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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현빈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현빈을 잊지 못했다. 그는 누구를 향한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 군대로 떠나갔다. 현빈이 떠나간 지 반년이 다 되가지만 아직도 내 책꽂이에는 그가 넘겨보던 책들이 얌전히 꽂혀져있다. TV 에선 아직도 그 반년이 다 지나가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적잖은 현빈이 광고로 등장한다. 듣자하니 현빈을 앞세운 해병이야기를 담은 책도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한다. 이 책을 빌미로 새삼스럽게 현빈의 브랜드 파워를 논하고 싶진 않다. 현빈은 떠났지만 다시 올 날을 기다리는 아줌마들의 심리를 고백하고 싶어서다. 아니 현빈 입대 후 그 상실감을 견딜 수 있는 그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다. 현빈은 갔지만 김주원 사장은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다.

   재벌회장의 아들과 그 회사 말단 여직원의 로맨스는 미니시리즈의 진부한 흥행공식이다. 현빈은 여기서 배출된 수많은 실장과 본부장의 2010년 계보에 위치한다. 실장의 마음을 뺏은 여주인공이 고졸이건, 시한부 인생이건, 스턴트맨이건 그따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현빈이 떠나도 실장은 무한히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유학파와 스포츠카, 호텔 바와 사교파티로 설명되는 그들 모든 실장은 바로 저자가 지적하는 ‘도시 중간계급 여성’의 판타지를 상징하는 욕망의 로맨티스트다. 이 직장 내의 변함없는 수사학이 연예계로 변형, 이식된 드라마가 ‘최고의 사랑’이었다. 현빈 떠나간 가슴을 독고진으로 달래면 그만인 사안이었다. 엊그제 ‘여인의 향기’라는 드라마를 보니 이 공식은 그대로 복제되었고 우리는 다시 독고진 떠나간 서운함을 조금 더 젊은 실장의 눈망울로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도시 중간계급의 여성으로서 이런 이야기는 내게 상당히 흥미롭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임성한식의 연속극을 넘겨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는데(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보다 확실한 타겟은 남성은 아니지 싶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컨텐츠를 주도하는 형식의 통속성에 굴복당하는 느낌. 그러나 그러한 불쾌를 알면서도 멈추고 싶지 않은 쾌락의 범주에 속하였다. 우리가 김수현 드라마를 통해 ‘불륜이라는 금지의 명령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쾌락을 재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이택광의 문화비평을 통해 ‘우월이라는 불편한 비평 뒤에 숨어 있는 독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환기’하는 시간이었다고 할까. 재미나면서도 불쾌했던 건 반복되는 (재계몽의 대상으로서) 우월감에 대한 저항이었고 그럼에도 지속시키고 싶은 호기심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은 정확하게 저자가 말하는 주이상스의 영역에 편입된다. 피할 수 없는 가독성의 주이상스, 물론 그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바로 저자가 할 일이겠지만(중이 제 머리 깎기는 힘들겠지만) 나는 능력부족으로 그냥 그 앞면에 대에서만 말하겠다. 간만에 글을 좀 끄적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과연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잉여(?) 재미를 설명하고 싶게 하는지.



문화비평은 미완성이다

   평가단의 지위(?)와 역할을 이용해 나쁜 점부터 말하겠다. 이 책은 크게 ‘철학과 비평사이’, ‘사회와 정치 사이’, ‘문화와 인물 사이’라는 대 구분으로 나뉘어 약 구십여 개의 꼭지가 기사모음처럼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블로그에 이와 비슷한 글들을 읽은 것 까지 합치면 백 여 개 이상은 될 듯하다. 문제는 바로 백번이나 같은 방식의 글을 읽었다는 것인데 이 반복성이 주입하는 효과가 딱 반반이다. 저자가 분석하는 해석툴이 어느 순간 단순하게 느껴져 지겹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정치와 사회현상, 이슈가 된 사건, 방송 이야기등 저자가 해부하는 매스와 칼질의 방향은 언제나 똑같다. 저자가 주로 사용하는 용어가 이상하게도 고급한 문장으로 느껴지지 않은 이유가 그 반복과 방식의 강요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 반복효과로 그가 말하는 문화비평의 방법론을 하나 학습한 것 같다는 보람은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배운게 있다면 그 부분이다.

   또 하나, 책의 구성상 맨 앞에 제시된 ‘철학과 비평사이’의 단락이 어쩐지 앞으로 전개될 모든 비평의 배경, 혹은 기둥으로 제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어색했다) 특히 나같이 저자가 언급하는 철학자의 책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모두 성급한 논리의 비약으로 느껴질 소지가 많다. 시대를 넘나드는 맥락의 전개가 다소 무리있어 보였다. 이러이러한 철학적 지식과 고민한 과정이 있었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였다는 타당성의 논리로 보여 약간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달까. 저자는 이 책을 처음부터 서론, 본론, 결론의 방향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모아진 글들을 대주제 하에 엮어서 편집하였을 터이다. 그래서 아쉽게도 이 책의 결론은 없다. 어찌 보면 (백여 개의 글을 덮고 난 생각인데)발전이 없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책의 제목이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인데 내 생각에 이 책의 보다 정확한 제목은 ’이것은 문화비평의 한 부분이다‘, 혹은 ’단계이다‘ 정도가 맞을 듯하다. 저자의 말대로 문화비평이 사회 현상에 대한 발본과 그 사유를 통해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라면 이 책에서 밝혀낸 사회구조는 아직 공동의 질문인 채 인 듯하기 때문이다. 어쩐지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분석된 단편적인 징후들을 모아 다시 총체적으로 통합된 사회구조의 평면도를, 그 3D를 그려내어야 할 듯하다. 분석된 퍼즐들을 알아서 맞추는 것이 혹 우리들 독자의 몫이라면 그는 아직 문화비평을 완성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뚜렷한 결론이 없다하더라도 그 없는 이유라도 결론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단락이 에필로그처럼 부연되었다면 자극의 쾌락을 자의적으로 중단할 동기부여는 충분했을 듯하다.(<인지자본주의>의 경우 방대한 본론에 비해 확실한 결론은 없었지만 현재 상태에서의 기대나 바람을 조심스런 결론으로 언급하였다) 지금 아직 비평을 하고 있는 단계였고 아쉽게도 우리는 그 과정을 저자와 함께 체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조교, 학생이 아니고 독자이므로 이 책은 강의 교재가 아니고 인문서적이므로 나는 그 부분이 아쉽고 모자랐다고 생각한다. 특히 앞부분에 철학과 비평의 관계를 서론처럼 언급했다면 더욱 사회현상과 인물을 지나쳐온 마지막 결론부는 이러한 결과를 다 같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 에두를 방향이었어도 언급은 되었어야 한다고 본다. 향후 공통의 과제쯤은 정리해 주었어야 한다. 결론이 부재한 이 책은 자칫 허무적인 냉소의 분위기로 모든 비평이 마감될 여지가 있다. 저자의 블로그에도 이 현상은 반복된다. 이는 유치하더라도 결론을 내고 다음의 발전을 기약하는 일부 정치인의 서적만 못하다고 할수 있다. 혼자만 저 높은 혹은 저 낮은 곳에서 초탈한 시선으로 세상을 견지한 후 세상의 변혁 가능성은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로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탈정치적인 결과다. 저자는 문화비평이 정치적인 것이라 정의하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대로 그를 해석하자면 그는 ’정치주의자이면서도 선명하게 정치주의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교수님이라는 생각이다. 문화비평이라는 장르가 원래 미완성을 그 완성으로 한다는 주석을 달아주셨다면 모를까.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다

   이 책에서 언급된 한국 사회의 문화현상은 한국이라는 대극장에서 상영된 억압 장르의 스펙타클 영상이었고 대부분 흥행에 성공한 바 있다. 저자가 이러한 현상들을 분석하는 방법은 ‘동전 뒤집기’와 ‘뫼비우스의 띠’ 를 살펴보는 관찰기법이다. 전복과 입체화. 동전의 나머지 한 면의 실상을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드러난 이데올로기 이면의 은폐된 진실을 포착하는 것. 진실의 배면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 예를 들어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맹렬히 비난하는 대중을 말할 땐 ‘유영철을 논하면서 유영철은 없다’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이미 갖고 있던 희대의 살인마 법칙에 부합하는 유영철을 재차 발견하여 한껏 사연을 추억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길태 사건 이면에는 파렴치한 악인에 가려진 재개발 지역의 피해자, 여중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시선이다. 유영철이라는 동전 뒷면엔 ‘살인의 추억’이라는 집단 심리가 있고 김길태라는 뫼비우스의 띠에는 ‘재개발 도시정책, 한국식 자본주의’가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이다. 이런 식으로 세계는 없어도 세계화는 있다, 민족은 없고 민족주의는 있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사실 동전 뒷면이 추잡하든 뜻밖이든 그것도 동전이긴 하므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비쳐지는 경향이 없지 않다. 뫼비우스의 띠는 끝이 없는 블랙홀이므로 결과가 미궁으로 빠지는 국면도 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자칫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다, 문화비평에만 모든 게 있다,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동전의 뒷면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국 하나로 이어진 징후에 숨어있는 정치경제적 측면을 말한다 했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가 가장 많이 주장했던 것은 그러한 증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에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가시적 효과 때문에 저자로부터 지적당한 불쾌감이 결국 이 책을 향한 불만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에 의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모든 증상의 주체는 (여성이건 남성이건)한국의 도시 중간계급이다.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계급으로서 이들은 ‘쾌락의 평등주의’에 길들여져 있으며 그들에게서 한국적 자아의 도착증 상태를 발견한다 주장한다. 저자가 투시하는 렌즈는 중간계급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세금 올리는 건 반대하면서 복지정책 확대를 지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분열 증세이다.

   
 


아무리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부자나 연예인에 대한 신비화), 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법에 대한 반발(인터넷 댓글에서 드러나는 우상 파괴), 그리고 절대 악이나 권력에 대해 관대하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강력한 권에 대한 갈망) 이런 악과 권력에 자신이 귀속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것(미국적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이런 모순이 바로 도착증의 구조다.       -117p

 
   

    
   이 책에서 이들 중간계급은 사회구조적으로 금지된 억압을 방어하는 기제로, 기존 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주이상스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주인공으로 근거한다. 유영철도 이순신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신세경도 소녀시대도 이들에 의해 그때그때 호출된 유령이자 판타지라 말한다. 월드컵은 기적이라는 유토피아 충동을 한데 모아 논리로 끌어낸 문화형식이다.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이명박에 대한 열망이며 촛불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다시 신자유주의에 더욱 충실한 논리로 해결하고자 하는 역설이라 설명한다. <쩐의 전쟁>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반응하는 한국 중간계급’의 판타지며, 반지성주의는 ‘먹고사니즘’이라는 대한민국 유일의 이데올로기와 섭동하는 판타지며, 부자 신드롬은 ‘계급적 대립의 리얼리티를 은폐’하는 판타지라 부연한다. 저자는 이들의 판타지를 다양한 종류로 구분짓고 저자의 법칙대로 뫼비우스의 프레임 속으로 도식화, 정형화한다. 문화비평은 우리 사회 각종 판타지를 발본하여 판타지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이들은 북핵의 공포보다는 파산의 공포를 더 두려워하며, 아파트에서의 삶이 아닌 아파트 가격의 즐거움에 중독된 존재들이다. 지속적인 경쟁을 통한 즐거움을 원하며 소말리아 해적소탕 같은 군사행동은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협받는 전쟁은 거부한다. 월드컵 응원녀는 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한국사회가 나눠 갖는 절대적 대상’이며 소녀시대 역시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실상이 아니고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인형으로서 비굴한 오빠들의 판타지를 의미한다. 미드는 미혼여성의 자기계발 욕망 판타지며 막장 드라마는 중산층에서 누락된 아줌마들의 판타지다. 중간계급의 불안과 분노를 섹슈얼 판타지로 극장화 한 것이 김수현 드라마이다. 소주 마시는 여성은 ‘몰락해가는 중간계급에 바쳐지는 조시’이며 그랜저는 수입세단까지는 힘들어도 한국세단까지는 가능한 중간계급의 욕망을 대리한다. 타블로 논란은 중간계급이 주체가 되어 도착적 퍼포먼스의 의미를 실행한 근대적 마녀사냥이었다. <워낭소리>를 보고 흘린 눈물은 농촌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지금은 잊어버린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독설이 신해철을 진보로 보이게 했다면 그것은 폭로가 자본주의의 상품화를 작동시키는 논리와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괴담과 소문의 출처로 기능하는 인터넷 공간은 ‘사실상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담합하는 장소’인 것이다. 이렇듯 저자가 나열하는 문화비평의 조각들은 대부분 중간계급의 현재증상을 통한 성격규명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니 중간계급의 세분화를 통한 성격통합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이데올로기가 ‘주입‘의 과정을 거쳐 주체로 스며드는 것이라고 할 때 중간계급의 주체에 해당되는 나는 이 책이 뜻하지 않게 모종의 패배감, 열등감, 죄의식을 안겨주었다 말하고 싶다.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었지만 그 문화를 만들어온 사람은 가득했던 것. 사실 문화는 잘못이 없지만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렇게 잘못해온 시간들이 문화를 창출하는 것 일테니까. 이 역시 문화비평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우연하게 생겨버린 동전의 뒷면은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익숙하고 당연해 보이던 문화이해 방식을 한번 뒤집고 비틀어 새로운 층위를 발견할 수 있는 통로는 하나 발견한 것 같다. 늘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주는 대로 인식하던 습관에 경고등 하나는 달아놓은 느낌이다. 재밌고 유익했다. 한가지 분명한건 뒤집는 재미를 위해 동전의 뒷면을 애써 뒤집어 보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모든 진실이 그 배후에, 그 이면에 있는 건 아닐 터이다. 그리고 뒤집어 폭로했다면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끼기 보다는 그 후의 대안이나 효과도 고려를 해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논리가 진실을 이기고 분석이 진실을 규정지어선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인터넷 공간에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이면을 색다르게 보았다는 주장을 하며 사실상 비밀을 폭로하는 사람들을 본다. 은폐된 진실을 나누어 구경하는 것은 저자의 말대로 쾌락 평등주의에 해당된다. 이는 다같이 공유하는 진실이라면 개인의 상처나 희생쯤은 감수해도 된다는 공동의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셈이다. 이 책이 모아지는 결론이 없었기 때문에 궁극엔 문화비평이 진실폭로나 진리발표의 방법론을 말하는 장르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재미나게 넘어가는 수준인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언제나 설레인다. 그것이 정말로 진실이든 거짓이든 들추어보는 전 과정은 금지된 쾌락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진리를 향한 주이상스다. 독서 중간계급의 지적허영을 채워줄 문화판타지다.

 

<덧붙임> 

며칠 지나 다시 읽어보니 나는 이 책의 좋은 점은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은 ..... 한마디로 비웃는 재미이다. 씁쓸한 안주, 그러나 알코올을 당기는 매력.  
서두에 언급했지만
시청률 높지만 시나리오는 황당한 막장 드라마를 습관적으로 보는 이유와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막장식의 비평이라는 뜻은 아니다.(신을 모두 모아 상영하니 막장드라마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계속하여 책을 넘기게 하는 그 기분도 중요하다.
학식과 교양이 뭐 별건가. 

그래서인지 많이 안다는 게 요즘은 크게 부럽지가 않다.
세상을 깨치고 통달하는 그 '앎'이 앎을 넘어 '선'이나 '행'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암튼, 이 책을 덮고나면 나름대로 서로 다른 교훈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인문교양서적 덮고나서 재미봤다는데 부채감을 느끼는 분만 아니라면
색다른 재미를 위해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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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0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한사람님의 저번 소개로 관심이 생긴 책이었는데 '여인의 향기'를 언급하시니 좀더 솔깃. ㅎㅎ 김선아 연기 볼라고 드라마 보니, 남주가 누구인지는 별 관심없긴 하지만 그래도..쩜쩜..ㅎㅎㅎ

햐아..거진 백 번이나 반복되믄 지겹지요. 반복효과의 장단점이라..와우. 한사람님 분석 짱!!
덧붙임..도 의미심장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