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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솔직히 나는 이런 장르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해리포터 시리즈와 나니아 연대기, 황금나침반 등의 영화를 보러갔다가 생애 최초로 극장에서 졸았던 기억이 있다. 한마디로 늙은 것이다. 어드벤쳐, 환타지, 거기다가 스릴러까지 가미한 복합적인 영상이 내게 제공하는 것은 대개 피곤함으로 종결되는 특수효과만 남길 뿐이었다. 꿈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난 늙지 않고 꿈이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에도 이런 식(?)엔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으니 훗날에도 선택을 할 계기가 없었다. 책과 영화는 분명 다른 분야지만 사람은 자신이 싫은 속성에 있어서는 그것을 세목화하지 않고 일괄처리 하는 무책임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가끔 평가단 미션으로 상기 장르의 소설을 받았을 때 나는 당혹스럽다. 적잖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서평에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꽤 의미있는 시간동안 거실 한 켠에 방치했다. 비교적 어려운 숙제를 먼저하고 남은 시간 편하게 노는 편(?)인 내게 있어 읽지 못하고 놓아두어야 하는 책은 무언의 존재로서 막강한 스트레스이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분명 기간 내 이 책이 집어 들고 싶을 때가 오리라는 믿음에서였다. 환타지-스릴러를 써먹을 시간이 도래(?)하면 내 그때 주저없이 이 책을 읽어 주리라, 뭐 이런 같잖은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주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책을 덜커덕 잡아버렸고 일요일 저녁 무렵 책을 덮었다. 훌륭한 전략이었고 나는 마치 거대한 미션이라도 수행한 듯 보람마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현실을 ‘잊겠다’는 명확한 목표의식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현실을 잊으려고 소설을 차용했고 작품은 그런대로 목적에 부합하는 유용성을 지닌 것이었다. 한마디로 무언가 잊어야 할 현실이 있다면 이 책을 집어드시라. 주말에 나는 뜻하지 않은 문자 한통을 받았다. 살면서 그런 일방적인 문자는 처음 받아보았다. 나는 성격상 일이 커질수록 놀라지 않는 냉정함을 生의 전략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혹자들은 천성이 차가워 인간성이 그리된 줄 오해를 하는데 그만큼 큰일을 많이 겪으면서 살아왔다가 더 맞지 싶다. 그 크고 작은 일 속에는 늘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 상처를 주는 한 사람 때문에 온갖 종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그 상처를 제공하는 사람이 소속된 집단과 바닥이 싫어지는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절은 잘못이 없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중이 떠나야 할 곳이 그 중에게는 生의 마지막 장소일 수가 있다. 그럴 땐 떠난다는 의지보다는 떠밀린다는 서글픔이 앞서기 마련이다. 내겐 이 서평바닥이 내 추락한 인생의 마지막 보루였다.(는 생각이다) 비겁하지만 바깥 세상 사람들이 싫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인데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도 바깥 세상과 다를 바는 없었다. 차라리 바깥세상은 얼굴을 보고 술 한잔 걸치면 쉽게 해결되는 심플한 구석이라도 있다. 이곳은 억측과 오해, 음해와 소문이라는 음성적 메시지가 난립하는 바깥 세상의 안쪽, 안방과도 같은 안전지대였다.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들이 책 안 읽고 글 안 쓰는 사람들 보다 무언가 생각이 더 많고 생각이 많은 만큼 말과 언행도 옳바르리라 우린 그렇게 배웠고 나 역시 그것을 믿고 살아간다. 그런데 지난 일년 동안 나는 그 믿음에 대한 배신감을 버텨내느라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고 해야 맞다. 물론 이 복잡한 세상에 나만이 고상하고 나만이 정의롭고 나만이 결백하다고 주장한다면 위선가득한 자기오만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내가 무언가를 하고 무슨 말을 한 사람이 되어있는 것은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이유를 알면 알수록 꼭 그들에게 지는 것 같아 울기도 분하여 구멍난 뼛속만 시릴 뿐이다. 아무 대응을 하지 않는 나를 향해, 불필요한 논쟁을 그만하자는 내 의지에 전달된 한통의 문자는 당신을 이제부터 ‘모르는’ 사람으로 한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졸지에 그가 알았던 사람에서 지우개처럼 지워져 투명인간으로 처리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능히 이 바닥에서 그렇게 할 파워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문자는 상당부분 자신의 파워를 의식한 내용이었고 한밤중 벼락같은 전송은 파워를 행사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 때문에 역으로 내가 그들에게 존재감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나는 그런 일에 체계적인 대응을 했을 터이다. 나는 오랜 세월 말과 글로 밥 벌어 먹고 살았기에 그런 유형의 사람을 그 지위에서 논리적으로 끌어 내리고 톡톡히 댓가를 치르게 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별의 별 유형의 사람들을 겪은 내가)지난 시절 치밀한 심리적 보복에 대한 기획과 실행은 거의 내 전공분야이자 생존전략과도 같았다. 나는 (팔자가 사나와 늘 시기와 질투에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특히 내가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음해나 모략같은 일은 성격상 가만있지를 못하는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렇게 파헤쳐서 내게 돌아온 것은 대개 인간관계가 단절되거나 물리적, 사회적인 손실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장이 클수록 후련하고 시원하다는 보상은 있을지언정 상대는 파멸하거나 나또한 (피해로 비롯된)가해자로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죄다 까발리고 싶다는 것도 그리하여 내가 더 옳다는 이해를 받고 싶은 것도 모두 욕심이다. 복수도 결국 고집스런 욕망에 불과해 이루어지고 나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추한)자괴감에 스스로 추락하게 마련이다. 결국 양쪽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몸소 체험하고 그 흉터를 잘 간직하고 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고 보니 개인적인 불의는 때로 참아도 될 경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달까. 그이가 안쓰럽고 내 상처가 두려워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잘못한 것은 딱 하나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이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지만, 너는 모른다는 것. 사람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적당히 웃고 적절히 칭찬하며 적잖이 솔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적당한 위선도 의무적인 공감과 타성젖은 연대속에서 이해로 발전하므로 절대 오해의 대상이 될 리는 없는 것이다. 어떤 집단에서 창조하는 헤게모니는 집단에 충성할수록 오해의 방패막이 된다. 그런데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혼자 우아하게 책 좀 읽고 글 좀 쓰다가 자기 내키는 대로 (자기 식으로)타자와 교류하지 않았으니(심지어 거절까지 하나니) 그것이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속된 말로 재수없는 자, 지못미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나 같은 은폐성향의 블로거들은 이웃과 교류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을 터인데 왜 나만이 구설수에 올라있는가. 혹시 (믿고 싶지 않지만)그것은 (같은 서평자로서)지난 일 년 동안 내가 이룬 성취에 있었던 것일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 번의 성취에 흥분하거나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지 않아 나는 늘 숨어지낸 편에 속했다. 나는 남의 서평을 잘 읽지 않지만(나는 내가 타자의 글을 읽기 힘든 심정을 알기 때문에 내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십분 이해한다) 어쩌다 감동적인 글을 만나면 나 혼자 그 친구의 사연에 눈물 흘릴 때도 있고 우연히 훌륭한 글을 만나면 찾아가 덥썩 손이라도 잡고 싶다. 얼마전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서평을 먼저 쓰기 시작했고 내가 서평의 멘토로 삼은 어느 후배는 서평은 오래 쓸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서평계를 떠났다. 꽃은 곧 질 것이고 나는 ‘요란한 비’ 소식에 마음이 흔들렸다. 어짜피 서평으로 무엇을 이루려 한 것이 아니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서평을 연습삼았던 나이니 무언가 결단을 내릴 시점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잊어야 할 무엇을 말하느라 서두가 또 길어졌다. 나는 잠시 나를 잊고 야속한 세상을 잊고 싶었다. 왜 언제나 세상은 이렇게 나에게 가혹한 것인지. 그렇게 대책없던 내게 이 책은 무사히 대책으로 역할을 마쳤다.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이야기가 분명한 소설이다. 줄거리가 간단하고 익숙하기에 내용은 친근하다.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감춰진 미스터리를 다루었다고 해서 ‘안개 3부작’으로 불린다는 기사가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고 뚜렷한 미스터리였음이다. 환타지 서사를 이끄는 상투적인 표현들만 분량 조절했다면 훨씬 흥미로왔을 것 같다. 구구절절 자세하게 서술된 상황묘사는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은 불러일으켰지만 엄밀히 말하면 문학적 상상력과는 별개로 영상적 테크닉으로 느껴졌다. 일일이 화면을 설명하는 느낌이 들었달까. 지난 시절 나는 광고쪽 일을 이삼년 한 적이 있다. 나와 일했던 감독은 콘티를 미친듯이 환타스틱하게 설명하는 재주를 가져 그분이 설명을 하면 마치 대단히 박진감넘치고 영상미 풍부한 한편의 광고가 연상되는 효과를 가져왔다.(그래서 몇 번 속은 적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저 파란 하늘에 하얀 눈이 내릴 뿐인 영상이었는데 특수효과와 함께 줄줄이 부연되는 서사의 스펙터클함은 그가 둘러대는 이야기의 힘에 있었다. 필력(筆力) 못지않은 화력(話力)이다.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고 짧은 분량이지만 그가 말하고 나면 꼭 방대한 대하극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작가가 그랬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거짓말이 참 능수능란했다. 다만 그것이 좀 빤하고 놀랍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야기의 흡입력은 상당한 작품이었다. 물 흐르듯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는 장점도 이야기의 거침없음의 연장선상에 있을 듯하다. 페이지가 잘 넘어갔기에 나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고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니까. 잘은 모르지만 이런 장르에 있어 흡입력은 작품의 중요한 장점이라는 생각이다. 아마도 '애드거 알란 포와 보르헤스, 스티븐 킹이 뒤섞인 듯 하다'는 언론평은 그러한 마법같은 이야기의 연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특히나 소설 초반부엔 마치 영화의 시작 5분처럼 앞으로의 이야기에 기대를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 영국군 장교 피크 중위가 목숨을 무릅쓰고 쌍둥이 아기를 데리고 도망친다는 설정과 기다란 검정망토에 터번을 두른 정체불명의 추적자가 끝까지 아이들을 찾아 나서겠다는 선언은 출생의 비밀과 복수코드의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로선 늘 공식과도 같은 스타트였다. 열여섯이 되면 법정 후견 기한이 만료되므로 보육원을 떠나야 하는 쌍둥이 아이의 운명과 그를 보육원에 맡긴 할머니의 비밀스런 사연, 아이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대 ‘차우바 소사이어티’라는 낯선 이름등은 감추어진 비밀을 위해 잘 짜여진 밑재료로 느껴졌다. 특이했던건 서사의 뼈대에 모티브로 작용한 내용이 인도와 영국간의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기담이었다는 것인데 스페인 출신 작가이면서 인도의 민간설화를 오늘날의 문학적 주제와 접목했다는 점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인도를 아직 여행해 본적은 없지만 앞으로도 인도를 여행가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던 나에게 캘커타라는 미스테리한 도시를 문학으로나마 체험하게 하였으니 그것도 뜻깊었다.

캘커타(Calcutta)는 영국 식민지 시대 수도였던 도시이다. 이번에 이 소설로 캘커타가 궁금해 여기저기 기웃거려보니 1995년에 전통명칭인 콜카타(Kolkata)로 개명했다고 한다. 십오년 이상 나는 콜카타를 캘커타로 알고 지냈던 것이다. 콜카타 주민들에게 후글리강은 신성한 존재라는데 소설에선 후글리 강 근처에 차우바 소사이어티의 아지트 ‘한밤의 궁전’이 위치하고 있었다. 여행정보 사이트를 돌아다녀 보면 콜커타는 완전 영국풍의 거리 박물관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지트로서 폐허가 된 '한밤의 궁전'은 어쩐지 빅토리아 풍의 건물을 상징한다고 느껴졌달까. 소설속 후글리 강 건너편 지터스 게이트 역에선 고아 3백 명을 싣고 가던 뭄바이 행 열차가 터널 속에 갇힌 채 전소되는 비극의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과거 역사적인 사실과 지역 민간설화의 결합은 인도라는 이국적인 장소와 잘 어우러지며 신비스런 풍광을 잘 부각할 수 있는 치밀한 전략이었다. 또 하나, ‘시바’는 인도의 3대신(브라흐마, 시바, 비슈누) 중 하나인 창조와 파괴의 신이라 알려져 있다. 나는 신에 관한 이야기가 세상의 모든 철학만큼이나 심오하고 모든 종교만큼 경외스러운 곳이 인도라고 생각해왔다. 바로 이 책에서 벤과 쌍둥이 남매인 쉬어는 차우바 소사이어티에 입단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자신의 개인적 비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고백하며 아버지가 남긴 책, ‘시바의 눈물’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가 인도신에서 차용하여 가공한 소설적 주제는 ‘과거의 속죄’로서의 시바의 부활이었다. 애초부터 저주받은 도시였던 캘커타(검은 도시)에 등장한 검은 망토의 사나이는 실은 멀리 떨어진 외계에서 날아온 비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라 속세에서 무엇이든 어떻게든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을 한 현세 인간들의 반영인 것이다. 작가는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바의 인간화를 통해 과거(죄)나 미래(벌)보다는 외려 현실을 더 소중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야기야 어떻든 간에 과거에 저질러진 악이 자신들의 미래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현실에 당면한 환영을 이겨내어야 하는 강렬한 동기가 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현실은 차우바 소사이어티의 구성원들이 검은 망토의 불사신을 극복하려는 과정에 있었다. 진실을 찾는 것이 곧 불사신을 이기는 일이었고 그것은 마치 검은 도시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먼저간 고아들의 영혼을 달래는 일로까지 느껴졌다. 그러므로 아이들이야 말로 ‘시바의 눈물’을 자아내는 직접적인 영웅이 될 수 있도록 작가는 그 타당한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벤과 쉬어, 이언을 비롯한 친구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극박한 상황에서 지켜내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기상황에서 선보인 약속과 희생에의 의지, 믿음과 희망에 대한 선량한 교훈들, 환타지라는 형식 내부에 이런 가치들을 보석처럼 상자에 담아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살짝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일곱 빛깔의 상자만큼이나 아이들의 캐릭터가 그다지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는 것인데 막간에 소개된 멤버의 특징들을 제외하곤 그들이 헤쳐 나가는 국면은 양적, 질적으로 분별하기 어려웠다. 영화였어도 구성멤버들 중 한 두 명은 사족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진실의 실마리를 쥐고 있던 쌍둥이 남매의 할머니 야르야미의 대사는 다소 작위적인 면이 있었고 지나치게 선생님같은 강요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세대라 그만큼 장광설에 눈치가 빠르다는 生의 이력 때문에.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서사적 이미지, 불의 화력(話力)만큼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두렵고도 끔찍스럽게 느낀 인상적인 내러티브로 남았다. 불길에 휩싸인 채 달려가는 기차와 화마에 가득 찬 열차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절규소리, 화염이 삼키고 난 후의 끔찍한 잔해들, 이어지는 불꽃속에서 피어난 망토의 사나이, 불사신의 이글거리는 분노의 눈빛등은 이 소설을 한 마리 불새의 스토리로 인식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인도하면 이국적인 색채가 자랑이자 특색인데 이 작품은 대체로 검붉은 바탕위에 세워진 회색빛의 궁전과 그 궁전을 타고 올라가는 오렌지빛 불꽃 정도로 시각적인 연상을 강렬하게 고정화하였다. 나는 물 이상으로 불을 무서워하는 성향이라 이 기억은 꽤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화마의 이야기 속에 어른된 나를 위로하고 깨우쳐주는 할머니의 잠언도 나는 기억한다. 할머니는 두어 차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이 보고 들어온 평생의 모든 진실을 고해성사하듯 나지막히 들려준다. 고백이라고 느껴진 할머니의 잠언들은 대체로 평범했고 특이할만한 건 없었다. 세상의 진리라는 건 늘 그렇듯 놀랄만한 사실은 없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시점이 진실에 회의를 느끼던 찰나였기 때문인지 내게만은 유독 사무치게 들려왔다.

사실 진실은 믿기가 어려운 법이란다. 거짓말처럼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도 없고 말이야. 거짓은 크면 클수록 더 매력적인 법이거든. 그것이 인생의 법칙이란다. 그 가운데서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적으로 너희들 자신의 판단에 달려있단다.      139p

눈물이 핑돌았다. 내겐 할머니가 이 작품의 ‘빛의 공주’였다. 돌이켜보면 거짓말은 언제나 진실보다 참 매력적인 것이 틀림없다. ‘가장 불길한 그림자는 자신의 머릿속에 깃든 기억’이며 그것은 곧 ’파괴와 복수의 천사’에 다름 아니라는 할머니의 충고는 꼭 나 들으라고 하는 말씀만 같았다. 불새라는 지옥의 무기를 가지고 분노에 사로잡힌 자신의 영혼을 암흑의 정령으로 부활시킨 자와할의 모습은 흡사 내가 끝까지 주저하고 망설이던 내 이면의 거울일지도 몰랐다.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동물이 뱀이라는 말씀처럼 뱀의 사악함과 교활함에 지배당해 나라고 ‘인간들이 마음속에 심어놓은 분노와 증오의 두려움에 스스로 먹혀 버리고 만 영혼’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자와할로 살지 않기로 마음먹은 내 자신이 생각나 그렇게 결심하기 까지 괴로웠던 시간들이 떠올라 나는 새삼 가슴을 쓸어내리며 참았던 눈물을 삼킬 수 있었다. 그 순간 눈감은 내 눈앞으로 ‘소년들 위로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작고 흰 눈물이 비처럼’ 내리던 ‘하얀 눈물’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책 한권으로 분노와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존재였다.

캘커타라는 도시를 몰랐다. 당연히 미스터리와 신화를 몰랐다. 환타지는 허무맹랑해 이미 어른이 된 내가 만나보기엔 너무 멀었던 장르이다. 그래도 나는 대책없던 순간 내 앞에 놓여있던 이 책을 대책삼아 또 한순간을 넘겨본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가면 상처도 그리울 때가 있는 법. 실패나 실수도 추억이 될수 있는 것.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고 해놓고선 나는 그 이야기의 종류를 내 마음대로 정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독서의 효과를 강조했으면서도 다만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게만 해당된다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생각외로 책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 나니 목숨을 걸어 우정을 나눈 이 책의 주인공들 처럼 유치한 조직이라도 대단한듯 결성했던 그 시절 친구들이 그립다. 나름대로 우리가 찾았던 것도 그 당시 우리가 몰랐던 진실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진실을)몰랐던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려고 몸부림 치던 모든 시간들이 이토록 그립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어른이 되면 이미 알게된 진실만으로도 벅차기에 더 이상 무언가를 찾고 싶지 않을 것이기에. 어쩌다 더 찾아낸 오늘의 진실은 아마도 어제보다 더 외면하고픈 날카로운 아픔일 것이기에.

어른이 된다는 건, 어린 시절에 믿어 왔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대신 믿지 않으려 거부해 왔던 모든 것들이 진실임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3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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