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 시민들 모임에서 내려진 결정은 개인적 검토를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개인 권리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다. 사회적으로 종속된 사람들은 어쨌든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전적 공화주의 전통이 찬양하는 고대 시민 자유는 우리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유 개념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고대 자유는 곧 도시 통치에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고대 자유는 의회에 출석하고, 토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에 대한 판을 내리고, 어느 한 쪽 편을 들면서 투표할 특권과 의무로 이뤄져 있었다. 아울러 행정관으로 봉사하거나 필요한 경우에 배심원으로 일할 가능성도 고대 자유에 속했다. 고대 자유는 정치 과정에 대한 무관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적 일이 가장 중요했다."<개인의 탄생>
"자유, 즉 리베르타스(libertas)는 먼 고대에 생긴 낱말이며, 자유를 지키고 실현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정치철학을 처음 시도할 때부터 주요한 목표였다. 서구 정치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문헌들은 특히 폭정의 충동과 주장을 어떻게 제약하느냐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폭정 유혹에서 벗어나는 핵심 방안으로 덕성 함양과 자치를 꼽았다. 특히 그리스인은 자치가 개인 차원에서부터 정치제 차원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했고, 어느 차원에서든 절제, 지혜, 중용, 정의 같은 덕목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증진할 경우에만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자치라는 덕목이 시민들 영혼을 다스릴 경우에만 도시 자치가 가능하고, 시민권 자체를 법과 관습을 통해 덕성을 몸에 익히는 일종의 지속적인 습관들이기로 이해하는 도시에서만 개인들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 철학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덕성 교육을 폭정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 자유를 보호하는 주된 방안으로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해도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근대의 현저한 특징은 이 오래된 정치관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합의는 효력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 뿌리는 사회 병리의 원천 – 즉 분쟁 근원이자 개인 자유를 제한하는 장애물 -으로 치부되기에 이른 다양한 인간학적 가정과 사회 규범을 뒤집으려는 노력에 있었다. 자유주의 토대를 놓은 사상가들의 주요 목표는 국내 평화를 위해 비합리적이라고 결론 내린 종교와 사회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안정과 번영을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개인 양심과 행동 자유를 증진할 것으로 그들은 내다보았다.”<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그리스의 실천철학은 도덕이 아닌 윤리 형태를 띠었다. 도덕이 마땅히 따라야 할 초월적인 규준을 상정하는 사유라면, 윤리는 현실적인 인간들의 좋은 관계 맺음을 추구하는 사유다. 전자는 스토아철학, 기독교를 거쳐 칸트 등에 의해 대변되고, 후자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등에 의해 대변된다.
이렇듯 소크라테스 사유는 ‘좋음과 나쁨’을 사유하는 윤리학이지 ‘옳음과 그름’을 사유하는 도덕이 아니었다. 비록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가 그리 명확하게 구분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좁은 의미에서 옳음과 그름, 선과 악, 의무 같은 가치들은 기독교가 도입한 가치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무엇인가가가 좋기 때문에 옳은 것이지 옳기 때문에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좋지만 그르다든가 나쁜지만 옳다는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에게 지는 것, 쾌락의 유혹에 빠져 좋음과 나쁨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의지 문제보다는 무지의 문제로 본다. 나쁜 것을 올바로 인식하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덕과 지혜를 일치시킨다. 덕=지혜가 소크라테스 윤리학의 근간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모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한다는 소크라테스 생각은 ‘의지박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알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너무 단순화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으나, 달리 보면 ‘안다’는 말에 일상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를 넣어서 사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그런 인간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세계철학사 1>
현대 자유주의의 공공철학에 내포된 원천은 바로 좋음(the good)보다 옳음(the right)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다. 즉 자유주의 정치 이론의 중심은 서로 다른 시민이 좋은 삶을 규정하는 도덕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에 대해 정부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발상이다.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기에 정부는 좋은 삶의 특정한 형태를 법률로 단정해선 안 된다. 그 대신 정부는 각 개인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존중하고 각자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틀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특정한 목적보다 공정한 정차를 중요하게 여기기에 이것이 일러주는 공적 삶을 ‘절차적 공화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관용을 강조하고 개인 권리를 존중하는 사상적 전통, 즉 존 로크와 임마뉴엘 칸트에서부터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에 이르는 사상적 전통을 뜻한다. 우리가 하는 토론이나 논쟁 대부분은 이 범위 안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이런 자유주의를 고취한 자발주의적 자유관은 해방의 전망, 즉 권력이 집중된 조건에서도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체성의 약속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P. 265.
1940년대 초부터 대법원은 오늘날 익숙하게 보이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개인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또 좋은 삶을 규정하는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역할이었다. 1947년에 처음으로 대법원은 정부가 종교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대법원은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기대서 이 중립성을 정당화했다. 판결문에서 “존중할 가치가 있는 종교적 믿음은 신자들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선택의 결과물이다”라고 밝혔다. 같은 기간에 법원은 자치보다 지기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에서 언론의 자유로 보호받을 수 있는 영역을 넓혔다. 예컨대 “자기표현의 선택권이 보호를 정당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련의 판결에서 대법원은 자율성과 선택의 자유라는 근거를 내세워 정부가 피임과 낙태 문제와 관련된 도덕적 사항을 법률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며 사생활 권리를 강력하게 보호했다.
좋음보다 옮음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 버전은 헌법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뉴딜 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부상한 복지국가라는 개념을 정당화하는 데서도 자유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뜻 봐서는 자유주의가 어떻게 그런 역할 할 수 있었을지 분명하지 않다. 복지국가의 시장경제 개입은 중립성을 지키려는 시도와 상반되는 듯 보일 수 있다. 게다가 모든 시민에게 특정 재화를 공적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상호 의무와 공유된 시민의식이라는 강력한 윤리, 즉 고도로 발달한 연대감과 공동 목적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pp. 267-268.
루스벨트 관점에서 복지국가 관념을 정당화하는 것은 강력한 공동체적 의무감아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라는 발상이었다. 즉 개개인이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면 반드시 물질적 전제조건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P. 270. 존슨은 1964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하면서 경제적 안정이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젠제조건이라는 루스벨트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굶주린 사람, 일자리가 없는 사람,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사람, 결핍에 굴복당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온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개인이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자유주의적 개혁 사업을 옹호했다. pp. 273-274.
자유주의 버전은 1970년대에 온전한 철학적 진술을 확보했다. 특히 존 롤스의 <정의론>이 가장 대표적이다. 롤스는 20세기 대부분 기간에 영미 철학을 지배했던 공리주의적 가정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특정한 개인적 권리는 워낙 중요해 사회 구성원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나 다수의 의지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정의에 따라 확보된 권리는 정치적 흥정이나 사회적 이익이라는 계산에 의해 좌우될 수 없다”라고 했다.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바람직한 덕목을 함양하려고 노력하거나 시민에게 특정 목적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바라봤다. 정의로운 사회는 오히려 상반되는 여러 가지 목적 사이에서 중립적 권리 체계를 제공하며 사람들은 그 체계 안에서 타인의 유사한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자신이 가진 견해를 추구할 수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것은 좋음보다 옳음을 우선시하는 주장이자, 절차적 공화주의의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주장이다.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한다는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바로 자발주의적 자유관이다. 롤스가 설명했듯이 사람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며 저마다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므로 목적 중립적 권리 체계가 필요하다. 정부가 시민의 바람직한 덕목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시민의 도덕적 성격을 형성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하는 개인 능력을 존중하지 않는 의미다. 자발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언론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권리를 보장하는 이유는 각 권리가 보호하는 활동이 특별히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 신념과 견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부가 제각기 다른 목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의 밑바탕에 해방적 전망을 전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대해 롤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덕적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목적을 가진 주체이며, 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자유롭고 평등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기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자기 의지대로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선호한다.” 옮음이 좋음보다 우선하듯이 자아는 자의 목적보다 우선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가진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자기 목표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존중하겠다고 동의할 수 있는 권리다. “자아는 자아가 확인하는 목적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리 지배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가능성 가운데서 선택된 것일 뿐이다.” pp. 276-278.
한편 공화주의 이론은 자유가 시민의 자치(self-governing)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는 발상을 중심에 두고 있다. 즉 공동선(common good)에 대해 동료 시민과 함께 깊이 생각하고 또 정치 공동체 운명을 만들어나가는 데 힘을 보탠다는 뜻이다. 어떤 개인이 공동선을 깊이 생각할 수 있으려면 자기 목적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 권리를 존중하는 데 필요한 능력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적인 일에 대한 지식, 공동체 소속감, 전체를 생각하는 관심, 위태로운 운명의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유대감 등이다. 따라서 어떤 시민이 자치에 참여하려면 특정한 인격적 특성이나 시민적 소양(시민적 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공화주의 정치가 시민들이 옹호하는 가치관과 목적에 대해 중립적일 수 없다는 뜻이다. 공화주의적 자유관은 자유주의적 자유관과 달리 자치에 필요한 소양과 덕목을 시민에게 적극적으로 심어주는 형성적 정치를 요구한다. pp. 29-31. 자유에는 자치가 필요하고 거꾸로 자치는 시민적 덕목에 의존한다는 발상이 공화주의 이론의 핵심이었다. p. 41.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