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표기 문자는 발화 언어와는 완전히 별개의 언어를 이루고 있다.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문화적, 인지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 때문에 별개 언어를 쓰는 편이 같은 언어의 두 가지 형태를 쓰는 것보다 더 논리적일지 모른다. 그들 발화 언어 어순은 완전히 자유롭고 별다른 우선순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문장 속 어의문자들을 읽을 때 특별히 선호하는 어순은 없다. 문장 어디에서 읽기 시작해도 좋았고, 그대로 뻗어가는 절들을 따라가면 결국 문장 전체를 읽는다.

 

그들 문자는 단어로 분할되지 않는다. 문장 획들이 여러 개의 구를 가로지른다. 그들은 구성 단어들에 해당하는 어표를 결합해서 문장을 표기한다. 회전하고 수정하면서 어표들을 결합시킨다. 필요할 때마다 어표를 갖다붙여 거대한 복합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문장을 작성한다. 이점은 그들이 최초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자를 읽는 사람도 메시지 전체 문맥을 미리 알 수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그들과 같은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그들 언어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나에게 지금까지 사고란 보통 마음속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 청각장애인이 수화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처럼. 사고란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말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의 사고가 도형 형태로 코드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로 전제조건과 결론을 서로 호환할 수 있게 숙고할 수 있다. 각 명제들 사이 관계에 고유한 방향성은 없고,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의 맥락’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에 관여된 모든 요소의 힘은 동등하고, 모두가 동일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미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절박한 느낌에 가깝다. 본능적으로 주저 없이 따라야 하는 느낌. 미래를 아는 사람은 자유롭지 않지만 속박당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니다. 그들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한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다. 선택의 자유는 내가 미래를 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래를 아는 것과 선택의 자유 모두 동등하고 타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미래를 아는 지금 난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한다.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한다. 인과적 해석과 목적론적 해석이 양립하는 물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적 사건은 정보 전달과 계획의 현실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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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06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rrival을 못 봤지만,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신 언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것 같네요. 실천으로 옮겨진 언어는 지시적 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3-06 15:22   좋아요 1 | URL
Arrival(컨택트) 못 보셨다면, 보시길 강추드립니다.^^
이웃님인 AgalmA 님, 고양이라디오 님, 나와 같다면 님 등의 호평 보시면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 느끼실 수 있으십니다.^^ 아니, 빌 드뇌브 감독 작품은 전부 추천합니다. 시카리오, 프리즈너스, 특히 그을린 사랑...
감독의 단편 15분 짜리 영화 <다음 층>은 유투브에도 있으니 오늘 퇴근하시면서 보실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일상 언어가 단순히 정보 전달에 있지 않고, 계획 혹은 의도의 현실화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드 창은 그걸 교묘하게 엮어 뛰어난 소설을 창작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3-07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 추천해 주신 <다음 층>을 봤습니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먹기만 하면서 끊임없이 추락하는 현대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라 여겨지는데, 제가 잘 이해했나 모르겠네요. 대화도 없는 짧은 영화가 이토록 흡입력이 강한 것을 보면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네요^^:)!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3-07 16:18   좋아요 1 | URL
네, 그 감독 모든 영화의 흡입력이 엄청납니다. 또한 항상 엄청 불편합니다.
전 <그을린 사랑> 보고 몇일 간 멍~~~ 했던 경험이 있을 정도로요. ^^

AgalmA 2018-03-11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다시 생각하면....
전후 과정을 모두 아는 일종의 다층적 사유와 사고를 한다 해도 3차원의 이 세계에서 행동으로 구현할 때 어떤 틈이, 우연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 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결과‘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소멸 뿐이지 않겠나...싶습니다. 과정은 과정일 뿐이니까.

북다이제스터 2018-03-11 20:09   좋아요 0 | URL
어려운 말씀이세요. 생각의 여지가 많은...
 

 

 

 

 

 

 

 

 

 

 

 

 

 

 


‘페르마의 최단 시간 원리’는 빛이 공기에서 물속으로 들어갈 때의 경로다. 빛은 수면에 달할 때까지 일직선으로 나아가다, 물의 굴절률이 공기와 다르기에 빛이 방향을 바꿔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원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원인(물의 굴절률)에 따라 결과(방향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을 덧붙여보자. 빛은 공기보다 물속에서 더 천천히 움직이기에 빛이 전체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물속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 한다는 목적론 관점에서 ‘페르마의 최단 시간 원리’를 바라볼 수도 있다.

 

 

“빛은 언제나 극치(極値)의 경로, 바꿔 말하자면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든지 아니면 최대화하려는 경로를 택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해. 최소와 최대는 어떤 수학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모든 물리학 법칙은 하나의 변분 원리*로 다시 기술될 수 있어. 유일한 차이는 어떤 속성이 최소화되는지 아니면 최대화되는지에 달려있어. 페르마 원리가 적용되는 광학에서 극치를 가져야 하는 속성은 시간이야. 역학에서는 또 다른 속성이 적용되지. 전자기학에서는 또 다른 속성이 대두되고. 그러나 그런 원리들은 수학적으로는 모두 비슷해.”

 

 

“물리법칙의 통상적인 공식은 인과적인데 페르마의 원리 같은 변분 원리*는 합목적적이고, 거의 목적론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야. 의인화를 통해 확대해석을 해도 무방하다면, 빛은 일단 선택 가능한 경로들을 검토하고 각각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야 해. 결국 빛은 자신이 도달할 목적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정보도 갖고 있는거지. 한마디로 빛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는 거야.”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것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굴절률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인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애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햅타포드(외계인)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해석이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이 없다.”

 

 

“인류와 햅타포드 모두 동일한 물질세계를 지각했다.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세계관의 궁극적인 상이함이 이런 차이를 낳은 결과였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햅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와 최대화 목적을.”

 

 

 

 

 

 

 

 

 

 

 

 

 

 

 

 

“뉴턴 역학은 주어진 힘 때문에 가속도가 생기고 운동이 결정된다는 관점에서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외부 원인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는 것은 다분히 ‘기계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헤밀턴-라그랑주 역학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용이란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는 양인데, 에너지는 힘처럼 외부에서 주어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운동에너지나 잠재에너지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의, 정확히 말하면 계의 성질입니다. 따라서 외적 요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의 내부 성질에 따라서 정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기보다는 작용을 최소화하는 기본 원리가 자연에 내재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지요. 다분히 ‘목적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완전히 다른 전제에서 출발했는데도 해밀턴-라그랑주 역학은 수학적으로 뉴턴역학과 완전히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흥미로운 일이지요. 자연을 타당하게 해석하는 관점이 아주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 2008년)

 

 

 

 

* 변분원리

변분법으로 나타낸 물리학의 기본법칙으로 어떤 이론을 일반화할 때 사용되는 원리이다. 이 원리의 장점은 운동방정식의 방법과 비교해서 시간에 대한 도함수 중 낮은 차수만 풀며, 얻은 방정식이 전체적으로 앞뒤가 맞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물리학의 기본법칙은 모두 변분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역사적으는 광학에서의 페르마의 원리, 모페르튀의 최소작용원리(1747)에 이미 변분원리의 단서가 있었다. 현재는 역학의 법칙이나 전자기장의 법칙 등 물리학의 기본법칙은 모두 변분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를테면 역학의 법칙은 라그랑주함수를 써서 δ∫Ldt=0의 형식으로, 또 진공 속의 전자기장의 법칙도, 전기장의 세기 및 자기유도의적당한 함수(라그랑주함수밀도) L을 써서 δ∫L dx dy dzdt=0인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들은 각각 물리법칙의 미분방정식 표기이며, 라그랑주의 운동방정식 및 맥스웰의 기초방정식과 등가(等價)임이 알려졌으나, 미분방정식의 경우와는 시간 ·공간의 어떤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전체로서 관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분원리 [variation principle, 變分原理]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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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3-11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의 내부 성질!
<과학은 그 책을 고전이라 한다> 책에서 절판된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를 적극 추천하더니 역시 그럴 만하네요!

북다이제스터 2018-03-11 20:07   좋아요 0 | URL
<과학은 그 책을~>이란 좋은 책이 있었네요. ㅎㅎ
목차 방금 봤는데, 읽어 본 책도 있었고 인정할 수 없는 책도 몇 권 있지만, 대부분 공감되는 책, 읽고 싶은 책들 잘 간추려 논 책입니다. ^^
 

 

 

 

 

 

 

 

 

 

 

 

 

 

드리나 강의 다리는 예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경 근처에 있다. “다리는 보스니아를 세르비아와 잇는 길을 연결하고 터키(오스만) 제국의 다른 지역들과 심지어 이스탄불까지 잇고” 있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역사를 약간이라도 안다면 소설의 다음 문장들을 이해하는데 수월하다.

 

 

"드리나 강변의 왼쪽에는 기독교도 아이들이 태어났으며, 강의 오른쪽에는 태어나서 전혀 세례를 받지 않은 이슬람 아이들이 살았다."

 

"무장한 호위병을 거느린 예니체리 행렬이 동부 마을에서 아좌미-오글린으로 선발한 일정수의 기독교 아이들을 데리고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10살에서 15살 사이 건강하고 영리하며 용모가 수려한 남자 아이들은 혈세였다." 

 

“19세기 초 세르비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경에 위치한 이 마을은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일과 항상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먼 데서 생긴 사소한 일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속되면서 세르비아에서의 폭동은 보스니아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특히 경계선에서 불과 도보로 한 시간이면 도작하는 이 마을의 생활에는 더욱 세찬 파도가 밀어닥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리나 강의 다리>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지역의 간략한 역사는 이렇다.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지역’은 7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대거 이주했고, 슬라브계 크로아티아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9~10세기경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으로 여겨지며, 1377년 보스니아 왕국이 건국되었다.

 

15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은 보스니아를 정복했고 이 지역에 많은 무슬림을 이주시켰다. 이 시기 보스니아 거주 세르비아인 중 일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9세기 중반까지 보스니아는 오스만 통치를 받았다. 한편 ‘세르비아 지역’은 1371년 세르비아 공국이 창건된 후 1389년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사실상 동맹국에 가까운 관계였다. 세르비아 공국은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두 강국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하다 결국 1459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고, 4백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다.

 

19세기부터 세르비아의 민족운동이 격렬해지면서 1817년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반면 보스니아는 1878년 베를린 회의 결정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양해로 보스니아를 합병하자 세르비아가 격렬히 반발했다. 결국 1914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가 세르비아계 테러 조직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차 세계대전 후 1918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지역’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연합 왕국이 되었고, 이후 유고슬라비아로 개칭된다. 하지만 민족적, 종교적으로 상이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결속력이 떨어졌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계가 떨어져 나가 세계대전의 전쟁터가 되었다. [<발칸의 역사>, <동유럽사>, 나무위키 참고]

 

 

 

 

 

 

 

 

 

 

 

 

 

 

 

 

 

 

정말 복잡하고 파란만장한 역사다. 소설은 오스만 제국 통치 시절인 1516년에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드리나 강의 다리가 폭파되는 1914년까지 대략 4백년 기간이 이어진다. 사실 역사라는 물줄기로는 시대의 큰 흐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굴곡진 역사를 몸으로 직접 겪은 기록되지 않은 많은 민초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했다. “1878년까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처형당한 사람들 머리가 말뚝에 꽂혀 드리나 강 다리 여기저기 매달리거나 내둘렸으며, 이후 큰 사건이나 역사적인 변화가 있을 경우 성명서나 공고문들이 다리에 나붙었다. 특히 혼란스런 시절에는 그런 일들이 매일 벌어질 정도로 빈번했다.” “인간 사회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연히 세워진 건축은 있을 수 없다. (드리나 강의 다리처럼) 모든 위대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건축물의 기원과 생명은 그것이 세워진 장소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듯 그 안에 다양하고 신비스러운 역사를 안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을 사람들 삶과 드리나 강 다리는 함께 수백 년 동안 이어오는 긴밀한 연대가 있다. 마을 사람들과 다리의 운명은 어찌나 서로 얽혀 있던지 따로 생각할 수도 분리해서 말할 수도 없다.”

 

 

드리니 강의 다리 주변 마을 사람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통치를 시작하면서 근대화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부자연스러운 근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갖가지 법령과 규정, 명령은 사람, 가축, 사물 할 것 없이 온갖 형태의 생활을 간섭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도시 외형은 물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풍속과 습관을 뜯어고치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평화롭게 그리고 그다지 얘기도 없이, 완력이나 도발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의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들이 시작한 모든 일들은 장난 같고 심지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황무지를 측량했고 숲에 나무를 심었으며 변소와 하수구를 검사했고 말과 소들의 이빨을 들여다보았으며 무게와 상태를 물었고 사람들이 질병이 있는지 과수원 규모와 어떤 과일이 있는지 양이나 가축 종류에는 무엇이 있는지 조사했다(그들은 마치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 주민들 눈에는 그들이 하는 이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 없고 비현실적이며 소용없는 짓으로 여겨졌다). 1년이 지난 후 그토록 어리석어 보이던 이런 일들의 참 의미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었다. 각 지역의 행정관청은 삼림보호법, 발진티푸스 예방법, 과일 판매법 그리고 가축 반출의 허가 등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매일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거나 개인 자유를 구속하는 임무들이 생길 때면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가 감소되고 의무가 증가되는 것을 느꼈지만 생활은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이방인들이 한 가지 일에 무작정 정력을 쏟아 그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방인들은 집을 짓고 또 땅을 파고 세우고 메우고 시설을 꾸몄다가는 다시 고치고 하는지 또 왜 그들은 자연력의 작용을 예측해서 그것을 피하고 극복하려는 영원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 한 명도 없었다.” “가구 수를 세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수를 세었는데, 이런 조사는 나중 세금을 매기거나 남자들을 강제노동이나 군대, 혹은 양쪽 모두 써먹기 위함이었다.” “훌륭한 통치 체계를 갖춘 새로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터키(오스만) 세력들이 횡포를 저지르고 약탈을 하거나 비합리적으로 수탈해갔던 강압적인 식으로가 아닌 고통 없는 방법으로 백성들의 세금과 공과금을 떼어가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방법은 같은 돈을 아니, 좀더 많은 돈을 거둬들이면서도 훨씬 더 신속했고 확실했다.”

 

 

“이제껏 보지도 못했던 많은 양의 돈들이 마치 신선한 피처럼 공공연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금화, 은화, 지폐 등을 적어도 눈요기만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곤경은 단지 일시적이고 그래서 참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전에도 물론 돈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다. 하지만 부자는 흔치 않았고 구렁이가 몸을 감추듯 돈을 감추고 살았으며 권력이나 자기 방어라는 형태로만 자신들의 우월성을 나타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부는 향락과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형태로 공공연하게 표출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의 환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감추던 향락을 이제부터는 돈으로 살 수 있고 드러내놓고 즐길 수가 있었다. 이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더욱 돋웠고 향락을 찾는 사람의 수를 늘렸다. 이제껏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거나 전혀 만족을 얻지 못하던 여러 가지 정욕과 식욕, 기타 욕구가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추구되었다.”

 

 

“철도 등 다양한 공사가 시작되면서 시장에 큰 돈이 풀리자 물건 값과 생활필수품 가격이 뛰었다. 돈벌이가 있고 품삯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제 필요한 것보다 언제나 적어도 20% 정도는 부족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더욱 고되게 하고 점점 미치게 만드는 인위적인 장난이었다. 이방인들이 가져다 준 풍족한 이윤과 안락한 생활에는 동시에 대가가 있었고 또 아무도 그 법칙을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어서 누구도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어마어마하고 불가사의한 조작의 단계라는 것이 점점 더 뚜렸해 졌다.” “새로운 철도로 사람이 얼마나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어디를 가는지 어떤 일로 가는지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속도가 언제나 이로운 것이 아니다.” “어느 정부가 자기들의 시민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붙일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그것이 반대로 진행된다던가 혹은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껑충 뛰어오른 물가는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었고 오히려 계속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해 세르비아 은행과 이슬람 은행 두 곳이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약을 먹듯이 어음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손쉽게 빚을 지게 되었다. 벌어들이는 돈보다 계획 없이 써대는 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더 수월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물가가 더 올라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물건들이 더욱 늘어났다. 장사는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점점 더 값싼 것만 찾게 되었다. 물건을 많이 사고는 갚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유일하게 확실하고 훌륭한 사업은 군대나 정부 기관에 물건을 대는 것이었지만 그 일을 누구나 따낼 수도 없었다. 국세와 지방세는 점점 더 늘어났고 종류도 많아졌다. 세금을 걷는 태도도 갈수록 깐깐해졌다. 주식으로 생기는 이익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넘어갔고 손해는 방방곡곡으로 번져서 영세 상인들에게서 소매업자, 소비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모든 인간 세대는 문명에 대한 자신들만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문명이란 장소와 보는 시각에 따라 항상 불타고 그을리고 또 사라지고 하는 법이다.”

 

 

저자 이보 안드리치는 이 소설로 196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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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체코 출신 저자 카렐 차페크는 서문에서 자신 책을 “인간 문명 멸망을 다룬 ‘유토피아’적 소설”이라고 소개한다. 인류 멸망 과정을 디스토피아로 그린 소설과 영화를 그동안 다수 봤지만, 오히려 때로는 저자 표현이 더 타당할 수도 있겠다. 소설 배경은 1930년대로 추정된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타나마사라는 작은 섬에서 네덜란드 상선의 반 토흐 선장이 놀라운 도롱뇽 무리를 우연히 발견한다. 물속에서는 헤엄을 치고 해저와 육지에서는 똑바로 걸어 다니며, 키가 열 살 꼬마 정도 되고, 손도 있는 도롱뇽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학습 능력까지 갖춰 도구를 사용하고 인간 언어를 말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능력은, 소설 초반 가장 중요한 복선인데, 기하급수로 번식하고 비버처럼 수중 댐과 방파제 등을 건설할 수 있단 점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도롱뇽이 똑똑하고 착한 동물인 줄로만 알았다. 자의식이 없고 독립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반 토흐 선장은 도롱뇽을 돈벌이로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대형 사업을 구상한다. 선장은 사업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서 회사 스무 개쯤과 카르텔을 경영하는 주식회사 MEAS의 본디 회장을 찾아가 자신이 발견한 도롱뇽 이야기를 털어놓고 진주조개잡이 사업의 동업을 제안한다. 똑똑하지만 독립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도롱뇽들 덕분에 전 세계 바다에 진주조개 씨가 마를 정도로 그들 사업은 쉽게 번창했다. 그즈음 “태평양 각지에서 도롱뇽을 닮은 전대미문의 동물이 발견됐다는 보고서가 전문 학술지나 일간지에 점점 더 많이 실리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이러한 도롱뇽에 ‘안드리아스 스케우크제리’라는 학명을 붙이고 ‘앤드루 슈크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발견된 도롱뇽들은 동물원이나 서커스단에 팔려가 신기한 볼거리가 되었고 심한 학대를 받았다.



진주조개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본디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도롱뇽들을 진주조개 채집 이외 좀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다른 사업을 도입하기로 한다. 이미 도롱뇽 숫자는 6백만 마리에 달했고 도롱뇽 한 쌍이 매년 어림잡아 새끼 백 마리를 낳는다고 볼 때, 내년에는 3억 마리의 도롱뇽을 부릴 수 있다. 그리고 10년이 채 되기 전, 이 숫자는 말 그대로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것이다. 본디 회장은 회사 이사회를 열어 설득한다. “도롱뇽 한 마리마다 소정의 경제적 가치가, 즉 우리가 활용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노동 가치가 있습니다. 도롱뇽들의 타고난 본능과 탁월한 기술 적응력을 볼 때, 도롱뇽들은 특히 댐이나 제방, 방파제 건설, 항구나 운하 깊이 파기 등에 특히 적합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해안선 확보 및 조절, 대륙 확장 등도 가능하겠죠. 따라서 적절히 훈련받고 자격 요건을 갖춘 도롱뇽들을 건설업체에 외부 용역으로 빌려주는 ‘도롱뇽 신디케이트’ 신규 사업을 제안합니다.”



본디 회장은 덧붙인다. “신디케이트는 도롱뇽들을 비용 대비 최대 효율로 양식하고 활용하는 작업에 매진할 것입니다. 도롱뇽뿐 아니라 도롱뇽이 필요로 하는 모든 도구와 자재, 식량을 함께 제공하게 됩니다. 독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훗날 도롱뇽들을 판매하려고 시도할 그 어떤 경쟁자와 비교하더라도 압도적인 우위를 선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사회 회의가 끝난 후 어떤 사외이사가 본디 회장에게 묻는다. “그나저나 도롱뇽을 한 마리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본디 씨? 전 솔직히 도롱뇽이 뭔지 잘 모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본디 회장이 답한다. “저도 전혀 모릅니다. 도롱뇽이 뭔지 제가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본디 회장은 도롱뇽이 뭔지 관심 없었지만, 전 세계에서 도롱뇽이 점차 많이 출몰하자 학술연구가 진행됐다. 연구 중 “도롱뇽들이 오랫동안 미지의 존재로 남아 있다가 왜 이제 와서 태평양 열대 지역 전역에서 떼를 지어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게다가 도롱뇽들은 최근 들어 비정상적인 속도로 증식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애초 도롱뇽들은 외부 접근이 극히 어려운 호주 해상 작은 섬에 격리되어 방해받지 않고 살고 있었으며, 작은 섬이라서 먹이가 그리 많지 않아 크게 번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나타나 도롱뇽 전부를 학살하고 단 한 쌍만 배에 선적했는데, 육지로 운반 도중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근처에서 도롱뇽 한 쌍이 바다로 탈출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생물학적으로 가장 우호적인 조건에, 무한한 식량을 보장하는 환경에 떨어졌다는 얘기다. 그런 환경변화가 도롱뇽에게 강력한 ‘진화’의 추동력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롱뇽은 무한한 먹성으로 ‘진화’한다.” “자연이 이 멋진 계획을 세워 둔 것은 아닌지! 깊디깊게, 높디높게 진화하도록! 얼마나 높은 곳에 도달할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대부분 사람은 도롱뇽들의 의식이 얼마나 빨리 진화할 수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소설에서도 우리 현실의 피에르 조세프 프르동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칼 폴라니처럼 인류를 걱정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한 철학자가 있었다. 소설 속 철학자는 자신의 논리적인 예견을 담은 책자를 발간한다. “인류의 비극이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내게 행복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데려와 달라. 아니면 존재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 국가를 하나라도 찾아 달라. 인간에게 과거에나 지금에나 행복의 능력이 있었던가? 분명히 개별 인간에게는 있다.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인류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국가니, 신분이니, 계급이니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결국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서로를 밀치고 앞을 가로막지 않고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동질적인 사회만이 행복한 사회라는 법칙을 위반해 버렸다. 인종과 국가, 계층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간극이 이처럼 넓고도 깊은 지경에 도달한 지금, 일종의 인류를 창조하고자 하는 이 불행한 역사적 노력이 마침내 확실하고도 비극적인 실패를 맞았다는 사실을 더는 묵시할 수 없다.”
















“그래서 자연이 직접 나서서 세상에 도롱뇽 자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도롱뇽들은 단일하고 거대한 동질적 전체로서 존재를 과시한다. 주인도 하인도 없고, 자유민이나 농노도 없고, 부자도 빈자도 없다. 그들은 서로 간의 불평등에 시달리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행복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날, 사실 앞으로 언제든, 별 어려움 없이 인류가 실패한 과업을 이룩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전 세계에 걸친 공동 사회, 보편적 도롱뇽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 오늘날 대략 우리 인구의 10배에 달하는 도롱뇽들이 전 지구에 걸쳐 살아가고 있다. 역사적 논리는 물론 생물학적 필연이 예속된 도롱뇽들의 해방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동질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단결할 수밖에 없다. 도롱뇽들은 그들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가 차이를 창출하고 또 차이를 견뎌 내는 파괴적 이중성을 그들에게 주입할 테니까. 오로지 하나의 민족과 하나의 규준만이 있을 뿐이다. 도롱뇽의 세계는 우리 세계보다 훨씬 더 나은, 더 완벽한 세계가 될 것이다. 유일하게 ‘행복한 신세계’가 될 것이다.” 철학자의 책자는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었고, 도롱뇽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다.



많은 사람이 철학자의 책자를 읽은 후 여러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도롱뇽들을 없애야 한다. 이미 그들은 너무 많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도롱뇽 숫자를 줄이면 무수한 인간 산업 분야에 심각한 경제 침체가 닥칠 것이라고 반대하는 의견들도 만만치 않았다. “농업마저도 도롱뇽 사료에 쓰이는 옥수수, 감자를 비롯한 여타 곡식들 엄청난 주문량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도롱뇽 숫자를 조금이라도 줄이면 식량 시장의 심각한 퇴보를 초래할 테고, 농부들은 몰락 일보 직전으로 내몰릴 것이다.” 많은 사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상당 기간 도롱뇽들은 인간에게 항의 시위나 복수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롱뇽들은 진화하여 ‘자기방어’ 의식이 생겼다. 그들의 반란과 역공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미국 루이지애나를 시작으로 전 세계 곳곳에 지진이 나며, 소해협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5분의 1이 해수면 아래로 침강하는 거대한 지질학적 대재앙이 발생했다. 해안이 폭발해 갈라지고 그 틈새로 바닷물이 밀려들어 왔다. 인간이 수중 건축에 사용하라고 도롱뇽들에게 맡긴 고성능 폭발물로 지진을 일으킨 것이다. 곧 우두머리 도롱뇽이 사람들에게 성명을 발표한다. “우리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요, 우리 해안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 물과 해안, 모래톱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대륙들을 철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 모래톱을 건설할 겁니다. 여러분의 세계를 철거하는 일을 우리와 손잡고 해나갑시다. 감사합니다.” 인간은 12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소용없었다. 대부분 대륙은 물에 잠겼고 인간은 물속에서 살 수 없다. 책은 한 노신사 말로 끝을 맺는다. “그저 아이들이 우리를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




저자 말처럼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현실’이다.” “나는 도롱뇽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봤다. 이것은 실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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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21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페크의 소설, 정말 대단한 작품입니다. 작가가 체코에서 태어나지 않고, 미국이나 인지도 높은 유럽 국가에 태어났으면 세기적인 작가로 평가받았을 겁니다. 카프카와 쿤데라의 인지도가 넘사벽급이라서 카렐 차페크의 명성이 가려지는 편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2-2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체코 작가 중 카프카와 쿤데라 작품은 아직 전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차페크는 정말 재담과 치기가 뛰어난 작가란 건 분명합니다. ^^

cyrus 2016-12-21 21:43   좋아요 0 | URL
저도 쿤데라의 소설은 안 읽어봤어요. ^^

yureka01 2016-12-23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도 행복한 성탄절 맞나 시길 바랍니다`~^^..

북프리쿠키 2016-12-23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고
뜻깊은 성탄절 되시길 바랄께요^^;

북다이제스터 2016-12-25 17:33   좋아요 0 | URL
저 서재의 달인 아닌데요. ㅎㅎ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6-12-25 17:58   좋아요 0 | URL
앗 죄송합니다. 착각했습니다ㅎㅎ^^;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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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스토리는 정말 식상하다.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데몰리션 맨>, <아일랜드>, <가타카>, <이퀄리브리엄>에서 이미 친숙한 주제와 소재다. 하지만 이 책이 1932년에 훨씬 먼저 출간되었다는 걸 알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책은 앞서 말한 그 모든 영화들의 모티브다. 


소설 리뷰는 내겐 정말 낯설다. 경험이 없다. 줄거리와 결론을 말해도 될지 몹시 조심스럽다. 난 결론이 어떤지 전혀 모르고 읽어 매우 재미있었다. 굳이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미래 혹은 현재의 회의론적 디스토피아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전체주의 대량생산 체제의 자본주의 폐단을 염려하고 있다. 우리 세상은 과연 전체주의인가? 대량생산 자본주의인가? 혹은 모두 해당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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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11-23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이 책 읽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이 소설을 읽으셨군요ㅎ 저도 이미 영화에서 많이 접한 주제와 소재라 조금 식상했어요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