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프롤로그’에서 발췌함.


20쪽 – 책이 주는 자극은 마음의 문을 노트하는 것에서부터 쿵쾅거림, 다소 욱신거리는 자극, 격렬한 대화 등등 다양하다. 그래서 여러 권의 책을 한 권으로 읽는 사람과 한 권의 책을 여러 권으로 읽는 사람의 차이가 생긴다. 수량으로는 전자가 많이 읽고 시간을 더 쓰는 것 같지만, 실질적인 수확은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토머스 해리스의 '대중 소설’ 《양들의 침묵》을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은 '범죄 스릴러’로 읽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책을 여러 권의 다른 책으로 읽는다. 범죄와 지식의 관계, 범죄자의 지적 매력, 식인의 의미, 동성애 코드, 선악의 대치보다 지적 친밀성이 우선하는 관계, 현대 범죄 패턴의 변화, 말하기가 인간을 자살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 말과 죽음의 관계 등 열 권 이상의 책으로도 읽을 수 있다.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

 


 

15~16쪽 – <미운 오리 새끼>의 작가 안데르센은 동성애자였으며,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은 동성애 정체성과 정치적 은유로 이루어져 있다. 이성애 제도에 대한 이해 없이 그의 문학을 읽고, 평론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내 석사 논문 소재였던 가정 폭력도 위에 적은 모든 분야의 지식이 필요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한 분야만 공부한 전공자보다 더 깊게, 더 많이 알게 된다. 개인이 축적한 지식의 양 때문이 아니다. 이는 구조적으로 당연한 일인데, 여러 학문을 두루 접하면 지식의 전제와 지식이 구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20쪽 – 책이 주는 자극은 마음의 문을 노트하는 것에서부터 쿵쾅거림, 다소 욱신거리는 자극, 격렬한 대화 등등 다양하다. 그래서 여러 권의 책을 한 권으로 읽는 사람과 한 권의 책을 여러 권으로 읽는 사람의 차이가 생긴다. 수량으로는 전자가 많이 읽고 시간을 더 쓰는 것 같지만, 실질적인 수확은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토머스 해리스의 ‘대중 소설’ 《양들의 침묵》을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은 ‘범죄 스릴러’로 읽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책을 여러 권의 다른 책으로 읽는다. 범죄와 지식의 관계, 범죄자의 지적 매력, 식인의 의미, 동성애 코드, 선악의 대치보다 지적 친밀성이 우선하는 관계, 현대 범죄 패턴의 변화, 말하기가 인간을 자살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 말과 죽음의 관계 등 열 권 이상의 책으로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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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2-19 15: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뭐랄까, 이건 일명 화제별로 읽는다는 건데....이걸 ‘한 권의 책을 여러 권‘으로 읽는다고 명명할 수 있을지 매우 의문이 듭니다. 책 한 권에는 다양한 주제와 화제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럼 한 권을 여러권으로 읽을 수 있고 주제에 맞게 읽었다면 1권을 여러권 읽었다고 셈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좀 문제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에코의 소설들은 한 권에 여러가지 주제를 함축하고 있어 역사소설, 과학소설, 추리소설, 중세 이야기 등 무수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 한 권으로 여러 권 읽은 효과가 나는데...이건 참으로 난감한 얘기네요..^^;;

페크pek0501 2022-12-20 11:06   좋아요 1 | URL
저자가 개성적이고 독특해요. 인터넷도 폰도 사용하지 않고 로션도 안 바른다고 하네요. 삶과 글이 일치...
책 읽는 방식도 평범하지 않겠죠. 물론 많은 공부를 한 결과겠지요. 글도 엄청 잘 쓰죠.
제가 예를 든다면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도 누군가는 여자들의 우정에, 누군가는 이웃 할아버지의 희생 정신에, 누군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에 중점을 두고 읽을 수 있어요. 제 짧은 생각으론 요 정도로 이해했어요

야무 님처럼 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답니다.ㅋ 그냥 여러 관점에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더 생각해 볼게요. 댓글에 감사..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서니데이 2022-12-23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요즘 날씨가 많이 추운데, 따뜻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이번주 일요일 크리스마스인데, 계속 추울 것 같아요.
추운 날씨 조심하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페크pek0501 2022-12-25 10:50   좋아요 1 | URL
엄청 춥습니다.
조금 전 디카페인 카누 마셨어요. 겨울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가 가장 맛있지요.
오늘이 그 유명한 성탄절이라는군요.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도화지와 크레파스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던 때가 생각납니다.
서니데이 님도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하나의책장 2022-12-25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돌아오는 주가 지나면 2023년이라는 게 믿겨지질 않네요ㅎㅎ
날씨 많이 추우니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저녁 보내세요! Merry Christmas🎄❤

페크pek0501 2022-12-27 11:24   좋아요 0 | URL
하나의 책장 님, 반갑습니다.
저도 해가 바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네요. 아니 믿고 싶지 않아요. 시간만 잘 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책장 님도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12-26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겨울이 되어서인지 바로 뜨거운물을 부은 커피도 금방 식는 것 같아요.
저희집은 디카페인커피 다 마셔서 새로 사야겠네요.
요즘엔 크리스마스 카드도 연하장도 쓰지 않아서 그런지
연말연시는 참 빠르게 갑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2-12-27 11:26   좋아요 1 | URL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쉬면서 보냈습니다. 나가 봤자 사람만 많을 테지요.
맞아요, 커피가 금방 식어요. 그 정도로 춥다는 것이겠지요.
저도 디카펜인커피를 왕창 사 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떨어질 때마다 사는 거 귀찮아요.
서니데이 님도 몸과 마음이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2022-12-27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27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은전, <그냥, 사람>



124~125쪽 -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꿈도 꾸지 못할 자유를 아무 노력 없이 누리면서도 일상의 작은 불편조차 장애인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을 격리하고 가두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장애인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인식할 수조차 없다. 한때 남성들이 자신이 여성혐오의 잠재적 가해자임을 선언하는 장면에 나를 대입하면 식은땀이 난다. 나는 장애인차별의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확실한 가해자이며, 이 시스템의 분명한 수혜자이다. 비장애인인 내가 이 지면에 장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그 증거다.



125쪽 - 세상의 변화는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닥쳐온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되며, 그것은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이 비로소 ‘비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성찰할 때일 것이다. 



124~125쪽 -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꿈도 꾸지 못할 자유를 아무 노력 없이 누리면서도 일상의 작은 불편조차 장애인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을 격리하고 가두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장애인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인식할 수조차 없다. 한때 남성들이 자신이 여성혐오의 잠재적 가해자임을 선언하는 장면에 나를 대입하면 식은땀이 난다. 나는 장애인차별의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확실한 가해자이며, 이 시스템의 분명한 수혜자이다. 비장애인인 내가 이 지면에 장애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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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6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6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오래전 완독했는데 이 책을 책장에서 발견할 때만 해도 이 책의 어떤 글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고양이에 대한 글이 있었던 것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책을 다시 들춰 보니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이 보였고 재독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문장이 많았다. 그중 일부를 옮겨 적고 단상을 적어 보았다. 

  


이 책 속에 담긴 일련의 상징들은 삶의 에피소드, 무대 장치, 오락...... 따위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남은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21쪽)


⇨ 이 책은 에세이다.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고 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소설의 핵심은 ‘인간의 모습’이다. 즉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어떤 모습을 하는지 보여 주는 장르가 소설이라는 뜻이다. 


영화 타워링(1977년 개봉)은 135층의 빌딩에 화재가 일어나서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과 빌딩에 갇힌 사람들이 탈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타워링이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라면 왜 작가는 초고층 빌딩에 화재가 발생하게 했을까? 그 이유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그 본색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33쪽)


⇨ 나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 일이 있기 위해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곤 한다. 만약 내가 경험한 것들을 점으로 그려서 그 많은 점들을 알파벳으로 표기한다면 A라는 점과 R이라는 점을 연결시킬 수 있고, C라는 점과 Y라는 점을 연결시킬 수 있다. 가령 A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R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함이었고, C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Y라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 무관한 일들이었는데 인과 관계가 형성된다는 얘기다.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한 순간에 늘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라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57쪽)


⇨ 이 글을 읽으니 대학 시절 미팅에서 맘에 드는 파트너를 만나 들떠 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우리들 앞에서 전날에 만난 남자 파트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또 자기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 얼마나 귀여운 짓을 하는지를 흥분해 말하곤 하던 이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본인에게만 중요할 뿐이다. 


우리는 듣는 입장에서 자신의 지성을 필요로 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듣는다. 

 


그러나 한편 그 고양이가 이제는 불구의 몸이 되어 눈이 멀고 개체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으며, 더군다나 제가 무슨 까닭으로 얻어맞은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꼼짝달싹도 못하며 지내야 할 것을 상상하니 차라리 그를 위해서라도 죽는 쪽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는 다름이 아니라 그 고양이 자신을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굳이 믿으려 애를 썼다. 그런데 실제로는 내가 사랑하던 한 존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견디기 어려워서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이다.(66쪽)


⇨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인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에 빠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는 글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대상에 화려한 옷을 입혀 만든 환상을 사랑하는 것인지 모른다.   



여름도 다 끝나갈 무렵, 결국 물루(고양이의 이름)의 운명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를 데리고 떠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오래 걸리는 여행인 데다가 도착 장소도 불확실했고 여러 군데에 기착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데리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누군가에게 주고 가는 일이었다.(67쪽)

하여간 그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양이와 같이 지내는 데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때 습관이란 말은 사랑이란 말과 동의어다.(69쪽)


⇨ 고양이를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하는데, 고양이와 같이 지내는 데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단다. 여기서 습관은 사랑이란 말과 동의어라고 한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고양이에게 보조를 맞춰 사는 습관이 있는 사람일 것이므로.  


고양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다. 연인이나 배우자를 사랑하면 상대편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싶을 것이므로.  


사랑은 자기를 따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 보조를 맞추는 것. 



도대체 인간은 무슨 특권을 가졌기에 짐승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랐다.(71쪽) 


⇨ 위의 글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개를 파마하거나 염색해서 다니는 걸 보면 개를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다. 그것을 개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닌 건 분명하기 때문이고, 개의 속마음은 하기 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쁘게 파마한 개를, 예쁘게 염색한 개를 키우고 싶은 견주의 욕심 때문에 개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런데 내가 애완견을 키운다면 나 역시 예쁘게 꾸며 놓고 싶을 것 같다. 그러니 똑같은 상황이 아니면서 남을 흉을 보는 것은 금물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병이란 여행과도 같은 값을 지닌 것이며 병원 생활이란 그 나름의 으리으리한 고대광실 생활이다. 만약 부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91쪽)


⇨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환자가 되어야만 노동을 하지 않고 쉴 수 있으니 병상 생활만이 휴식 생활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글을 읽으니 모파상의 단편 소설 ‘승마’가 떠오른다. 가정부로 일하는 65세의 노파가 빠르게 달리는 말에 부딪힌다. 이 사고로 노파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병상 생활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 나온다. 사고를 낸 사람이 병원비를 대어 주니 당장은 가정부로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어 그야말로 즐거운 휴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변할 수가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인간은 지금까지 변화밖에 한 것이 없다. 기독교의 성인은 고대의 현자와 닮은 것도 아니고 현대의 시민과 닮은 것도 아니니 말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인간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159쪽)


⇨ 인간은 어떤 측면에선 변하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선 변하지 않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이 변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고전을 읽다 보면 옛 사람들이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이 지금의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섬」은 저자의 제자인 알베르 카뮈가 쓴 서문으로 유명한 책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서문의 마지막 구절을 옮기는 것으로 이 리뷰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14쪽)

 



(59쪽) 헤이그 시의 거리거리를 누비고 다니면서 앓는 고양이들을 실어다가 병원에 데려가곤 하던 그 칸막이 합승트럭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질병과 사고로부터 안전이 보장되고 하루 종일 따뜻한 방 안에 들어앉아서 운하를 따라 나룻배를 저어가는 뱃사람들의 동작을, 그대 영혼의 움직임과 잘도 조화되는 그 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지낼 수 있는 고양이들은 행복하여라!

(60~61쪽) 레닌은 옛날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그 접촉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부질없는 문제에 대하여 박학해진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라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디어 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하여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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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2-12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왠지 장 그르니에와 언니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22-12-13 18:02   좋아요 1 | URL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어림없는 일이지만요...

얄라알라 2022-12-13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고등학교 때 겉멋 충족용으로 시도 & 실패
어른 되어서도 두 차례 더....잘 이해 못함...

그런데 페크님처럼, 문장, 문단....나의 삶과 연결지으려 곱씹으며 적어가며 읽어보는 방법 아주 좋겠어요!
2022년 중에는 <섬>을 다시 읽을 일 없겠지만
혹 나중에 다시 보면, 그 땐 페크님의 깊은 이야기(해제문?^^)도 더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겠죠?
아 페크님 서재 놀러왔다가 책 읽어야한다!!! 숙제하나 스스로 얻어 갑니다.^^

페크pek0501 2022-12-13 18:05   좋아요 1 | URL
얄라 님은 학창시절에도 책과 가깝게 지내셨군요. 이런 분이 부럽습니다.
아마도 이 책은 제자인 카뮈처럼 저자와 가깝게 지낸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할 듯해요.
저는 워낙 독학인지라 오독의 가능성이 많답니다. 그냥 저 나름의 단상인 거죠.
저는 늘 숙제를 달고 살아요. 숙제가 미완성인 게 문제지만요...^^

희선 2022-12-13 0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베르 카뮈가 집으로 한걸음에 달려가서 만난 책... 누구나 그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렵다는 말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천천히 보다보면 좋은 말이나 생각을 찾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2-12-13 18:08   좋아요 1 | URL
이런 책은 전체 내용이 다 좋을 수 없고 다 이해할 수도 없는 것 같아요. 시대가 다른 데다가 국적도 문화도 다르니
더욱... 그래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을 만날 수 있으니 그게 독서의 기쁨이지요.^^

서니데이 2022-12-15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2-12-15 23:36   좋아요 2 | URL
작년에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서니데이 님이 좋은 소식을 전해 주셔서 알게 되네요.
이번엔 서재의 달인이 되지 못할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이네요.
서니데이 님도 12월과 새해에 좋은 일들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희선 2022-12-16 0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 님 서재 달인 축하합니다 십이월뿐 아니라 2022년 얼마 남지 않았네요 한달이 가는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마지막 날까지 건강하게 지내시고 새해 잘 맞이하세요 페크 님 새해에도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페크pek0501 2022-12-16 12:40   좋아요 0 | URL
서재의 달인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제 계획은 서재의 달인이 되신 분들의 서재에 축하 메시지를 댓글로 남김으로써 덕을 쌓아 보려 했는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어요.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니고 알라딘이 베푼 호의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번엔 많이 선정하여 저도 포함된 것 같아요.
이 달도 반을 넘고 있네요. 잘 마무리하시는 12월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기 조심하고요.^^

겨울호랑이 2022-12-16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날과 궂은 날이 있지만, 항상 일상 속에서 꾸준히 사색을 이어가시는 페크님으로부터 많이 배웁니다.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며,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

페크pek0501 2022-12-16 12:36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처럼 저도 좋은 글을 뽑아 올리는 것, 오늘 했습니다.
저야말로 님의 글로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3-01-06 2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3-01-08 14:2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님.
단상의 형식으로 쓴 것이라 뽑힐 줄 몰랐어요.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니 주의하세요...
 

(경인일보 홈페이지에서 ‘지면 보기’를 클릭하여 지면을 ‘화면 캡처’함.)



딱한 처지에 놓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쓴 소설 '승마'의 주인공 '엑토르'다. 그는 가난한 귀족으로서 해군성의 사무원으로 일한다.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었고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어느 봄에 엑토르는 과장에게서 업무 할당을 더 많이 받게 되어 300프랑의 특근 수당을 탔다. 그는 이 돈으로 말을 빌려 가족 소풍을 가기로 했다. 예정한 날이 되어 엑토르는 말을 타고 아내와 아이들과 하녀는 마차를 타고 그들은 신나게 달렸다. 그들은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베지네 숲 풀밭 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들이 돌아올 때 넓은 거리는 마차들로 붐볐다. 그런데 엑토르의 말이 개선문을 지나자 갑자기 제 집을 향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속도를 늦추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앞치마를 두른 노파가 차도를 건너고 있었다. 기관차처럼 내닫는 말 가슴에 노파가 부딪혀 치마가 허공에 펼쳐지며 굴러 떨어졌다.


이 사고로 엑토르는 경찰서에 가게 되었다. 노파는 65세인 가정부로 밝혀졌다. 엑토르는 그녀의 치료비를 부담하겠다고 서약하고 치료소로 달려갔다. 의사는 노파가 팔다리는 부러진 데가 없으나 내상이 염려된다고 했다. 그는 노파를 요양원에 보냈다. 한 달이 지났다. 노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기만 해서 살이 쪘다. 다른 환자들과 즐겁게 이야기도 했다. 엑토르가 매일 요양원에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노파의 병원비를 대야 했으므로 하녀의 급료마저 큰 부담이 돼 하녀를 집에서 내보냈다. 노파의 병세가 여전히 호전되지 않자 이에 낙담한 엑토르의 아내는 결국 "부인을 이리로 데려오는 게 낫겠어요. 그러면 비용이 덜 들겠지요"라고 중얼거렸다.


이 소설의 결말은 주목할 만하다. 특근 수당을 탄 일로 말미암아 엑토르와 그의 아내는 노파가 회복될 때까지 그녀의 생계와 병간호를 책임지게 됐고 더 가난해졌다. 반면 노파는 몸을 다친 일로 말미암아 당장은 가정부로 일하지 않고도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좋은 일이 나쁜 결과를 낳았고 나쁜 일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


소설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좋은 일로 인해 나쁜 일이 생기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재벌가의 아들과 결혼하여 주위의 부러움을 받은 이가 나중엔 이혼하여 자녀와 떨어져 외롭게 사는 신세가 되었다든지, 회사에서 초고속 승진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받은 이가 승진한 뒤 업무 스트레스로 큰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등이다.


이와 반대로 나쁜 일로 인해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경험한 것도 여기에 속한다. 내가 오래전 소화 불량으로 고생했을 때의 일이다. 병원에 가도 소용없었고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없었다. 소화가 되지 않고 뱃속이 더부룩해 하루에 한 시간씩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걷기 운동을 하다 보니 소화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기분 전환이 되었고 걷기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또 당뇨병, 암 등 각종 질병에 걸릴 위험도 낮아진다고 하니 걷기 운동으로 일석사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소화 불량 증상이 있었던 것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요즘 주식이나 가상 화폐에 투자했다가 이득을 보거나 손실을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곤 한다. 운 좋게 투자로 많은 이익을 얻었으나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기는커녕 그 행운이 오히려 화를 불러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예도 적지 않다. 우리가 살면서 겪은 일들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 돌아보면 전과는 다르게 생각될 때가 많다. 행운으로 여기던 것이 행운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불운으로 여기던 것이 불운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네 인생에서 행복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불행은 행복의 씨앗이 된다. 이렇게 행불행의 반전이 있는 것은 우리가 행운을 꿈꿀 필요가 없고 불운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도록 하기 위한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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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의 오피니언 지면에 실린 글입니다. 

아래의 ‘바로 가기’ 링크를 한 번씩 클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문 ⇨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2120101000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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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2-02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암요암요! 공감합니다 페크님.
나이 먹어가면서 깨닫는 바가 있다면 이 사실 하나인 것 같아요.
좋은 글 클릭 열 번 했어요. ^^

페크pek0501 2022-12-02 10:59   좋아요 2 | URL
열 번씩이나!!!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2-02 15: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인거 같아요 ㅋ
그래서 일희일비 할 필요는 없는거 같아요~!!

저는 11번 클릭^^

페크pek0501 2022-12-03 11:37   좋아요 1 | URL
11번 클릭이라니 감사합니다. 서재 활동 안 하다가 요때만 나타나서 눈치가 살짝 보였는데
새파랑 님을 비롯해 따뜻이 맞아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2022-12-02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03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2-12-02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클릭클릭!!! 여러번 합니다. ^^지금의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므로 항상 조심하고 진중하게 살아야지 하고 결심했습니다. 문제는 결심만 하고 막상 닥치면 또 일희일비하는 저에게 실망하지만요. ㅎㅎ

페크pek0501 2022-12-03 11:46   좋아요 0 | URL
한 번만 클릭해 주셔도 황송한데 여러 번이나 고맙습니다.
저 역시 행불행의 반전은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는데, 막상나쁜 일이 닥치면 난 왜 이리 복이 없나, 하면서 신세 타령 들어갈 거예요.ㅋㅋ 서울엔 첫눈이 왔어요. 이 겨울은 자연재해나 코로나 및 사고가 없는 무탈한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서니데이 2022-12-02 1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일은 좋은일로 끝나면 좋은데, 그게 다음엔 다른 일이 되기도 합니다.
반전의 반전인지 다시 좋기도 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페크님,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2-12-03 11:48   좋아요 2 | URL
그래서 좋은 일이 일어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이러다가 뭔 일 일어나는 거 아니야? 하면서 말이죠.
언제나 좋은 이웃으로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yamoo 2022-12-05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페크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신문연재 칼럼은 압박감이 심한데 대단하십니다!!

페크pek0501 2022-12-06 12:34   좋아요 1 | URL
잘 아시네요...ㅋ
글 제출해야 할 날짜는 다가오는데 글감을 찾지 못할 때 느끼는 공포가 있어요.
그래서 칼럼 한 편을 써서 여유분으로 저금해 뒀어요. 그다음부터 편해지더라고요.^^

희선 2022-12-13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겠네요 둘 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좋은 일이 생기면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하기도 하네요 그것도 그렇게 좋은 게 아닐지도... 그건 그것대로 받아들이면 될지...


희선

페크pek0501 2022-12-14 10:40   좋아요 2 | URL
확신은 금물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나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누구에게나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어요. 항상 긍정적인 마음자세를 가지는 게 좋겠어요.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고요 잘 지내세요... 감사합니다.^^
 

2022년 11월 6일에 찍은 사진. 수채화 같은 풍경.




예전에 친구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걸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이때 내 대답은 “이혼해야지.”였다. 내가 젊어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서 그랬던 것 같다.


며칠 전 지인과 통화 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혼에 대한 말이 나왔다. 지인이 무능한 남편 때문에 이혼한 친구가 있다고 해 그 얘기를 듣다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능하면 다른 배우자가 돈을 벌면 되는 거 아니야? 나 같으면 이혼하지 않고 그냥 철없는 아들 하나 데리고 산다고 생각하고 살겠어.”라고.


내가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부부가 살다 보면 배우자에게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요즘 내가 그렇다. 남편은 아직도 돈을 벌고 있지만 그것만 고마운 게 아니다. 친정어머니가 응급실에 가야 할 일이 생길 때라든지 입원해 있을 때라든지 나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제일 먼저 남편을 찾게 되고 남편이 도와준다. 성인이 된 애들이 있지만 자식보다 남편이 내 옆에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다. 그리고 고맙다. 배우자 없이 혼자 산다는 것은 나로선 상상할 수가 없다. 미혼자들은 혼자 사는 게 습관이 되어 괜찮겠지만 나처럼 부부가 함께 살던 이들은 홀로 사는 게 쉽지 않을 듯하다.


지인 중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 이가 있었는데 그의 남편이 휴직을 신청하고 몇 달간 아내를 간병했었다고 한다. 지인은 간병인을 쓰는 데 돈이 많이 들어서 남편이 하게 됐다고 말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본다. 아무래도 낯선이가 간병하는 것보다 배우자가 간병하는 게 환자로서 편하지 않겠는가. 만약 내가 아파 입원하게 될 경우 나를 간병할 사람은 남편일 것이고, 남편이 환자가 된다면 내가 간병할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다니곤 하셨다. 두 분 다 지병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약을 타러 병원에 가야 했는데 어머니가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아버지가 함께 가 주셨고, 아버지가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어머니가 함께 가 주셨다. 어머니는 그때가 좋았다고 지금도 말하신다. 남들이 보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정답게 병원에 다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남편이 퇴직을 하고 나면 쓸모없는 사람으로 대하는 아내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 아내들 중 자신이 아파 눕게 되면 배우자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사람은 아파 봐야 마음이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지면 의지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때 의지할 수 있는 배우자가 옆에 있다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배우자는 젊었을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 늙어서도 필요하다. 우리 부모님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2013년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후로 남편이 많이 애써 줬다. 남편이 없었다면 그때 난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훗날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남편이 애써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젠 내가 젊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일 게다. 배우자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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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1-27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2-11-27 14:37   좋아요 0 | URL
라로 님도 젊지만은 않은 나이에 온 건가요? 벌써 아시다니...ㅋ

scott 2022-11-27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어머님 곁 지켜드리시면서 이리 좋은글을 ^^

페크pek0501 2022-11-27 14:41   좋아요 1 | URL
사실은 어머니가 아프면서 남편의 존재 소중함을 깨달은 거지요. 혼자서는 많은 일을 하기가 힘들어요.
청소 담당인 남편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도 한답니다. 두 집 살림 하느라 제가 고단한지라...
좋은 글이라 하시니 황송합니다. 이렇게 훈훈한 글은 처음 쓰는 듯합니다. 주로 배우자 흉을 보는 글을 썼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만큼 제 마음이 약해진 증거이겠습니다.^^

2022-11-27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7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2-11-27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인에서 동지로 -

그리고 그간에 쌓인 신뢰
가 빛을 발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페크pek0501 2022-11-27 17:41   좋아요 0 | URL
동지? 크후후~~~ㅋㅋ 맞는 것 같습니다. 전우애와 연민으로 살게 되는 날들이 올 것 같네요.
앞으로 애들이 다 결혼하고 나면 더 그럴 것 같아요. 결국 둘만 남게 될 테니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지요..^^

2022-11-27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8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8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9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7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8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2-11-28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페크님.
저 북플이 알려준 2012년 오늘 쓴 글을 다시 보다가 페크님께서 댓글 마지막에 ˝첫 댓글이예요.˝ 라고 남기신 걸보고 페크님 서재로 놀러왔어요.

저는 벌써 한참전에 이혼을 해버려 이젠 배우자가 없지만, 일상에서 이런저런 이들이 닥칠 때마다 내 편이 되어주고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든든하다고 여겨요. 그래도 인생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페크pek0501 2022-11-28 10:10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그럼 감은빛 님과 제가 2012년에 댓글을 주고받던 사이였네요. 오래된 사이네요. 하하~~
싱글들은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 있더라고요. 갑자기 혼자가 될 때만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메우게 되는 것들이 있겠죠. 제 주위에도 생각해 보니 네 분이나 싱글로 사네요. 다 바쁘게 잘 살아요. 주부들은 한 번씩 싱글이 돼 보고 싶은 맘이 있답니다.
저도 이혼하지 말고 억지로 참고 살아라, 하는 주의는 아니에요.
이번에 연예인 선우은숙 님의 재혼 소식을 보니 때늦은 새 출발도 괜찮겠구나 싶었어요. 삶은 다양해요. 정답이 없음이에요. 언제나 감은빛 님의 글을 응원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2-11-28 0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습니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고마운 존재...

페크pek0501 2022-11-28 10:13   좋아요 1 | URL
저는 그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어요. 가까이 있으니 고마운 존재라는 걸 잘 모르고 살다가...
이번에 어머니가 병원에 가실 일이 많이생기자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존재만으로도 고맙~.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레이스 2022-11-28 1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두 마음입니다. ^^

페크pek0501 2022-11-28 11:03   좋아요 2 | URL
너무 솔직하십니다. 막 웃겨요.~~~

희선 2022-12-01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혼자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일이 있을 텐데, 페크 님 곁에는 남편분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군요 자식이 자랐다 해도 남편만큼 의지하기 어렵기도 하겠습니다 함께 한 시간이 있어서 그렇게 서로한테 의지하겠네요 페크 님 그런 사이 오래오래 이어가기 바랍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2-12-02 10:02   좋아요 0 | URL
배우자든 형제든 친구든 사는 데 울타리가 되어 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젊었을 땐 생각하지 못한 점이에요.
자식은 아직까지 제가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더 늙으면 나중엔 자식도 울타리가 되어 주겠지요.
함께한 시간이란 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yamoo 2022-12-05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페크님은 그러시군요! 배우자 없이 혼자 산다는 것은 나로선 상상할 수가 없다...는 표현을 보니 결혼을 꼭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사람들이 있는 거 같습니다. 뭐, 대부분이 그렇겠지요.

재밌는 글 잘 봤어요~~

페크pek0501 2022-12-06 12:38   좋아요 0 | URL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배우자의 흉을 보기도 하는데 막상 그 배우자가 아파 입원이라도 하고 나면
누구나 마음이 아려 올 겁니다. 부부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