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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필리프 아리에스도 동일하고 제목도 거의 유사한 두 책이 서로 다른 책이다. 두 책 모두 ‘죽음’ 관련 습속사(習俗史)이긴 한데, 내가 읽다가 만 <죽음 앞에 선 인간>(동문선, 2006)이 죽음 관련 물품과 의식에 대한 고고학적 설명이라면, <죽음 앞의 인간>(새물결, 2004)은 죽음 의미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추적한 책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필독서’ ‘고전’으로 알려진 <죽음 앞의 인간>을 앞으로 읽으려는 다른 분들은 나처럼 실수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읽다가 말았지만, 그래도 <죽음 앞에 선 인간> 중 몇 가지 글을 남겨본다.

 

 

“흔히 믿고 있듯, 인간만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바를 인지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사실은 확실치 않다. 반면 인간은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바로 그 유체를 매장한다는 점에서 이전 불과 도구를 사용한 일단의 영장류와 분명히 구별된다. 수렵, 채집으로 살아가던 최초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죽은자를 가족 단위 공동 묘소로 생각되는 일정한 장소에 안치시켰던 최초의 존재였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오래 된 묘지는 4만 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묘지(혹은 무덤)는 인간의 항구적 거주의 표상이 되었으며, 죽음과 문화 사이의 불변적인 관계를 증언하고 있다.

 

 

로마와 폼페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죽은 사람이 도시 외곽지역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분리하는 것은 그 시대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죽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도, 또 뒤섞여서도 안 되었다. 그럼에도 죽은 사람은 아주 먼 곳으로 이송되지 않았고, 완전히 격리되지도 않았다. 이유는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제물 헌납을 용이하게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 곁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사실상 기원 1세기까지 로마의 죽음에 대한 표현은 저승의 신비보다 현세의 향락을 더 많이 환기시켰다. 물병이나 식탁의 모자이크화에 묘사된 해골은 공포심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이승 삶이 짧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인생을 즐기도록 권유하는 것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고 네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라’고 일깨웠다.

 

 

중세 묘지는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는 묘지와 사뭇 다르다. 중세 묘지는 미사가 끝난 후 서로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되는 공공 장소였으며, 때로는 시끄러운 광장의 역할도 수행했다. 교회의 부속 시설로서 묘지는 공공 공간의 중심이었으며, 동시에 사회 교류의 강력한 장소였다. 죽은 자들과 제물의 봉헌자들을 위해 인간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할당된 로마 시대 공간은, 중세 들어서면서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공유하는 공간이 되었으며, 죽은 사람 존재는 살아 있는 사람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과의 바로 이러한 혼재가 라틴적인 서구 사회에서 18세기까지 특징을 이룬다.

 

 

중세 묘지는 어떠한 묘비도, 어떠한 표식 흔적도 없이 죽은 사람들은 지하에 사방팔방으로 안치되었다. 무덤 층은 중첩되어 있고, 열묘식 묘지에서 엄격하게 준수되었던 무덤의 개별성이 사라졌다. 유체들은 개인용 관이나 묘혈도 없이 거의 뒤죽박죽 뒤섞인 채 완전히 땅속에 매장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개인용으로 결정된 장소를 영원히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성스러운 영토와 그 보호하에 자신 육신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 육신을 안치할 수 있는 교회에 의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정확한 토장 장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고, 어떤 기념비나 비문으로 그 장소를 지정하는 것에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차 16세기부터 묘비명이 일반화되었다. 자신 무덤을 결코 가져본 적 없고, 묘지나 교회 익명적 성격을 지닌 매장지에 만족하지 못하던 계층 사람들에게 묘비명은 무덤 형식으로 채택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 모습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를 지녔고 적어도 문자로나마 자신 존재를 인지시키고 싶어했다. 이 시기는 바로 문자 보급과 독서가 보급되던 시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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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일곱 딸들
브라이언 사이키스 지음, 전성수 옮김 / 따님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책 <사피엔스>에서 저자 유발 하라리는 우리에게 ‘이건 몰랐지?’ 라고 묻는다.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인류 종을 단일 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에렉투스를 낳고 호모에렉투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낳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우리 종인 호모사피엔스가 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상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동시에 살았다.”<사피엔스>(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5)


대체 왜 몰랐을까? <이브의 일곱 딸들>이 바로 호모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와 서로 다른 종이며, 우리 모두는 호모사피엔스의 직계 자손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인류유전학자가 쓴 책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이 학계에서 널리 인정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저자가 다양한 인간 종이 과거 동시에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미토콘드리아 DNA로 밝힌 199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고고학과 유전학계에 갑론을박이 많았다.


인류유전학 연구에서 사용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양쪽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세포핵 염색체의 DNA와 달리 누구나 다 어머니로부터만 전달되며, 특히 세대를 거치면서 거의 변하지 않고 전해지지만 돌연변이가 하나씩 서서히 일어남에 따라 관련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시계역할을 한다. 대체로 서열에 차이 한개가 있다면 두 사람은 1만년 전에 공통 모계조상을 가졌다는 의미다.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계통도는 모든 현대인의 공통조상이 약 15만년 전에 살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점이 바로 1백만년 전 이미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정착해 살았던 호모에렉투스가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했을 리 없다는 증거가 된다.”


“현대인간인 호모사피엔스는 약 1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약 10만년 전 어느 때부터 아프리카에서 퍼져나와 나머지 세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믿기 힘들지 몰라도 이러한 정착이 13개 아프리카 씨족 중 단 하나의 씨족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대규모 이동은 아니었다. 만일 수백 또는 수천의 사람들이 이주했다면 나머지 세계의 유전자 풀에서 여러 아프리카 씨족의 유전자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가 라라(Lala)라고 명칭한 한 씨족만 관련되어 있었다. 그녀가 전세계의 진정한 미토콘드리아 이브인 것이다.”


“이처럼 호모사피엔스는 적어도 10만년 전에 근동지방에 들어왔지만, 5만년 동안 그 지역에 머물기만 했을뿐 유럽 지역으로 퍼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유럽에는 육체적으로 추위에 적응하고 툰드라의 큰 동물들을 사냥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네안데르탈인들인 이미 살고 있었다. 근동지방에 있던 호모사피엔스에게는 네안데르탈인을 제치고 나갈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해도 어떤 장점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은 근동지방에서 지낸 긴 시간 동안 느리지만 기술의 진보를 이루었고, 더 중요하게는 궁극적으로 유럽에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준 사회적 교류를 발전시켰다.”


한 가지 더 이 책을 <사피엔스>와 비교해 보면,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인류유전학 <이브의 일곱 딸들> 내용이 인류문화학 <사피엔스>보다 더 명확하다. <사피엔스>는 인류 최초에 농업이 퍼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 지역에서든 일단 한 무리가 정착해서 경작을 시작하면 농업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농업은 인구 증가에 크게 기여했기에) 농부들은 순수한 머릿수의 힘만으로 언제나 수렵 채집인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수렵 채집인은 자신 사냥터를 경작지로 내주고 도망치거나 스스로 쟁기를 잡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따름이었다.”


유발 하라리는 석기시대 농경인과 수렵 채집인 관계를 애매모호하게 묘사했지만, <이브의 일곱 딸들>은 “근동지방에서 유럽으로 퍼져나간 것은 농경인들이 아니라 농업에 대한 아이디어”였다고 밝힌다. 즉 “새로 유입되어 들어온 농경민들에 압도되어 수렵인들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었다. “미토콘드리아 DNA로 추정하면 현대 유럽인 조상이 초기 농경민인 경우가 2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기에 수렵 채집인은 자신 사냥터를 경작지로 내주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스스로 쟁기를 잡은 것이다.


<이브의 일곱 딸들>은 인류진화 과정을 유전학으로 설명하는 책이다. “인류유전학 연구는 객관적으로 정의된 종족(race)이 지구상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장 높은 순수성을 자랑하는 민족에도 이질성이 존재할 뿐이다.”


“예를 들면 영국 에든버러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아주 확실하게 폴리네시아인 유형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가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어떻게 그 DNA가 전해졌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려주는 그 무엇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전해졌다. 그녀는 매력적인 선장과 사랑에 빠진 타이히 공주의 후손일까? 아니면 마다가스카르 해안에서 아랍인에게 잡혀온 노예의 후손일까?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 DNA 서열이 노르웨이나 북부 스코틀랜드의 어부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이유는 또한 무엇일까?”


게다가 “현재 종족들은 모든 살아 있는 종들의 역사를 특징짓는 일시적인 혼합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혈액 유전학으로 현재의 유럽인들을 보자. “세계에는 Rh+형이 압도적으로 우세한데, 유럽만 특이하게 양쪽 형이 거의 같은 빈도로 나타난다. 이것은 진화적으로 엄청난 짐인데, 이러한 불균형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어느 한쪽 Rh 혈액형이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단일 인구집단에서 두 가지 Rh 혈액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진화적으로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서로 다른 Rh 혈액형을 가진 두 사람이 자식을 낳을 때 ‘푸른 아기 증후군’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Rh-형 어머니와 Rh+형 아버지 사이에 자식이 생기면 태아는 Rh+형일 확률이 아주 높은데, 그 아이가 태어날 때 Rh 항원을 띤 아기 적혈구가 산모 순환계로 유입되어 산모 면역계는 항체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항체는 두번째 임신된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태아도 Rh+형이면 탯줄을 통해 산모 항체로부터 공격받는다. 그렇게 해서 새로 태어난 아기는 혈액에 산소가 부족해져 푸른빛을 띠게된다. 한 인구집단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같은 Rh 유형이어야 한다. 하지만 유럽에 유형이 반반이라는 점은 현대 유럽은 Rh-형인 원래 거주민과 아마도 약 8천 년 전 농경문화와 함께 근동지방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Rh+형 집단의 혼합체고 현재 섞이는 과정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모든 인간종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그 기원이 더 짧고 서로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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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금욕주의로 시작하여 쾌락주의 속에서 소멸한다. 국가가 요람에 있을 때는 종교가 함께 하고 무덤으로 갈 때는 철학이 동행한다. 모든 문화 초기에 강한 종교적 신앙이 사물의 본성을 감추거나 부드럽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고통과 고난을 인내하며 참을 수 있게 한다. 모든 걸음마다 신들이 함께하여 사람들이 망하지 않게 지켜줄 것이라고 종교는 말한다. 악은 신앙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든다.

 

 

승리를 얻거나 안녕과 평화 속에서 전쟁을 잊게 되면 부가 증가한다. 지배 계층의 경우 몸이 중요했던 생활에서 감각과 정신이 중요해지는 생활로 바뀐다. 고생과 고통이 쾌락과 안이함으로 대체된다. 학문이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가 하면, 사색과 안락함은 남자다움과 용기를 약화시킨다. 그러다가 결국 사람들은 신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여 지식에 따르는 비극을 슬퍼하고, 덧없는 쾌락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한다. 국가 서막에는 아킬레스가 등장하지만 마지막은 에피쿠로스로 끝난다.

 

 

가난은 부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 이스라엘 솔로몬 시대에 계층 전쟁이 시작되었다. 솔로몬은 표트르 대제와 레닌처럼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너무 빨리 옮겨 가고자 했다. 그가 펼친 공공 사업에 투입된 노역과 세금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뿐 아니라, 20년에 걸친 공사가 끝나자 예루살렘에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형성되었다. 개인 부가 증가하고 궁전의 호사가 증대되는 것과 발 맞추어 빈민가들이 늘어났다.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 그리고 신전 주변에 모여 있는 상인들과 환전상들 사이에서는 착취와 고리대금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문명이 산업화되는 과정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풍요로운 사람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도시와 농촌 사이 갈등이 점점 깊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솔로몬이 죽은 후 팔레스타인이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은 북왕국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남왕국 유다라는 적대적인 두 왕국으로 분열된 일과 관련 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동족 간 증오와 갈등 때문에 약화되었으며, 이런 증오와 갈등은 혹독한 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솔로몬이 사망한 직후 예루살렘은 이집트에게 점령되어 굴복하고, 솔로몬이 오랜 기간 거둬 모아 놓았던 금 대부분을 바쳐 정복자를 달랬다.

 

 

정치는 부패하고 경제는 갈등이 깊어지고 종교는 타락한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들(히브리어로나비(Nabi))이 등장했다. 예언자들은 미래를 예언하는 체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거리낌 없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야당 소속의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애기다. 한 국면에서는 산업화에서 나타난 착취와 종교계 속임수에 대해 분노한 비폭력 저항자였다. 그들은 도시의 부패한 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런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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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하게도 우리는 인간이 옛날의 수준 낮은 문화를 거치고 끊임없이 발전해 오늘날 유례없는 절정기에 이르렀다고 여기는데, 부질없는 생각인 셈이다.

 

 

5000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서면 시간이 전혀 새롭게 보인다. 그리스와 우리 사이에 놓인 2000년 시간이 무색해지고, 잠시나마 카이사르와 헤로도토스가 근대를 사는 동시대인으로 느껴진다. 우리에게 그리스는 먼 옛날이지만, 그리스인에게 이집트 피라미드는 그보다 더 먼 옛날일 테니 말이다. 그리스 여행 안내서 오류로 멤논의 거상이라고 잘 못 알려진 아멘호테프 3세 거상의 기부(基部)에는 2000년 전 이 유적지를 다녀간 그리스 여행객들이 새겨놓은 비문이 있다. 그 까마득한 옛날의 유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스와 우리를 메우고 있는 2000년 세월이 무색해지면서, 그리스인과 우리가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기묘한 기분이 또 한 번 든다. 메네스부터 클레오파트라에 이르기까지 이집트는 얼마나 장구한 역사를 누렸는가! 그리스 수명도 천 년에 이르는 로마 역사도 이집트 옆에 서면 보잘것없어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람세스 2세에 비하면 철부지 애송이에 불과하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50년경 이집트 인부들과 농부들을 봤을 때 그 모습을 이렇게 낙관적으로 묘사했다. ‘이집트 농부들은 땅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때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쟁기로 고생스레 밭을 갈거나 호미질을 하지 않는다. 나일 강이 저절로 밀려와 밭에 물을 대 주고, 밭에 물을 대 주던 그 강이 물러가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땅에 씨를 뿌리고는 밭에 돼지를 풀어 놓는다. 돼지가 돌아다니면서 씨 뿌린 밭의 흙을 다져주면 농부는 이제 수확할 때만 기다린다.’ 돼지를 시켜 밭의 흙을 밟게 했다면, 원숭이들을 길들여 나무 열매를 따는데 이용했다. 그리고 밭에 물을 대 주는 나일 강은 범람기가 되면 얕은 웅덩이에 물고기 수천 마리를 남겨두고 갔다. 당시 학생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나와 있는데, 살코기 33가지, 구운 고기 48가지, 각종 음료 24가지였다. 부자들은 식사에 포도주를 곁들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맥주를 마셨다.

 

 

한편 이집트에 치안 제도가 있었던 흔적은 없다. 이집트의 상비군조차(이집트는 사방이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기에 항상 상비군 규모가 작았다) 나라 안 기강을 유지하는 데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법과 통치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파라오 특권에 의존했으며, 파라오 특권은 학교와 종교가 유지시켜 주었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심리에 이토록 크게 의지해 나라 기강을 다진 곳은 없었다.

 

 

파라오는 왕실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자기 누이와 결혼하는 일이 잦았다(간혹 자기 딸과 결혼하기도 했다). 이것이 과연 혈통을 약화시켰는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으며, 적어도 수천 년 간 실험을 거친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누이와 결혼하는 풍습은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서기 2세기에 이르자 아르시노에의 시민 3분의 2나 이 풍습을 시행했던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집트 시(詩)에서 오빠와 누이란 말은 오늘날 우리의 연인이나 애인과 똑 같은 뜻이었다.

 

 

가정생활은 오늘날 가장 고도로 발달한 문명만큼이나 질서가 잘 잡혀 있었고, 도덕적 분위기와 영향력도 건전했다. 여자 위치는 오늘날 대부분 국가보다 높은 편이었다. ‘고대에도 현대에도 나일 계곡에 살았던 이 사람들만큼 여자에게 그토록 높은 법적 지위를 준 사람들은 없었다.’ 유적들을 보면 여자들이 공공장소에서 먹고 마시고, 거리에서 애정행각을 벌여도 관심을 받거나 해를 입지 않았으며, 산업과 교역 분야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잔소리 심한 아내들을 좁은 집안에 가둬 두는 데 익숙했던 그리스 여행객들은 여자들의 그런 자유로운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자들은 또 자기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물려줄 수 있었다. 여자가 이렇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이집트 사회가 약간 모권제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여자는 집안에서 명실상부한 안주인 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땅도 모두 모계로 상속되었다. 남자들이 자신 누이와 결혼한 건 친밀함이 낭만적 사랑으로 발전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주는 집안의 유산을 자신이 마음껏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애를 할 때도 보통 여자가 먼저 나섰다.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사랑 시와 편지들은 대개 여인들이 남자에게 바치는 것이다. 시와 편지로 밀회를 청하고, 직접적으로 구애하기도 하고, 공식적으로 청혼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이 담긴 편지도 있다. ‘오 아름다운 나의 친구여, 당신의 아내가 되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게 나의 소망입니다.’ 따라서 정절과 또다른 덕목인 정숙은 이집트인 사이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요즈음 윤리 의식에는 거북할 정도로 대 놓고 성생활을 이야기했다.

 

 

철학사를 다루는 사람은 흔히 그리스 이야기로 서두를 연다. 한편 자신들이 처음 철학을 만들었다고 믿는 인도인이나, 자신들이 철학을 완성했다고 믿는 중국인은 우리 서양인의 역사 지방주의를 보고 슬며시 미소 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리스인은 이집트인의 지혜를 소중한 금언으로 여겨서, 먼 옛날 살았던 이 민족에 비하면 자신들은 철부지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철학 작품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프타호테프의 가르침>이다. 이 작품은 기원 전 28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보다 2300년이나 전이다. 프타호테프는 멤피스를 통치하는 지방관이었으며, 왕의 총리 대신을 지냈다. 관직에 물러나면서 그는 아들에게 영구불변의 지혜가 담긴 지침서를 남겨 주었다. <프타호테프의 가르침> 중 한 문구다. ‘진실을 넘겨짚지 말 것이며, 제후든 농부든 사람이 방심해서 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말지어다. 그것은 영혼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이다.’

 

 

기원전 2200년 전 이집트 석판의 시는 ‘카르페 디엠’을 노래한다. ‘즐거운 오늘 하루를 축하하라. 하루를 기진맥진 살지 말라. 보라, 사람들은 죽을 땐 누구나 빈손이다. 그리고 한번 저세상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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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이 생겨나 그 여파로 돈과 이윤 개념이 도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재산이란 것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고 따라서 통치도 거의 필요 없었다. 개인 용도가 아닌 물건에는 재산 의미가 하도 약하게 작용하여 애초에 머리에 서 있지 않은 재산 개념을 끝없이 강화시키고 주입시켜야 했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토지는 공동체 소유였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페루 원주민, 인도 치타공힐 부족, 보르네오 섬 주민 및 남양제도 주민들은 공동으로 땅을 소유하고 경작했던 것으로 보이며, 수확률도 공유했다. 오마하 인디언은 ‘땅은 물이나 바람과 같아서 사고팔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모아 섬에는 백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토지를 판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식량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식 사고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음식을 가진 사람이 먹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거나, 여행을 하는 도중 아무 집에나 들러 음식을 얻어먹거나, 가뭄으로 고생하는 마을을 이웃 사람들이 먹여 살리는 일은 ‘야만인’들에게는 예삿일이었다. 숲속에서 식사를 하려고 자리를 잡을 경우엔 누군가 와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도리였다. 그런 후에야 혼자 먹어도 괜찮다고 여겨졌다.


한번은 영국인이 사모아인에게 런던의 빈민에 대해 이야기 해 주자 그 ‘야만인’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요? 음식이 없다고요? 친구도 없어요? 살 집이 없다고요? 그 사람이 자란 곳은 어디인데요? 친구가 가진 집도 없어요?’ 그들에게는 마을 어딘가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 한 음식이 모자라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호텐토트족의 경우,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진 자가 있으면 모두가 똑같이질 때까지 잉여분을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들은 배고픈 자를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느니 차라리 자기가 배고프고 마는 편을 택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커다란 가족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소위 ‘문명’이라는 것에 도달하자 원시 공산주의가 사라져 버린 건 어째서일까? 공산주의가 왜 문명 초창기에 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지 그 이유를 한 가지 들면, 공산주의는 결핍의 시대에 가장 잘 번창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결핍의 시대에는 기아라는 공통의 위험을 이기고자 개인들이 집단으로 뭉치게 된다. 그러다 세상이 풍요로워지고 위험도 줄어들면, 사회적 결속이 약화되면서 개인주의가 퍼진다. 사치가 시작되는 곳에서 공산주의는 끝나기 마련이다. 성장하는 문명은 모두 불평들이 배가되는 장인 셈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는 모두 보다 단순하고 평등한 삶에 대한 일종의 집단 기억으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다 불평등과 불안정이 도를 넘어서면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빈곤은 까맣게 잊은 채 평등함을 떠올리며 이 이상향을 향해 기꺼이 되돌아가려고 한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역사 속에서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나 프랑스의 자코뱅당원, 소련의 공산당원 손에 토지 재분배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 역시 가혹한 재산 몰수, 혹은 몰수나 다름없는 소득세나 유산 상속세 징수를 통해 주기적으로 재분배된다. 그러다 부, 상품, 권력 경쟁이 다시 시작되면서 다시 한 번 경쟁과 능력의 피라미드가 형성된다. 그 결과 불평등은 곧 이전만큼 심각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보면 ‘경제사’는 모두 서서히 진행되는 사회적 유기체의 심장 박동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부가 집중되는 대규모 심장 수축기와, 자연스럽게 혁명으로 폭발하는 대규모 심장 이완기가 번갈아 찾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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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15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경제 체계에서 교환 수단인 화폐 도입으로 가치 체계가 왜곡되면서, 금융 경제와 실물 경제가 분리되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금융 산업은 ‘그들만의 리그‘가 된 듯한 요즘 이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8-15 10:15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금융산업이 자본주의의 아주 끝판왕인 것 같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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