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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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손, 하얀 질문



내 두 팔을 벌리고
태양을 마주하여
춤추고! 돌고! 돌고!
짧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어스레한 저녁에 쉬는......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
부드럽게 다가온 밤은
나처럼
 까만색.

 -『랭스턴 휴스 시선집』 中에서 


   미국 흑인 문학을 대표하는 랭스턴 휴스(1902∼1967)는 흑인들을 향해 피부색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응원하는 시인이었다. 바닥은 분홍색이고 등은 암흑같은 손이지만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보물이므로 엄숙하게 여기자는 것이다. 옳고도 아름다운 말씀이다. 하지만 시인이 전하는 자부심은 그들 삶의 긍지에서 기인한 당당함이라기 보다는 삶의 애환을 극복하려는 애잔함으로 다가온다. 어쩐지 백인을 향한, 백인을 견디고 극복하려는 상대적인 선언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의미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시를 읽고는 묘하게도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얼마간 공감하는 마음보다는 다행히도 우린 흑인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앞선다. 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흑인은 아니라는 비겁한 심리를 숨길 수가 없다.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안도감은 낯선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흑인이 등장하는 영화나 그들이 억압받는 종류의 이야기를 만날 때면 그들을 향한 연민과 울분에 실컷 공감하다가 뒤돌아선 꼭 흑인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어린아이같은 생각을 해왔다. 내게 있어 흑인은 오바마 대통령, 오프라 윈프리 같은 성공한 인물보다는 아직도 할렘가를 어슬렁거리는 불량배, 기아와 에이즈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난민, 유흥가에서 호객행위를 일삼는 마약 매춘부들이 먼저 떠올려지는 까닭이다.

  시인이면서 소설가이고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흑인여성 중 한명이라는 마야 엔젤루(1928~ )는 작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딸에게 보내는 편지, 2010, 문학동네>를 통해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흑백분리 영화관을 다닌 적 있다고 그 생생한 설움을 전하였다. 매표소부터 백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쓰레기가 밟히는 2층의 흑인 전용 상영관, 그 닭장같은 곳이 기억난 건 당대의 유명한 백인 배우들(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 헨리 폰다, 찰턴 헤스턴)과 함께 나란히 초청되어 유명한 영화감독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때 그 영화 속의 하얗고 눈부신 주인공들 앞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려던 마야 엔젤루는 그만 '유명하고 돈 많고 인정받는 하얀 당신들을 증오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으로 한참이나 아무 말을 못했다는 고백을 한다. 마야 엔젤루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제일 먼저 떠오른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흑인여성으로서 뼛속부터 각인된 분노를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은 문학이었고 그녀의 시와 소설은 이 땅에 사는 딸들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소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졸업을 축하하며 의미심장하게도 ‘너희들은 이 나라를, 우리나라를 지금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똑바로 물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녀의 책을 뒤적이면서 밑줄이 그어진 이 문장을 보고 흠칫 머뭇거렸다. 그 질문은 공교롭게도 이 책에서 작가로 데뷔하는 스키터가 작가가 되고파 하는 아이빌린을 만난 날,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하며 아이빌린을 혼란스럽게 만든 질문과 겹쳐졌다. 나는 그들의 심장같은 연타의 질문에 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현실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친 적은 많았으나 그 현실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한 적도, 노력한 적도 없지 않았나, 싶어서다. 그것은 더 이상 흑인이 아니어서 다행인 나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꽤 둔중하면서도 동시에 예리한,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그들의 검은 손가락이 똑바로 나를 가리키며 그래, 당신은 흑인이 아니어서 행복한지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질문은 거의 이 작품이 최종적으로 던지는 한마디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1960년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처럼 현실이 까맣게 불타버려 실은 피부색같은 건 하나도 의미없는 자들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누구보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갔고 내가 처한 현실과 자주 비교하며 조용히 울고 실없이 웃었다. 책을 덮었다고 내 까만 현실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분명 조금은 하얗게 변한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그러잡으며 두 손에 힘을 주어본다. 나는 그들에게 한 번도 손을 내민 적이 없었으나 그들은 그 까만 손으로 나를 보기 좋게 ‘HELP’ 해 준 것이었다.


虛스토리가 herstory로

  소설은 특이하게도 세 명의 여성이 시점을 번갈아가며 자기가 처한 입장을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자기 고민을 우리와 깊게 나누는 형식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대본으로 인식될 정도로 매 장면마다 섬세한 연출력을 선사했고 인물마다 에피소드가 분명하고 풍부해 이야기로서 현실감이 구체화, 극대화 되었다는 것은 이 소설이 지니는 개성이자 장점이었다. 서사의 디테일, 이야기의 밀도,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흡입력을 잃지 않게 하는 작가의 고집스런 의지가 글의 행간에서 느껴질 정도로 소설은 긴장감을 유지했다. 이 소설이 올 여름 영화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반가운 소식이었는데 보통 영화가 원작의 감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르긴 해도 책만으로도 영화의 감동을 미리 예상해보기에 충분했음이다.

  우선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의 잭슨이라는 마을인데 글만으로는 오십 년 전의 미국에서 우리의 80년대가 상상되는 느낌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고용주로서 백인 여성들과 가정부로서 흑인 여성들이 소설적 관계를 맺고 흑인의 인권문제를 앞세우는 구조였지만 그 이면에는 이들 주종 관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백인 작가 지망생 여성이 소설 속에서 소설을 통해 흑인여성들의 자아를 해방시키고서 동시에 자신의 자아를 성취한다는 복선적 주제를 함의하는 소설이다. 인물의 뼈대는 스물셋의 백인 작가지망생인 스키터와 아들을 잃고 상처를 지닌 50대 흑인 가정부 아이빌린, 그리고 그녀의 절친인 30대 가정부 미니를 주축으로 스키터의 동창생과 그녀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백인 여성 셀리어, 그녀들의 가족, 같은 동네에서 그들의 가정부로 사는 흑인 여성들이 뭉클하고도 통쾌한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남자로서 여성의 갈등에 기여하는 인물은 스키터의 동창생인 힐리의 옛 연인이자 셀리아의 남편 미스터 조니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에피소드와 함께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로 보여졌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여성이 만든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이 말하는 꽤 상징적인 미국식 herstory의 자아실현물로 볼 수도 있었다.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자칫 단순하고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소재였지만 작가는 미국 남부 잭슨 마을을 보편적인 인간군상의 무대로 활용하며 세대간, 계층간, 동성간의 정교한 일상과 심리묘사로 절망과 희망을 밀도높게 조율했다. 작가의 대리인으로 보인 스키터는 ‘가정부 위생 발의안’을 구상한 힐리와 육아와 살림엔 도통 관심이 없는 엘리자베스와 동네 오랜 친구였지만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기도 했다. 내 경우를 보아도 미혼인 친구들은 기혼인 친구들과 공통된 관심사가 거의 없다. 미스 리폴트(엘리자베스) 집의 가정부인 아이빌린에 따르면 이들은 사교적인 모임에서 자식, 옷, 친구, 딱 세 가지만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국식으로 정리해보면 ‘자식’은 반드시 남편과 시집식구들을 포함한 자기가족을 의미하며, ‘옷’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상품으로서 아파트나 자가용, 가방등으로 표출되는 허영심을 상징하며, ‘친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이른바 주변인 혹은 남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한마디로 어딜 보아도 절대 자신에 대한 내면의 성찰과는 상관이 없다. 혹시라도 기혼녀의 모임에 미혼인 친구가 속하게 되면 이미 신산한 인생사를 겪었다고 자랑하는 그들이 스키터와 같은 친구에게 충고하는 건 딱 한가지이다. ‘좋은 남자를 만나라’,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향후 보다 안전한 生의 기득권을 빠르고 쉽게 쟁취하는 일은 조건 좋은 남자와의 결혼이 가장 모범답안인 것이다. 세상이 변하여 ‘자아실현’이라는 답도 무효인 것은 아니나 ‘좋은 남자’는 아직도 효력면에서 우세하다. (자기는 그렇지 않았지만)딸을 좋은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자기 남은 생의 최대 목표가 된 속물적 엄마의 전형성을 보여준 사람은 예상대로 스키터의 엄마였다. 이것은 작가하겠다는 딸에게 안정적인 행복을 주입하려는 오늘을 사는 여기, 우리 여성들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캐릭터 상으로 전형성이 더 부각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백인 여성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주로 가해자였고 가정부가 피해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 바로 작가가 백인여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아이빌린, 미니, 콘스탄틴, 율 메이 등 가정부들 중에서는 미니가 제일 활력적으로 느껴졌지만 그녀도 어쩐지 바라보는 시각에서 타자화된 대상이라 생각되었다. 자신과 같이 성장했고 같은 교육을 받았고,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생각과 행동, 심리묘사는 리얼하다 못해 안스러울 정도였다. 백인의 위선은 내가 가장 잘안다 식의 고발적 문장들은 사실 고백으로 들리기도 했는데 그 과정이 작가에게는 뼈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일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녀가 말하는 백인 여성은 하얀 얼굴과는 달리 모두 속은 시커먼 유형의 인물이었다. 힐리는 마을의 유능한 여성일꾼이었다. 겉으로는 지역과 주민의 발전을 위해 빈번한 자선행사를 개최하고 공통의 복지를 위해 법안을 개진하여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진취적 인물인 것 같지만 뒤로는 자기 집단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층계급을 억압하고 일방적인 권력행사를 통해 주종관계를 영속화 하려는 위선적인 지역인사의 대표적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머나먼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서는 돈을 보내도 내 가정부가 자식들 등록금이 모자라 손을 내밀 땐 원칙을 내세우는 식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난민에 울음짓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각종 단체에 기부는 해도 내가 알고 나를 아는 이웃의 불행엔 외면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 아닐까. 좋은 환경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사교적인 성격에 능숙한 언변까지 갖춘 사람들은 힐리의 위선을 욕하기 보다 힐리와 자신의 싱크로율을 점검해 보아야 할 터이다. 미스 리폴트는 뚜렷한 개인 주장은 없으면서 영향력있는 친구를 추종하며 그의 행보와 지시를 무조건 따라하는 기회주의의 인물이다. 이런 유형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명품이나 동안, 패션에만 관심있고 텅빈 내면을 화려한 외양으로만 메워보려는 사람들이다. 셀리아는 어린 시절 가난한 빈농출신으로서의 열등감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늘 불안한 인물이다. 운좋게 남자를 통한 신분상승에 성공했지만 남편이 지역의 유명인사인 힐리의 옛 연인이었기에 이웃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였다. 돈과 시간이 많아 과도하게 외양을 치장하는 것에만 만족을 느끼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작가는 이들이 언뜻 보기엔 세련되어 보이고 타인에게 예의바른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교양있는 백인 여성인 것 같아도 가정에선 흑인 가정부에게 살림과 육아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고민이나 가족간 갈등, 살아가는 지혜 등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의지하는 나약한 면모를 자주 일러주었다. 바로 작가 자신이 그러한 가정에서 자랐고 누구보다도 흑인 가정부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백인 여성들은 결국 각자 다른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같은 여성인 흑인을 적극 이용한 것이었다. 힐리는 자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확인하는데 가정부를 앞세웠고 미스 리폴트는 아이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정부에게 일임하므로써 자신을 더 사랑하는데 시간을 투자했고 셀리아는 남편과의 형식적인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할 목적으로 가정부의 도움을 적극 활용했다.

  이렇듯 백인 여성의 herstory는 흑인 여성의 성실함과 부지런함, 그 고생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반대로 흑인 여성의 herstory는 그들로부터의 눈물과 상처위에 씨앗이 싹트고 울분이 자라나는 것이었다. 타자의 노력과 고통으로 성립된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 터이다. 비록 남들이 보기엔 초라한 사연일지라도 자신의 눈물로 영글어진 이야기가 진실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백인 여성의 虛스토리가 진짜 이야기로 탄생하는 것은 작가의 대리인인 스키터의 역할이자 책임이었다. 그녀는 흑인 여성의 herstory로 자신의 herstory를 완성했다. 백인의 虛스토리가 비로소 색깔있는 유색의 이야기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까맣게 타들어간 와중에도 마지막 남겨진 백인의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자기절망이 자아실현으로 

  스키터와 친구들의 공통점은 모두 가정에 흑인 가정부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녀들의 손에서 자랐다는 것이었다. 작가 캐스린 스토킷은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가정부 디메트리를 떠올리며 한번이라도 그녀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었는지를 자문하며 그 미안함을 이 소설로 화답하였다 고백한 바 있다. 또 출판사로부터 수십 번 외면당한 작가의 경험은 이 작품에서 스키터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시키고 기어이 출간이라는 성공을 이루어 내는 소설 속 소설구성 및 출간이라는 형식을 완성시켰다. 그런데 그 소설 속 소설은 허구가 아닌 엄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했기에 외려 물리적인 진실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되었고 스키터가 소설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독자에게 비슷한 성취감을 제공하는 효과를 제공했다. 즉, 이 소설에서 스키터가 다름 아닌 자기경험을 쓰게 되었고 그것을 힘겹게 완성하여 마침내 출판까지 이르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스토리는 이미 작가의 소설로 현실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설이상의 극적이고도 비현실적인 소재였던 것이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루트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스키터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몇백 배 더 세상으로부터 거절, 외면당하고 난 뒤에 빛을 보게 되었고 그런만큼 그 성취와 영광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이미 성장기에 작가적 시선을 키워온 스키터가 작가의 대리인으로서 친구들의 위선과 부모의 허영심을 뒤로하고 소설적 주제를 발굴해 그것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었다. 뉴욕의 출판사 편집자는 스키터에게 여러 번 우습고 하찮아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찾아내라 주문하였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그동안 인생에서 돌아보지 않았던 과거의 인물, 그 타자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심했던 타자의 고통을 다시 복원해 그것을 섬세한 시선으로 투시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것 마냥 절실하게 끌어안고 체감한 후 독자와 진심으로 그것을 소통하고자한 노력이 바로 더 강렬한 진정성을 발휘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나는 작가의 영리함을 실감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성취한 것은 곧 작가가 성취한 것과 동일했다는 것이 이 작품이 다른 작품과 가장 차별화되는 장점이자 매력은 아닐까.

  또 가만 보면 이 소설엔 자신의 고통을 글로 쓰는 사람들이 결국 글을 완성함으로써 글이 자기 생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통해 가장 현실적으로 체험한 사실이기도 했고 또 지금의 내 현실과도 가장 밀접한 단서였다. 아이빌린은 중학교 때부터 기도문을 쓰기 시작해 평소 일기처럼 자신의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사고로 잃은 아들은 미시시피에서 유색인 남자로 살면서 일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투명인간>이라는 책으로 쓴 사람이었다. 아들의 책을 읽은 아이빌린은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에 아들이 살아 숨쉬도록 할 터이다. 사람은 죽었어도 글은 죽지 않는다. 사람과는 헤어져도 글로는 이어지고 다시 만나게 된다. 글로 부활해 아직 살아있는 많은 흑인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만난 것이다. 누군가는 눈을 잃고, 누군가는 혀를 잃고, 또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총에 맞아 숨졌지만 그들의 모든 까만 사연은 이렇듯 하얀 그리움으로 새겨진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고 소설의 능력인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흑인도 승리했지만 백인도 승리한 소설이었다. 흑인은 이야기로 승리했고 백인은 소설로 승리했다. 누가 상처를 받고 또 누가 언제 복수를 하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흑인은 흑인대로 백인은 백인대로 서로 자존심을 지키며 자신을 성취했다는 것이 나는 좋았다. 각자의 절망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도 자신의 희망으로 전복되는 결론이 설득력 있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참 기특하고도 공평한 결론이 아닌가.


눈에는 눈, 입에는 입

  그런가하면 이 소설은 화장실 용변으로 시작해 화장실 용변으로 마무리 되는 대 화장실 수사학의 기발한 수미쌍관적 면모를 과시했다. 앞선 화장실 문제는 분명 백인들이 주장하는 질병 및 위생관리 차원의 흑인과의 분리정책을 의미하지만 후자의 화장실 담론은 그것에 대응하는 흑인의 짜릿한 보복을 의미한다. 이 책은 흑인에게 가장 예민하고 가슴 아픈 사연인 화장실 문제를 재치있게도 유머러스한 풍자로 희화화 하면서 이 소설이 다큐나 논문, 기사가 아닌 소설이라는 문학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환기시켜준다. 화장실문제는 어찌보면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이 작품에서 화장실이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에피소드는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나는 책을 덮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야 말로 같은 인간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이 저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인의 집에 일하러온 흑인 일꾼은 화장실을 가기위해 인근 도처의 덤불을 헤매어야 했다. 아이빌린은 키우던 아기의 소변가리기를 훈련시키기 위해 차고 바깥 화장실에 아이를 데려가 그곳에서 시범을 보여준다. 백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백인에게 몰매맞아 눈을 잃은 청년의 소식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같은 식품점에서 음식을 사지 못하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같은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지 못하고, 같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반인권적인 이들에게 작가가 내린 벌은 가장 정직하고도 합리적인 처사였다. 거사를 시행한 것은 요리를 잘하고 케이크를 가장 잘 만드는 미니였지만 그 과정을 찬찬히 따져보면 그것은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작가의 계략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입에는 입, 전략은 정직했다. 

  가정부들은 유색인 식품점에서 구입한 싹이 자란 감자나 맛이 간 우유를 먹고 집에 욕실이 두 개나 있어도 한 겨울 멀리 떨어진 차고 뒤편 으슥한 화장실에서 그 결과물을 배출해야했다. 이런 아이빌린에게 지역의 위선자 힐리는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니 어떠냐고 비아냥 거린다. 힐리는 주로 연단에 서서 마이크에 대고 지역민에게 자선금을 호소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미니는 그 입으로 들어갈 초코케잌에 흑인으로서 최종 결과물을 식품첨가제로 활용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것 먹고 그 입 닥치라는 무혈 항변의 행위이다.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미니는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그보다 더한 수치스런 맛을 겪으며 산다는 그래, 당신들과 다른 인간들의 맛은 어떤지 확인해보라는 의미심장한 행위인 것이다. 평소 흑인으로부터 질병이 옮는 것을 두려워한 힐리가 케잌이 더 맛있다고 칭찬한 일화는 이 작품의 모든 눈물을 통쾌한 웃음으로 전복시키는 짜릿한 반전이었다. 자존심 강한 힐리는 그 사실이 평생 지키고 싶은 최대의 비밀이 되었고 그것은 가정부들을 자유롭게 하는 불문율이 된다. 미니에게 별도의 화장실 사용이라는 법안(현실)은 바꿀 수 없었지만 자기식의 용변처리(용기)는 얼마든지 가능한 문제였고 그것으로 힐리에게 안 보이는 법(성과)을 만들어 준 것은 소설적 재미에 그치지 않고 뭉클한 교훈을 준다. 

  이 책에서 가정부들은 대부분 남편의 음주와 폭력에 시달리거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흑인이면서도 여성적인 성차별의 이중고를 안고 살고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심많은 이웃으로 등장한다. 가족의 먹거리를 책임지며 가정의 안녕을 위해 가사를 책임져온 주부들은 미니의 복수에 야릇하고도 통렬한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서면 사회 최약자층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이런 반인간적인 아니 가장 인간적인 최고의 항거를 온몸으로 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먹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화장실 에피소드는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공간에서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의미를 묻고 있다. 그래봤자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것은 모두 변함없이 똑같다는 우리 生의 이치를 알려준다.


착한 사람, 나쁜 운명

  스키터는 말한다. 이십 구년 동안 가족을 위해 일해 온 가정부 콘스탄틴은 유일하게 자신을 유지니아라는 본명으로 불러주었으며 성인이 되고서도 기숙사에서 편지를 주고받던 인생의 비밀 동맹자였다고. 콘스탄틴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빌린은 말한다. 자신은 ‘아기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줄 알게 키우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그런데 자기 자식에서 허울좋은 규율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예절이 아니라 진심어린 친절과 자존감을 가르쳐준 이들에게 고용주인 백인은 없는 사건을 만들어 인격을 모함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 일자리를 잃게 한다. 가정부의 딸이 백인 것을 인정하지 못해 단칼에 해고하고 별 쓸모없는 보석을 훔친 죄로 모진 실형을 선고하도록 종용한다. ‘잭슨에 있는 모든 땅의 주인은 백인이고, 모두 백인을 아내로 맞았으며, 그 아내들은 누군가의 친구’이기 때문에 속된 말로 백인에게 한번 찍히면 가족의 생계는 물론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왜 그토록 소름끼치게 그들과의 분리를 열망하며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을 두려워 했을까. 실질적인 도움은 제일 많이 받고 있으면서 왜 그들은 그 도움을 인정하지 않는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자신의 결점과 일상의 비밀을 가장 가깝게 많이 알고 있는 가정부들이었기에 될수록 그들과 삶의 구분을 확실히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와 여러 해 동안 나는 부모님과 함께 큰 이모님 댁에 얹혀 살았다. 2층 짜리 주택이었는데 그 큰 집에 시골에서 올라온 ‘행자’언니라는 가정부가 있었다. 그 당시 소위 있는 집에는 ‘식모’라는 개념의 스무살 남짓한 처녀가 대 식구의 살림살이와 치다꺼리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행자'언니는 성격도 좋고 덩치는 물론 식성도 좋아 사촌오빠들의 놀림을 많이 받았다. 얹혀 사는 신세인 내 어머니와 가장 친했고 혼자인 나에게도 잘해주었지만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내가 그 언니와 (신분이)같지 않다는 사실을 꼭 언니에게 주입하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이른바 주인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행자언니는 어린 나를 귀엽게만 여겨 목욕을 하면 머리도 감겨주고 거친 때수건으로 내 등짝을 빡빡 밀어주던 살갑던 언니였다. 나는 이모집에 있는 동안 '행자'언니 덕에 그야말로 호강하며 공주아닌 공주대접을 받았고 나중에 우리 식구가 이모집을 나와 이사를 가고 난 후엔 물한잔도 마다않고 떠다주던 그 언니가 제일로 그리웠다. 한참 세월이 흘러 남의 집 식모로 살아야 했던 <봉순이 언니>라는 소설을 읽고 다시 그 언니가 생각났던 게 벌써 십년 전이다. 고향으로 내려가 방앗간집 큰 며느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잊고 있었던 행자언니를 근 삼십 년만에 만난 것은 뜻밖에도 어머니 장례식장에서였다. 한눈에 보아도 시골에서 상경한듯 보이는 퉁퉁한 아주머니 한분이 어머니 영정앞으로 종종 걸어오더니 그만 목을 놓고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어머니를 잘 아는 분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는지 그녀를 알아보던 큰 이모님이 그녀에게 달려가 서로 안고서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음을 떠뜨리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모님의 입에서 '행자'라는 호칭을 들었고 그제서야 왜 그녀가 그토록 서럽게 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장례식에서 상주가 되면 조문온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슬픔의 양을 가늠할 수가 있게 된다. '행자'언니는 내 어머니의 죽음이 슬퍼서 울었다기 보다는 자신과 맺은 그 시절 많았던 기억 때문에 눈물을 쏟은 것이었다. 기억의 양이 곧 눈물의 양인 것이다. 울음을 정리하고 마주 앉은 '행자'언니는 그때 내 손을 꼭 잡고 어머니는 스무살에 유일하게 자신을 견디게 해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남의 집 가정부였지만 그런 자신을 늘 똑똑하고 친절하고 성격좋은 사람이라고 앞으로 제일 잘 살거라고 매일같이 용기를 주셨다고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아이빌린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키운 아이와 헤어지면서 너는 ‘똑똑하고 친절한 아이’라고 재차 일러주고 스스로 다짐하게 할 때 가슴에 태풍같은 바람이 휙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스키터는 가정부의 기억을 통해 ‘비참하다고 생각되는 자기 인생에 구원을 받는 듯한 느낌’을 얻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현실이 고통스럽고 내 처지가 보잘 것 없어도 내가 중요한 사람이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그 사람을 현실에서 구원해주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아이빌린에게 로버트의 실명소식을 전하던 이웃은 말한다. ‘나쁜 일은 왜 가장 착은 사람들에게 생기는 지 모르겠’다고. 우리가 주변을 둘러 보아도 불의의 사고는 꼭 누구보다 착했던 사람에게 일어난다. 남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묵묵히 자기 생을 살아온 사람들, 자신도 변변치 않으면서 남들에게 자기 가진 것을 더 많이  나누어 주던 사람이 꼭 변을 당한다. 나 역시도 어머니의 사고를 겪은 사람이라 왜 착한 사람들에게만 불행이 닥쳐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런데 얼마 전 십년 전 <봉순이 언니>로 나를 울린 작가, 공지영의 소설 <맨발로 글목을 돌다, 2011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를 읽었는데 그 작품에 수긍할 만한 답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봉순이 언니>를 통해 나와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 제기한 작가였기에 세월이 흐른 후 그녀의 답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비슷한 질문을 하는 기자에게 ‘착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만이, 선의를 가진 그들만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긍지로 운명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들만이 착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운명을 좋은 의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쁘게 해석하는 것은 운명에 닥친 당사자가 아니라 그들이 불행하다고 바라보는 나머지 사람들의 문제라는 뜻으로도 이해되었다. 이 말은 착한 사람이야 말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 아닐까. 꼭 이 책에서 언급한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線을 뛰어 넘는 것은 오로지 善뿐이라 답하는 것만 같다. 그것을 이 작품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착한 사람이야 말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세 명의 이야기가 교차되다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그 세 명의 시선이 아닌 작가의 시점으로 서술된 부분이 있다. 2권 초반부에 제시된 '자선행사장에서 생긴 일'. 흑인이고 백인이고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작품속의 소설적 축제에 다름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카메라를 줌 아웃하여 조감으로 전체를 내려다 보는 그 장면에서 작가적인 깨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정답이 없다. 저마다 행복하려고 더 좋은 남자를 만나려 하고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행사장 바깥에선 베트남 파병으로 군인들은 전사했고 마틴 루터 팅 목사는 가두시위를 벌렸고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어쩐지 오늘을 사는 우리네 세상과 흡사한 세상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누가 누구를 욕하고 비난하기엔 행사장은 새삼 별 문제가 없어 보였고 저 바깥 세상은 나와는 너무 멀어 보였다. 이 책의 마지막은 아이러니 하게도 예상대로 가정부들이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그 첫 발자국을 따라간다. 이정표는 자선 행사장도 아니고 백인의 또 다른 가정집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지는 장면이다. 두렵지만 벅차고 슬프지만 희열이 느껴진다. 어디로 갈 것인지 묻는 것만 해도 심장이 빨라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조그만 손으로 내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 어떻게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현실을 바꾸는 것은 결국 내 생각이 바뀌어 지는 그리하여 내가 새로워 지는 그 첫 걸음의 시작, 그 바닥을 느껴보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차갑고 단단한 그 바닥위에 그래도 눈을 질끈 감고 발걸음을 한번 떼어 보는 것이 아닌가. 튼튼한 벽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내 두 다리로만 직립하여 얼굴을 들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일이 아닌가. 누군가의 돌에 맞고 누군가의 웃음에 잠시 멈출 지언정 그것을 알고서도 계속 걸어가는 그 서러운 마음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내게만은 돌아설 줄 알았던 그 운명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와 마주해 결국 내 두 손을 이끌어 주지 않겠는가. 그렇게 살다보면 HELP, 하고 외치지 않아도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HELP가 되어 있지 않겠는가. 진정한 HELP는 내게 손 내민 상대의 손을 먼저 잡아 주는 마음이 아니겠나.

  HELP, 그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HELP가 됨으로써 나는 내 운명을 HELP하고 싶다. 그것이 내 운명이고 싶다. 현실이여, '시작'하라. 운명이여,'HELP'하라.

어쩌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내 나이는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진다. 어젯밤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THE HELP 2, 343p



나는
흑인여자다
사이프러스처럼 키가 크고
튼튼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묵묵하고
장소와
시간과
환경을 무시하며
공격을 당해도
상처받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그대
나를 보고
새로워지라

- 『나는 흑인 여자다』, 메리 에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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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인 문학은 저도 좋아하는 편이라, 랠프 앨리슨도 그렇고 저 위에 인용해주신 랭스턴 휴스도 흑인대푬 문학선에서 읽어 본 기억이 나네요. ^^ 개인적으로 말콤X를 제일 좋아해요. 문학가는 아니지만 말이죠. ^^
이 소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읽은 것 같은데 한사람님이 쓰신 리뷰에는 성실함이랄까, 그런 것을 느껴요. 전 문학에서 성실함을 느낀 작가는 하루키거든요. 작품의 이해는 떠나서요. 내일 다시 와서 이 리뷰를 읽을려구요. 좀 곰곰히 읽어야 할 듯 해요. ^^ 항상 감사해요. 좋은 리뷰 올려주셔서 ㅋ

루쉰P 2011-06-24 23:17   좋아요 0 | URL
아! 그저께는 대략적 대목만 보고 너무 피곤해 잠들었는데 역시나 제가 본 데로 바늘로 꼼꼼하게 하나 하나 엮은 듯한 리뷰에요. 성실에서 더 높은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이거 리뷰를 읽다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이 진정한 리뷰다 생각했는데 이 리뷰!! 그런 마음이 나왔어요. 전 원래 사람들이 많이 보는 소설은 잘 읽는 괴벽이 있는데 이거 정말 한사람님 글을 보니 읽고 싶다는 생각이 팍 드네요.
'나처럼 현실이 까맣게 불타버려 실은 피부색같은 건 하나도 의미없는 자들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문장은 날카로운 화살처럼 확하고 제 마음에 꽂히네요. 전 문장이 아름다울 때 정말 즐거움을 느껴요. 도처에 그런 문장들이 보여요. 후와!! 어떻게 이렇게 쓰시는지..-.- 부럽습니다!

이 리뷰가 공을 안 들인 리뷰라니 또 한 번 놀랐어요. 근데 아무리 봐도 리뷰 안에 있는 한사람님의 문장이 참으로 좋아 소설은 충분히 쓰실 수 있을거라 여겨지는데요. ^^

반응이 없는 것 보는 눈이 없는거죠. 염려마세요.

서재에 글들을 보면서 신중하게 보기는 하지만 한사람님의 리뷰는 읽고 또 읽게 돼요. ^^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천천히 차근 차근 읽을려구요. 아..리뷰 감동 먹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