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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인간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은 이미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살아야 하는데, 잘사는 것은 특수한 기술이나 기능의 점진적 향상이 아니다. 잘산다는 말은 인간성이 원활히 발휘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성이야말로 인간 행복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80쪽)
인간성이란 인간다운 기능이다. 인간의 기능은 생식, 감각, 사유로 나뉜다. 생식은 식물도 하는 일이며, 감각은 동물에게도 있다. 하지만 사유는 오직 인간에게만 내재된 기능이다. 사유를 통해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사유를 인생의 본질로 삼았을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따라서 행복은 사유다. 생각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선한 삶이고, 삶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80~81쪽)
쇼펜하우어(1788년생)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에 있는 글이다.
쇼펜하우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사유하며 ‘선한 삶’을 사는 데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사유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겠네. 선한 삶을 살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겠네. 여기서 경제적 요건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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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은 전적으로 선의 향수에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혼자만 그 선을 향수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복지를 홀로 향수하기 때문에, 또는 자신이 남들보다 더 혜택 받고 운이 좋기 때문에 자신을 더 축복 받은 존재로 간주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61쪽)
예를 들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 및 축복은 전적으로 지혜와 참된 인식에 있을 뿐,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 또는 다른 사람들이 참된 인식을 갖고 잊지 않다는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지혜, 즉 그의 진정한 행복에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기뻐하는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염두에 두고 기뻐하며, 그러므로 앙심이 깊고 악의가 있는 동시에, 진정한 지혜를 모르고 충실한 생활의 평안도 알지 못한다.(61쪽)
스피노자(1632년생)의 「신학정치론」에 있는 글이다.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지혜와 참된 인식에 있을 뿐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게 아니고, 자기만 참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자신이 남들에 비해 더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타인의 불행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이란 지혜와 ‘선한 삶’이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겠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내용이 쉽지 않은 책이라서 술술 읽히지 않는다. 그래도 스피노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읽고 있다. 다행히 유튜브를 통해 스피노자 관련 강좌를 많이 접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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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
쇼펜하우어나 스피노자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아닌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인생에는 행복한 날과 불행한 날이 교차하기 마련 아닌가. 맑은 날도 있고 비바람 치는 날도 있는 것처럼
누구나 다 알 듯이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부자가 아니라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부자인가 빈자인가 하는 것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속에 행복은 이미 깃들어 있다. 아무리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행복은 멀어진다. 두 철학자가 말한 지혜와 ‘선한 삶’을 추구할 때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