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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1. 어제의 불만


   이 책은 적어도 우리나라의 바깥에 있다. 물론 그렇게 예상했기 때문에 이 책에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바깥에 있는 그들이 말하는 ‘불안’은 안에 있는 우리의 거울이 되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불안을 지병처럼 달고 사는 작금의 시대에 범 세계적으로 거시적인 불안을 관찰하고 함께 미래를 성찰하고자 하는 소박한 독자의 심정이었다. 바로 그런 뉘앙스의 제목 덕분에 다른 객관적인 정보들을 간과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언짢은 것은 원제를 왜곡했다는 사실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칼럼니스트인 기디온 래치먼(Gideon Rachman)이 집필한 책의 원제는 <Zero-Sum Future: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이다. ‘제로섬 미래’이면서 부제가 ‘불안의 시대에 놓인 미국의 파워’인 것이다. 문법상으로만 보아도 중요한건 미국의 힘인 것이지 세계의 불안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출판사는 떡하니 <불안의 시대: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이라는 인문교양학적인 제목으로 바꾸어 제로섬의 경제학적인 이미지와 아메리칸의 부정적 뉘앙스를 덮어버린 것이다.(허긴 제목이 ‘미국의 힘’이면 역학적 결과에 관심있는 독자들만 이 책을 사볼 것이 자명하지만)

  나는 책을 덮고서 표지에 그려진 다섯 개의 커다란 돌멩이 위에서 불안하게 서있는 코끼리를 확 밀어 버리고 싶었다. 이 책은 결국 다섯 개의 돌멩이를 흔들림 없이 균형을 맞추어 잘 쌓아보자는 것인데(그래야 코끼리가 제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코끼리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선 원래 능력자인 코끼리의 문제이기 보다 그런 식으로 돌 쌓는 자, 혹은 그렇게 쌓여진 돌의 문제라는 의미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코끼리더러 불안한 돌 위에 서라고 한 적이 있단 말인가. 번역만 사실대로 정직(?)하게 했어도 이 최종적인 불쾌감은 줄었을 듯 하다. 책덮고 난 후 코끼리에 가려 원제목을 확인하지 못한 실수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조금만 더 찾아보았으면 저자가 최근에(2010-2011) 이 책 말고도 제로섬을 타이틀로 한 책을 두 권 더 출간했고 제목엔 모두 제로섬이 저자의 법칙처럼 네이밍되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원서의)책 소개만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제로섬의 법칙을 벗어나려면 그 대안으로서 미국에 힘을 실어주자는 식의 결론은 접할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이 책이 인문학보다는 비즈니스, 경제학 분야에 속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 Zero-sum World :                                                  < Zero-sum Future :
    Politics, Power and Prosperity After the Crash, 2011>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 2011>


  경제학에 속한다는 것이 잘못되었고 그럴 줄 알았으면 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저자가 내리는 결론이 인문학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며 페이지를 넘겨간 것이 얼마간 아쉽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저자는 오랜 기간 경제기자로서 여러 지역의 특파원 생활을 하였고 현재 영국에서 발행하는 국제 경제신문의 칼럼을 맡고 있는 저널리스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오늘 아침(2011. 7.9) KBS 2 라디오의 <박경철의 경제포커스>에서도 번역자와 함께 소개되었고 경제 전문 케이블 TV SBS CNBC 채널에서도 이미 상세하게 브리핑 된 책이다.(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152729) 아마존에 등록된 이 책의 원서엔 대부분 긍정적인 서평이 올라와 있으며 이 책이 21세기라는 불안의 시대를 깊고 넓게 알게 하면서 앞으로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어 무척 유용하다는 식의 ‘Essential Reading’이나 ‘The perfect guide’라는 표현이 주를 이룬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의 결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보다 불안한 상황이니 기왕이면 오래 반장 해먹은 친구를 중심으로 의기투합해 다시 똘똘 뭉치자는 굉장히 동양적 사고방식을 투영한다.(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식민지 분단국가의 오래된 대 국민 정체성 아니었던가) 각자 흩어져 하던 대로 자기 목소리를 높이자, 보다는 낫겠지만 문제는 이 책이 주장하는 불안 및 불안해소의 주체로 보인다. 누가 더 불안하고 그리하여 누가 불안을 해소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누가 덜 불안해지나 하는. 이 책에서 세계는 미국이고 이 책에서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는 오로지 미국의 경쟁국가로만 의미를 획득한다. 조금만 더 부풀리면 미국이 아주 유례없이 불안하므로 세계가 멸망하는 꼴 보기 싫으면 다시 미국을 불안하게 하지 말자는 뜻으로도 들린다. 첨부되는 자료와 기사는 더없이 세계적이나 그로인한 통찰은 누구보다 미국적임을 이 책을 접한 독자들은 피부로 체감할 터이다. 허나, 이 책의 피상적이고 오만한 결론과 상관없이 서구 강대국의 서구적 시각은 2011년 현재 지금 이와 같다는 것이 우리로선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급작스럽고 황당스런 결론을 가지고 우리가 옳고 그름을, 혹은 장점 단점을 논하는 것은 이 책을 대하는 자세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거의 신문 칼럼의 연장선상에 있는 외교 및 경제 리포트의 성격이 강한데 오늘자 런던 발, 뉴역 발, 도쿄 발 경제 사설을 보고 그 결론이 한국의 국민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 하여 당신네들은 틀렸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 의미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저자가 그토록 부르짖는 2008년 금융위기 같은 범 세계적 사태만 하나 터져준다면 또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바뀔 수 있는 성질의 텍스트가 아닐까. (물론 텍스트만 바뀌고 기본적인 믿음은 거의 종교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긴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해온 대로 평소 분석위주의 기사들로만 마무리 짓고 나머지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기사가 아니라 책이니만큼) 마무리만 지었어도 별 문제는 없었을 듯하다. (우리 언론에서도 저자의 결론은 무시(?) 하고 그저 시대를 나누어 잘 정리한 것에만 언급하지 않는가) 문제는 저자가 자기수준에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 결론을 우리 수준에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음이다. 결론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직업적으로)결론을 내는 것이 저자의 역할이었고 그것은 이 책에서도 유효할 수 밖에 없는 습관이자 패턴, 업무라고 여겨진다.

  미국위주의 초국수적 결론만 제외하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가 지난 30년을 '전환의 시대', '낙관의 시대', '불안의 시대' 의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각기 그 시대를 정의했다는 것이다.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역할이자 사회가 동의한 능력이 아닐까. 저자는 구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오랜 기자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를 규정짓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낱낱이 풀어놓았다. 이 책의 성과는 바로 국제 정치관계에 있어 지난 삼십년간의 역학구조와 그 변화를 자신의 발품을 팔아 조사하고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손으로 기록한 결과들로 재건축 했다는 것이 아닐까. 저자의 결론을 우습게 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사실 그 삼십년의 세월에 있다는 생각도 한다. 저자는 늘 현장에 있었고 인물의 곁에 있었고 사건과 추이를 몸으로 겪은 사람이었다. 물론 많이 알고 그래서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이 꼭 훌륭한 정답을 내라는 법은 없다. 나 역시도 밤을 새워서 고민해 놓고 다음날 아침에 내리는 결정은 그 전날 전혀 밤을 새우지 않았어도 좋을 만한 결론일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많이 고민한 사람은 말할 수 있다. 보따리 풀듯 고민한 내용들을 풀어 놓을 수 있다. 누군가는 그 고민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고 전혀 다른 해결책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이 책 역시 우리같이 강대국이 아닌 변방의 나라의 국민이 보기엔 퍽이나 자존심 상하는 결론이겠지만 지난 세월 우리라고 옳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만 대통령으로 뽑아주진 않지 않았던가. 이 책은 논리로 구축된 오늘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축되는 과정에는 공감하고 그 흐름을 우리의 필요성에 따라 잘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또 내가 보기에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듣고 써온 고민들이 중요한 것이지 대안이나 결론은 스스로도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결론을 설파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2. 오늘의 불안

  이 책의 시대 구분은 1978년, 1991년, 2008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다. 각기 전환, 낙관, 불안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중국의 개방, 소련의 해체, 미국의 금융위기가 변화를 이끈 주체로 규정된다. 시작은 1978년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며 마지막은 G2로서 중국의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삼십년간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를 뒤흔들고 있는 주체는 바로 중국이다. 어찌 보면 이 책은 (미국입장에서)중국으로 시작해 중국으로 끝난다는 인상을 주는데 70년대 말 이후 덩 샤오핑의 개방정책 추진을 기점으로 세계화, 자유화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삼십년의 시기를 구분하는 잣대로 근거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아마도 중국의 변화흐름을 훑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도 소련도 다 극복해온 미국이니 거대 중국도 헤쳐나갈 수 있다(니들이 도와준다면)는 메시지가 우리로선 참 재미난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가 북한과 화해하여 행여나 통일이라도 할까봐 불안한 나라이다. 일본은 행여나 우리가 자신들을 앞지르며 아시아의 일인자가 될까봐 노심초사 좌불안석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군을 보험삼아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선 복잡한 역학관계로 인해 어느 하나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순간이 없는 실정이니 그들간의 리그는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과 미국은 북한의 행동을 억제하는 데는 공동으로 협력한다. 하지만 두 나라 간에는 이러한 협력을 제한하는 암묵적인 라이벌 관계가 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중국 국경 바로 앞에 미군 기지가 들어오는 것을 중국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355P
 
   


  일례로 오늘아침 신문엔 지난 4일 열린 故 로널드 레이건(1911~2004) 전 미국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동상 제막식을 기사화하면서 바로 레이건의 길을 갈 것이냐 카터의 길을 갈 것이냐를 여론화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10/2011071001267.html

  이 책에서도 전환의 시대를 이끈 레이건은 중요한 ‘냉전시기의 정치가’로 상징화 되고 있었다. 저자는 대처총리와 레이건의 파트너쉽을 자세히 언급하면서 같은 세계관을 가진 두 사람이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과 소련에 대한 강경 노선을 펼쳤고 결국 소련을 해체하고 탈냉전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나는 친구였던 레이건을 기리는 대처의 축사에 "다음 세대들이 이 동상을 보며 그가 우리에게 베푼 것을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라는 구절의 '다음 세대(future generations)'와 '되새긴다(remind)'란 표현을 특히 강조하며 바로 한반도 역사의 ‘동어반복(同語反復)적’ 속성을 이어 붙여 그것에 설득력을 실으려는 논설위원을 볼 수 있었다. 레이건은 평화를 주장하기 보다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소련을 압박하는 정책’을 씀으로 해서 냉전체제를 종식시켰는데 이를 교훈삼아 한반도는 평화를 어떤 식으로 지켜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공산주의와 공존하며 평화를 외쳤던 카터 대통령을 빗대며 인권과 평화를 앞세운 패배주의를 지향할 것인지도 비교화법으로 질문한다. 우리의 대북관계 노선 및 정책은 이렇듯 이미 고인이 된 레이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대처의 생각, 영국자 신문의 사설과 무관하지가 않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낙관의 시대를 부활시키자는 저자의 생각은 오늘자 신문의 논평과 중첩되면서, 그것이 바로 한반도의 평화논리와 결부되는 것을 목격하곤 이 책이 꽤 영향력있는 책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음이다.

  이 책의 저자는 후반부로 갈수록 미국의 힘이 막강했던 ‘낙관의 시대’의 정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그것이 역사적인 시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어쩐지 개인적인 뉘앙스로도 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낙관의 시대에 <이코노미스트>의 판매부수가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도 나타났다. 내가 이 잡지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던 때인 1991년, <이코노미스트>의 판매부수는 매주 30만부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이코노미스트>를 떠날 때인 2006년에는 100만부가 넘게 팔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이코노미스트>가 시사주간지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낙관의 시대를 특징짓는 경제사상, 특히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활기차게 전파했다는 사실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한 예로, 미국의 국제 관계 권위자인 마이클 만델바움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화를 알리는 주보”라는 말까지 했다. -155p
 
   


  저자가 규정지은 낙관의 시대는 정확히 자신이 이코노미스트에 근무한 세월과 일치한다. 즉, 전 세계에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전파하는 선봉장으로서 앞장서온 저자는 그 시절 언론계의 클린턴, 빌게이츠에 다름 아닌 것이다. 클린턴 정부와 빌 게이츠 그리고 우리의 김대중 정부를 떠올려 보면 그 시절 IT 혁명으로 미국의 낙관주의를 적극 수용, 개발한 발빠른 이력이 겹쳐지고 한국은 미국이 선도하는 세계적 정책의 영향하에 위치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 하나 아쉬운 건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은 유독 작고 볼품없는 나라로 생각된다는 것. 그것은 저자가 분석하는 국제정치의 역학적 논리에 있어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난 시절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처럼 자신들을 위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미있는 나라로 분류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늘 자기들 편이라는 확고한 믿음의 방증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저자는 한국과 북한을 말할 땐 마치 저 위에서 한참 아래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거의 반복되는 형용으로 일관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한국과 태국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휴전선 너머 북한을 바라보면서 경제적 고립은 훨씬 더 나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211p

세계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아시의 떠오르는 중산층은 과거보다 영양상태가 더 좋아지고 있다. 따라서 식량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267p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립된 국가중 하나인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었다. 276p 

국제적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과 문제를 진정으로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반드시 같다고 볼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도 고립된 국가 중의 하나인 북한이 확실히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핵에 관한 국제적 합의의 맹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297p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에 대한 그 어떤 평가를 하진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개최된 정상회의는 잘도 언급하면서 작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이 책이 올해 출간되었고 정상회의가 작년 말이니 저자의 성격상(?) 서울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이 환율문제 등과 관련해 신경전을 벌인 정도의 에피소드는 첨언할 만도 한데 어쩐 일인지 서울 정상회의는 논외에서 제외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그런 건 우리만 중요해보였다고 할까. 당시 파이낸셜 타임즈는 “새로운 조직이 리더쉽을 장악했다”고 까지 보도했다는데 저자의 눈엔 우리의 리더쉽 같은 건(대세에 지장이 없으므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자가 지목하는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세계화와 밀접한 기후변화와 관련한 문제도 대립을 이루는 건 중국이었고 미국을 제치고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1위를 달성한 중국을 걸고 넘어지는 식이었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중국 간의 직접적인 협상은 두 나라가 중요하게 판단하는 국익이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계속 교착 상태에 빠져들 가능성이 많다. 기후 변화에서 글로벌 경제 불균형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중국은 점점 더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의 손실이 되는 제로섬 관계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291P

 
   


  결국 이 책의 원제인 제로섬의 문제는 곧 중국과의 대결에서 손실이 발생할지 모르는 미국의 심리적 불안을 상징하는 키워드였던 것이다. 저자는 효과적인 다자간의 협력도 필요하지만 실패와 교착을 반복하는 상태에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은 낙관의 시대에 막강했던 미국의 파워라 주장한다. 문서상의 합의는 실질적인 도움, 수행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제로섬의 도래로 더 이상 오바마 정부의 ‘글로벌 문제에 관한 글로벌 해법’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 저자가 내리는 삼십년간의 처방인 것이다.


   
 


중국은 위안화의 가치와 외환 시장에서 자유롭게 변동하지 못하도록 해 그 가치를 고의적으로 평가절하함 으로써 미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기록했다. 중국은 이렇게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내 자산을 구매함으로써 달러가 미국에서 재순환하도록 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이자율은 떨어졌고, 결국 2008년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신용 붐이 일어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 함으로써 중국산 제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하락시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미국과 유럽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341P

 
   

  저자는 미국 내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의 시각을 타전하며 2008년 금융위기의 책임을 은근히 중국으로 돌리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여지를 독재국가라는 개념으로 더 굳건히 하려는 논리의 발판으로 삼는 듯 했다. 금융위기로 바탕을 다지고 기후변화로 역량을 만들어 독재국가로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들 중 두 나라가(인구는 두 나라를 합쳐 15억이 넘으며, 군사력은 세계 2위와 3위를 차지한다) 독재국가이며, 이들은 가까운 미래에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3. 어제 오늘의 대안 

  독재국가의 지배를 받게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저자는 삼십년 동안 세계화, 자유시장, 민주주의 사상을 언론을 통해 전파하는데 앞장서온 사람이었다. 라이벌을 두려워하고 과대평가하지 말 것이며 EU는 더 확대되어야 제로섬 논리를 해체하는 역학적 힘을 키울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며 미국국민은 세계화가 윈윈 세계를 창출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 ‘발전은 결국 다시 시작될 것이다’, 는 것이 불안의 시대에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이었다. 속된 말로 중국은 80년대 일본보다 위협적이지 않고  생각보다 자기들을 앞서는 것도 아니라는 식이다. 세월의 통찰에 비해 오늘 내리는 처방은 참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철학적이기 까지 하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예전에도 그래왔던 거 처럼 앞으로도 잘 될거라고 믿는것이 최선이라니. 돌려 말하면 사실 대안이 없으니 우리의 저력과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해온 시간들만 믿자는 것으로 들리는데 이쯤되면 웃기다기 보다 슬퍼해야 할 자조적 답안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자본주의는 명목상 미국의 보호아래 지난 삼십년간 80년대 맥도날드가 2000년대 스타벅스라는 서구 다국적 기업으로 교체되면서 동반 성장해왔다. 1950년 전후의 악조건 속에서도 반세기 이상 이만큼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온 나라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든 성과지향적인 삶 자체가 국가와 개인의 성공을 앞당기는 우선된 가치였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 핵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었고 미국이 도와주었고 미국이 우릴 자극했고 우리도 미국에 기여했다. 세계적으로 소련과 중국과 일본과 미국사이에서 그 국제적 정세를 좌우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그만큼 한반도의 미래가 세계적 변화와 맞물려 있으며 세계적 평화와 상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조금은 더 흥미롭고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다시 제로섬의 법칙을 환기하자. 내가 이기면 당신이 지는 게임. 나의 성공은 타자의 실패를 상징하는 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최근 성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내가 탈락되지 않으려면 누군가 탈락해야 하는 것이 서바이벌 시장의 법칙인 것이다. 오늘날 잔인한 경쟁의 원칙은 윈윈이 아니고 제로섬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제로섬의 게임규칙을 대체할 대안이 협력이나 양보가 아니고 한 명의 영웅을 믿고 따르는 방식인 것은 그 길고긴 분석에 비해(분석이 아쉬울 정도로)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고 헐리우드 적인 것이 아닐까. 내 목소리만 주장하는 것 만큼이나, 아니 더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일단 돈 먼저 벌고 나서 파이를 나누겠다는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 세계는 효과와 이득이 배려와 이해보다 중요한 것인가.

  다시 윈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서운하다. 낙관의 시대로 돌아가 대처와 레이건의 리더쉽으로 민주주의 복음을 전파하던 그들만의 행복은 우리의 그것과 상이하다. 우리는 다 같이 이기는 것도 소중하지만 다 같이 져도 서로를 안아주는 민족이 더 절실하다.

  다 이길 수 없다면, 누군가는 패배해야 한다면 모두 지는 것은 어떠한가. 조금씩 이윤을 포기하고 나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쌀 한 줌을 나눌 수 있는 진심과 정이 아쉽다. 우리가 (그들이 말하길)중국 중심의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운명으로서 현재 서구의 시각을 파악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일인가. 협력의 시대가 아니라 경쟁과 분열의 시대라는 저들의 분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꼭 이겨야 한다고 말해왔던가. 이기는 것만이 발전이라 누가 주장했던가. 어짜피 어느 시대건 늘 이겨왔던 패권자는 말한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국가들로부터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이렇듯 서구세계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슬로건과 함께 미국과 끈질기게도 연대하며 미래의 파트너쉽을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너무나 좋은 말이기에 이 책을 덮은 나 역시 그 말만은 잊지 않고 싶어진다. 미국이나 영국, 혹은 중국, 일본의 속내를 아는 것은 우리로선 유익한 일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의미있는 결론에도 절대 상처받거나 흥분하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얼마간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보다 많은 독자들이 서구중심의 이런 결론을 같이 알고서 부디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결연함을 소원하는 바이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힘겹게 읽으면서 얻은 유일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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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일 말머리에 하시는 말씀, 무엇인지 알아요.
요즘 책 소개에 많이 속아넘어갔거든요. 또는 제가 잘못 안 경우도 많죠.
최근에 <괴짜 생태학>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어요.
저자의 관점과 의도가 저랑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의도 파악 중이예요.

음..... '평정심 유지', 진정 제가 원하는 일이네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승질날거 같은데요. ㅎㅎ

참, 한사람님.. 아마존 링크에 줄그은 부분부터해서, 아래 모든 페이퍼에 밑줄 긋기가 되어있어요.
수정하셔야 할거 같아요. 아니면 서재지기에게 문의하시던가요.

가연 2011-07-1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저도 원제를 보고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요.. 저는 처음에 저 말은 봤지만 저게 원제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에휴

윈터 2011-07-2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제, 표지 이미지에 대한 코멘트에 공감합니다. 이 책 읽고, 오랜만에 황당한 독서를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