파병에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고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한국에 살지도 않았지만 한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 2세로서 베트남 국민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을 재차 부연했다. 베트남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같은 건 한번도 해보지 않은 나였기에 멍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서교수는 (베트남에 사죄하지 않는) 한국정부가 발행한 여권으로 한국민이 행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한국적 보유자이므로 죄의 여부와 상관없이 책임은 존재한다는 논리였다. 서교수가 책임을 느끼는 건 아마도 ‘사죄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상처에서 기인한 본연의 자기반성이었을 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후 일본인들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죄는 없지만 일본인으로서 집단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그러한 책임을 한번도 느껴보지도 가져보지도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서교수의 통찰은 한국민이 하지도 않는 부분에까지 뻗어 있었다. 어찌보면 ‘사죄하지 않는 심리’가 ‘사죄 안 받아도 상관없는’ 심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결국 우리는 일본 리버럴파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타국에는 우리의 잘못을 사죄하지 않으면서 일본에는 끝까지 사죄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서교수는 말한다. 일본 리버럴파는 1990년대 이후 이어진 증언의 시대를 묵살하였고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이후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적 사죄와 보상을 통해 한국과 창조적인 관계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매번 유보, 실기하여 사상적으로 퇴폐에 이르렀다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식민지 극복보다는 보다 글로벌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체제를 위해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논리로 과거를 봉인한 채 화해만을 기념하려 든다고. 서교수는 이러한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에 빠진 그들이 국가로부터 은혜를 받아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정작 국민이나 민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으라고 발언하는 것과 같다며 이 역시 이념주입의 폭력이라 주장한다. 마치 사죄만을 요구하는 상대를 과거에 묶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옹졸한 국민으로 치부하며 지금부터라도 잘 지내보자 하는 것과 같다고. 그런데 가만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지나간 일은 전세대의 일이고 우리 세대는 더 중요한 세계화를 향해야 한다는 논리는 일본 리버럴파가 아닌 한국의 보수, 진보 모두에 해당되는 암묵적 합의 아니었을까. 리버럴파에 부합하여 일본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는 박유하는 바로 화해없는 화해극의 시나리오와 주연, 연출까지 맡은 한국의 젊은 세대를 표상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사죄도 없었으니 용서 안해도 된다는 심리는 서로가 편한 구석이 있다. 서교수가 염려한 것은 궁극에 서로 아무일도 없었던 것으로 여기자는 국익우선주의는 아닐까 싶다. 서교수는 ‘역사적인 유래가 저항의 소중한 무기’라고 말한다. 식민지와 세계전쟁이라는 역사가 낳은 재일조선인은 특별히 반항적이라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분단을 극복하는 것 자체가 저항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장에 실린 서교수와의 대담내용은 다소 이상적으로 느껴져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통일이 분단과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결론과 통일의 방법, 형태의 시나리오는 어쩌면 남일처럼 생각되는 너무나 먼 비현실의 이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식민주의와 냉전체제를 거치면서 분단이 양산한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들을 모두 다 포함한 온전한 통일이 가능만 하다면 그리고 그 실현주체가 한국민이라고 한다면 분명 인류 역사적인 사건임은 틀림없다. ‘인류역사가 나아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서 다원주의를 채용하여 다중국적, 참정권을 인정하는 나라. 동아시아를 향해 한반도를 개방하는 해방의 통일.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을 집필한 서교수의 입장에서는 가장 완성된 결론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3.11 일본 지진후 나는 과거 역사적 감정보다는 자발적으로 인류애적인 온정을 발휘하는 네티즌과 그에 호들갑을 떨며 기부액수를 이슈화하는 방송 언론이 탐탁치 않았다. 한창 기부가 유행처럼 번져갈 때 행여 (불행에 빠진)일본에 대한 비난을 했다간 몰매라도 맞을 기세였다. 우리가 분명 인류애를 발휘해 일본의 고통을 모른척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발전이었지만 과열된 여론과 인류애 호소에의 무조건식 확산은 또 언제든 반대의 이슈만 있으면 마찬가지의 비난여론으로 뒤집힐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이 많아서였다. 연이어 보도된 독도문제만 보아도 여론은 지금의 우호적 현상에 '찬물' 을 끼얹는 분위기라 일관했다. 내 생각에 일본은 원래부터 '찬물'이었다. 문제는 찬물의 온도를 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우리네 변덕 아니었을까. 일본은 한국의 기부라는 뜨거운 주관앞에서도 줄곧 찬물다운 객관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언제나 배울만한(?)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엊그제 기사를 보니 계속되는 여진과 원전사태가 아직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본은 벌써 피해지역의 발전계획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이다. 복구, 재생, 부흥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미래발전계획이 당연히 일본 자국의 몫이듯이 독도를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도 자신들의 책임이라 여길 터이다 . 일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들은 매사에 매순간 상대에게 습관적으로 실례했고 미안하다 노래를 한다. 병적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악으로 여기며 어릴 때부터 피해주지 않는 인간형을 학습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전국의 나무 잘라 종이 만드는 회사가 자연환경은 보호해야 한다는 광고를 몇 십년 반복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한다. 아시아 지역의 민족에게 그 누구보다도 큰 피해를 준 일본이 일상에서는 절대 피해주지 않는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대략 이해가 가는 생존전략이라는 생각이다. 일본에 가면 매번 뜻밖에도 친절하고 이렇게도 매너좋은 사람들, 우리보다 조용조용하고 길가에는 담배꽁초 하나 보이지 않는 이토록 깨끗한 나라가, 모르는 사람에게도 밥 먹듯이 사과하는 이 나라의 국민이 과연?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지난 시절 일본을 드나들며 나는 (한국사람만 아니라면)배려하는 일본, 깨끗한 일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지진만 아니라면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사는 건 자유고 선택은 개인의 문제이다.  하지만 주거환경으로서 일본을 선택하려 했던 한국인인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는 것,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했으며 그것은 어떤 의미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모르는척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는 모르는 일로 하고 싶기에 자신들의 다음 세대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실과 다르게 가르쳐 주고 있기까지 하다. 이 책은 그들이 왜 우리를 모른 척 하는지, 왜 모르는 것으로 하고 싶은지, 왜 모르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소상히 알려준다. 그런 것들이 일본을 택하는데 상관이 없었던(상관하고 싶지 않았던) 내 자신을 가만히 원점으로 돌려 놓는다.

이번 독서로 '논리적 사유'가 얼마나 아름다운 능력인지 알게 되었다. 어떤 주장을 내세우고 그것에 대한 반론에 논리적으로 근거를 제시하고 상대측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와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과 더 치열한 싸움은 아닐까. 상대 논리의 헛점을 공격하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빈틈없는 자기논리의 정당화, 완성화를 통해 폭력이 아닌 평화를 소원하는 방법이 아닐까. 자기주장을 힘이 아닌 논리로 전파하는 건 꼭 일본이 우리에게 행사한 폭력의 역사에 보란듯이 항거하는 윤리적인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가해자를 최대한 배려하는 일본지식인으로서의 최선일 것이다. 서교수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거나 간과되어도 평화적인 토론과 설득의 기본정신만은 잃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멈추지 않을 듯하다. 시 한줄, 기사 한 단락, 논문 한 구절도 폭력을 용인하지 않은 그의 '이성'과 오독과 반론을 용기있게 제시하는 그의 '감성'이 새삼 뭉클해진다. 한 가지 잊지말고 새겨야 할 것은 그 모든 이성과 감성은 어느 재일조선인의 감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왔다 갔다 다만 모두이거나 또는 아무도 아닌 경계의 섬에 갇혀있던 시간의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이제 차디찬 쇠사슬의 감옥을 뚫고 출옥한 진실앞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열쇠는 우리 몫이다. 기존의 감옥에 갇힐 것인지 새로운 문을 열고 세상을 볼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인 듯하다. 다시금 두 손에 쥔 열쇠가 뜨겁다. 그가 차가운 쇳덩어리만 건네준 것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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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4-3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쪽으로 옮기고 첫 서평이네요. 만족하시나 봅니다.
저는 이제 겨우 조금 보기 시작했어요.
두권 다 만화책이라 금방 또는 부담없이 읽을 것 같아 여유 부리고 있습니다.
사실 만화책 별로라 마음이 안 가는 것도 쫌 있구요.
한권은 그래도 볼만은 한데, 한권은 어린아이 학습만화 같아서 심드렁합니다.ㅋ
활자도 작고.ㅜ
비 오고, 황사낀 주말이지만 잘 지내시길...!^^

가연 2011-05-0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한권씩은 꼭 별로인 책이 온다니 걱정되는데요ㅠ 앞으로도 그 러셀의 책과 비슷한 책으로 머리를 싸매야 된다는 건가요!! 그나저나 이 '언어의 감옥에서'는 논리가 아름답다, 는 생각이 들 정도였기에 덕분에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지더군요. 저는 서경식 교수를 한겨레에서 연재하는 칼럼에서 알게되어서..

June* 2011-05-0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 한사람님이 인문을 읽고 서평을 내놓는 심정만큼이나
 한사람님의 서평을 읽고 싶은데 .. . 관심분야도 아니고 어려운 것 투성이라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괴로워요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