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아이들 -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 이야기 문학동네 청소년 8
박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자꾸, 미안한 이야기

  소중한 책을 만났다.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동안 나만 몰랐던 사실이라는 것이 죄스러워지는 이야기였다. 책을 집어 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심지어 만주의 아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내일을 준비하는 모습이겠지 싶었다. 나는 이 책을 아이 친구들을 통해 다른 학부모 몇 명에게 전달했다. 마치 혼자 알고 있기에 벅찬 비밀이라도 되는 듯 지인들로부터 독서에 동참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나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케 하는 독서였다. 마침 이틀 전 봄비로 집 앞의 벚꽃들이 눈송이 마냥 아스팔트에 소리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꽃이 지는 것이 어쩐지 내 잘못처럼 느껴져 나는 온종일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만이 화사한 봄을 만끽하고 더 푸르른 오월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오월이 되어도 아직 영하의 날씨라는 그곳에, 여전히 내복을 입는다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마음이 영 불편했다. 이제 그들의 아픔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우린 너무 무정한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한국으로 떠나온 조선족 부모를 둔 만주 아이들에 관한 생생한 현장보고서이다. 하지만 현장보고에만 그치지 않고 작가의 감회와 취재 후 심상이 곁들여져 먼 곳에서 날아든 편지의 사연들을 읽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소중한건 아이들이 사는 곳에 작가가 직접 발품을 팔아 방문하여 그들을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얼굴마주하고 눈 마주쳐가며 (직접)사진도 찍고 좇아가 귀한 아이들 목소리를 듣고 온 시간의 기록, 대화의 결과물인 것이다. 르포형식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기자가 아니라)시인인 덕에 이야기는 객관을 너머 고향의 향내나는 서정성을 지녔다. 마치 떠나온 지 오래되는 먼 고향, 그리운 그곳 사람들의 안타까운 소식처럼 들렸달까. 거리상으로도 멀고 중국이 개방되었다고는 하나 작가가 원하는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매번 취재를 허락받기가 쉬운 여정은 아니었을 터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행, 그야말로 사서 하는 몸과 마음의 고생길이었을 것이 훤하다. 우선 그 정성스런 수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한 명의 아이로부터 시작된 우연한 만남이 왜 작가에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필사의 취재거리가 되었을까. 같은 민족으로서 아이의 눈에 고인 눈물이 단순히 딱해 보여서는 아닐 것이다. 평소 소외된 약자에게 마음의 시선을 빼앗겨 버린 작가의 품성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그 시선이 우리네 사는 곳이 아닌 저 먼 만주땅을 향하신 것도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도 혼자 진실을 알고 모른 척하기엔 같은 민족된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 여기셨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혼자 세상을 향한 ‘고발’이 아닌 서로 같이 나누는 ‘고민’이길 바라는 취지가 많다고 보고 싶다. 그래서인지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아이들 표정이 담긴 사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가만 보면 색상만 컬러이지 우리의 6,70년대 사진을 보는 느낌이었다. 흡사 북한을 연상시키는 장면도 있었지만 북한사진에서 감지되는 어떤 경계심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그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에 대한 호감과 반감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또 우리와 다른 게 있었다면 아이들의 눈빛이었다. 가난하고 낙후된 시설이라고 모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흑백사진이라고 눈빛마저 슬프란 법은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하나같이 미소짓고 있어도 기운은 없어보였다. 속으론 슬프지만 그래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힘에 부쳤던 것일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작가가 매일 비오는 날만 셔터를 누른 것은 아닐텐데 그곳은 햇빛마저 회색이었고 거리마저 푸르스름해 보였다. 작가는 왜 그곳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아이들의 눈물을 기어이 전하고 싶었을까. 혹시 그 눈물에서 우리가 지난 시절 지니고 있었던 무엇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잃어버려 애써 기억해야만 생각나는 더욱 애틋한 그것은 아니었을까.

  책을 덮고 처음으로 그들을 생각해보았다. 내게 있어 만주와 조선족은 그들과의 거리만큼이나 너무 멀었다. 한마디로 세상의 관심 밖의 이야기라고 해야 맞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작년에 故 박완서 작가의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에 등장하는 연변 아줌마와의 에피소드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박완서 작가는 어느 날 식당에서 실수로 손님과 사장 모두에게 심한 모욕을 당했던 연변 아줌마가 식당 뒤켠에서 (가족으로 생각되는)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오열하는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지인들과 일본으로 여행을 가서도 연변사람으로 보이는 도우미를 만났는데 그녀는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과는 달리 무척이나 당당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에 박완서 작가는 우리와 일본 연변 아줌마의 차이가 조선족의 심성, 자질등의 문제가 아닌 사람을 부리는 용인술의 차이라고 지적했다. 똑같이 타국에 와서 고생을 하는 외지인에게 우리쪽은 모멸감을 주었지만 저쪽은 자존심을 지켜주었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결국 노동의 질을 결정한다는 말씀이었다. 그 글을 읽고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이 엊그제만 같다. 나 역시 조선족 근로자들은 중국인과 탈북자와 동일선상에 놓고 은근히 무시한 적은 없었던가. 대개 우리 현장에서 저임금의 노동자로 분류되는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에게 하듯 정중히 응대한 적이 있었던가. 나만해도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조선족 아주머니의 음식 서빙에 맞같잖은 시선을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대놓고 무시한 적은 없었지만 아마도 시선만은 일반 직원보다 아래를 향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족은 한국에 돈벌러 들어와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근로자라는 생각, 그야말로 '싼 인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나는 해 본 적이 없었던 듯 하다.

  그리고 요즘 들어선 조선족 근로자들보다는 한국에 시집온 동남아 여성들의 인권문제가 더 사회적으로 부각되면서 그들은 사회문제에 있어서도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는 추세였다. 그런데 얼마 전 신문에서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 신종 ‘다방촌’이 생겼다는 불쾌한 내용의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기사의 내용은 주로 조선족, 탈북녀등으로 구성된 여종업원을 이용하여 변태 영업을 하고 있는 다방들이 그 지역에 주력상권을 형성해 어엿한 하나의 스트리트를 조성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식당에서만 일하는 줄 알았전 조선족 아주머니들이 더 나은(?) 일자리라도 찾은 것일까, 싶었다. 한국의 남성들이 커피나 차를 마시러 다방에 들른 척 했다가 결국 노래방, 술집, 여관등의 2차로 종업원을 데리고 나가는 방식. 티켓다방과 유사한 멀티형의 접대인데다가 말 잘 듣고 뒤탈 없는 조선족여성인 것이 고객에게 큰 장점인 영업이었다. 그들의 사연중에는 조선족 남편과 결혼해 세 살짜리 딸을 두고 온 조선족 아기 엄마도 있었다. 중국에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한 달 30만원이 고작인데 그곳에선 열배인 300만원 이상을 벌고 있어 조선족 여성들에게 인기직종이라는 것. 그때만 해도 나는 순간적으로 이 지역의 주거환경에 대해서만 큰 실망을 하였고 이차적으로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같은 동네 아이가 있는 학부모였다면 나와 같은 순서로 걱정을 하였을 터이다. 종업원이라는 조선족 여성들조차 떠올리지 못했으니 당연히 그들의 자식까지 생각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다방촌의 종업원인 조선족 여성들이 두고 온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그 기사와 이 책이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조선족 여성들이 그만큼 물불 안가리고 주택가 성매매현장에 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이 책속의 아이들 엄마가  무엇에 우선가치를 두고 있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그 아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엄마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모두 돌아오지 않거나 매정하게 돌아서 버린 모정이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모두 시퍼런 멍을 가슴에 새긴 채 어른이 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작가가 물론 잘잘못을 따지자고 그 먼 만주까지 다녀온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자꾸 무심코 스쳐 넘긴 신문기사와 함께 어쩐지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처음에 짠하게만 생각되었던 아이들에게 자꾸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내 마음은 작가로부터의 감성에서 시작되어 상투적인 동정심을 넘어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미처, 몰랐던 이야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은 조선족에게만 해당되는 生의 시련은 아닐 것이다. 1992년 한·중 수교로 중국 일대에 ‘코리안 드림’ 열풍이 불면서 중국 조선족 다섯 명 중 한명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우리도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인식하고 ‘아메리칸 드림’에 미래를 걸었던 시기가 있다. 대략 10년 전부터 시작된 조기유학의 열풍으로 ‘기러기 아빠’라는 반강제 결손가정의 형태가 사회이슈로 떠오른 적도 있다. 생계 및 취업형 이민이나 유학등으로 완전가정의 형태가 잠시 유보되는 일은 우리같이 야망과 목표가 뚜렷한 개발도상국형 나라에선 익숙한 모습이다. 그런데 작가가 취재한 그들의 환부는 대략 원인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그 결과만은 다른 양상이었다.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이 초래한 것은 바로 자신들의 아이들을 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 꿈의 시작이 아이들을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더 좋은 학교를 보내겠다는 의지였다는 것. 처음부터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아 보자고 떠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부모와 자식간의 끈끈한 유대를 자랑하는 그들인만큼 이 파장의 상처는 많이도 깊어보였다. 그리고 상처의 한 가운데에 아이들은 대책없이 노출되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한국으로 나간 엄마가 자신의 아빠와 이혼하고 한국남자와 결혼을 한 엄마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술로 지내는 아빠로부터 잦은 폭력에 노출되는 위험에 놓여 있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양쪽 부모 모두 돌아오지 않자 아이들 양육을 떠맡게 된 조부모가 학교를 등교시키는 풍경은 그래도 다정해보였다. 결국 이모나 고모등의 친척집을 전전긍긍하다가 그들마저 한국으로 가버려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의 학교 기숙사에서 사육과도 같은 소년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에게 불어 닥친 ‘한국바람’은 쓰나미와도 같은 가정의 폐허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너무도 쉽게 버려져 있었다. 같은 부모로서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식구들이랑 함께 살 때 우리 엄마, 무척 단단’ 했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이곳 식당에서 힘겹게 일하는 조선족 여성들이 떠올랐다. 뒤돌아 어깨를 떨며 오열하던 연변족 아주머니의 사연이 생각나 그들이 아이를 저버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찾겠다고 하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선 가족에게 봉사하며 어른에게 공손했던, 그렇게 단단하기만 했던 엄마가 ‘사상품성이 약한 나라’인 한국바람이 들어 드라마에 나오는 다정하기만 한 한국남자와 살겠다고 자신들을 팽개쳐 버렸으니 ‘한국은 절대 안심할 수 없는 나라’인 것이었다. 아니 미국이나 일본보다 무서운 나라가 한국이었다.

  이 책에는 대화중에 유난히도 ‘사상품성’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만큼 아이와 교사 모두가 사람의 ‘사상품성’을 중요시한다는 의미로 들려 새삼 ‘사상품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중국에선 정치, 사회, 법률, 윤리 과목을 ‘사상품성‘과목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법도 야물지 못하고 사람들도 허세로 가득한 한국이 ’사상품성‘이 약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조선족 사회에서 지향하는 고유의 '가족윤리', '성윤리'가 약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내 생각은 아이들이 자신들과 부모를 말할 때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 따라하기‘ 병에 걸렸다는 자조적인 반성의 대화속에서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한류 드라마, 그곳에서 열광하는 우리의 드라마는 모두가 <대장금>과 같지는 않다. 그들이 드라마를 통해 본 한국은 여성이 보다 자유롭고 남성은 보다 근사하다. 주인공은 대부분 가정을 버리고 자신의 사랑을 찾아 떠난다. 떠나지 않더라도 출생과 가정, 학력, 직업 모두가 내세울게 없었던 한 여인의 앞에 백마탄 왕자, 대재벌의 후계자가 꼭 한번은 나타난다. 신데렐라식의 러브스토리에 뻔한 결말일지라도 중국에 수출된 드라마는 백퍼센트 한국에서 대흥행을 한 작품에 한한다 할 것이다. 즉, 우리가 죽도록 열광했기에 그들에게도 열광적인 시청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들에게 그 결과는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가 이혼율 1위라는 굴욕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무엇을 수출한 것일까.

  묻지마 한국행을 강행한 학부모들, 차후에 아이들을 방치하는 학부모 때문에 졸지에 학업외의 생활까지 지도하게 된 현지 교사들은 말한다. 한국바람 때문에 가정은 파괴되었고 조선어는 쇠락했으며 덕분에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다고. 한국에서는 아파트를 사두어야 가격이 오른다는 것을 배웠기에 조선족 사회에선 돈벌어 무조건 아파트부터 사고 본다고. 재물과 성욕에 미쳐 자녀를 등한 시 하는 것은 암보다 무서운 정신병이라고. 교사를 포함해 작가가 만나본 현지 어른들은 한국에 나가있는 어른들에게 대부분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남겨졌거나 돌아온 어른들은 하나같이 ‘한국에서는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중국으로 돌아오면 다들 주인이 되려하는 우두머리 병’을 고쳐야 한다고 쓴소리를 하셨다. 사실 한국에서는 고시원이나 쪽방, 혹은 식당에서 숙식을 하며 휴일도 없이 장시간 노동환경에 노출된 조선족 여성들, 자신은 안먹고 안입고 돈버는 기계처럼 고향으로 돈을 부치는 여성이 더 많을지 모른다. 한국에 왔다고 모두다 아이들을 버리거나 남자와 바람이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무어라고 한국병에 물든 조선족 여성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병은 사실 조선족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바이러스 유포자는 우리들 자신이고 치명적인 병균으로 생성, 발전시킨 것도 모두 우리들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유포하고 싶은 것은 조선족 여성의 헛된 욕심과 무모한 이기심이 아니라 그들 아이들의 상처와 미래이다.

  이 책에서 가장 내 마음을 무겁게 하던 친구는 미혜와 정우였다. 아마도 내 아이와 꼭 같은 또래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곧 아이들의 부모가 나와 같은 세대이고 내 부모가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 나왔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그 말은 나와 다르지 않은 피를 가진 동년배 여성이 자기 속으로 낳은 새끼들이 바로 미혜와 정우라는 뜻이기도 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집필하는 계기가 된 미혜는 글로만 보아도 참 똑똑한 아이였고 사진이 유독 인상깊었던 정우는 그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작가는 3년 전 흑룡강성 해림의 하숙집에 머물면서 만났다는 미혜와 다시 재회를 하게 된다. 10년 만에 아빠를 만나 보았다는 미혜는 여전히 한국과 수교한 학교와 좋은 관계를 맺으며 한국의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만약 미혜가 수교한 학교가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였다면 미혜는 딸아이의 귀한 친구가 될 뻔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으나 미혜의 부모님은 여전히 한국에서 돌아오지 않을 성 싶었고 언니도 타지로 떠난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돌봐주던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이모마저 이혼해 그토록 싫다는 하숙집을 알아보던 중이었던 것.  하숙집에 들어가기에 미혜의 나이는 이제 열두살이고 여자아이는 그때부터 생리적 변화가 시작된다. 나는 지금까지의 미혜의 인생도 가여웠지만 앞으로서의 성장이 더 가슴아팠다.

 “아저씨랑 정들었던 아파트 하숙집 아시죠? 그 아주마이가 한국에서 돌아와 함께 있슴다. 이모보다 더 잘해줌다.”

 


 

 

 

 

 

 


 '모든게 얄미웠슴다. 엄마 아빠도 저자신도 눈물도'    '매일매일 보고싶슴다. 그렇지만 굳세게 참을 자신 있슴다'
 


  어른스러워져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미혜가 작가와 통화하며 어른처럼 들려준 목소리였다. 결국 하숙집으로 들어가게 된 미혜는 이제 부모와 같이 살게 되는 희망같은 건 일찌감치 버린 듯 느껴졌다. 예전엔 ‘철이 없었지만’ 이참에 한국에 가면 아빠와 더 마음을 나누겠다는 미혜의 야무진 목소리가 나는 목이 메었다. 아직 어른이 아니어야 할 나이에 어른들로부터 떠밀려져 할 수 없이 어른된 마음을 훈련할 수 밖에 없었던 미혜에게 내가 어른인 것이 많이 부끄러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은 미혜의 프로필이 담긴 단정한 사진 한 장이었는데 슬픈 표정속에서도 눈매는 허투르지 않았고 꼭 다문 입술이 꽤 야무져 보였달까.(좌, 미혜) 무슨 책을 펼쳤는지 모르지만  반듯한 자세와 태도가 범생이의 그것과 같아 나쁜 쪽으로 빠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면 정우라는 남학생(우, 정우)은 너무 귀여워 한번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한국국적을 가진 조선족 여성이 운영한다는 복합건물 꼭대기 4층에 위치한 희망학원, 아이들 합숙소에서 만난 4학년 정우의 엄마는 장애인이고 아빠는 한국으로 떠났다. 내가 울컥했던 건 아빠가 매일매일 보고 싶지만 2012년까진 굳세게 참을 자신이 있다고 아빠가 그때까지는 돌아온다고 약속했다는 정우의 말이었다. 나는 자꾸 정우의 그 순진한 믿음이 눈치도 없이 서러워 지는 것이었다. 정우는 그 마음 그대로 군기 바짝든 신병처럼 부동자세로 미소를 지으며 작가의 카메라에 담겨졌다. 사연없이 사진만 보면 아이의 부모가 다 부러울 미소였다. 동그란 얼굴, 발그레한 볼과 맑디 맑은 그 눈빛에서 나도 작가가 언급한 아이의 가없는 순수함을 발견하고 말았다. 바로 이런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 때문에 작가는 시련과 아픔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싶었던 것일까. 부모를 그리워 하는 노래를 합창하며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아이들의 눈물을 가슴에 고이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벌써부터 정우의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봐 저 맑은 정우의 눈에서 기이이 눈물이 떨어질까봐 가슴팍이 저려온다. 작가는 이러한 사연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 부모들에게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지만 과연 고단한 노동속에서 우리도 흥미롭지 않아 집어들지 않는 이 책을 자신들 이야기라고 애써 선택할 기회가 주어질까 싶었다. 그렇다고 사연을 접한 우리들이 조선족 여성들을 찾아가 실종 어린이 찾기 식으로 무언가를 실천해야 할 성질의 문제도 아니었다. 결국, 가슴으로 울었던 사연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었고 그것이 머리로 이어져야 하는 문제였다. 하루빨리 연변족 아줌마가 목표한 돈을 모아 가족들과 같이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는 박완서 작가의 문장이 다시 어른거렸다. 이 글을 쓰는 내 문장에서도 미혜의 부모님과 정우의 아빠가 빨리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아이들의 노래 <아빠 곱니 엄마 곱니>의 한구절처럼 물컹하게 샘솟고 있었다.  


                         엄마야 아빠야 우리 우리 함께 살자   해도 있고 달도 있는 푸른 하늘집처럼


다시, 생각해야 할 이야기

  이 책은 내게 조선족과 아이들을 다시 생각하게 할 의미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장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들의 환부를 뒤늦게라도 글과 사진으로나마 확인하여 상처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시금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비로소 그들로부터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저만치 앞서 있어 전달하고 가르쳐 드려야 할 것이 한류속에 포장된 화려함과 허세는 아닐 것이다. 돈이면 능사인 세속의 논리는 아닐 것이다. 외려 우리 자신도 한국병으로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가족간의 가치와 그의 바탕이 될 진실한 인간성일 터이다. 우리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우리 자신의 환부를 부러 알려줄 필요는 없었던 것일지 모른다. 이 책에는 조선족 100년의 이민사를 한눈에 꿰고 있는 어느 어르신의 뼈아픈 말씀이 마치 작가의 당부처럼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 1920년대부터 1992년 한중수교까지 그 역사속에는 일제침략과 광복, 한국전쟁과 중공군 철수등의 우리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뼈대가 되어 때로는 북한으로 때로는 남한으로 그들을 이동하게 한 것이다. 당장 우리네 일상과 삶에 상관이 없어 보이는 그들이었지만 실은 같은 민족으로서 걸어온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달랐을 뿐 한국이라는 뿌리에서 시작된 처절한 생존의 시나리오엔 예외가 없었다. 뿌리가 같은 역사로 파생된 오늘과 내일에 똑같이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다만 이주하지 않아도 되었던 우리의 경우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 불굴의 끈기로 이제는 꽤 주목받는 어엿한 나라가 된 것이다. 하지만 지난 몇십년을 돌아 보면 우리는 다른 나라가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하고 다른 나라가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도 해 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라가 되었다. 작년에 개최된 G-20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역순으로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제 원전기술도 수출하고 남극에 기지는 물론 우주선도 쏘아 올리고 엑스포, 월드컵,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등 국제 스포츠 행사는 빠짐없이 유치한 세계에 몇 안되는 나라에 속한다. 인천국제공항은 매번 종합 서비스가  세계 1위를 달린다하며 초고층 빌딩이나 새로 짓는 다리 역시 규모면에선 언제나 세계적인 나라이다. 하다못해 청춘의 자살율, 이혼율까지 1위인 것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가 확실히 세계병, 일등병에 걸린 것은 맞다는 생각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이돌 그룹의 한류가 드라마의 한류를 이어 전세계로 퍼져 나간다는 흥분된 보도는 역시 성과위주, 성적위주의 우리들 스스로를 위한 과대평가는 아니었을까. 숨가쁘게 앞만보고 고고씽한 결과로 많은 부분 짧은 시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렇게 달려오는 동안 우리는 가난과 인권유린, 소수 및 약자의 목소리를 흘려듣고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상대가 져야만 우리가 이기는 게임,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경쟁에 익숙해지느라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엔 어색하고 어려웠던 것이다. 모두 물리치고 1등이 되는 환희에 중독되어 2등이나 3등, 혹은 참여의 가치엔 비중을 두지 않게 된 것이다.

  먼 곳의 아이들로부터 내가 너무 거창한 한국의 일등병으로까지 확대하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제 우리는 좀 솔직해지고 좀 더 아래를 곁을 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외양적, 가시적인 성과에만 들떠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아쉬워하지 않는 반 윤리적인 태도를 돌아보아야 할 듯하다. 우리는 실은 쓸데없고 엉뚱한 자랑을 수출하고 전파하고 있었던 것임을 깨우쳐야 할 듯하다. 책 한권 읽었다고 금방 한국병에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인이면서 주제넘게 피상적으로 한국병을 비판하고 반성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 같이 안다는 것, 알고 있다는 것,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언제라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애틋해지는 오늘이다. 그 안다는 것이 곧 ‘한숨을 내쉬고 그 다음에는 말과 눈물이 동시에 터지는 가슴병’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만주의 아이들에게 이 책을 만났다고 건낼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일지 모른다. 자신들은 ‘운복이 없는 세대 같’다는 서늘한 목소리에 아니라 화답하는 마음인지 모른다.

  중국내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을 알지 못했다.(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민족문화에 애착을 가지고 두만강과 압록강의 후예로서 조선의 피를 타고 났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지도 생각치 못했다. 적어도 우린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만큼은 그들의 의식을 존중해야 할 입장이다. 그러므로 우린 그들이 한탕주의와 자본의 논리에만 물들어 한국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에 뒷짐지고 구경하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의 상황과 그쪽의 사정을 잘알고 틈새에서 한몫 챙기려는 브로커들이 원망스럽다. '한국은 경제만 외치느라 상식을 잃어'버렸다는 어느 한국 기업인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생생하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으로 부모와 자식중 한쪽을 포기해야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조선족 어르신의 탄식을 못들은 체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불행에 아주 우연한 또는 필연한 씨앗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이라도 그 씨앗에 무심코 물을 주고 어제처럼 햇빛을 비추는 우리의 무책임함에 고개를 숙여야 하지 않을까. 만주의 아이들이 한족의 아이들과 시작부터 경쟁에서 패배감을 느끼고 뒤처지는 것이 우리 아이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일까. 지난해 2010 뱅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우리에게 금메달을 안겨준 선수들을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에 태어난 G(Global)세대라 칭한다고 들었다. 강대국에 대한 열등감과 배타심이 없는 그들을 자신감과 함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세대라 띄워놓고 우리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뉴스를 분명히 기억한다. 중국에서도 1980년 이후 태어난 신세대를 ‘바링허우’(80後)라 칭한다고 한다. 개인주의와 소비지향적인 성향의 이들 젊은이들이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각 분야에 대거 포진해 중화(中華)부흥이라는 중국인들의 염원을 실현시켜주길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동시대 같은 나라를 살고 있는 코리안 드림 베이비(?), 만주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이 아이들의 불행한 미래가 과연 우리 아이들의 행복한 내일과 아무런 역학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코리안 드림이 허무한 꿈으로만 종결되어 코리안 킬러로 성장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를 원망하고 보복할 것이 두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행에 분명 우리가 기여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중국의 한족에 무시당하고 조상의 나라 한국에 상처받으며 성장할 만주의 아이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 나만의 치기, 쓸데없는 관심이 아니었음 좋겠다.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그 알고 있음의 눈동자가 서로 우리 얼굴을 비추고 그렇다면 하는 다음의 손가락이 우리 가슴을 향해 있길 간절히 기대한다. '다정도 병인 양' 작가는 아는 것만이 힘이 되는 '병'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었을 터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린 오늘의 '병'으로 머리를 맞대어 내일의 치유책을 찾고자 했을 터 이다. 잠시 가슴은 시리고 눈가는 뜨거워졌지만 다시 머리는 서늘해져야 할 순간인 듯하다. 이 책은 바로 진실을 알고 난 후의 우리 심신을 새롭게 돌아보는 특별한 선물일 것이다. 아는 것만이 나머지 힘이 되는 독서의 오래된 교훈일 것이다. 우리 역시,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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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고래논술토론 2011-05-11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것이 힘이 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제발, 제발, 시작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사람 2011-05-11 16:44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덮고난 다음부터는 우리 한류의 수출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특히나 드라마는 같이 열광하고 감동받았으면서도 마약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어요. 그들이 현실과 구분할수 있는 판단력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피해사실을 안 이상 한류에 자랑스러워 해서는 안될것 같아요
책은 아무래도 속도가 느리고 일부에 국한되니, TV 시사프로에서 만주아이들을 조명해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