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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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을 견디기

    이 작품은 손바닥에 말굽이 자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자라 마침내 말굽이 된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된 말굽이 다음 생의 부활을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는 동안 유독 몸과 마음에 힘을 주며 읽었는지 책 덮고 몇 시간이나 누워있기까지 했다. 이번 글은 <은교>와 <비즈니스>에 비해 상당히 폭력적이다. 실제로 글에도 마치 말굽이 달려있어 어떤 페이지에선 무자비하게 내 정수리를 찍어 누르는 듯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발에 힘도 주고 우습지도 않은 경직된 자세를 취하곤 했다. 책 앞에 두고 이삼 일 간 누가 때리지 않을까 불안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 책은 때마침 찾아온 폭염이라도 되는 듯 한여름 오후의 낮잠이 꼭 필요할 만큼의 피로도를 지녔달까.

    올해 들어 나를 좀 편하게 하는 소설들을 영 구경할 수가 없다. 뭐 맘 편하자고 재미 보자고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나 작년하고 양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실감한다.(최근에 읽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정도가 가장 밝다고 해야 할 형국이다.) 그건 아무래도 우리가 처한 사회정치 분위기, 나아가서는 지구적 현상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올 초 터진 일본발 원전폭발과 쓰나미같은 연쇄적 아프리카, 중동 혁명은 이제 자본주의의 세기말적 경종을 울리는 지구적 현상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문학은 스펀지 같이 이러한 위기와 불안의 에너지를 그대로 흡수했고 독자는 그런 소설을 자기부정하듯 외면하고 있다. 내 주변에만 봐도 요즘 소설 읽는다는 지인들은 눈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아예(?) 시집을 읽었으면 읽었지 한국 소설은 어렵고 화나고 우울하다 증언한다.(가져가라 해도 싫다고 한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한권 겨우 집어 들더라는) 세상이 이토록 불편한데 문학에서의 불편을 더 이상 원치 않는 것이다. 이십대는 아프니까 청춘을 위로받고 삼십대는 성공에의 생각을 버리려하고 사십대는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이 순수문학은 나같이 한때 작가되기를 꿈꾸었거나, 혹은 더 이상은 작가되기 어려워 보이는 문학 향수주의자들만이 근근이 집어 드는 비현실적 독서현상으로 전락했다. 책도 (드라마처럼)주변에 읽은 사람들이 많으면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 지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는 생활의 일탈 에너지를 갖고 있다.(현빈 이후 문학은 더 이상 대화소재로 실종되었다) 그런데 오프라인에선 도통 소설 읽었다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나는 무슨 홀로 저항하는 심정으로 이런(?) 소설을 읽게 된다.(그래서 더 외롭다) 학습지 선생님이 거실에 쌓인 소설들을 보고 어머니 예전에 문학도이셨냐고 묻길래 답하기 귀찮아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아니라하면 자꾸 물어볼 것 같아서) 다른 집에 가면 방학을 맞아 아이들 자기주도 학습을 어떻게 시킬 것인지에 대한 책들이 주를 이룬다고 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려 나도 모르게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맘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살면서 소설을 읽는 것이 단 일초라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는데 며칠 전 나는 그랬다. 소설같은 비현실보다는 아이들 교육같은 현실에 좀 더 신경을 쓰라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에.(책은 그날만 쌓여있던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가고 나서 더욱 기분이 나빠졌고 그래서 더욱 내가 소설 읽는 것은 시대적 저항이 맞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건 일종의 오기같은 것이기도 한데 책 한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를 생각하면서 그나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그 책 읽었다고 그 책 읽어보라고 이렇게 글로 떠드는 것. 이것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아 나는 또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다. 그렇게 여름을, 소설을 견디고 있다.


심장을 견디기

    견디는 게 좀 즐거움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번 소설은 유난히 외롭다. 작가들은 쓰면서 더 그랬을까. 작가는 이 글을 쓰고 나니 손바닥 한가운데 말굽처럼 딱딱한 굳은살이 생겼다고 했는데 나는 손바닥이 전보다 현저하게 얇아진 느낌이다. 자세히 보니 거짓말처럼 손가락도 짧아진 것 같고 전체적으로 외양상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다. 원래 내가 알던 내 손보다 축소되고 못나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 읽고 새삼 내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손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이상하게도 손끝의 예민한 감각이 피가 돌듯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어렴풋하게 발도) 머리로 에너지를 쏟으니 신체기관 중 맨 끝에 매달린 것들이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햇빛에 반사되어 빗금처럼 새겨진 손금들이 순간 어떤 (예술적)스크래치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면 면도날에서부터 커터칼, 조각도, 과도, 식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흔적이 아닐까 싶도록. 공교롭게도 (주로)왼손은 수평 오른손은 수직으로 기묘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인류가 처음으로 삶의 형태를 새김으로써 패턴을 만든 것은 빗살무늬였다. 고미술가들은 빗살무늬의 직선이 생선뼈를 상징하고 생선뼈는 정복의 의미로서 사냥과 주식의 풍요로움을 소원하는 의미라 말한다. 그런데 그 심플해 보이는 빗살무늬 하나만 해도 약 삼 천 년 정도 변하지 않았던 양식으로 상상할 수 없도록 오랜 세월의 결과물이었다. 미술사가들은 '삶은 형태이고 형태는 삶의 방식'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겹도록 반복되어온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결국 훗날 빗살같은 무늬 하나로 남게 되는 것이다. 기껏해야 백년도 살지 못하는 내 삶의 무늬는 무엇일까. 고생을 많이 하면 잔주름이 많아진다는데 내가 만들 수 있는 무늬는 혹시 내가 새겨온 손금의 총합인 것은 아닐까. 스크래치난 그것들이 결국 지금까지 내 모든 인생의 결과인 것만 같아 울컥 주먹을 쥐게 되더라. 주먹을 쥐고 손에 힘을 주게 되면 자연 가운데 손가락이 손바닥의 가장 중앙을 자극하게 되는데 작가는 그 ‘노궁혈’이라는 곳이 ‘말굽이 들어와 집을 짓고 제방으로 삼은 곳’이라 하였다. 그곳은 심장을 향하는 촛점, 심장과 연결되는 마음의 자리였다. 즉, 우리가 주먹을 손에 쥐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심장을 겨냥하는 일이며 그것은 심장을 무언가에 장전하는 행위인 것이다.

    신기한건 얼마 있다가 손바닥을 펴보면 그곳에 또 하나의 손금(표식)이 추가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다시 주먹을 쥐지 않는 한 그때까지 그 손금은 서서히 사라지는 운명이 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주먹을 쥘 때만 선명한 일시적 손금은 유효하다는 것. 살면서 어떨 때 주먹을 쥐게 되는가. 무엇 때문에 주먹 쥔 손을 펴게 되는가. 작가는 왜 그곳에 말굽이라는 영구손금을 박아 넣은 것일까. 손금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도 누구를 따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만이 만들어온 독창적 무늬가 아닌가. 그렇지만 자신조차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다른 곳에 잊혀지지 않을 무늬로 새겨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왜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의 손바닥에 말굽의 흉인을 새기고 그것을 입체화하였는가. 그것은 손금의 진화인가 운명의 퇴화인가. 우리네 한 점 한 줄의 삶이 말굽으로 조각되어 누군가의 인생을 숨가쁘게 달리게 하는 것이라면 그 인생은 누가 멈출 수 있는 것인가. 멈출 수 있기는 한 것인가. 만약 멈출 수 없다면 그것은 혹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살아가는 일은 아닐까.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향해 심장을 달리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한 멈춰질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심장을 견녀낸 만큼이 곧 그 사람의 일생인 것이기에.


슬픔을 견디기

   
 
생명선이 사라지면 죽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사는 걸까.
손바닥에 쇠말굽을 숨겨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느낌이다.
    -18p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 때 나는 슬프다는 말로 대신할 때가 있다. 이 작품이 꼭 그 대답이 어울리는 경우인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치욕과 복수심, 두려움과 유사희망, 공황과 불안 등의 모든 감정들은 결국 슬픔의 감정들이라 말한다. 단순분류일지 모르지만 기쁨과 슬픔에 일가견이 있었던 철학자이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여본다. 그리곤 그 분류안에 폭력이라는 감정도 추가해본다. 내 생각에 슬픔은 슬픈 결말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시작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죽음같은 것도 처음부터 슬픈 것은 아니지만 그를 향해 다가가다 보면 나도 모를 슬픔의 종착역에 다다르게 되고 그 역에 대한 기억은 나중에 새로운 슬픔의 시작이 되는 것처럼. 이 작품은 손에 피어난 말굽을 통해 인간 폭력의 근원적 모태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폭력이 그리움이면서 노스탤지어면서 희망이나 종교가 될 수 있는 건 결국 폭력이 인간의 가장 슬픈 감정을 자극하는 막강한 호소력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폭력은 누구로부터 어디를 향하든 그 종착역은 언제나 미치도록 슬픈 역사(驛舍)가 되는 건 아닐까. 은폐된 욕망이나 거짓된 본능을 자극하는 박범신 작품들은 하나같이 슬픔의 결론을 촉발한다. 서사가 비극으로 종결되어서가 아니라 원래 비극의 시원지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감정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손바닥안에 성공이나 건강, 행복, 기쁨의 감정을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토록 숨겨온)폭력이라는 말굽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그건 불행이기 이전에 누구보다 슬픈 일임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말굽이라는 폭력의 표식을 통해 인간의 슬픔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소설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그 슬픔이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선) 무엇보다 아름답게 체화된다. 가만 보면 문학에서 더러운 기쁨은 있어도 더러운 슬픔은 드물지 않은가. 이때 폭력은 비인간적 미화로 체화되기에 가장 안전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인간적인 것은 추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아름답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군가를 때리고 또 누군가에게 맞았던 인간적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인격을 성장시켜온 비인간적 존재들이니까. 그건 설사 한평생 누구를 때리거나 맞은 사실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탄생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오래된 기억인데 작가가 전하는 ‘탄생 이전으로부터 온 슬픔’에 해당하는 기억이기도 할 터이다. 이 책에서 폭력의 주체로 폭력을 행사하던 말굽은 작품 후반부에 스스로 쟁취한 인격을 통해 아무리 사람이 죽거나 마음이 변해도 그가 지니고 있던 폭력만은 변종바이러스처럼 타자와 세상에 끈질기게 전이되어 불사조의 운명을 살아갈 것임을 스스로 확신하며 그 깨달음을 우리에게 유언처럼 설파하고 있다. 말굽의 유언이 섬뜩했던 건 서글픈 말굽의 운명때문이 아니다. 말굽이 누군가에게 들러붙어 그를 좌지우지하게 될 우리네 불특정 다수의 연약한 운명인 것이다. 두려움은 곧 슬픔이요 불안은 두려움의 예감에 불과하다.

    흡사 말굽의 유언은 죽지 않음으로 전승되는 영혼의 선언이자 작가의 예언같다. 비슷한 의미로 모리스 메를로 퐁티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다."
 
(『휴머니즘과 폭력』, 2008, 문학과 지성사)


    우리는 이미 폭력자이기 때문에 비폭력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폭력의 유무,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출발선이 된 폭력의 체제하에서의 폭력의 종류 즉, 폭력의 미래라 주장한다. 이를 성찰하고 쉽게 풀이해준 강신주 교수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 2011>을 통해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말한다. 임재범의 노래에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이 상호폭력에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인 것이다.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타자를 죽이고 타자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 폭력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겐 누구나 생존전략이자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존재한다는 메를로 퐁티의 주장은 이 소설의 슬픈 고통을 더욱 슬프게 기정 사실화한다.

   
 
슬픔이란, 어떤 슬픔이 없었다.
내겐 탄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슬픔뿐이었다
.  -341p
 
   

    인간은 폭력을 피할 순 없지만 그나마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최후의 희망이라고 본다면 슬픔이 줄어들 수 있을까. 외려 슬픔이 더 구체화, 시각화되는 일은 아닐까. 이 책에서 말굽을 자기 폭력의 종류로 선택한 남자는 개장수 아버지를 둔 개백정의 새끼로서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을 살다나온 전과범이자 노숙자로 등장한다. 이 사람의 이력은 자신에게 말굽이라는 생명체를 전이해준 이사장 운영집단의 경비원이 되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사장은 말굽이 된 이 남자와 조우하기 위해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말굽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말굽남자가 통과한 생의 이력은 곧 폭력의 이력과 동일해 보였다. 말굽남자의 기억속에 가장 폭력적인 그리움으로 자리잡은 이력은 열네 살 여린과의 추억이다. 암수 은행나무로 상징되던 이들 소년 소녀의 집터는 권력과 개발이라는 폭력에 의해 전소되고 그 결과 각자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폭력을 잃게 된다. 소년과 소녀에겐 실명증과 화상이라는 치명적 상처가 남겨지고 이들은 ‘죽을 때까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은행나무의 운명처럼 그리움이라는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게 된다. 소녀가 유전으로 자신이 실명할 것을 알게 된 날 이들은 마침내 그 폭력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고자 했다.

   
 
우리는 그날 함께 죽고 싶었으며, 또 함께 죽음을 이겨내고 싶었다.   -409p
 
   

    각자의 죽음을 소유하는 경험을 서로 공유함으로서 사랑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폭력을 이기는 사람들일까, 폭력에 지는 사람들일까. 책에서 만난 이들을 보며 사람은 자기가 겪은 폭력의 기억을 지우고 실현하는데 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기든 지든 폭력의 과거, 현재, 미래를 극복하는 것이 인생의 전 과정 아닐까 싶었다. 소년과 소녀는 자신들의 집터를 불태워버리고 불멸의 성소가 된 샹그리라에서 극적으로 재회했지만 한명은 프랑켄슈타인이 되어 한명은 맹인 안마사가 되어 여전히 폭력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눈먼 그녀의 말(言語)과 들려줄 수 없는 자신의 말(馬)이 하나가 되려면 자신의 말굽으로 그녀의 말을 막는 것 밖에는 없었을 터이다. 이들의 비극은 박범신 소설에서 어느 정도 예정된 서사이기도 한데 이 통속이 자극하는 슬픔은 대개 폭력의 명백한 주체인 말굽보다는 그것을 전이토록 한 이사장 혹은 이사장을 권력자로 받드는 추종자들, 그리고 그들 폭력으로 시스템을 유지하는 사회 메카니즘을 향한 진한 원망으로 남게 된다. 폭력보다 더할 수 없이 폭력적인 원망이 되어 독자를 고통스럽게 하곤 한다. 이 책에서 말굽이 된 자신과 자신을 만든 말굽이 서로 내면의 진솔한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폭력을 지지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깨달음을 선사한다. 우리로선 자신들의 폭력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변론에 뚜렷한 반기를 들 수는 없어 보이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든 가해자든 더 이상 원망해야할 대상이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린 근원적인 질문에 가닿게 된다.


욕망을 견디기

    작가는 인간사 오욕칠정을 나른한 봄날 잠결에 다가온 아지랑이와 같다고 말한다. 그건 ‘세 번째 갈빗대와 네 번째 갈빗대 사이에서 모락모락’ 솟아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때의 ‘아지랑이는 기쁘고喜, 노엽고努, 애달프고哀, 즐겁고樂, 뜨겁고愛, 어둡고惡, 욕심도 많았다’고 증언한다. 그때의 ‘봄철의 숲에서 솟아나는 힘은 사람에게 도덕상의 악과 선에 대하여 어떤 현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읊조린다. 작가는 오욕칠정을 거세하는 것이 아름다운 봄날을 아름답게만 느끼는 전제라 말하는 듯했다. 어찌 보면 문맥상으로는 틀린 말이라 생각되지 않았던 이중적 악의 화신, 특수부대 훈련장 부대장 출신, 명안진종의 창시자 이사장의 논리를 통해 작가는 ‘몸과 영혼을 합치는 것’, ‘자연의식 치유법’등의 허상을 일갈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인간사의 폭력이라는 메카니즘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정한 시스템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인간 내면의 근원적 욕망을 성찰하는 가운데 자본주의를 폭력과 중첩되게 하는 시적수사를 연출했다. 배경이 되는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리하여 폭력이 발생, 유지, 전이되는 운영체계를 다채롭게 제시하기도 했다. ‘샹그리라’는 모두가 폭력을 은폐하고 협동으로 그것을 지켜낸 결과 일상으로서의 쾌락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장소로서 관음적, 쾌락적 아지트로 그려졌다. ‘명안진사’는 폭력을 종교처럼 떠받들고 강제적으로 전도, 강화되는 장소로서 ‘제석궁’은 폭력이라는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 죽음을 대기하는 장소로서 ‘문화궁’은 같은 종류의 폭력이 복제되어 안착하게 될 새로운 영토로서 모두 우리 사회의 연계된 폭력을 수행하는 장소의 표상들로 느껴졌다. 좀 낭만적인 곳이 있었다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만 기어 올라가 샹그리라의 모든 방안을 파노라마 영상처럼 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암벽이었는데 그곳이 가장 고독하게 보여졌던 건 어쩐지 문학하는 작가들의 최종 번뇌장소로 느껴져서 였달까. 그곳은 실컷 구경하고 난후 반드시 폭력이 돌아가는 운영체제를 꿰뚫어보고 그것의 대책을 세워야 할 장소가 아니었을까. 대책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와 같이 고민하자고 손내밀어야할 장소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에서 폭력이라는 욕망이 다소 위로와 용서의 기운으로 전복되던 희망의 인물은 예상했듯이 애기보살이었다. 애기보살은 이 책에서의 유일한 생존자였고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행자였다. 애기보살이 살아남은 것은 그녀가 단순히 누군가의 애기를 잉태한 상태였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이 작품의 논리대로라면 애기보살이 잉태한 것은 결국 폭력의 유전자를 지닌 이차적 폭력의 생명체임이 자명한데 그렇게 보자면 애기보살이 낳게 될 애기는 누군가로부터 전이된 말굽의 새로운 주인공이 될 운명적 객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생각에 그러한 폭력의 생명을 지닌 채로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그건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의 공감능력이 더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라 믿는다. 남성이 태어날 때부터 폭력적 장치로서의 성적 무기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여성은 자기 안에 타자라는 생명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자궁이라는 비폭력 장소를 지니고 태어난다.

    내가 임신한 열 달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은 바로 내 몸속에 내가 아닌 이물질 같은 생명체가 계속하여 자라나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이 비록 내 자식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생명체가 버젓이 숨을 쉬고 커가고 있다는 동물적 느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기쁘거나 만족스럽지가 않다. 말하자면 여성들은 열 달 동안은 꼼짝없이 그 생명체를 키워내면서 꼬박 그 불쾌한 시간을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시간은 산모에게 폭력적인 경험이 된다. 이물질과의 싸움, (태아라는)타자의 성장, 불쾌감으로 유발되는 죄책감들이 믹스되어 여성은 타자를 견디고 용서하며 공감하는 감수성이 진화되온 것은 아닐까. 출산이 태아에게 폭력이라고 보았을 때 이는 (여성이)폭력을 거부행사할 수는 없으나 폭력의 종류는 택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성은 출산이라는 폭력을 택함으로써 폭력의 미래를 구원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좀처럼 밝은 성격을 가졌던 애기보살은 미소보살의 남편이 제발 구출해달라던 평범한 소녀였다. 서사속에서 다른 여성들에 비해 실질적인 폭력의 기억을 잉태하지 않은 소녀이기도 했다. 폭력의 에너지를 가장 적게 발휘하면서 폭력을 행사할 가장 대안적 인물인 것이다. 그것은 폭력을 구원하겠다는 막연한 희망이라기 보다는 폭력을 최소화하겠다는 차선의 선택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폭력을 (제거하지 않고)견디는 여성들의 몫인 것이다. 사람이 생명을 가진 것은 특별한 능력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결국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결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복제물로서의 생명은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타자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욕망을 견딤으로써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가장 폭력적인 존재인 것이다.


기억을 견디기

    이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 중에 남자가 말굽을 사용할수록 차츰 기억이 회복되던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남자는 누군가가 자신을 가해하려는 악마의 힘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때 그 방어기제로 말굽이 방패막처럼 솟아오르곤 했다. 남자의 말굽이 입체화되는 순간은 곧 남자의 기억이 한 곳에 집결되는 순간이기도 했는데 말굽의 입체정도는 폭력의 체화정도와 비례하는 것으로 보였다.

   
 
몸의 반절은 멧돼지나 말인 것 같고 나머지 반절은 사람인 것 같았다. 발버둥치는 개를 은행나무에 목매다는 특수부대 장교들의 얼굴이 갑자기 보였다. 무표정하게 개의 배를 가르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였고, 삿대질을 하는 소녀의 눈먼 아버지, 야구 방망이로 내 갈비뼈들을 부러뜨리는 어린 학생, 마구 발길질을 하는 횟집 남자, 생니를 아예 뽑겠다며 펜치를 들고 설치던 간수장, 그리고 칼을 든 이사장의 얼굴도 보였다.
      -104p
 
   

    남자는 기억이 총집결된 마지막 순간 가해자를 멧돼지 때려잡듯 처리하곤 하는데 폭력에 대한 기억이 말굽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느껴져 내심 섬뜻하게 느껴졌다. 저 정도 맞아온 사람이라면 이 정도 폭력쯤이야 당연하다는 보상심리를 나도 모르게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복수를 부르는 폭력은 결코 희망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또 다른 희망의 기회를 짓밟는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말굽의 처사에 남몰래 응원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폭력에 투사되는 내 심리 이면에 다른 것은 없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만의 은밀한 상처를 타자에게 투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만히 있다가도 누군가 유명인이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마치 이때를 기다려온 것처럼 그 사람에게 집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우리가 은폐해온 개인 폭력의 한 종류가 아닐까. 사람이 때리고 맞은 기억을 평생 극복하기 위해 인격을 성장시키는 존재라면 모두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괴감에 다다른다. 폭력이 두려운 기억인 것은 그것이 꼭 순성장을 유도하지 않고 폭력의 중독자가 된 이사장처럼 역성장의 길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폭력은 순성장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작년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이었는데 광복 전후에 태어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작가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최근에 비슷한 시기에 작품을 내놓게 된 작가들을 보면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사람의 욕망은 죽는 날까지 바람직한 소멸이 아닌 바람직하지 않은 파멸이라는 지속적 성장을 향한다 말씀하신다. 이들은 이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한 욕망의 뿌리를 어떻게든 발본하여 살아있는 한 그것들과 대치하는 것으로 모든 에너지를 쓸 것으로 느껴진다. 이들이 이렇듯 세상과 인간에 대치하여 자본주의의 폐허를 말하는 방식은 우리네 근원적 욕망이 모두 쓰레기라는 잿더미였음을 말하거나(『낯익은 세상』, 황석영) 오랜 세월 인간을 지배해온 자본의 가치는 배역과 역할에 충실한 로버트 인간을 생산했다고 말한다.(『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박범신 작가는 이번 작품으로 자본주의의 생체시스템이 폭력의 진화구조와 같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이들은 모두 현실의 균열 속에서도 자신을 찾고 쓰레기 더미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폭력의 낭떠러지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가해해 가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이들이 우리사회와 자기 인생을 투쟁적으로 기억하고 고통스런 문학으로 기록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문학은 기억매체라고 하는데 우리가 외면해온 것은 어쩌면 문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 우리 사회와 타자에 대한 기억, 그리하여 탄생 이전부터 시작된 무수한 생의 폭력에 대한 엄연한 기억들은 아니었을까. 폭력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런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를 이겨내는 시간임을 가만히 깨닫는다. 기억을 견디는 것이 자기 생을 견디는 것임을, 그리하여 자신이라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알 것 같다. 이 책은 말한다. 폭력은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라고. 그것은 어쩌면 폭력보다 훨씬 폭력적이어서 필히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이지만 모두가 같이 견디고 말함으로써 이겨내야 하는 것이라고. 그래야 이겨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덧붙임> 

이 책을 넘기는 재미중에 하나가 김영진님의 삽화도 한몫을 했다.
중앙일보에 연재할 땐 120회 매회마다 삽화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책에는 약 1/3가량 추려서 실은 듯하다.  

그들중 기억에 남는 그림을 덧붙여본다.  

 

 

이런식의 충격적인 삽화가 더 대중일 것 같아도 이상하게 이번엔 
관념상의 폭력을 더 구체화 시켜주는 역할을 한 듯하다. 

썩 괜찮은 전략이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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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2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처음 나왔을 때 정말 사고 싶었는데 안 샀어요.
읽어야 할 책이 한 두 권이라야 말이죠.
김애란 소설에 실망하고 문득 읽고 싶었던 게 이 소설이었어요.
그리고 한사람님 리뷰 읽으니 또 읽고 싶네요.
전 박범신을 알고 나서 오히려 김훈 소설 보다 더 낫다 싶어었요.

정말 소설 읽는 사람이 그리도 없던가요?
소설 쓰겠다는 사람은 어찌 살라구요...쩝.
요즘 소설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게 별로 없긴하죠?
그래도 낯익은 세상 정도면 괜찮은 것도 같은데 그것도 결말이 쓸쓸하긴 해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