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최인호를 찾아서

 
내가 아는 작가 최인호는 가장 많은 작품이 영화화된 작가이다.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작품만 해도『별들의 고향』(이장호 감독, 1974),『적도의 꽃』(배창호 감독, 1983),『고래사냥』(배창호 감독, 1984),『깊고 푸른 밤』(배창호 감독, 1984), 『겨울 나그네』(곽지균 감독, 1986)등 대부분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에서 ‘고래사냥’과 ‘겨울 나그네’는 정확하게 내 청소년 시절의 스크린을 관통한 작품이다. 주로 이장호, 배창호등 스타감독이 연출하고 안성기, 장미희, 이미숙등 당대 톱스타가 열연해 각종 영화제에서 단골로 상을 가져간 작품이기도하다. 내 기억으론 당시 배창호와 안성기, 그리고 최인호의 조합은 곧 대 흥행공식을 의미했었다. 그러니까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 질 경우 상업성은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부분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많았고 주로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인데다가 배경은 도시였기에 그들은 예술적, 퇴폐적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인호라는 이름 석자는 분명 영화와 소설 모두 주류의 시스템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대중소설가였고 작가로서 그 이름은 성인의 영역에 있다고 판단한 내가 그의 작품을 문학으로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 그냥 그 이름만으로 잘 알고 있는, 어영 부영 읽었다고 생각되는 유명한 작가들 중 한사람일 뿐이었다. 동시기를 살아 내온 작가들 중에 한수산, 박범신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최인호는 심지어 문학인이 아니라 영화인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분명 작가와도 모종의 독서 인연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주로 역사소설을 집필했기에 내 관심분야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한 작가였다. 그런 그가 암투병 중에 전작소설을 완성했다는 소식은 처음부터 굉장히 설레는 뉴스였다. 은연중에 소식을 보고는 이제는 소설을 못 쓰시겠구나, 그런 섣부른 생각을 했기 때문에.(놀라웠다) 나도 몰래 그를 병들은 늙은이 취급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간소식은 감동이었고 그동안 그의 소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나로선 세월의 오래된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최인호라는 작가에 대한 미안함과 최인호 문학의 낯설음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지난주 그의 초기 작품 <타인의 방, 1971>, <깊고 푸른 밤, 1982>이 실려 있는 소설집을 빌려와 뒤늦게 읽어 내려갔다. 아니 <타인의 방>을 읽지 않고서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타인의 방>은 40년 전 ‘70년대를 상징하는 공간적 은유’라 불리던 그 시대 문제작이었다. ‘타인의 방’의 공간배경은 도시를 대변하는 아파트이며 (부재중인)아내를 포함해 안방과 거실에 놓여진 낯선 사물들의 전시관이다. 소설 속 자아가 40년 후 그 방을 잘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지금에서야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다는 작가의 증언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우연히도 지금의 내 나이만큼 이었다는 것도 나로서는 그냥 넘기고 싶지 않은 우연에 속했다. 또 <깊고 푸른 밤>은 제 6회 이상 문학상 수상작(1982)이면서 얼마 전 쎄시봉 콘서트로 세간에 많이 회자된 가수 이장희를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기도 하다. 아련한 내 기억속의 ‘깊고 푸른 밤’은 단연 장미희와 안성기의 자동차 본네트(보닛)위 로맨틱한 정사신이었다. (다른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내가 성인이 되고난 후 보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깊고 푸른 밤’은 소설속의 밤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소설 속의 밤은 절대 육화된 로맨스의 밤이 아니었다.(얼마나 창피하던지) 그런데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들 중에는)30년 동안 나처럼 ‘깊고 푸른 밤’을 한국 영화의 80년대 에로틱한 밤의 대명사로 여겨온 독자들이 많을 듯하다. 깊고 푸른 밤은 소설 속 ‘그’가 마리화나를 피운 후 걸어 내려간 해변에서 밀려오던 검은 파도와 그 파도로 자신의 분노가 누그러지던 그날 밤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는 내면의 밤이다. 두 작품 다 급속한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자체가 답이 되는 소설이기에 과거 최인호의 문학 연장선상에서 그들은 이번 소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이며 그곳에서의 나는 누구인지 묻는 것은 최인호의 오래되고도 끈질긴 질문방식이 아니었을까. 두 작품은 충분히 오늘의 소설을 낯설게 하지 않는 일등공신이었고 모르고 넘어갔으면 리뷰를 쓰는 것 조차 어려웠을지도 모를 정도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 깊고 푸른 밤 -  1984, 배창호 감독, 안성기 장미희 주연 >

 
  <타인의 방>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공간에서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로 한다.


지난 여름은 행복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입으로 중얼거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행복했었지. 행복했었구 말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소리에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좀 무안해졌고 부끄러워졌으므로 과장해서 웃어 젖혔다.

방안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과 어둠이 결탁하고 역적모의를 논의한다. 친구여, 우리 같이 얘기합시다. 방 모퉁이 직각의 앵글 속에서 한 놈이 용감하게 말을 걸어온다. 벽면을 기는 다족류 벌레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옷장의 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이 투명한 교미를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는 어둠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벽이 출렁거린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방 벽면 전기다리미 꽂는 소켓의 두 구멍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여, 귀를 좀 대봐요. 내 비밀을 들려줄게. 그는 그의 오른쪽 귀를 소켓에 밀착한다. 그의 귀가 전기 금속부품처럼 소켓의 좁은 구멍에 접촉된다. 그러자 그의 온몸이 고급 전기난로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몸에 스파크가 일고, 그는 온몸에 충만한 빛을 느낀다.  
- 타인의 방 / 1971


  이렇듯 도시에 떠밀려 자신이 속한 공간과 대화를 트게 된 소설 속 자아가 <타인의 방>을 뛰쳐나와 <깊고 푸른 밤>의 해변에서 발견한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거센 파도에 의해서 바다를 건너 밀려온 죽은 시체처럼 바위위에 쓰러져 누웠다. 그를 낯선 땅으로 유배시켜온 파도들은 서둘러 물러가고 갓 도착한 빈손의 파도들만 그를 사로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제야 줄곧 그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분노의 불길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보았다. 파도에 의해서 밀려온 낯선 뭍으로의 망명이 그의 분노를 잠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살아온 모든 인생, 그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삶들, 그가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허비했던 명예와 허영, 그가 옳다고 믿었던 정의와 법,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배반당했던 그의 욕망, 끊임없이 추구하던 쾌락과 성욕, 그가 한때 가졌고 버렸던 숱한 여인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무참하게 얻어맞고 마침내 처절하게 패배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절하게 패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분노는 참따랗게 재를 보이면 소멸되었다.  
- 깊고 푸른 밤 / 1982

 
  살면서 자신의 실패와 추락을 물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사실 심리적인 또 다른 패배를 불러온다. 심리적인 상처는 보이지 않는 분노를 쌓게 하고 사람은 결국 그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온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한수산은 막살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어느 완벽주의자 교수의 분노를 <타인의 얼굴>이라 호칭, 환유했다. 자신의 은사가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가 확인한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두려움과 혼란, 무력에 빠진 노란 얼굴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싸워. 정상적인 자아와 병든 자아가 이십사 시간을 싸워. 이게 나야. 내가, 두 개의 내가 살아있어. 내가 나를, 정상적인 자아가 병든 자아를 두 시간만 재워놓자. 그러면서 잠이 들어. 여덟시에 깨우자. 그러면서 살아. 병든 자아를 달래서 약을 먹이고, 병든 자아에게 사정해가며 물도 몇 모금 먹고......”

- 타인의 얼굴 / 1991

  나는 췌장암에 걸린 교수가 하루는 ‘그 사람이 뭔데 나보다 이십 년을 더 살아.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다가도 ‘뛰어내릴까. 그래서라도 죽는 게 낫지 않나. 딱 죽는 약이 있으면 먹을까도 싶고.’ 하는 혼란이 어쩐지 침샘암에 걸려 투병중이었다는 작가의 고통과 겹쳐졌다. <타인의 얼굴>에서 교수의 마지막 얼굴을 확인한 그는 그의 죽음이 슬프기도 하지만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끼는 자신과 건강을 조심해야지 하는 자신도 자신 속에 살아 있었음을 확인한다. 결국 수많은 자아와 싸우는 자신만 존재할 뿐 어떤 자아도 실체로서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의 사막같은 깨달음은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준다. 내가 믿고 있었던 내가, 내가 알고 있고 상대가 알고 있는 나라는 자아는 어쩌면 원래의 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자아에는 원래 원형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최인호의 얼굴은 소설 속 타인과 더불어 그 어디에도 있으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는 없었다. 최인호를 따라가는 것은 낯익은 줄 알았던 작가, 낯익어만 보였던 소설과 조우해 낯선 타인과도 같은 내 자신을 만나는 귀한 시간은 아니었을지.


스위치를 찾아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덮고 나서 나는 만 하루 동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슬프고 쓸쓸한 감정에 속했지만 그대로 모두 받아들이긴 힘들었던 것 같다. 타자화된 소설은 많이 힘겨웠고 아프게 느껴졌다. 작가가 손톱과 발톱이 빠져가며 원고지를 작성했다는 소식때문 이었는지 기나긴 투병의 현장에 같이 동참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날을 받아놓은 말기암 환자의 병문안이라도 간 채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온 기분. 밤새도록 그의 고통을 확인한 후 숨죽이며 맞이하는 다음날 아침. 그런데 막상 시간에 떠밀려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 그렇지만 어서 빨리 현실로 복귀해 남은 생을 허비하지는 말아야지 하는 야릇한 다짐. 아픈 사람 위로하러 갔다가 미안하게도 내 아픔만 위로받고 돌아가는 염치없는 심정...객관적으로 나는 멀리 떨어진 한명의 살아있는 독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어쩌면 발이 짓무르고 피가 배어 나와도 어떻게든 마지막을 향해 걷고 뛰어가는 마라토너의 엄숙한 주행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시간이었달까. 그러니 그의 완주는 소설의 결말과 상관없이 눈물이 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니체는 ‘자신이 가진 힘의 4분의 3 정도의 힘으로 작품이나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충고한 바 있다. 너무 완벽하게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기울여 완성한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의 긴장과 고통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일 수도 쾌감일 수도 불쾌감일 수도 있지만 절대 느긋한 여유를 전해주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최인호는 모두를 쏟았다.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가진 것의 이상을 쏟지 않으면 처음부터 완주가 불가능해 보여서 였을지도 모른다. 좀 더 가지고 여유롭게 마친 자의 여유라고는 털끝만치도 확인할 수 없었던 이 소설은 분명 지금까지 마주한 소설에서 느끼지 못한 고통의 낯설음, 불쾌한 이질감을 제공했다. 그것을 차마 감동이라 하기엔 내 스스로가 주제넘어 보였다.(감동이라 말하면 안된다) 후배 소설가 김연수는 발문에 최인호의 계속하여 쓰고자 하는 힘이 소설가인 자신을 구원한다고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소설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작가로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운명이야 어느 작가도 피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이번 운명이 유독 잔인하게 느껴졌던 건 왜일까.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절벽에서 자신인 자신과 타인인 자신을 합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는 날까지 분열되지 않겠다는 자기 맹세는 아니었을까. 다시 출발하고 싶다는 의지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곧 죽음을 이기는 일이라 생각한 냉철함은 독자로서 속편한 구경거리는 아닌 것이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구원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 바통을 이어받은 독자는 이제부터 균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토요일 7시에 시작해 월요일 8시 14분에 막을 내린다. 특이하게도 첫 문장은 <POWER ON> 이고 마지막은 <POWER OFF>이다. 어떤 장치에 전원이 들어와서 그것이 꺼지는 사이, 즉 기계가 작동되고 있는 운영시간은 꼭 2박 3일간의 주말에 놓여있다. 주인공 K가 금융회사의 차장인 것으로 보아 이 시간은 샐러리맨의 달콤한 휴식시간에 해당한다. 누가 파워 스위치를 켜고 누가 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건 이 소설이 그 꿀맛같은 주말동안 시간단위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매 순간 숫자로 표시된 시각과 K, H, MS, JS등으로 기재된 출연진,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회, 인문학적 용어들은 이 작품을 절대 친근하게 바라볼 수 없도록 객관화 하고 있었다. 全 소제목은 8시 15분, 9시 53분과 같은 식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공간은 아무리 바뀌어도 큰 변별력이 없어 보였다. 거대한 지하창고나 광활한 사막이 배경인 듯 거실과 안방, 부엌, 카페, 극장, 병원, 지하철, 버스등은 현장감을 가지지 못한 채로 관념상의 의식적 공간에 머물렀다. 설계용어로 표현하자면 3D 이미지를 평면적인 도면으로 찍어 눌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POWER ON>의 의미도 처음엔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인지 기계인지 아니면 이야기인지 그것이 그동안 작동되어 왔다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에 알려주므로(깨닫게 되므로) <POWER OFF>가 된 후라야 그전에 파워가 들어왔다가 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깨우침을 알려주는 강력한 신호가 아닐 수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 전까지 아침이면 기계처럼 일어나 출근을 하고 로봇처럼 업무를 수행하고 밧데리가 방전된 채 퇴근을 하던 반복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무언가의)파워가 켜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파워신호는 자아의 분출과도 같은 자발적 내면의 신호인 것이다. 그 내면의 신호가 켜지자 아이러니 하게도 외부의 모든 신호는 정전이 된다. 아니 결국 방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2박 3일간의 파워여행을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한 내면여행으로 테마를 설정하신 듯했다. 가이드도 없고 목적지도 없고 물론 동반자도 없이 처절하게 외로와 보이는. 내가 보기에 이 여행의 목적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 같진 않았다. 누구라도 일단 파워스위치가 켜진 이상 그 여행은 떠날 수 밖에 없는 여행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왜 여행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왜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었나, 가 맞는 질문이 아닐까. 떠나는 건 절대 자발적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소설 속 <POWER ON>은 자동사의 위치가 아닌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내가 아닌 타인, 타인으로서의 또 다른 자아가 스위치를 실행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자아는 원래의 나일 터이니 알고 보면 범인은 나이기도 한 것이다. 파워 스위치를 누가 켰는지, 이것은 이 소설에서 숨겨진 복선이자 작가의 은밀한 힌트이기도 했다.


육체를 찾아서


그 사람이 다름 아닌 K의 모습이 투영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K는 필요이상의 시간을 소비하였다. 거울 속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21p


  누구나 한번쯤 거울속의 자신이 전에 없이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 낯설다는 느낌은 기존에 자신이 생각하는 원형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기준점이 있어야 그와 다르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거울을 보기 전엔 누구나 그 전까지 뇌에 입력된 자신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면 매일 거울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원형의 이미지는 사실 매일 갱신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람은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은 달라진 타인으로서의 자신을 매번 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다만 점진적인 (타인으로서)자신의 변화를 자각할 수 없을 뿐인 것이다. 내가 모르고 있다고 내가 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 작가는 물론 이처럼 서서히 노화된 외양으로서의 변화를 스스로 감지한 주인공을 말하진 않았다. 문학은 일차적이고 시각적이지 않다. 주인공 K가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하는 순간은 누구보다 정확한 자신의 모습일 때였다. 통시적이라기 보다 공시적인 시각이다. 금융회사의 모범적인 직장인으로서 매주 한번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 친구를 두었고 지식인으로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자기원칙이 분명한 주인공이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한 최초계기는 거울 속 나신이었다. 기계작동의 시작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사내였던 것. 그날 아침 ‘그 누구도 작동하지 않는 자명종이 스스로 울린 것’처럼 K는 누군가 자신의 옷을 벗겨낸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파워논리에 비추어 볼 때 옷도 타인인 자신이 벗겼을 확률이 백 프로다)

  리뷰를 시작하면서 느낀 것인데 거울 속 나신으로서 자신의 모습은 거짓없는 진실, 순수를 추구했던 육신, 새롭게 시작하고픈 욕구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의지, 절망의 늪으로 빠져버리고 싶은 충동, 허물어진 육체를 가학하고 싶은 욕망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주제넘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병든 작가가 자신의 현재 육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고통스런 시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욕실에서 시작된 알 수 없는 불안은 대체로 낯익은 존재들에 대한 낯설은 느낌이었다. 낯익은 아내, 낯익은 딸, 낯익은 강아지, 낯익은 친구에서부터 낯익은 공간, 낯익은 풍경까지. 기존에 자신과 관계하며 자신을 알던 모든 사람은 가면을 쓴 존재로 인식되고 강아지마저 자신을 낯선 침입자로 취급한다. 심지어는 죽었다는 장인이 버젓이 살아나 처제의 결혼식에 나타나고 사람들은 누가 누군지 모르는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1인 다역 배우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전날 밤 아내와의 (결혼 후 처음으로)섹스에서 발기가 되지 않은 것과 친구와 술자리 후 잃어버린 휴대폰이었다. 거울 속 나신, 발기하지 않은 성기, 잃어버린 휴대폰, 이 세 가지 단서는 남성으로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지를 말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러므로 간밤에 잃어버린 휴대폰의 행방을 찾아 나서는 길은 곧 주인공이 잃어버린 타인과의 관계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으며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여인은 바로 발기되지 않은 주인공의 성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우연히 마주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심리적, 물리적으로 그를 유혹하는 육질의 존재로 출연했다. (아내와의 습관적인 섹스에서 발기가 되지 않았던) K는 자신이 카페와 주차장, 극장 등의 공공장소에서 뜻밖에 관음증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성욕에 사로잡힐 수 있는 인물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내용상 상당부분 K가 남성으로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순수소설의 수위보다는 좀 높게)관능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다. K는 누구보다 고상하게 아닌 척 하면서 자신의 남성을 육체로만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인 것이다.(이 의문이 해소되는 것은 소설의 말미이지만) K의 은폐된 욕망은 기존 소설에서 낯익은 서사였지만 그 추구 형태는 무엇보다 낯설었다. 술집에서 만난 나비 문신의 여인은 카페에서 노출증의 여자로 변신하고 그 여자는 TV속의 아나운서로 순간 이동한다. 15년간 살을 맞대온 자신의 아내는 친구 H의 아내와 동일 인물이었다. 아내는 잃어버린 휴대폰 동영상에 저장된 정사신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 JS는 예전에 탤런트였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지만 폭식증에 걸려 거구가 되버렸고 K는 그 육체의 낯설음 속에서도 낯익은 정욕을 느끼고 만다. 이 작품속의 여성은 자신의 아내로, 혹은 누이로, 혹은 친구의 부인, 혹은 길거리 스치는 익명의 여인으로 신분과 역할을 바꾸었지만 K가 확인한 건 (누가 되었건)그 순간 자신이 항상 살아있는 남성이었다는 자각이었다. K는 육체적 욕망을 가진 여성에게서는 숨막히는 악취를 느끼는 다시 말해 자신은 굉장히 도덕적인 남성으로 생각하는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균열은 이러한 인지부조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자신이 모르고 있던 자신을 비교하는 수사로 작가는 대상인 여성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나는 이것이 투병으로 스러져가는 한 남자의 보잘 것 없는 육신에 대한 生의 악착같은 가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소설을 쓰고 마치기 위해 퇴화된 육체인 손톱이 뽑히는 고통을 감내해야했지만 그 고통은 오히려 소설을 마치게 하는 심리적 보상체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암에 걸려 집필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 때문에 새로운 육체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소설, 즉 자기안의 타인과도 같은 자신이 쓴 소설을 당당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 일 것이다. 이 과정은 평생 소설쓰는 낯익은 행위일지라도 이번만은 유독 낯선 작업 시간을 제공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 과정은 본인은 이제 남성으로서 성기능이 끝나버려 더 이상 남성의 의미가 쇠퇴한 육신일지라도 (자기안의 타인으로서)육화된 감각만은 더욱 생생히 살아남아 자기안의 (죽어가는)남성을 괴롭히고 자극하던 고통의 시간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최인호 작가가 소설속 여인의 육체를 찾아가는 일은 결국 자신의 육체, 새로운 생명을 찾아가는 일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육체를 신대륙처럼 발견하는 일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부활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영혼을 찾아서

 
작가는 K에게 일어난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어제 새벽 2시쯤 서해 앞바다에서 진도 5.6 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뉴스로 부연했다. 지진의 원인은 ‘지하의 단층 밑에 축적되었던 고압상태의 마그마가 저항이 약한 해구를 공격함으로써 일어난 것’이라 분석했다. 이 책에서 지진이 일어난 시점과 K의 세상이 낯설어진 시점은 동일했고 소설은 일정한 속도로 각자의 붕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K는 무언가를 찾아 나설수록 계속하여 낯익은 존재가 낯설게 등장하는 현실에 놓이게 되는데 K의 현실과 서해 앞바다에 발생한 지진은 무슨 인과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소설의 시공간이 깊어질수록 지진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가장무도회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더욱 바빠 보였다. 처제와 결혼해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새신랑은 낯선 카페에 어느 불량 커플로 등장하고 유일한 혈육인 누이 JS가 재혼한 현재의 남편은 다름 아닌 장인이기도 했다. 다양한 역할의 복제인간은 끊임없이 K의 기존 인맥관계를 비집고 불청객처럼 불쑥 등장하곤 했다. 결국 지층밑에 축적된 K의 마그마는 이러한 외부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성인방에서 7만원을 주고 달의 요정 세일러문과 가벼운 키스와 스킨쉽’을 나누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이 현상을 작가는 제 3의 입체공간으로서 ‘섀도박스’이거나 ‘같은 부품들을 종횡으로 배열하고 이들을 그물 모양의 도선으로 연결한 회로’, 즉 매트릭스라 명명한다. 혹은 ‘안쪽과 바깥 쪽의 구별이 없으며 좌우의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단일 경계를 갖추고 있고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성을 지닌’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고 말한다. K는 그런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 다니는 개미이며 ‘같은 곳을 되풀이해서 돌고 있는’ 환상방향의 주체로서 ‘링반데룽’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엔 이렇듯 사회적으로는 낯익지만 소설에선 낯설어 보이는 여러 용어들이 제 3의 언어처럼 자주 등장한다. K는 ‘이 모순된 가상현실의 이중성은 누군가에 의해서 180도로 뒤틀린 왜곡된 현상’이라 믿었다. 예를 들면, 아내는 ‘어딘 가로부터 하달되는 초월자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하게 되어 있는, 그렇게 설계된 로봇이며, 세뇌된 인간이며, 사람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딸’이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그대로인 채로 변하지 않았지만 외부 세계, 타자들만 약속이나 한 듯이 변했다는 논리이다. 개인적 견해지만 소설에 차용된 사회학적 용어들은 너무 빈번해 혼란을 야기했다는 생각이다. ‘섀도박스’나 ‘매트릭스’, ‘뫼비우스의 띠’들 중 어느 하나만 밀고 나가셨으면 K가 처한 현실이 더 입체적으로 (두렵게)느껴졌을 것 같다. 사고의 배경을 옮겨 다니는 것이 나로선 피곤했고 관념상에 머무르게 했다.

  작품 후반부에 K는 이 모든 현실이 누구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지를 따져 묻고는 사고의 방향을 타인에게서 자신으로 선회한다. K의 이러한 사유는 우리 사회에 성형으로 모두 얼굴이 같아졌기 때문에 자신이 그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자기 변호와 그래도 자신 주변의 복제인간은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행동으로는 부패와 뇌물과 타락과 위선과 구제불능의 권위와 야합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보다는 훨씬 양심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내 탓이오, 하는 자기 반성과는 달라보였다. 그는 진짜가 아닌 복제인간들을 통해 사람의 정신을 치료하며 가장 가깝다는 친구 H가 실은 보통사람보다 더 정신병 환자이며 섹스 중독자이며 위선적인 인물임을 깨닫게 되고 사람은 한 가지 얼굴로도 얼마든지 두 가지 이상의 인격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 확인한 것이다.


         ‘모든 의혹의 출발점에는 K 스스로가 K 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전제가 먼저 선행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가상현실에서 바뀐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임을 깨달은 K를 설명하는 작가의 언어는 ‘분열된 또 다른 자기 자신의 생령을 보는 심령현상’, 즉 이위 일체로서 도플갱어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K를 모범적인 금융인 K2와 집창촌 포주의 기둥서방 K1으로 분열시키셨던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K1이 ‘불운한 인생을 살아온 전과 5범의 범죄자’라 할지라도 악의 상징이라 칭할 수 없으며 K2가 ‘단 한 번의 경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무죄한 사람’일지라도 선의 상징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K1과 K2가 동일한 사람이듯이 우리 안의 선과 악은 동시에 공생하는 타인들이라고. 결국 K가 그토록 헤매 다녔던 방황의 여정에서 자신의 합체를 이룬 곳은 ‘선’과 ‘악’이 만나는 지점, 그 영혼의 절반이 서로를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영혼은 누구보다도 고귀하거나 순결한 것이 아니고 누구라도 선하고 악할 수 있는 공평한 만남의 결실이었다. 그 자명한 진실을 깨닫기 위해 K는 타인이기도 한 또 다른 K를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고 진정하고 온전한 K가 되기 위해선 타인인 K를 확인하고 그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들어있는 실재였다. 삶은 그렇게 내 속에 들어있는 무수한 타인을 만나러 찾아가는 그래서 그를 만나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끝없는 여정인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나를 포함해)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의심없이 인격수준이 어느 이상은 될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친인척, 학교 선후배, 같은 직장 동료 등등, 내가 아는 범위 내의 사람들은 내가 기대하는 수준의 인간성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착각을 한다. 이 착각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상대에 (허락없이)실망을 하고 놀라움에 호들갑을 떨고는 한다. 나는 내가 그다지 인격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는 나 혼자 잘나서 내부에서 일어난 깨달음이 아니고 상대인 타자에 의해 촉발된 내 반응에 따르는 결과였다. 어떤 상대는 지금껏 모르고 있던 나를 알게 해주는 (자아)발견의 슬픔이 된다. 즉 내가 그동안 쌓아온 내 인격의 보유량은 절대 내 스스로 측정, 평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번 소설을 덮으면서 더더욱 사람은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고 특별히 악한 사람도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든 선해질 수 있고 또 언제든 악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더해진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내가 생각했던 나보다 선한 타인이 내 안에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런 타인이라면 아마도 서늘하거나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만약 내 안에 악한 타인을 언젠가 만난다 하더라도 너무 많이 놀라지는 않으련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악한 타인도 나라는 사실을 수용하고 비로소 온전히 합체된 그 순간에 더욱 의미를 찾아 볼 작정이다. 이번 독서는 근래 만난 소설중에는 많이도 힘들었다. 힘든 만큼, 내가 발견한 소중한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내 안의 못난 나, 내 안의 비겁한 나보다 더 진실되게 악하고 못된 나를 인정하는 용기였다. 인정하고도 원래의 나라고 생각하는 선한 나와 동일시 하였다. 말로만 인식하다 그 실체를 온몸으로 확인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실체는 타고난 악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과 대치되는 갈등의 순간을 초래할 것이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들인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나를 십분 이해해준다. 이 작가는 이런 나를 살포시 안아준다. 부디 당신도 언젠가 당신 속의 타인에 무릎꿇고 그를 아프게 인정하길 바란다. 쉽지 않지만 당신과 나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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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이 분의 책을 아직도 못 읽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책이 그렇게 많은데...ㅠ
영화화 된 것도 그렇게 많은데, 이 분은 통속소설을 쓴다는 이미지가 있어
선뜻 마음이 안 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박범신도 그랬거든요.
하긴, 내가 읽은 한국 소설가가 얼마나 된다고...
책 표지가 마음에 들어요. 난 이런 게 좋드라.^^

한사람 2011-06-08 12:44   좋아요 0 | URL

이번 작품은 완전 관념적이더군요
통속을 그렇게 객관적으로 풀다니 ㅋ

저는 참 좋았습니다.
소설이 지극히도 우울한 것만 제외하면요..

달사르 2011-06-08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익음과 낯설음이 섞이는 느낌입니다. 최인호. 낯익은 이름이지만 한 편의 소설도 읽지 않은 소설가. 낯익음을 가장한 낯설음일까요. 낯설음을 눈치채지 못한 낯익음일까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번 신간은 최인호의 또 다른 새로운 소설, 로 받아들이는게 낫겠군요.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하는..

한사람 2011-06-09 00: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망측한 생각이지만, 작년에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가 출간되었을때 그 책이
마지막이 아니길 저도 모르게 바래었거든요(투병중도 아니신데...)

아직 한창이신 나이니..더 오래 활동하셔서
이처럼 낯설어도 뻐근한 소설을 마니마니 출간하셨으면 합니다..

달사르 2011-06-10 18:02   좋아요 0 | URL
이 동네는..땡스투라는게 있네요? 뭐지? 하면서 눌러봤다가 그 기능을 알았어요. ^^ 앞으로는 책 살때 저거를 누르면 되는거로군요. ^^

음..저는 리뷰에 언급하신 전작소설..이 뭔지 몰라서 출판사에 아시는 분께 여쭤봤더랬어요. 히. 그 뜻을 알고나니 작가님이 새로이 보이더군요. 요새는 전작소설이 드물다지요?

한사람 2011-06-10 21:45   좋아요 0 | URL

저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연작이 아닌 전작의 형태로 소설을 쓰시는 줄 알았어요
요즘은 매체가 다양해 연작이 대세이니 그게 중요한 사건인가봐요

저는 땡스투 한번도 안해봤는데....
달사르님 많이 아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