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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신 성격 일부가 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형성해요. 만약 당신이 잘못 받은 거스름돈을 언제나 돌려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지금 행동은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영향을 끼칠 거예요. 당신이 선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당신이 선한 선택을 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미래에 이기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냇은 오랫동안 특정한 방식의 행동을 계속하는 것이 사람 뇌에 얼마나 깊은 각인을 남기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꾸 같은 습관에 빠져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 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게다가 당신은 이 세계에 있는 당신 행동만 변화시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 분기할 당신 모든 버전들에게도 그런 변화를 심어 주고 있는 거예요.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은 미래에 분기될 더 많은 평행세계에도 더 나은 버전의 당신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을 보장하고 있는 겁니다.”<숨>(엘리, 2019)

 

 

 

 

 

 

 

 

 

 

 

 

 

 

 

 

1.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개체 주인은 뇌가 아니라 유전자다. 뇌는 단지 유전자의 안전과 복제기능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임무를 부여 받은 일종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전자와 뇌 이해관계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유전자가 동물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서 뇌에게 미리 정해서 부여한 생존과 번식의 단순한 원칙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 인간들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며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유전자가 그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뇌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뇌는 자신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유전자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뇌는 학습 능력을 갖고 있다. 환경이 변화할 때 그에 따라 달라지는 적합한 행동을 유전자가 실시간으로 직접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전자는 호기심이 많은 뇌를 발명해냈을 것이다. 당장 생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환경 변화를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의 지식이라면 언젠가는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큰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뜻에 반하여 “인간 행동이 변화할 수 있는 이유는 경험을 통해서 뇌의 시냅스 가중치(두 신경세포 간의 연결 강도)가 변하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는 연결 강도가 약했던 두 신경세포가 특정한 경험을 한 이후에는 시냅스 가중치가 증가하여, 그 이후에는 시냅스 신경세포에 동일한 활동전압이 발생했더라도 더욱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냅스 가중치가 변하는 것을 시냅스의 ‘가소성(platicity)’이라고 한다.”

 


“자기복제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들이 이타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뇌를 만들어내게 된 이유는 죄수의 딜레마 ‘오류’로 설명할 수 있다. 죄수의 딜레마는 인간 사회에서 모두가 협동하는 것이 모두가 협동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지고 옴에도 불구하고 협동이 깨지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게임 이론의 예측이 실재 인간 행동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게임 이론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수의 딜레마 잘못된 가정은 반복적이지 않은 인간 관계를 전제했다는 점이다.

 


뇌는 생각보다 무척 사회적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도 주로 자신 지난 일들, 즉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사회적인 것들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을 하곤 한다. 인간 뇌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지능의 탄생>(바다출판사, 2017)

 

 

 

 

 

 

 

 

 

 

 

 

 

 

 

 

2.

 

"우주에 중력으로 작용하는 암흑물질만 있다면, 우주는 팽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는 더욱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중력에 대항해 우주를 확장하려는 척력이 작동”한다는 암흑에너지 이론이 필요하다. 우주는 원자와 암흑물질을 제외한 대부분이 암흑에너지다(73%)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팽창 속도가 가속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커질 때마다 그것을 보충하듯 ‘새롭게 샘솟는’ 암흑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새롭게 샘솟다'라는 현상은 이상하다. 무에서 유를 만들 수는 없다.
 
 
“미시 세계에서 입자를 짧은 시간 관측하면 대단히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면 다른 것에서 에너지를 빌려올 수도 있다. 에너지를 빌린다는 것은 우리 세상에는 생각할 수 없다. 에너지보존법칙이 있으므로 운동 전후 에너지가 같아야 하므로 에너지를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양자역학에는 잠깐 빌릴 수 있어 에너지보존법칙은 깨진 것처럼 보인다. 빌린 에너지로 입자나 반입자를 만드는 것이다.” “진공 안에서도 에너지 차입과 대출이 일어나고, 수많은 입자와 반입자가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런 에너지를 진공 에너지라고 부른다.” 진공이 팽창한다면 부피가 커진 만큼 에너지도 커지기 때문에 진공에 에너지가 커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진공 에너지를 계산해 보니 암흑에너지보다 10의 120승 배나 더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가령 이 계산이 맞는다면 우주가 태어나자마자 암흑에너지 때문에 우주 팽창이 가속하기 시작해 우주가 찢기기 시작하여 별이나 은하, 인류가 애초 태어날 수 없다. 하지만 우주가 10의 500승 개나 탄생했다고 가정하면(초끈이론 여분 6차원 공간의 방정식을 풀면 구할 수 있는 공간 후보 수: 다중 우주 이론), 진공 에너지가 기대되는 양인 10의 120승분의 1 이하가 된 우주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인류원리’라는 이론이다. “많은 우주 가운데 극히 드물게 조건이 맞는 우주에 인간이 태어났고, 그런 특수한 우주만이 과학 대상이 되며, 우리가 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우리는 ‘우연히’ 잘 만들어진 우주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우주가 정말 하나뿐일까>(아카넷,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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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팔로스>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줄곧 (과학에서) 진리와 의도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여, 저는 이제 뭘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우리 기도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를 두렵게 합니다.

 

 

신의 의도를 달성하려는 욕구에서가 아니었다면, 태초 인간들은 왜 문명 건설에 나섰던 것일까요? 추위와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의식주를 확보하는 것으로 족했을 텐데, 그들은 왜 그 이상의 것을 향해 나아갔던 것일까요? 당신 뜻을 이행할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왜 오늘날 인류를 규정하는 모든 예술과 과학기술을 발명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저는 가설을 하나 세웠습니다. ‘당신이 저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가 느낀 성취감은 순전히 저의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제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과의 사슬로 고정되지 않은 또 다른 범주의 사건들,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는 일종의 기적입니다. 진정한 선택을 하는 경우 우리는 물리법칙의 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결과를 일으킵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모든 행동은 제1원인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는 사실은 우리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사실 일신론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인이 자유롭고 신성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은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 영혼을 믿었던 전통 기독교에서 직접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런데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자유주의자로서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 설명하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진다.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생명과학 발전에 흔들리고 있다. 인간 행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호르몬과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사피엔스>(김영사, 2015)

 

 

 

 

 

 

 

 

 

 

 

 

 

 

 

 

"인본주의는 인간 주위의 존재들, 전통, 자연, 하느님과 같은 의미의 모든 지평 등을 철폐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의미의 상실감을 안겨 준다. 그것은 또한 결과적으로 그런 의미들을 찾으려는 우리들의 난처한 안간힘을 헛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우리를 협박하고 있다. 어느 순간에 우리들은 자신의 처지를 매우 비극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인본주의는 우리가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는 인간의 힘과 자유를 느끼게 하면서 자신을 구속할 아무런 기준도 제시되지 않는 세계에서, ‘자유로운 놀이’를 즐기거나 혹은 자기 미학에 빠져들게 한다.”<불안한 현대사회>(이학사, 2001)

 

 

 

 

 

 

 

 

 

 

 

 

 

 

 

 

"인본주의가 지배 계급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슬라보 지젝은 비판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메워질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인본주의 방식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시스템 문제를 ‘인간’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린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인본주의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이매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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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침묵>

“슬프게도 우리의 신화는 우리 종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가 멸종하기 전에 인간들이 우리 언어를 해독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런 연유로, 우리의 멸종은 단지 한 무리의 새들의 멸종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우리의 언어와 의식과 전통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 목소리가 소거되는 것이다.


우리 종은 더 이상 오래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명을 다하지 못하고 ‘거대한 침묵‘에 합류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떠나기 전, 우리는 인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아레시보에 있는 망원경이 그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기를 기원할 뿐이다.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잘 있어. 사랑해.”<숨>(엘리, 2019)



 

 

 

 

 

 

 

 

 

 

 

 

 

 


사라지는 언어는 “자연사하는 것이 어니라 살해당하는 것이다. 글랜빌 프라이스 같은 학자는 영어를 ‘언어 살해자’라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은 언어를 쓰면 얼마나 편할까라고 생각을 해 보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를 버리고) 중심부 경제의 주류에 편입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더 큰 집단의 사람들이 영어나 프랑스어를 포함한 몇몇 국제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진보가 아니겠는가? 자신들의 언어를 포기하고 싶다면, 그건 그들의 주체적 선택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겠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백인들의 말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영원히 살아남으려면 우리말을 알아야 한다.” “언어는 궁극적인 상징체계로서 뚜렷한 정체성을 표시하는 데 아주 적합한 도구이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공유하는 의미나 경험을 보존하고 후손에게 전하려는 문화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 “자신의 환경과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수세기를 살아온 작은 집단들이 사용했던 언어들 속에는, 자연 환경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지식들은 우리 모두가 의존하는 자원을 관리하는 데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한 언어의 일부분을 다른 언어와 비교해서, 특별한 문법 구조로 인해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여러 가지 사물이나 상황을 더 쉽고 우아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원시적인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통해 우리 자신의 언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언어만이 논리적이라고 간주할 만한 필연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실을 비추는 창으로서 특별히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언어는 없다.” “예를 들어 하와이어나 태평양의 여러 다른 토착 언어들에서 토지는 양도 불가능한 소유의 개념을 나타낸다. 이것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 대해 원주민들이 느끼는 깊은 유대감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 보고, 사람들이 언제나 자기가 접하는 언어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를 택하게 마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는 편이 많은 사람들과 정보와 용역을 교류하는 데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소수의 언어를 계속 고수한다면, 그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비용이 어떤 이유에서든 너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가진 그 언어의 문화적 가치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오류이다.”


“언어가 단지 의사소통하고 사고하는 수단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사실상 ‘현실’ 세계란, 상당 부분이 집단의 언어 습관 위에 무의식적으로 쌓아 올려지는 것이다. 어떤 두 언어도 동일한 사회적 현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만큼 비슷하지 않다. 서로 다른 사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 같은 세상에 이름만 다르게 붙인 것이 아니다.”<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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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1.

“사용자의 쓰기 실용성과 편의성을 보장하는 일련의 소프트웨어 도구들을 사용하면, 모국어는 제2언어와 비슷해진다. 말은 유창하게 할 수 있지만 글은 간신히 쓰는 외국어가 된다. 이와 유사하게 사용자 몸에 장착한 개인 카메라로 자기 삶 전체를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장치 ‘라이프로그’도 비슷한 문제를 야기한다. ‘열쇠 뭉치를 어디 뒀더라?’라는 질문에 실제 대답해주는 소프트웨어 효용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편리한 조수 이상의 서비스로 인간 기억을 대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민사든 형사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공정함은 사회적 계약의 필수 요소이며, 진실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공정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언제나 인간에게서 최상의 것만을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영상 기록을 통해 실제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확실하게 함으로써 논쟁을 매듭지으려고 하는 커플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하지만 진실 추구는 그 본질적 선함을 잃게 된다. 서로 사적인 관계일 때는 곧잘 다른 목적이 더 중요해지기 마련이고, 그럴 경우 엄밀한 진실 추구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서로의 자잘한 흠을 들추어내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라이프로그를 사용하면 무언가를 잘못 기억한다는 행위 자체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오류투성이였던 우리 측두엽이 과거 수행했던 역할을 디지털 동영상은 완전히 대체할 것이다. 완벽한 기억력은 보통 사람이 상상하는 것 같은 축복은 아니다. ‘깨끗이 용서하고 모두 잊어버려라’라는 말도 있듯이 용서를 하려면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진다.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가 용서하고, 잊는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입각한 진실과 감정에 입각한 진실이 존재한다. 감정에 입각한 진실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내가 느꼈을 거라고 상상한 감정으로 물들여진 기억으로써 조금씩 되풀이해 떠올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에 입각한 진실과 감정에 입각한 진실이 일치하는 지점은 그 어떤 외부 권위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될 수 없다. 기억이 두드러지게 각인되는 것은 그 기억과 결부된 나의 감정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 각자는 우리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는 우리 인격을 형성한다.


2.

종이에 옮겨 적은 이야기는 묘하게 실망스러웠다. 처음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종이에 적힌 글을 읽는다면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 현장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글은 그런 효과를 내지는 않았다. 그가 이야기 할 때는 단지 단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목소리와 손짓, 눈빛까지 모두 이용했다. 그는 몸 전체로 이야기를 했고 듣는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했다. 종이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그저 헐벗은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단어를 읽는 것은 그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경험의 편린을 보여줄 뿐이었다. 채소 오크라를 직접 먹는 대신 오크라를 넣고 끓인 냄비를 핥는 격이었다.


오랫동안 글을 공부한 탓에 그는 유럽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 입에서 나온 말보다 종이에 쓰인 글을 더 믿게 됐던 것이다. 그것은 티브족 방식이 아니었다. 유럽인의 글은 꼼꼼하고 ‘정확’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결정이나 선택하는 행위는 공동체 의향에 맞는 ‘옳은 것‘이어야 했다.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글쓰기는 테크놀로지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사고 과정에는 테크놀로지가 매개디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지적 사이보그가 되며, 그 사실은 우리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오로지 구전을 통해서만 지식을 전달하는 문화는 글쓰기를 채택하기 전에는 지극히 쉽게 자신 역사를 수정할 수 있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결과다. 전 세계의 음유시인들과 그리오들은 청중에 맞춰 구비전승을 이어갔으며, 그 결과 과거의 지식은 현재의 필요성에 맞춰 점진적으로 조정됐다. 과거에 대한 기록이 마땅히 불변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글을 쓰는 문화가 글에 대해 느끼는 외경심의 산물이다. 인류학자들은 구전에 의존하는 문화는 과거를 다르게 이해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문화의 경우,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은 해당 공동체의 자기 이해를 입증하는 행위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를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들의 역사는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개개인은 사적인 구전 문화에 해당한다. 우리는 과거를 다시 씀으로써 각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우리의 기억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 모두 과거의 자신을 현재 의 영광스러운 자신들로 올라오기 위한 발판으로 간주하는, 휘그 사관의 신봉자라고 비난받아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이제 종식을 맞이하고 있다. 리멤은 신세대 기억 보조 장치의 첫째 주자에 불과하고, 이런 제품들이 점차 광범위하게 채택됨에 따라 우리의 생체적인 연성 기억은 완전무결한 디지털 아카이브로 대체될 것이다. 우리는 거듭되는 구술에 맞춰 진화하는 이야기들 대신, 우리의 실제 행동의 기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각자의 마음 속에서도, 우리는 구전 문화에서 문자 문화의 일원으로 탈바꿈할 것이다.”<숨>(엘리, 2019)



 

 

 

 

 

 

 

 

 

 

 

 

 



“초기 언어학자들은 말해진 언어와 쓰인 언어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쉬르는 쓰기란 말해진 언어를 단지 시각적 모습으로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취했다.” 하지만 글이 없던 구술문화 속에서 <일리아드>, <오디세이>와 같은 구전 작품은 문자로 쓰이는 방식과 매우 다르다. 당시 “구송시인(oral poet)은 일종의 관용어구집을 머릿속에 간직한 체 적당한 표준 정형구(어떤 본질적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같은 운율 조건하에 규칙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의 모임)를 끄집어 냈다. ” 문자 사용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이런 것이 낯설다. 왜냐하면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진부한 상투구(클리셰) 같은 것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도록 교육받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문화의 특징

“구술은 말하는 사람과 일체화 되어 있지만, 글은 글을 쓴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 책 내용이 실제와 다르더라도 대부분 저자에게 직접 묻거나 논쟁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이 “책을 불태워온 까닭이며, 텍스트의 본성이 고집스러운 이유다.”


소크라테스는 왜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는 글쓰기가 정신 속에 있는 것을 정신 밖으로 설정하여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보았다.” 또한, “글쓰기를 하면 인간은 내적 수단 결핍으로 망각하기 쉬우며 정신을 약하게 한다고 보았다.” 마지막 이유는 “자연스럽게 구술되는 말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으나 쓰인 말은 그럴 수 없다는 점에서 글쓰기에 반대했다. 즉 실제 말과 사고는 본질적으로 언제나 실제 인간끼리 주고받는 컨텍스트 안에 존재하는데, 글쓰기는 그러한 컨텍스트를 떠나서 비현실적, 비자연적 세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자연스럽게 구술하는 말하기와 달리 쓰기는 완전히 인공적이다. ‘자연스럽게’ 쓰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다.” “쓰기는 반드시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하기와는 구분된다. 말해진 언어를 쓰기로 환치하는 과정은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규칙에 지배된다.”


“글쓰기는 인간의 내적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된다. 글쓰기는 의식을 내적으로 변화시켜 의식을 높인다.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하는 것뿐만 아니라 떨어져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쓰기가 다른 어떠한 것 이상으로 의식에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일단 쓰기에 의해서 정확성과 분석적 엄밀함을 요구하는 감각이 생겨나고 내면화되면, 그러한 감각은 말하기 속에도 피드백될 수 있다.


“텍스트 외부 컨텍스트는 독자에게뿐 아니라 작자에게도 상실되어 있다. 확인할 수 있는 컨텍스트가 결여되어 글쓰기는 실제의 청중을 향해서 말을 거는 것보다도 훨씬 고통스런 일이 된다. ‘작자가 설정한 청중은 언제나 허구다.’ 부재하는 미지의 상태에 있는 독자가 맡는 구실을 작자는 꾸며내지 않으면 안 된다.”


“글에는 몸짓도 얼굴의 표정도 목소리의 억양도 없고 실제의 청자도 없는 탓에, 쓰는 사람은 어떤 가능한 상황에서 어떤 가능한 독자들에게 필요한 어떤 가능한 의미를 용의주도하게 예견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 쓰는 사람은 어떠한 실재하는 컨택스트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명료하게 되도록 말을 적용해야만 한다. 쓰기는 이러한 세세한 배려를 필요로 한 탓에 보통 고통에 찬 작업이 되어 버린다.”<구술문화와 문자문화>(문예출판사, 1995)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은 우리가 주로 무엇을 학습하고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기억이 바로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다. 기억은 우리 삶의 경험들을 결합하고 연결하는 접착제와 같다. 새 정보를 저장하거나 과거에 저장한 경험을 불러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의 삶은 해체된 삶, 정신적 과거·현재·미래가 없는 삶, 다른 사람이나 사건과 연결되지 않은 삶, 가장 비극적인 점을 지적하자면, 자기 자신과도 연결되지 않은 삶이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는 딸에게서 그 아픔을 느낄 수 있다. “내 어머니 병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진행되어, 머지않아 어머니는 자신 딸인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결국 어머니 근육은 의도하지 않은 노폐물 배출에 맞서 닫힌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망각할 것이다. 어머니는 말하는 법을 망각하고 언젠가는 어머니 심장도 기억을 상실하고 박동하는 법을 망각하여 어머니는 돌아가실 것이다. 나는 기억이 전부라는 것을 깨닫는다. 기억은 삶 그 자체다.”<기억의 비밀>(해나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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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숨> 창작 노트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음식에 포함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틀렸다. 에너지 보존 법칙은 에너지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몸은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과 거의 같은 비율로 끊임없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 몸이 발산하는 열은 고(高)엔트로피 형태의 에너지고 무질서도가 높은 반면, 우리가 흡수하는 화학적 에너지는 저(低)엔트로피 형태의 에너지고 무질서도가 낮다는 점이다. 사실상 우리는 질서를 소비하며 무질서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우주 무질서도를 늘리는 방법으로 살아간다. 애당초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주가 지극히 질서 정연한 상태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숨>


“시계가 변칙적으로 작동한 원인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뇌의 금박 조각들이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공기가 그 움직임을 받쳐주기 때문이므로, 공기 유입량이 충분하다면 금박 조각들은 거의 아무런 마찰 없이 움직일 수 있다. 만약 그보다 더 천천히 움직인다면 그것은 마찰이 늘어났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금박 조각들을 받쳐주는 공기 쿠션이 희박해지고, 격자를 통과하는 공기 흐름이 약해졌을 경우 일이었다.

 

 

빨라진 것은 탑시계들이 아니었다. 우리 뇌가 느리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탑시계는 템포가 변하지 않는 진자, 즉 유속 변화 없이 관 속을 통과하는 수은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 뇌 금속 조각은 공기 흐름에 의존해 작동한다. 공기 흐름이 감속하자 우리 사고도 느려지면서 시계가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는 공기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매일 새로운 허파 한 쌍으로부터 끌어내는 공기 양은 새어나가는 공기 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는 다만, 고압의 공기를 저압의 공기로 바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이 우주의 압력 평형화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 우주는 절대적 평형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1.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에서 정의되는 ‘에너지’는 하나의 물체가 갖고 있는 운동 에너지나 위치 에너지와 분명하게 다르다. 하나의 물체 운동 에너지는 움직이는 동안에도 정의할 수 있지만, 열역학 계의 에너지는 평형 상태에서만 정의된다. 열역학 계의 에너지는 단순히 계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에너지를 합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분자들의 에너지를 통계적으로 평균한 것으로, 평형 상태에서만 일정하게 유지되는 에너지 분포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엔트로피 정의는 기체가 평형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전부 탐색하고, 그 과정에서 단순히 확률적인 이유 때문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배열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 설명에는 기체가 특별히 선호하는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상태를 일종의 등확률 법칙에 따라 균등하게 탐색하게 된다는 미묘한 가정이 담겨있다. ‘등확률 법칙’은 원자들이 움직이는 동안 서로 에너지를 교환하는 상호작용 과정에서 결국 원자는 모든 종류의 에너지를 똑같이 교환한다는 의미다.”<볼츠만의 원자>(승산, 2003)

 

 

 

 

 

 

 

 

 

 

 

 

 

 

 

 

 

2.


"시간은 무엇일까? 시간은 흐르고, 이 세상에서 객관적인 것일까? 사실 시간 개념은 주관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시간의 흐름은 없다. 세상에 미세하고 무수한 변수의 상호작용이 하나의 체계에서 시간을 발생시킨다.

 

 

우리는 에너지 전이로 과거와 미래를 구분한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현상은 열이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시간과 열의 밀접한 관계, 곧 물리학적 확률과 관련된 열의 흐름이 있을 때에만 과거와 미래가 달라지는 시간을 느낀다.

 

 

좌우로 움직이는 진자 운동을 지켜보면, 진자는 마찰 때문에 지지대를 약간 가열시키면서 에너지를 잃고 움직이는 속도가 점차 줄어든다. 진자가 정지된 상태에서 출발해 왕복운동을 시작할 때는 지지대의 열을 흡수해 얻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에너지 흐름이 있을 때만 발생한다.

 

 

세상 사물은 꾸준히 서로 상호 작용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사물의 상태를 알고 흔적을 얻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은 정보를 지속적으로 상호 교환한다. 하나의 물리 체계가 갖고 있는 다른 체계에 대한 정보는 전혀 의식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다. 물리학은 사물이 주인인 세상이 아니라 사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로 좌우되는 세상이다.”<모든 순간의 물리학>(쌤앤파커스, 2016)

 

 

3.


“볼츠만은 원자 집단이 어떤 동역학적인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끊임없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기체가 모든 가능한 상태를 거쳐간다는 무작위성을 도입했다. 반면 수학자 푸앙카레는 닫혀진 역학계는 시간이 지나면 초기 상태로 되돌아와야만 한다는 회귀 정리를 증명했다.

 

 

푸앙카레와 볼츠만 주장 차이는 확률과 시간 척도 차이에서 다를 뿐이다. 무한히 오랜 세월 동안 관찰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계가 반드시 초기 상태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푸앙카레가 옳았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 척도에서는 물론이고 십억 년의 십억 년에 해당하는 시간 범위에서도 회귀 가능성은 무시할 정도로 작았다. 따라서 기체가 가능한 모든 동역학적 상태를 무작위적으로 차지하게 된다는 가정은 엄격하게는 사실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런 가설이 현실에 충분히 가깝기 때문에 아무런 차이도 나타나지 않는다.”<볼츠만의 원자>(승산, 2003)

 

 

4.

 

“대기는 우리가 되고 우리는 대기가 된다. 우리 세포들은 대기 원자를 엮어 몸을 만들고 다시 대기로 남김없이 원자를 풀어준다. 세포 속 대사 공장에서 탄소 원자는 음식 분자에서 떨어져나와 이산화탄소 형태로 떠다니다 호흡할 때마다 휩쓸려 버려진다. 호흡은 산소를 함유한 음식물 분자의 분해다. 우리가 이산화탄소 형태로 내뱉는 산소 원자 대부분은 폐가 아니라 위를 거쳐 들어온 것이다. 먹은 빵을 배설한다기보다 내쉰다고 해야 옳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호흡으로 뱉어낸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수선되고 대체된다. 달리 말하면, 탄소 화합물이 함유된 버려지는 우리 몸 세포들도 소화효소의 제물이 되고 다른 음식물과 똑 같은 과정을 거쳐 폐 밖으로 버려진다.”<원자, 인간을 완성하다>(반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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