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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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이 ‘풀꽃’되다


    냄새에 관한 기억은 이토록 선명하다. 그건 살면서 다른 곳에선 맡아 본 적이 없는, 내가 아는 종류의 모든 동물의 분뇨와 내가 먹어본 온갖 음식들이 썩어가는 냄새를 합치고도 모자랄만한 강도였다. 지난 시절 내가 출퇴근하던 고속화도로 일정구간엔 도저히 자동차 창문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도 그곳만 지나치면 상상할 수 없는 악취로 정신이 버쩍 들었고 재빨리 외부공기 차단버튼을 눌러야했다. 어쩌다 잊어버린 날엔 뒤늦게 조치를 취해 봐도 소용없었다. 이미 차량으로 유입된 냄새는 그 구간을 완전히 빠져 나온 후라야 해결될 사안이었다. 혼자인 경운 인상만 찌푸리면 되었지만 가족, 지인들과 동승한 경우엔 코를 막고 서로 누가 범인인지 짓궂은 분위기가 되기 일쑤였다. 신도시로 이사가서 근 십년간 나는 그 냄새를 맡아왔고 또 부지런히 막아왔다. 희한한건 (서울로)출근할 땐 같은 구간에서 전혀 나지 않던 냄새였지만 퇴근할 땐 예외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꼭 한번은 가스구간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일 겪으면서도 매번 낯설었다.

    악몽의 구간은 바로 쓰레기처리장이 위치해 있던 지역이었고 내가 살고 있던 시에 같이 속한 지역이었다. 행정구역상 같은 시였지만 누가 사는 동네를 물어보면 우린 절대 ‘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기도 했는데 우린 ‘**시’민이 아닌 ‘**구’민이기로 암묵적 합의를 본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쓰레기처리장을 비롯해 하수처리장, 납골당 등의 혐오시설이 이쪽으로 이전되어 새롭게 건립된다는 소식에 흥분했고 주민반대 서명, 단상점거같은 저항도 주저하지 않았다. 아침시간이면 옆 동네에서 건너오던 토끼굴이나 샛길도 우리만 이용해야 한다며 막아버리던 사람들이었다. 어이없게도 자기 아파트 출근차량을 큰길로 먼저 내보내려는 경비 아저씨들끼리의 신경전도 볼만했던 동네이다. 당시기억으로 엘리베이터엔 무슨 건인지도 모를 결사반대 서명 종이가 게시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옆 단지 아파트 신규분양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던 그 시절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도로에서 냄새가 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금새 그 구간의 기억을 쓰레기 처리하듯 망각의 수거함에 투척해 버렸다. 신규 시설이 운영중인지도 모르게 쓰레기는 잘 처리되고 있었고 우린 그 다음과제에 열정을 쏟았다. 요즘 우리 지역의 아파트 벽면엔 ‘지하철 **역사 개통’의 대형 현수막이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지하철 역이 아파트 단지 앞에 개통되어야 집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지역은 늘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강렬히 반대하고 또 무언가를 급격히 추진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 돌아서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 없지만 같이 연대하는 순간 결코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적고나서도 참 낯익은 모습이다.

    이렇듯 내 세대, 내 이웃 대부분은 거대 메트로폴리스 계획아래 잘 설계된 중산층을 꿈꾸며 오늘도 부동산의 호재와 악재 소식에 울고 웃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70년대 이후에 태어나 속물정신과 위선이 유일한 경쟁력이 된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라는 악덕에 길들여진 그 결과 대략 하우스푸어로 요약되는 삶에 도착해있다. IMF 사태와 금융위기, 조기은퇴에 내몰린 우리 윗 세대가 자녀의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노후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는 실정을 보면서 우리 아랫 세대가 반값등록금 투쟁의 힘없는 주체가 되는 걸 보면서도 한국사회에서 대학졸업이라는 사람구실의 자격증을 위해 속절없이 자녀교육에 몰두하고 있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희생과 역할이라는 유산을 마지막으로 물려받은 우리들이지만 바로 다음 세대에 여성의 결혼과 육아, 교육의 문제를 처절하게 푸념하며 결혼과 출산의 부정적 견해를 매일같이 전수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선배로 두었지만 그들이 앞장선 민주화에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고 현 유권자로서도 뚜렷한 이념을 내세우는 쪽은 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서점을 통해 정의관련 서적만 들춰보는 침묵의 세대가 되어버렸다. 기성세대, 기득권층을 늘 비난하던 우리 세대는 사실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지만 이대로라면 그들만도 못하지 싶은 열패감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우리 자신도 낯설은 형국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리와는 상관없이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의 젠트리피케이션(도심재개발)에 관한 계획발표가 미래청사진처럼 전시된다. 자고나면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이 앞 다투어 우리의 공공기관을 문화적, 예술적, 미학적으로 리노베이션한다고 홍보한다. 국토는 언제나 공사중이고 젊은 작가들은 (우리도 답답한 심정인데) 재개발로 밀려난 빈곤층이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집요하게 묻고 있다. 금방이라도 잡지에서 튀어 나올듯한 화려하고 첨단적인 파사드는 곧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고 이는 모든 도시인의 욕망을 자극하며 이미 예정된 부동산과 연계하여 돈있는 자본가가 추가적 자본을 취득하는 메트로폴리스적 불문율이 되는 것이다. 어느덧 예술은 상업성을 상쇄하기 위해 공공화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시 상업적인 가치를 창출한다. 자본주의가 세계의 운명처럼 보인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이제 지구전체의 도시화, 자본화로부터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결정으로 부동산 투기세력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터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가 활황하는 이 도시에 살고 있는 한 낯익은 이 풍경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과연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의 궁극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아니 우리는 진정 우리가 원한 것들을 향해서 개발도 성장도 다 함께 이루어 온 것이긴 한 걸까.

    이 책은 지난 삼십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자본주의를 달려온 우리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대체 무엇을 만들어왔는지 고개 들어 묻고 있다. 우리가 지난 시절 만들고 키워온 것은 다양한 인간 욕망의 현란한 그림들에 지나지 않는다 답하고 있다. 쓰레기는 우리 욕망의 나머지 배설물이 아니라 사실은 욕망의 근원적 실현물이었다 말씀한다. 우리가 불철주야 만들어 온 것이 시간이 지나 버림받았다고 해서 우리 욕망도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태우고 소독하고 묻고 은폐해도 욕망은 대를 이어 질량보존되는 가장 명징한 진화물이었다. 쓰레기가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노랗고 알록달록 반짝이기도’ 하는 것은 우리 욕망이 그토록 다채롭고 아스라한 ‘무지개’ 빛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중 ‘푸른’ 빛만이 도깨비로 승천한 것은 우리의 하늘과 바다가 아직까진 의심없이 푸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땅에서 수없이 태워버린 욕망의 잿더미는 어디로 날아서 어디로 돌아오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유독 불편했던 건 특이하게도 심리적 호흡과 영안의 시야였다. 목에 시커먼 매연이 넘어가듯 온 시간이 매캐했고 눈앞은 뿌옇고 따가왔다. 우린 우리가 버젓이 만들어 온 것들, 그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한참이나 무지했고 무례했고 오만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사법은 낯선 감정들로부터 기인하는 낯익은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메타포를 함의해 왔던 황석영 소설의 힘인 것이다. 그는 (늘 그래왔듯) 작품의 출간시기 역시 마치 미리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매 시기 무엇보다 간절한 사회, 정치적 요구를 수용해왔다. 한마디로 지금 이시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소설을 현자처럼 제시해 온 것이다. 한국분단 60주년, 경부고속도로 40주년을 맞은 작년의 시점에 한국에서 가장 살고 싶은 지역, 부와 명예를 단적으로 제시하는 강남땅의 형성사를 통해 개발논리에 짓밟힌 국민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하지 않았던가. ‘황석영 가는 곳에 가지마라’는 세간의 소리는 어딜가든 그가 투철한 시대의식을 잊지 않고 역사의 현장을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의 방증일 터이다. 이번에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가 지나칠 수 없었던 현장에선 무엇이 그의 불꽃을 태우게 하였을까. 혹시 붉은 불꽃보다 더 뜨겁다는 푸른 불꽃에 몸과 마음이 한껏 데인 것은 아닐까. 저 멀리 우주 별에서나 볼 수 있다는 ‘낯설은’ 푸른 불꽃이 그의 헛헛한 가슴에 기어이 ‘낯익은’ 풀꽃을 피우게 한 것은 아닐까.



인연의 진실, 이름의 상실


   소설은 열네 살 소년이 엄마와 쓰레기트럭을 타고 꽃섬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부로서 일주일중 가장 싫어하는 날이 바로 재활용 쓰레기 분리 수거날이다. 그날만은 남편이 내편으로 보이는 날이기도 하다. 지난 설 명절 때 집집마다 택배로 도착한 박스들이 대거 방출된 그날은 흡사 또 다른 아파트 건설현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인가 깜빡 잊고 쓰레기를 다음날 새벽에 긴급히 배출하던 중 나는 말로만 듣던 쓰레기트럭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온다는 스티로폴, 플라스틱 수거차량은 쓰레기라기 보다는 건설자재를 실은 공사용 트럭같았다. 대부분 먹거리 포장용인지라 나는 저 많은 분량을 누가 다 먹었을까만 생각했지 그 차량이 어디로 가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소년과 엄마가 올라 탄 트럭은 이처럼 잘 분리된 쓰레기가 아닌 음식물을 포함한 각종 쓰레기가 혼합된 차량일 터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부엌 한 켠에 쓰레기를 일률적으로 투입하는 배출구가 달린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다. 아파트 뒤편에 가면 그렇게 통로를 타고 내려온 온갖 쓰레기가 집결되는 장소가 있었고 트럭은 그것들을 원형그대로 수거해갔다. 내 기억으로 그땐 지금처럼 쓰레기가 많지도 않았고 음식물을 버리는 사람도 적었기 때문에 (아무리 섞여 있었다지만) 총체적인 냄새도 덜했다.(견딜만했다) 같은 단지 친구들과 그곳에서 트럼프 카드를 발견하곤 우리끼리 환호성을 지른 적도 있다. 딱부리 모자는 그 시절의 종합트럭 한 켠에 몸을 실은 게 아닐까. 처음 나는 어린 시절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마을 소독차량을 신나게 뒤 쫓아가는 심정이 되었다. 차량 꽁무니를 따라가는 어린아이마냥 소설의 도입은 흥미를 자극했고 기대감을 드높였다. 어쩐지 남들이 버린 쓰레기를 낱낱이 구경이라도 할 것 같았달까.

    아마도 쓰레기에 함께 실린 모자의 서글픈 처지보다는 쓰레기 세상을 확인하려는 설레던 마음이 많았던 듯하다. 그건 남들은 뭘 먹고 어떻게 사나 알고 싶은 속세의 심정이었다. 쓰레기를 보면 그 사람의 생활수준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영수증을 보면 경제능력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참으로 잘 배워온 속물근성에 다름없었다. 그런 심보가 사라지기 시작한건 그들 모자가 아수라반장을 만나고 부터였는데 어린 시절 마징가 제트, 로버트 태권브이, 마루치 아라치에 열광했던 나로선 그의 얼굴이 두말없이 불안과 불행의 캐릭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서야 그가 낯익은 세상과 낯선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는 우리 시대 자본에 훼손된 보통시민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작품엔 아수라반장처럼 인물의 실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두어 번 등장하는 딱부리의 본명 최정호와 땜통의 본명 영길은 이 작품과 상관없는 서류상의 실명처럼 낯설기만 하다. 어른들은 주로 헬맷, 장갑, 마스크, 각목등으로 도구화된(산업화 도구들로) 인상착의로 대신하고 아이들은 개성이 강조된 재미난 별명으로 일관한다. 딱부리, 땜통, 두더지, 깨비, 메뚜기, 헌데같은 별명은 아직 도시화, 디지털화되지 않은 아나로그적 낭만성, 순수함, 서정성을 자극했다. 아직 예능이 르네상스를 맞기 전 정극 코미디 상태라고 할까. 김서방네 식구들은 서울가서 찾는다는 그 김서방의 불특정 다수가 지닌 보편성을 상징하고 그들 식구와 교신하는 빼빼엄마는 무당의 혼령을 익살스럽게 풍자한 동화적 캐릭터로 느껴졌다. ‘샛강말, 여울목, 버드나무, 땅콩밭’등의 전원적 배경은 오염되지 않은 꽃섬의 원형적 언어로 이해되었고 ‘부대, 본부, 소세지, 초코볼, 벽돌게임, 슈퍼마리오’등은 군대문화, 미국과 일본문화에 대책없이 노출, 포섭되던 내 80년대 초등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후리가리, 시라이꾼, 야코, 씨레이션’등의 관용된 구어체로서의 외래어는 시대상을 환기하는 황석영 소설의 중요한 수사법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렇듯 등장한 모든 인물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저씨, 엄마, 아줌마, 형, 동생, 꼬마라는 세대적 구분만 있을 뿐 역할 및 관계의 구분은 경계가 흐릿했다. 이들은 원래 꽃섬에서 삼대가 모여 살았다는 김서방네 식구 스무 명처럼 (거울처럼 반사되어) 결국엔 동질성을 가진 공동체로 보였달까. 작가는 인물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름을 짓지 않았다 말했지만 쓰레기 마을에 기거한 그들은 외려 이름하나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와 주관적 인연을 맺은(맺어온) (뗄래야 뗄 수 없는)친근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언젠가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당신의 작품은 불교의 연기론을 배경으로 하였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연기론(緣起論)은 세상 모든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불교철학이다. ‘연기’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연이라는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다. 김서방 네와 딱부리 네와의 관계, 그들 모두와 쓰레기 모두와의 관계, 그 쓰레기 세상과 지금 우리 세상과의 관계, 그것은 막연한 인연의 소설적, 우발적인 그물망이 아니라 필연적인 자본주의 그물망 내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황석영식 세계관의 반영인 것이다.


                   온 세상의 산 것들과 물건들이 너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마라.  -207p


    하지만 책을 덮고 시간이 좀 지나자 나는 그들이 개별적 존재로 기억되지 않았고 먼 훗날 쓰레기섬에 다시 피게 될 풀꽃들의 미래만 어렴풋한 잔상으로 남았다. 나는 역시 내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그림만 기억하는 이기적인 독자였다. 불꽃도 풀꽃도 모두 내 탓은 아닌 듯했는데 이 부채감, 죄책감은 무엇이었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김서방네와 딱부리네, 빼빼네에게 미안했던 건 역시 그들이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다시 비현실적으로 인식되면서 이번엔 내가 아수라백작이 되어 버린 듯했다. 이 작품은 물질적 쓰레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거울을 자각하게 하는 서사였기에 지난 시절 쓰레기와 난지도를 우리사회의 거울로 삼은 시인들을 생각나게 했다. 이른바 난지도 문학의 대표시인 신현봉은 쓰레기처럼 난지도에 도착해 “일찍이 내 석자 이름을 묻고 잘 썩어진 나는 새보다 가볍게 가스처럼 소리없이 날아오르길 바랬다”(쓰레기, <난지도>, 1994)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쓰레기와 함께 썩고 있는 난지도가 “쇳덩이도 녹일 지독한 눈물을 흘리며 화려하게 다시 태어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간절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난지도는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쓰레기같은 정신상태가 된 사람과 동일시되었다. <난지도 가는 길, 1998>로 유명한 정태준 시인은 “검은 욕망이 불길로 솟아 오르는 곳”인 난지도로 가는 사람들은 “도야지가 달려드는 주택복권 꿈을 안고 난지도로 떠”난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무지개가 떠있는 난지도로 가는 길에 “모두 이름을 잃어 버린다”고 익명이 된 주체의 슬픔을 강조했다. 딱부리가 꽃섬에 도착해 가장먼저 의문을 가진 것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드는 이곳에서 과연 내 이름이 쓸모있는 것일까, 였다. 이름이 곧 인생과 동격화되는 것은 이름의 필요성, 실효성, 대표성에 기인하지 않을까. 쓸모없는 곳 천지에서 이름은 자기기능을 상실한다. 이름은 정상적인 가정과 학교, 조직사회에서 필요한 표식이지 쓰레기 섬에선 버려진 쓰레기보다 못하거나 겨우 쓰레기만한 장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딱부리는 여러 별명 중 쓰레기 줍듯 취사선택해 자신의 이름을 쟁취한 케이스니 꽤 진취적, 합리적, 능동적인 소년은 아닐까. 어짜피 우리네 인생은 최고로 바르게 살아서 호례호식(본명 최정호답게) 하며 살기는 어렵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별명이 부끄럽거나 맘에 들지 않아도 자기속성에서 근거한 별명을 인정하는 정직성을 보여준다. 최정호를 거부하고 딱부리를 택한 주인공은 나라에서 새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곳에 들어갔다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새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는 어른들의 허울좋은 위선을 향한 역설적 은유는 아니었을지.



송신자와 수신자들


    작가는 이렇듯 시종일관 (자신처럼)세상이치를 일찍 깨달아 열 여섯 살로 보여야 했던 열 네 살 딱부리의 시선으로 꽃섬의 일상을 나열하고 사건을 주시하며 현상을 사유한다. 때문에 화자가 딱부리는 아니지만 열네 살 딱부리의 시점과 육순이 넘은 작가의 관점은 동일시된다. 그래서인지 사실상 논리적으로 나와 동세대인 딱부리의 행보가 더욱 와닿아야 했지만 종종 그는 나보다 어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어쩐지 동생격의 땜통의 시선이 가장 인상깊었고 마음에 끌렸다.(그 때문에 가슴이 많이 아팠다) 말하자면 땜통은 쓰레기 마을의 어린왕자가 아니었을까 싶어서. 땜통은 딱부리가 아버지의 폐품수집을 대물림하듯 아수라 백작의 ‘왼쪽 뺨을 거의 덮을 정도로 푸르고 큰 점’이라는 치명적 외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였다. 땜통은 왼쪽 뒷머리의 흉측한 화상때문에 허름한 야구모자를 쓰고 다닌 아이였다. 땜통은 딱부리에게 그 동네에서 자기만 알고 자기만 볼 수 있는 ‘파란 불’을 기쁘게 자랑한다. 땜통은 딱부리형도 ‘쓰레기차에서 뚝딱하고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꽃섬을 금은보화가 가득한 도깨비나라쯤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이 책에서 김서방네 식구와 접신하는 빼빼엄마와의 인연도 흥미로왔지만 가장 눈길이 가던 관계는 바로 땜통과 김서방네 막내 꼬마와의 우정이었다. 땜통은 유일하게 그들 도깨비 나라에서 송신하는 푸른 불빛을 수신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인간계의 드문 메신져로 보였달까. 우주나 다른 차원에서 전해오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번역해주는 채널러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가장 어린 친구들이 주고 받는 메시지가 곧 이 소설의 핵심이라 생각되었고 그들의 소통으로 전해지는 에너지야말로 이시대의 황석영 소설이 구현하는 문학적 구원이라 믿었다.

    땜통은 아프다고 말하는 김서방네 꼬마에게 ‘쓰레기장에선 온갖 것이 다 나오므로 뭐든 구해올수 있다’고 말한다. 가슴저리도록 순수한 그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통찰이 아니던가. 쓰레기는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버린 바 있다. 그러므로 쓰레기는 인류의 모든 노력의 총체인 것이다. 신현봉 시인은 ‘쓰레기는 못쓰는 것의 대표이지만 쓰레기는 처음부터 쓰레기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고마움을 느낀 꼬마는 여러 번 ‘너희들 곁에 늘 같이 살고 있다’고 답을 하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입장은 세상사는 외로움쯤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에서도 저런 말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인물들은 쓰레기라는 절망의 산앞에서도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땜통은 힘들고 외로울때 꼬마를 떠올리며 김서방네가 살고 있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작가는 김서방네 식구가 살았던 원래 꽃섬의 생태와 환경, 농촌모습을 전하며 그곳이 곧 우리가 거쳐온 고향이자 앞으로 돌아가야 할 이상향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지금의 지옥도 예전엔 천국이었으니 그러므로 지금 지옥도 다시 천국이 될 수 있다고.

    김서방네 식구가 메밀묵을 좋아했다는 것은 자연에서 채취되는 식물로 가공하지 않고 손수 만들어 온 식구가 나누어 먹는 소박한 온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할아버지는 어렵게 메밀가루를 구해와 빼빼엄마와 함께 전통적인 방식으로 메밀묵을 만들고 백년 묵은 버드나무아래서 감사의 눈발과 하늘과 강물을 벗삼아 김서방네에 제의를 올린다. 메밀묵을 만든 할아버지는 말했다. ‘요즘 세상에 안 하게 된 짓이 어디 한 두가지냐’고. 할아버지는 ‘안하게 된 짓’을 부러 시범보여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이 ‘안해도 되는 것’, ‘안해야 될 것’은 아니라 증명하시는 듯했다. 김서방네 식구들은 말한다. 우리는 꽃섬에서 ‘오래오래 살았다’고. 그 사실을 알고 계신 할아버지는 거든다. 저들이 원래 ‘꽃섬의 임자’였다고. 그 말씀은 꽃섬은 꽃섬을 가장 꽃섬답게 하는 사람들이 주인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땜통과 딱부리는 김서방네 꼬마손에 이끌려 꽃섬이 원래 꽃섬답게 아름다웠던 풍경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구경하고 돌아온다. 샛강이 흐르고 버드나무 우거진 그 곳에선 돛을 단 조각배가 떠다니고 어미 소가 풀을 뜯으며 풀꽃이 피어난 강가에 오리가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한가롭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연상되던 이 장면은 어쩐지 조금 슬펐다. 이제 우린 그 시대로 돌아갈순 없는 것일까. 착찹함을 추스르기도 전에 사계절 그곳의 자연에 순응하며 농사짓던 그들은 가을 내내 일해서 씨앗을 얻었다고 자랑한다. 여기 씨앗이 자랑이 되는 이유를 보라. 꼬마의 전언은 곧 작가의 예언이자 우리 모두의 희망이 아니었던가. 우린 왜 봄이 오면 싹이 튼다는 사실을 봄에만 깨닫는가. 왜 봄이 아닐 때만 봄을 기다리는가. 봄은 확실히 좋은 것이 분명한데 왜 그 좋은 것을 좋아졌을 때만 기억하는가. 아니 나빠졌을때만 그리워 하는가. 그렇게 좋았다면 더 좋도록, 늘 좋도록 우리 다음 세대도 같이 좋아지게 노력할 순 없었는가. 


         저건 풀꽃들 씨앗이야. 우리 식구들이 모두 거두었어. 봄이 오면 꽃섬의 흙이 있는 어디에나 뿌릴 거다. -137p


    슬프게도 이 작품에서 땜통은 쓰레기 폭발로 인한 화재를 피하지 못하고 유일하게 죽어지는 인물이었다. 지난달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드는 주상복합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는 포이동 판자촌에서의 화재소식을 접했다. 그들의 주거지 몇 십 채가 전소되었는데 재산피해는 일억도 되지 않았다. 강제철거를 당할까봐 인근 학교로 피신하지도 못한 채로 최근 이어지는 장마까지 견디고 있었다. 범인은 어이없게도 자전거타고 놀러온 어느 초등생이었고 소년은 재미삼아 스티로폼에 불을 한번 붙여본 후 자전거 타고 돌아갔을 뿐이었다. 소년이 판자촌에 살고 있는 아이였을까. 쓰레기 구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쓰레기가 돈이라는 걸 안다. 땜통이나 딱부리를 보면 쓰레기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로 터득하게 되는 그 세계 법칙쯤으로 이해되는데 말이다. 나는 어떤 책을 읽으면 꼭 그 책에 어떤 내용과 거의 유사한 사건이 신문이나 방송에 등장하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예를 들어 소설에서 주인공이 거리를 돌면서 자판기의 동전을 훔쳤다 하면 바로 다음날 같은 사건이 뉴스에 뜨는 식으로) 판자촌 화재는 꽃섬의 화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불장난을 일으킨 그 소년 때문에 땜통이 죽은 듯이 느껴졌고 결국 초등생과 같은 자식을 둔 나 때문에 땜통이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최소한 무관하단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판자촌 화재 때문인지 땜통의 때묻지 않은 소년성 때문인지 부모에게 버림받고 교육의 사각지대에서 쓰레기로 성장해온 짧은 인생이 쓰레기 더미에 묻혀 쓰레기처럼 소각되는 운명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이 나를 죄스럽게 했고 그렇게 당하는 죽음이 많이도 서러웠다. 쓰레기더미 속 돈뭉치는 일찌감치 땜통의 운명을 예감한 그들이 선사하는 마지막 선물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땜통이 죽음으로 해서 더 이상 김서방네 꼬마와의 교신은 끊긴 것일까? 이제 꽃섬의 원형은 어디서도 추억되지 않는 것일까? 그리움의 인연은 전승되고 그리워 하는 방법은 복제되는 것이 아닐까. 다행히도 우리에겐 딱부리가 있었고 딱부리에겐 죽은 땜통이 예전 꼬마의 역할을 해주리라 믿어본다. 딱부리가 죽으면 딱부리가 누군가에게 김서방이 되는 것이라 믿고 싶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땜통처럼 꼬마처럼 이 세계의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꽃섬의 원형을 송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땜통이 꽃섬 아이와 우정을 나누었다면 빼빼엄마는 먼저 간 혼령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종의 무녀였다. 이를테면 김서방네 식구들이 병이 났을때 제수음식을 마련해 굿거리를 해주는 역할이랄까. 그녀는 자주 선조들의 목소리로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고 노랫가락을 읊으면서 인생의 깨달음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녀의 헛소리는 만물상 할아버지의 충언과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생생한 목소리로 남았다. 특히 ‘여기 니들만 사는 줄’ 아느냐며 ‘니덜 새끼 다 없어져도 세상은 그대루’라는 외침은 물신에 지배당한 우리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꾸짖는 작가의 간곡함으로 그대로 전해져 왔다. 작품 후반부에 딱부리의 환상으로 전개된 슈퍼 마리오 게임의 한 장면 역시 작가의 시점을 대리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환상 속에 깜짝 등장한 김서방네 할아버지 또한 작가의 마지막 당부를 의미한다고 여겨졌다. 딱부리는 게임 속에서 자본주의가 ‘이것은 무수하게 반복되는 행진이며 최대의 성취에 이른다 할지라도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전자게임과 같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김서방네 할아버지는 점수를 따기 위해 더 이상 성문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유언처럼 조언한다. ‘너희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게 되고 너희가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지는’거라는 말씀은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어 서로 의존하여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므로 그렇더라도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감동으로 내려앉았다. 작가는 관계와 인연, 그리고 절망속에서도 그로 비롯된 소통을 망각하지 말라는 당부를 재차 강조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쓰레기다운 쓰레기, 사람다운 사람


    요즘 공교롭게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육십대 이상 문단의 대가들의 작품을 번갈아가며 동시에 만나게 된다. 젊은 작가들이 제공하는 상상의 에너지가 있고 노년의 작가들이 선사하는 웅숭깊은 메시지가 있다. 황석영 작가를 앞세워 그 비교대상으로 젊은 작가들을 폄하하거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들추어 새삼 황석영 작가의 대단함을 주장하고 싶진 않다. 그건 독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니고 이미 황석영 작가는 그런 평가가 의미 없는 분이다. 다만 이번 작품으로 만년문학의 시작을 공표하고 기존의 성과를 다 불태워버린 폐허의 장소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그 잿더미와 함께 다음 세상의 풀꽃의 씨앗을 발견한 작가의 짙은 연민에 고개는 숙이고 싶다. 문학은 기록이면서 기억매체라 하였다. 문학을 통해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니라는 걸 이번 독서를 통해 깨닫는다. 엊그제 즉각적인 인터넷 검색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낮다는 연구결과를 보았다. 새로운 매체가 기억의 방법, 기억의 과정 및 질량마저 바꾸어 버린 것이다. 결국 자본이 우리에게 단계적으로 주입한 건 기억의 매립이요, 가치의 소각이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마치 새해 첫날 검푸른 동해의 수면위로 붉게 타는 태양이 서서히 깨어나듯 한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을 경험했다.

   
 
새마을 모자를 쓴 아버지와 머릿수건에 몸빼 입은 어머니와, 흰 수염의 할아버지며 할머니, 낡은 양복차림의 큰 아버지, 예비군복 입은 외삼촌,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이모부부, 고모부부, 사촌형제들, 형들과 누이들, 그리고 식구들 중의 막내꼬마가 나타났다.    -133p
 
   

    오래전부터 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그분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위로 다시 기다렸다는 듯이 빙긋 미소짓게 되는 또 하나의 장면이 겹쳐졌다.

   
 
나뭇결이 갈라지고 터진 절굿공이, 끝이 모두 닳아버린 수숫대 빗자루, 뒤축이 떨어져나간 남녀 고무신 한 짝씩, 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 쪼개진 물소뿔 마고자 단추, 부러진 곰방대, 이 빠진 참빗, 실 밥터진 골무, 손잡이가 반질반질한 참나무 도끼자루, 옻칠 벗겨진 실패, 타다 남은 부지깽이, 귀퉁이 떨어진 밥주걱, 앙증맞은 나무 팽이 따위의 물건들 가운데 불에 그을렸거나 반쯤 타버린 것도 있었고 말짱한 것들도 있었다.    -224p
 
   

     
    저들은 누구보다 사람다웠고 이것들은 무엇보다 쓰레기 답지 않았다. 그래, 저들같지 않은 우리는 사람다운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한번도 쓰레기 다운 것을 쓰레기로 버려온 것이 아니라는 뜻만 같았다. 많은 사람들, 많은 시간들, 더 많은 추억들, 더 아픈 물건들이 모두 쓸려 가버리고 폐허가 된 내 가슴에 그들이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새겨지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중에 ‘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는 오래전 내 할머니가 보물처럼 간직하던 물건이었다) 쓰레기 이야기였지만 내게 남겨진 건 ‘서루간에 정들어서’ 버릴 수 없었던 아니 내가 오래전에 버렸다고 생각된 그래서 결국 사라진 모든 쓰레기 아닌 것들이었다. 작가는 사람이고, 시간이고, 공간이고, 물건이고 이 모든 사라진 것들의 영혼을 달래주려 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 살과 뼈를 관통하는 무형의 에너지를 촉발해준 것이었다. 문학에서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구원이고 치유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 생의 기운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글로써 상기되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작가의 기억 저 너머의 세계는 얼마나 소중한 문학유산인가.

    황석영 작가는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그래서 당연히 잊혀진 것들, 그 실용적 가치가 소멸된 것들, 사소해보여 남루한 것들을 문학으로 복원해 이렇듯 무형의 위엄을 보여준 것이다. 그가 환기해준 쓰레기의 기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온 것은 쓰레기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치 쓰레기를 생산하려고 무언가를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우리는 버려야 할 것을 키우고 버리지 말 것을 버려오지 않았을까. 그렇담 여지껏 쓰레기가 된 것들은 다시 주워들고 쓰레기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들을 버리면 되는 걸까. 그러니까, 중요한건 버리고 안 버리고가 아니라 무엇이 쓰레기인지 똑바로 아는 것이 우선일 터이다. 이제 우린 어떤 쓰레기를 버릴 것인가.

    메트로폴리스라는 초대형 우주선에서 배출한 쓰레기가 가장 많은 나라가 어디였던가. 미국이다. 전 세계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는 어디인가. 중국이 되었다. 지난 삼십년간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를 지진처럼 뒤흔들고 있는 중국 때문에 위기를 느낀 미국은 실패와 교착만 반복하는 다자간 협력보다 미국을 중심으로 다시 연대하자며 세기말적 자본주의의 위기와 불안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쪽이 지는 제로섬이 아닌 모두 다 이기는(것으로 보였던) 윈-윈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는 계속 끝간데 없이 성장과 발전만 우선가치로 두자는 국수적, 퇴행적인 시각으로써 반문화적, 반환경적, 반평화적 결론임이 불을 보듯 자명하다. 슬프게도 서구 자본주의와 민주화, 근대화를 최단시간에 이룩한 우리는 적어도 저들간의 싸움에서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나라에 속한다. 올 초에 터진 원전폭발과 방사능 오염위기도 일본을 안전모델로 삼은 우리로선 뜻밖의 악재였다. 오년 전 원자력 홍보관을 설계할 당시 우리는 아오모리의 원전과 홍보관까지 돌며 샅샅이 벤치마킹했다. 일본은 안전을 신앙처럼 학습해온 나라였고 그들의 안전 홍보 및 체험 교육의 수준은 지금도 세계 제일이다. 쓰레기에 누구보다 강박적인 나라 일본이 배출한 원자력의 쓰레기는 무엇을 의미하나. 그대로 우리가 공들여 만든 것들이 더없이 낯설게 돌아오는 그러나 그 역시 우리가 추구한 것이기에 알고 보면 낯익은 세상의 가장 소름끼치는 실례일 것이다. 인간은 자본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산할 수 있을진 몰라도 그것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원적으로 통제해야 할 것은 미래에너지의 시스템이 아니고 원래 쓰레기의 모태가된 욕망의 발전소가 아니겠는가.

    다시 돌아와 소설이라는 순수문학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의 욕망의 찌꺼기, 쓰레기 같던 탐욕, 시기, 질투, 그리고 나를 옥죄고 목조르던 성과위주의 도전의식, 비교와 원망에서 허우적거리던 오래된 열패감 같은 기억들을 모두 불태워버린 듯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오래된 컴퓨터를 리폼하듯 바이러스 먹은 모든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운영체제를 다시 셋팅해야 할 시점처럼 한순간 정화된 희열감을 맛보았다. 내 기억의 쓰레기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우리가 세계를 바꿀 순 없겠지만 세계가 주입하는 욕망만은 세계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욕망을 모두 버리고 도인처럼 살아갈 자신은 없다. 하지만 오늘처럼 우리가 버려온 것들을 확인하며 앞으로 우리가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버려야 할 것들은 서로 묻고 답하며 나누고 싶다. 그래서 잊지 않고 싶다.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정말 쓰레기로 마땅한 것들만 쓰레기로 배출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쓰레기가 쓰레기 다워야 세상이, 나라가,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걸 통감하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번 책을 덮고서야 내가 알던 난지도가 난지(亂地)의 섬이 아닌 난지(蘭芝)의 향기를 상징하는 섬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꽃섬’이 쓰레기섬의 역설적 은유가 아닌 원래 자신을 함축하는 실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 다행스럽게도 그 이름은 꽃피고 새우는 초지(草芝)와 난지(蘭芝)의 풀꽃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딱부리의 바람과 예언대로 그곳은 질기고 푸른 생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나 역시 불모의 난지에서도 희망의 불씨가 풀꽃으로 피워 오른 것처럼 모질게 흔들리는 바람앞에서도 질기게 살랑이는 풀씨가 되고 싶다. 아니 풀씨로 살고 싶다. 혹시 언젠가 풀꽃이 되지 못한다 해도 나는 가을 내내 열심히 씨앗을 거두어 다음의 봄에 뿌릴 준비를 하는 인간이고 싶다. 그렇게 부지런히 거두고 거두어 내가 만들어 놓고도 정작 낯설은 내 인생의 꽃섬 하나 만나는 그날을 가만히 기다린다. 그 꽃섬에서 내가 힘겹게 버리고 태우고 묻어온 내 인생의 모든 쓰레기들에 애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제 한류가 낯익은 풍경이 된 이 시점에 출판 7대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의 역량에 가장 근접해있는 황석영 작가의 수상소식도 함께 조용히 기다려본다. 부디 그 소식이 전 세계에 낯설은 뉴스가 되지 않을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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