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본 일이 거의 없다. 한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마음을 모질게 먹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30쪽)


그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 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았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도, 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31쪽)


요컨대 나는 내 눈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31쪽)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31쪽)


작가가 가엾은 거지를 보고 그냥 지나친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자기반성의 소회를 담고 있는 에세이다. 거지 동냥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으로 나뉠 듯하다. 


앉은뱅이의 배후에 왕초 거지가 있다는 것은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어도 동냥을 외면하기보다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주는 게 낫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오죽하면 동냥까지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둘째는 앉은뱅이라도 돈벌이를 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걸인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걸인들이 있는 것이라며 적선을 반대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걸인들에게 적선하지 말고 생계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생계 기반을 마련해 주려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한데, 그들은 당장 매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게 시급한 형편이라면 어쩔 것인가.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5-02-12 0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 보면서 박완서 작가 글이 아닐까 했는데, 맞았네요 예전에 한번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박완서 작가 글은 많이 보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작가 글도 비슷하겠습니다

지금은 글에 나온 것 같은 사람이 거의 안 보이는 것 같네요 사는 걸 아주 다르게 바꿔주는 건 무척 힘들 듯합니다 오래 그렇게 살면 다르게 사는 건 힘들겠지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네요


희선

페크pek0501 2025-02-12 16:06   좋아요 1 | URL
박완서 작가 님의 글은 개성과 맛깔스러움을 느낄 수 있죠. 소설도 잘 쓰시지만 에세이도 수작이 많아요. 이 책은 작가가 생전에 남긴 660편의 에세이 중에서 따님이 가려 뽑아 엮은 것이라, 아마도 작가 님이 남긴 가장 나은 에세이집이 될 것 같아요. 소설도 많이 쓰셨는데 에세이만 660편을 쓰셨다니 위대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재래식 시장에 가끔 갈 때가 있는데 거기서 앉은뱅이를 보곤 합니다. 사실 적선하는 게 왕초 거지만 배부르게 하는 거라고 해서 뭐가 정답인지 단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고양이라디오 2025-02-12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읽어보고 싶네요.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저도 한 때 박완서 작가와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요, 지금은 ‘속는셈치고 라도‘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25-02-12 16:08   좋아요 1 | URL
아마 이 책을 읽으시면 좋다, 할 것입니다. 돌직구를 던지는 글이 있거든요.
예. 속는셈치고~~~ 좀 속으면서 살자고요.^^

잉크냄새 2025-02-12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지하철을 타던 시절에는 주머니에 잔돈을 넣고 다녔어요. 음악을 틀고 지하철 바닥을 기며 구걸하는 분들을 보면 그 분별심이 들기 전에 그냥 잔돈을 바구니에 넣었어요. 몇 푼의 적선이 고민과 갈등과 의심보다는 맘을 편안하게 하더군요.

페크pek0501 2025-02-13 11:06   좋아요 0 | URL
아, 일부러 동전을 준비하시는 잉크냄새 님,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갈수록 세상은 각박해지는 듯합니다. 얼마라도 적선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그래도 이 세상이 훈훈한 세상을 향해 가는 걸 증명하는 듯 여겨집니다. 저도 모른 척하지 않고 적선에 동참하겠습니다. 좋은하루보내십시오,^^

바람돌이 2025-02-12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는 동냥하는 분들 보이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넣곤했는데 요즘은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 동냥하는 분들이 안 생기려면 국가에서 제대로 된 대책이 나와야 하고, 또 동냥이 밥벌이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걸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항상 그런 이성과 잠시의 내 마음의 편안함이 갈등을 일으키게 하더라구요.

페크pek0501 2025-02-13 11:15   좋아요 0 | URL
댓글 중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하는 부분은 반전입니다.ㅋ 혹시 카드만 갖고 다니시는 건 아닌지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책을 마련하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언제나 없어지려나요. 오늘 부산 세모녀의 극단적 선택, 의 신문기사를 보고 놀랐고 가슴 아팠네요.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헤아리며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