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 정치학자 클로드 르포르는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구분했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하이데거식 관념을 다분히 연상시키는 르포르 분류는 근대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력적인 실마리를 준다. 그가 정치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주어진 현실이 세계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현실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처리하는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행위를 정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생각을 따를 때, 이미 주어진 세계에서 단절된 세계 바깥 혹은 너머란 것을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가정에 기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세계의 각 부분들이 각자 자신 이해를 대표하거나 그러한 이해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분쟁을 조절하는 일 정도에 그칠 것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이르게 될 결론은 간단하다. 정치의 유일하고 정당한 장소는 대표/대의 장소인 의회라는 것이다.

 

 

좌파정치가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라는 유혹에 빠져든 이유도 역시 이런 것에 있을 것이다. 의회주의적 백치가 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를 믿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달린 것은 아니다. 또 의회 바깥의 진정한 운동, 즉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의회로 들어갈 것이냐라는 것도 아니다. 의회주의는 의회라는 정치적 물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 혹은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일부 사회과학자들이 1987년 체제라 부르기도 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 무대에서, 좌파정치는 진보정당 – 노동조합의 양날개 체제로 그리고 그 뒤에는 진보정당 – 시민사회의 결합이라는 해법을 제시하며 대의민주주의 이데올로기적 환상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정치가 그런 것이라면 ‘정치적인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를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따라서 그것은 지금 우리가 전부라고 알고 있는 세계가 열리고 또 닫히는 계기에 주목한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과 그것에 속한 각 부분들 간 관계로서 상상되는 세계가 아닌 세계의 가능성/불가능성이란 계기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이란 현실 세계의 배치를 전체적으로 전환하는 행위를 조직하고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에 해당되는 정치 용어는 혁명일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지난 수십 년간 혁명은 보편주의 열망을 헛되이 좇으며 결국에는 전체주의적 수용소군도와 비인도주의적 테러를 초래할 뿐인 나쁜 행위로 취급받아왔다. 그러므로 혁명이란 용어를 얼마간 유보한다면 ‘정치적인 것’이란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원리와 규칙을 새롭게 창안하는 실천으로서의 정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근대 정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전연 다른 전망을 낳는다.

 

 

민주주의를 말할 때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주체를 모두 마주하게 된다. 먼저 하나는 보편적인 주권적 주체로서의 인민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여러 가지 사회적 집단의 총체로서 인민일 것이다. 바로 이점이 누가 얼마나 많이 대표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할 뿐, 그 현실을 창설하는 행위와 인물을 고려에 넣지 않는다. 결국 민주주의는 보편적 주체만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로장발롱이 ‘투표의 사법적 원리와 동일시의 사회학적 원인 사이의 긴장’이라고 말할 때 그는 주권적인 개인들의 세계 공화국이라는 정치체와 다양한 정체성에 따라 분류되는 집단들의 총체로서 사회라는 이중적인 세계로 분열이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차이만을 대표하는 대표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를 가리키는 이름이 바로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다.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가 금지하는 것은 사회의 ‘자기-차이화’라고 부를 만한 것, 즉 주어진 사회와 그런 사회가 생겨나고 움직이는 원리를 규정했던 사회의 자기결정 사이의 미세한 차이다. 자신을 보편적 전체로서 주장하면서 사회의 꼴을 만들어내는 결정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는 다양한 대표들의 대표, 바로 대표의 보편성을 위한 자리를 제거한다. 그러한 자리가 없을 때, 실은 사회적 주체로서의 인민조차 필요 없다. 그러한 사회문제는 그것이 처해있는 사회 법률과 제도, 정책, 관행, 언어 등에 의해 촘촘히 에워싸여 있고, 그것은 어차피 우리가 헤아리기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이다. 그럴 때 정치는 수많은 싱크탱크와 법률가, 회계사, 대학교수들이나 감당해야 할 문제다. 그런 터에 사회 꼴을 결정하는 정치적인 주체로서 인민을 상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자신이 인민-시민이라는 것을 잊은 우리는 자신을 대표하지 못한 채 오직 전문가들의 지식과 주장 앞에서 눈만 끔뻑이며 그들이 내린 처방에 따라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셈할 따름이다. 아니면 그들 주장을 중계하는 인터넷 글에다 고작 저속한 욕설의 댓글이나 남길 것이다. 무어라 굳이 시위에 나설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몇 푼씩 돈을 모아 가장 똑똑한 정책 전문가들이 모인 싱크탱크에 아예 정치를 외주 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파국적 상상이 스멀스멀 우리 눈앞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말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착취를 통해 움직이는 불평등한 세계라면 우리는 그 숫자가 아무리 적더라도 기꺼이 보편적인 정의의 이름으로 현재 세계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보편적 정의는 어떤 특수한 누구의 이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2.


언제부터인가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듣는 푸념이 있다. 이른바 강남의 ‘계급투표’라는 농담 같으면서도 농담처럼 듣기에는 어려운 말이다. 아둔한 강북의 없이 사는 자들은 항상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보수 여당에 표를 몰아주는 반면, 강남의 잘 사는 이들은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훤히 꿰고 약삭빠르게 자신을 대표하는 이들을 찍는다? 하지만 조금만 따져보면 이는 문제를 잘못 짚은 것임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가진 자들은 스스로 계급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기에 강남의 계급투표라는 이야기는 옳지 않다. 강남에 사는 가진 자들은 우리, 가진 자들이란 이름으로 스스로 집단적으로 대표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한 명의 개인으로 침착하고 냉정하게 자신 이해에 따라 행동하면 그만이다. 바로 그때, 즉 오직 개인적으로 행동할 때 그들은 온전히 계급으로 행동하는 셈이다. 부르주아들이 자신 이해를 대변할 위원회와 조합을 갖고 있다고 말을, 우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계급적인 단결의 힘이 아니라 자신 이해와 일치하는 세계의 이치다. 그들은 세상의 이치에 따라 스스로 행동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가 스스로 의식할 필요 없이 그날 자신 욕구가 일러주는 대로 자발적으로 살아가면 끝이다.

 

 

반면 강북은 어떨까. 여기에서 우리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우리는 대표되어야 할 자들 스스로가 없다는 기인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대표되어야 할 자신에 관해 언제나 오인하거나 무지하다. 가진 게 없는 자들이 세상 이치에 따라 행동할 때 그들은 언제나 자신 이해에 반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세상 이치를 쫓으면 쫓을수록 자신 이해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법이다. 강남을 자본이라 부르고 강북을 노동이라고 부른다고 치자. 그렇다면 강북 노동은 자신이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늘 불투명한 주체다. 노동하는 자는 항상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눈을 통해 자신 이해를 식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악에 대하여 말한다. 실업과 빈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비참한 삶에 관하여 모두 개탄한다. 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자의 사회적 삶은 언제나 우리를 화나게 하고 눈물짓게 하고 또 미치게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왜냐면 사회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체적으로 풍부하고 생생한 노동의 삶은 가난의 시학(詩學)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정치의 연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경제란 항상 모두의 경제가 아니라 자본의 경제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상품과 화폐, 자본, 임금 등의 물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노동하는 편에서 본 자신의 경제적 이해란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자본 이해를 거쳐 번역되고 인식된 이해일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자신의 경제, 즉 노동의 경제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경제 비판’이란 이름으로만 자신 이해를 제안하고 또한 발명할 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노동은 어떻게 해야 자신을 대표하는 정치를 조직할 수 있을까.

 

 

자본 대 노동이라는 구분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폐해에 저항하고 싸우는 정치를 꿈꾸는 이들에게 항상 쩔쩔매게 만든다. 자본 대 노동이라는 ‘외적인 대립’ 관계에서 노동은 자본 외부에서 노동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본 안에서의’ 노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이 자본 언어와 눈길을 통해 자신을 재현/대표할 수밖에 없다면, 노동을 대표한다는 것은 자본이 짜놓은 틀 안에서 자신을 재현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3.


프래드릭 제임슨은 역설적인 어투로 마르크스의 <자본>이 자본이나 노동에 관한 책이 아니라 실업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본>이란 책을 어떤 책으로 읽어야 할 것이냐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본의 자기증식 결과 노동은 언제나 자신의 부정 성, 즉 상대적 과잉인구로서의 실업을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실업이라는 형태로 노동은 자신의 긍정(사용가치를 낳는 보편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자신의 부정(자신의 노동을 점차 불필요하고 과잉인 것으로 부정하는 노동)을 낳는 힘으로 부정한다. 실업은 자본주의의 부정성 그 자체다. 실업이란 자본이란 명제와 노동이라는 반명제의 종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부정성을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연유로 제임슨은 <자본>이란 바로 그런 부정성에 유의하면서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자본주의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 아마 그것이 <자본>의 결정적인 교훈이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권리는 그 권리의 소유자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권리를 가진 자가 없는 권리란 있을 수 없고, 권리를 소유하기 위해 먼저 권리를 가진 자는 자신을 소유라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권이든 시민권이든 그것은 권리를 가진 자로서 일단 먼저 자신을 소유라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곧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쟁점은 노동이란 무엇인가하는 쟁점과 같다. 노동권은 자유의 근거로서 스스로 자신 노동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를 영유할 수 있는 권리를 내세운다. 노동에 따른 결과를 개인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이다.

 

 

노동권, 즉 노동할 수 있는 권리에서 말하는 노동이란 일을 함으로써 나를 온전히 가질 수 있고 이로부터 나는 권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노동권은 단순히 취업의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권리를 가진 개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권리를 가진 개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인간 혹은 시민이 되기 위한 권리이고 당연히 정치적 권리의 바탕이 된다. 상품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권리의 기초로서 노동이며 인간 모든 활동을 망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노동이 상상하는 노동권 세계에서 실업과 비정규직이란 부조리한 일이 된다. 실업과 비정규직이 가리키는 것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는 자, 인권이나 시민권을 누릴 자격에 미달한 자라는 것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하지만 자본은 영속적인 실업과 빈곤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노동력 상품이 차지하는 몫을 줄이고 잉여가치 크기를 증대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자본에게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자본은 광범한 산업예비군, 상대적 과잉인구를 통해서만 자본은 전진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 전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상품으로서의 노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권리란 인간 또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노동권과 달리 상품으로서의 노동, 노동력 상품이라는 권리로 축소된다.

 

 

더 나아가 자본이 유기하거니 방치하는 노동, 즉 우리가 실업이라고 부르는 노동 아닌 노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더 이상 자본의 소관사항이 아니다. 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은 절대 스스로 나서지 않는다. 이때 나서는 것이 국가다. 이때 우리는 국가는 자본을 대표한다는 믿음과 달리 국가는 자본의 무능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조금 엉뚱한 생각과 마주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빈곤은 정부의 잘못이며, 국가의 일차적인 존립 근거를 안전에서 찾게 된다.

 

 

분명 자본 바깥으로 밀려난 노동을 방치하는 것은 자본에게도 불리한 일이다. 자본은 최적의 노동력이 준비되어 있기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활동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 국가다. 국가는 자본 바깥에서 자본이 가진 이해를 대표하기는커녕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함께 움직인다. 국가란 실업이 초래하는 빈곤 그리고 빈곤에서 유래한다고 사람들이 걱정하는 사회문제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받는다. 우리가 실업문제라고 부르는 것을 국가는 사회문제라고 부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다지 깊이 생각해본 적 없었을 국가의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겉보기보다는 훨씬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국가를 생각할 때 인민 혹은 시민의 주권과 국가를 떠올리고는 한다. 하지만 국가는 직접적으로 인민-시민이라는 주체와 만나지 않는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국가가 상대하는 주체란 외려 실업자다.

 

 

자본 안에서 노동은 자신을 노동으로 대표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자본 편에서 자신을 대표해야만 한다는 구조적인 왜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실업은 노동이 없는, 노동 바깥에 있는 삶을 가리킨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노동이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노동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 즉 실업이라는 지점에 설 때, 찾을 수 있다. 노동이 없는 자리에서 노동은 자신을 대표할 수 있다는, 노동은 자신 부재라는 조건에서 자신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들이 부정성의 변증법이라고 말하곤 하는 것의 탁월한 예를 찾는다면 이는 실업과 노동의 변증법이라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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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1-2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가끔은 ‘국가‘라는 시스템이 보험회사와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입자로부터 보험료를 받아, 지급요청인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는. 보험회사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대수의 법칙에 따라 많은 가입자와 소수의 청구인이 있어야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는 국가를 넘어 글로벌시장질서를 좌우하는 신자유주의시대에서 ‘노동가치설‘의 의미를 되새겨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남은 하루 잘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TV의 ‘휴먼다큐’란 희한한 장르의 볼거리는 불행을 꾸며주는 따뜻하고 심지어 서정적이기까지 한 잔재주를 부리며 불행이라는 것을 안온하고 나른한 감상 대상으로 꾸며 놓는다. 이는 그로테스크하다 못해 역하다는 기분까지 들게 한다. 비참함은 쓰라린 것, 차마 듣고 보기 어려운 것, 만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적절한 감정적 기대를 갖고 느긋이 감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가장 불쾌한 것은 불행한 이들이 자신 불행을 바로잡고자 대들거나 싸우는 것은 불행의 축에 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동적인 불행, 피해자 모습으로 나타나는 불행,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고발, 비난, 규탄, 호소, 투쟁 흔적은 말끔히 표백된 불행, 잠시의 감상적 연민을 통해 쾌적하게 소비되고 곧 휘발되어 버려야 하는 불행을 매일 한 꾸러미 씩 선물받고 태연자약 즐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전환을 통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실용적인 대안을 추구하고 그 범위 안에서 긍정적인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어떨까? 사실 이런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을 위하여 숱한 조언과 대안, 처방에 시달린다. 이를 테면 우리는 맘만 먹으면 매력적인 모습으로 외모를 바꾸고,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가장 맛난 식재료와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다.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홈쇼핑의 자동 주문 리모콘 버튼만 누르면 낙원과도 같은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하여 못할 것이 없다. 단, 돈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실은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품과 쾌락의 만신전은 휘황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일자리도 없고 호주머니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 그들이 가진 재산이라면 고작 2년 약정으로 빚을 내어 산 휴대전화 한 대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과거 프롤레타리아가 가졌을 ‘쇠사슬’ 대신 그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될 소유물, ‘증오’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을 상징화하고자 이뤄졌던 시도들, 자본가 대(代) 노동자라거나 유산계급 대 무산계급, 자본 지배 대 스스로 지배로부터 소외된 자 등으로 이어지는 변증법 대립의 사슬은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적 인간학’을 분석한 정신분석학자 뒤푸르는 계급투쟁은 없고 오직 투쟁만이 있는 세계, 즉 대개 아무런 요구 없는 무의미한 분규, 아무런 이유 없는 살인, 다양한 대상에 대한 중독 등을 파헤친다. 그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계급이 아닌 계급으로서의 젊은이들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비록 그들은 간헐적으로 일자리를 얻지만 그로부터 자신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 삶에 관한 이야기를 구성하던 과거 노동자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은 단지 하나의 집단 혹은 주체화할 수 있는 어떤 정체성도 갖지 못한 비생산적인 소비자 인구집단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사이에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고 누군가와 더불어 살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도와주는 것은 카카오톡이니 페이스북이니 트위터니 하는 소위 ‘소셜(social)’ 미디어뿐일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지닌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을 침 튀기며 칭찬하는 주장이 강조하는 ‘사회성’이란 단지 덧없는 일시적인 사교일 뿐이다. 그것은 고작 내일이면 사라질 지금의 공감, 흐릿한 감정이입을 만들고 거품처럼 꺼지고 만다.

 

 

그 사회성을 통해 조합을 만들고 협회를 창립하고 상조회를 조직하는 등과 같이 단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여기에서 단체라고 말할 때 헤겔이 말하는 ‘단체(cooperative: 협력을 통해 공동 목표를 도모하는 모임)’를 말한다. 헤겔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 효과, ‘빈곤의 과잉과 천민의 출현’이라는 부정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단체를 제시한다. 이때 단체란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상조회 같은 집단적 조직화된 형식만 가리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헤겔이 단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인류적인 토대’로서의 그것이다. 헤겔 말 의미는 단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체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계급적인 문화 혹은 ‘계급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유롭다고 말하는 세계에서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그 누구도 자신을 그러한 주체로서 체험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로 스스로를 주체화하지 못한다. 애도와 기억, 느낌 등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체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탐색하는 것이다.

 

 

우리는 핼조선이라는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그나마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최악의 세계와 최선의 세계를 변증법적인 부정의 관계 속에서 매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한 것처럼 보인다. 변증법이 긴 낮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잠 자는 변증법을 깨워야 한다.

 

 

서로를 배척하는 두 가지 시선을 조정할 수 있는 방편은 없다. 최선이거나 최악일 수밖에 없는, 서로 전연 다르게 현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통합하는 방편을 찾으려면 그것을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관점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전락한 정치를 되살려 냄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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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게 아니다. 그것에 관해 꿈을 꾸는 것이다. 행복 (주장)은 기회주의자를 위해 존재 한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영원한 투쟁의 삶, 특히 자신과 투쟁하는 삶이라 생각한다. 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진정한 주인이란 결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다.’ – 슬라보예 지젝

 

 

"조지 오웰도 행복을 원하는 것이 왜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밝혀준다.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치통 없는 세상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치통 환자와 비슷하다. 그들은 일시적이기에 소중했던 뭔가를 끝없이 영속화할 사회를 만들기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 인류는 계속 나아가야 하고, 거대한 전략이 준비되어 있지만 자세한 예언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구체적인 행복을 그려내려 분주하게 행동하는 일 즉, 미래 행복한 세계를 ‘예언’하려 하는 일이 조세와 연금, 보험, 주거, 공공교육, 가정생활이든 무엇이던 간에 글러먹은 짓이다. 미래 행복을 긍정하려는 행위는 현재를 부정해야 하는 몸짓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이라는 정신을 통해 이뤄지는 우리 시대의 부정(否定) 아닌 부정, 그것의 백치 같은 면모를 깨닫지 않는 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는 불가능하다. 오웰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는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행복은 하나의 부산물이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렇게 남아있을지 모른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인류애이다.’

 

 

오웰은 전략과 예언을 구분하며 예언은 투쟁하는 자의 몫은 아니라고 말한다. 행복은 감각적으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상태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언을 불러일으킨다. 예언을 위해 굳이 정치나 혁명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언의 사회’과학’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보험설계니 재무분석이니 하는 이름으로 온갖 변수를 고려하여 미래를 예언한다. 그들은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삶의 상태 문제로 환원한다. 의료보험은 건강이라는 행복과 죽음, 질병이라는 불행이 미래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셈하듯 말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home saccer)’라는 표현을 통해 음울한 초상, 생명이라는 생물학적 삶으로 축소된 인물은 정치철학이 그려내는 이미지 속에는 있지 않다고 표현했다. 성인 남성 암 발병률 얼마를 들먹이며 실비보험에 가입하도록 강권하는 보험 광고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예언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불안하고 초조한 낯빛으로 보험상품을 살피는 이들보다 더 호모 사케르 같은 인물이 어디 있을까

 

 

행복이 예언이라는 형식으로 미래와 관계를 맺지만 인류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류애란 이렇고 저런 것이라는 실정적(positive), 경험적, 사실적 ‘상태’로 축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복처럼 이미 알려진 구체적인 삶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외려 그런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사회적 관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회적 관계란 것은 주어진 물질적, 주관적 조건을 재료 삼아 미래를 만들어 내는 행위들과 연관된 것을 말한다.

 

 

미래는 근본적으로 예언할 수 없는 것이고 미래는 선택에 무한히 열려있다. 우리는 예언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미래를 선택하는 것은 행복한 구체적 현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에 머물 뿐이다.

 

 

그렇지만 서글프게도 우리는 구체적 현실을 지금 여기에 실현하려는 작은 실천들의 적극적인 긍정을 최선으로 여기는 세계에 살고 있다. 부정(否定)을 부정하는 일이 부정 자체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이후 세계는 초월적인 이상일 뿐이기에 현실적인 계획으로 전환시키려는 순간 무모한 전체주의 폭력에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비난에 대해서 맞서야 한다. 위대한 부정의 몸짓을 찬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부정을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책임을 회피하고 기꺼이 궂은 일을 마다치 않을 각오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졸렬한 일이다.

 

 

흔히 자본주의 이후 세계를 조직하는 정치를 사고하는 일은 금지되거나 꺼림직한 일로 간주된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런 사고와 실천을 가로막는 요인은 무엇일까. 이 책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계를 기획할 수 있는 정치가 여전히 있다는 믿음을 지속할 수 있는지 묻는다. 나아가 그것이 가능하며 또 필수적이라면, 오늘날 그 정치는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 것인지 묻는다."

 

 

 

서문을 기막히게 잘 썼다.
참 세상엔 고수가 많다.
서문만 읽어도 독서가 기대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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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4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님^-^ 연휴에도 열독하실 것 같아요. 쉬엄쉬엄 즐거운 연휴 보내시길 ㅎㅎ

북다이제스터 2020-01-24 16:14   좋아요 0 | URL
독서 이외 긴 연휴 별 할 일이없습니다. ㅎㅎ
syo 님도 즐건 설 명절 보내세요. ^^
 

 

 

 

 

 

 

 

 

 

 

 

 

 

 

 


"19세기가 막을 내릴 즈음 미국인은 도덕이 쇠퇴하고 공동체가 붕괴하고 있음을 느꼈다. 당시 대중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다윈주의였다. 그 옹호자들은 사회 진보는 적자생존을 필요로 하며 ‘시장의 자연법칙’에는 정부가 일체 간섭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런 식으로 조직된 사회에서는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고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실패할 것이며, 부적격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이 인위적 방해없이 진행되면 사회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몇몇 중요한 측면에서 이 철학은 규제 받지 않는 시장을 숭배하며 요즘 미국에서 다시 한 번 인기를 끌고 있는 자유 지상상주의자들의 선조 격에 해당한다.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면서 사회적 다윈주의 비판자들이 점차 지적으로 그리고 더 크게는 정치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이 철학적 전환이 일어난 부분적 이유는 도시 참상을 폭로한 언론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슬럼가 공동주택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한 제이콥 리스의 <나머지 절반이 살아가는법>(1890), 도시의 비참한 생활과 정치 부패를 폭로한 링컨 스테픈스의 <도시의 수치>(1904), 1904년 스탠더드 석유 회사의 횡포를 잡지 <맥클루어>에 고발한 아이다 타벨, 이민 노동자에 대한 학대를 그린 소설 <정글>(1905)의 업튼 싱클레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개별적인 학대 사례와 비참한 상황을 폭로하는 일보다는, 소규모 마을의 생활이 갖고 있던 공동체적 가치를 찾으려는 열망을 광범위하게 표출했다. 사회 변화는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전통적 관계를 산산이 부쉈다. 그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해체의 느낌을 대단히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했다. 1914년 월터 리프먼은 ‘우리 존재의 뿌리 그 자체부터 흔들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노동자와 고용주, 그 어떤 관계를 막론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인간관계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문명에 익숙해 있지 않지만, 인간적 접촉과 영원한 권위가 사라졌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꾸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너무 빨리 환경을 바꾸어놓았다.’

 

 

작가 부스 타킹턴은 19세기 말 도시화를 동반한 사회 변화를 겪기 전 고향 인디애나폴리스를 이렇게 회상했다. ‘한 세대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다. 그곳에서는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서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던 이웃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즐거운 큰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느긋하고 친절한 곳, 그래서 ‘내 집 같은’ 마을이라고 부르던 그런 곳이었다. 대단한 부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주 가난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당시 진보 시대 지식인들은 도시화, 산업화되는 미국에서 과거 밀접한 공동체적 유대의 붕괴를 비판했다. 작은 타운, 가족, 친구 연대 관계로 이루어진 탄탄한 유대는 사라지고, 인간관계가 제거된 시장을 통한 비인격적이며 희미한 유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디즈레일리가 표현 한 사람들 ‘관계는 피상적이고, 여론에 의해 부과된 제약은 취약하고, 자기 이웃과 공통의 대의는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은 당시 미국 사회 질서에 잘 들어맞았다.

 

 

당시 진보 시대 사회개혁가들은 사회적 병폐, 빈곤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원인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개인 노력을 통한 자수성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는 새롭고 더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인 환경에서는 날이 갈수록 비현실적으로 보였으며, 보다 유기체적인 사회관으로 점차 바뀌었다. 진보 시대 지식인들도 자기 이익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사람은 애정과 명성, 심지어는 이타심 등의 비물질적 가치에 의해서도 움직인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간단히 말해 이 시대는 우리 시대와 매우 비슷했다. 기술 진보와 전례 없는 경제 번영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약속은 넘치고 있지만, 보다 통합된 인간적 유대 관계에 대한 그리움도 깊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양식의 커뮤니케이션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약속하는 듯 보였지만, 사려 깊은 사람들은 혹시 그러한 공동체가 오히려 위험하거나 속빈 강정은 아닐까 우려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회적 질병으로 가득 찬 냉혹한 현실에 입각한 비관론, 그리고 바로 직전의 경제 호황이 만들어낸 낙관주의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와 기업 힘의 새로운 집중 현상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에 의문을 제기했다. 안락한 중간 계급은 사회 유대 회복이라는 보다 근본적이 요구와 현실 탈출의 매력적인 유혹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물질주의, 정치적 냉소주의, 행동보다는 물러나 구경하려는 성향이 이상주의적 개혁 운동을 좌절시키는 듯 보였다. 무엇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 연계의 오랜 끈들이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의해 닳았거나 심지어 썩고 있었다. 신중한 관찰자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길을 다시는 밟을 수 없을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을 분명히 포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기술 진보가 탄생시킨 자기만족은 불만으로 바뀌었으며, 불안과 희망의 혼합물은 시민적 창조성, 그리고 조직화된 개혁의 열정을 지폈다. 그 뒤 수십년 동안 새로운 사회 연계성을 형성하며 뻗어가는 다방면의 운동이 크게 번성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개혁의 시대를 만들어갔다.

 

 

복고적인 낭만주의자들은 작고, 단순하며, 목가적인 시대로의 회귀를 생각했지만, 상당히 실용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진보 시대 지식인들은 그러한 호소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 미덕을 높이 평가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산업 시대는 많은 결함을 안고 있지만 시민 진보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물질적 풍요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들에게는 ‘근대성의 수용 혹은 거부’가 아니라, 우리 전통의 지속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이 새로운 세계에 어떻게 우리 행동과 사고 습관을 적용시키고, 제도를 어떻게 개혁하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진보 시대 지식인의 독특한 특징은 사회적 악이 저절로 치유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태도는 무모하다는 확신이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과연 민주주의와 경제적 평등이 산업 사회에서 가능한지 알고자 했다. 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곳의 영세민 거주 지역에 에너지를 쏟았고, 도시 빈민들 속에서 같이 일했다. 새로운 성직자 세대는 설교대를 내려와 성경 말씀만이 아니라 자기 교회를 어려운 사람 편에 적극적으로 서게 함으로써 기독교를 내세가 아닌 현세에 의미를 갖도록 만들고자 했다. 여성 클럽도 점점 관심사를 문학 토론에서 사회 문제 해결과 논의로 전환시켰다.

 

 

19세기 마지막 몇 십 년 사이 다시 점화된 미국 시민 생활의 활력이 보여주는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단체 형성의 붐이며, 여러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농민공제조합, 엘크 협회, 노동자연맹, 아메리칸 레전, 보이스카웃 같은 수 많은 단체가 그 때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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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깃발에는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이상이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 민주주의자들이 의도했던 박애는 사회적 자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 깃발 위에서 혹은 그 후 철학적 논쟁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이 가치 세 개가 항상 공존하느냐는 것이다. 지난 2백 년 동안 서양 정치 논쟁 대부분은 자유와 평등의 이율배반적 관계를 중심으로 전재되었다. 즉 지나친 자유 혹은 특정 형태의 자유가 너무 지나치면 평등을 침해할 수 있다. 혹은 지나친 평등 혹은 특정 형태의 평등이 너무 지나치면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이보다는 덜 친숙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단히 중대한 문제는 세 번째 가치에 해당하는 박애와 자유, 평등의 이율배반적 관계다. 즉 지나친 박애는 자유와 평등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가?

 

 

먼저 사회적 자본과 평등 관계를 보면, 20세기 대부분 기간 사회적 자본과 경제적 평등은 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부와 소득 분배라는 측면에서 1950년대와 60대 미국은 그 이전 시대보다 더 평등했다. 당시는 사회적 연계성과 시민적 참여가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최고 수준의 평등과 최고 수준의 사회적 자본은 일치했다.

 

 

반면 20세기 말 기간은 불평등의 확대 그리고 사회적 자본의 감소 시기였다. 20세기 말이 될 때까지 미국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격차는 거의 30년 동안 계속 늘었는데, 최소한 20세기 들어 불평등이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늘어난 시기였다. 평등과 박애의 상관관계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사회적 자본은 평등을 이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적 자본은 없는 사람들의 중요한 무기였는데, 이들은 다른 형태의 자본을 갖지 못했다. ‘단결이여 영원하라’는 인종적 소수자이거나 노동계급처럼 일반적인 정치 영향력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고 전략적으로 현명한 구호다. 따라서 촘촘하게 짜인 공동체가 보다 평등한 사회적, 정치적 장치를 지탱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납득할 만하다. 반면 부와 권력의 커다란 격차는 구성원의 광범위한 참여, 그리고 넓게 공유된 공동체 통합을 훼손시킨다. 따라서 인과관계의 화살은 평등에서부터 시민 참여와 사회 자본으로 진행한다는 것 역시 타당해 보인다.

 


다른 한편, 공동체 유대에 맞서는 자유주의자 반론은 공동체가 자유를 제약하고 편협성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주장은 옳을 수 있다. 사회적 자본과 자유는 양립하기 어려울 수 있다. 1990년대의 미국은 50년대 심지어는 70년대의 미국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이었다. 그런데 관용과 다양성이 꽃을 피웠을 때, 이 현상은 사회적 자본 하락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미국인은 해가 갈수록 더 관용적이 되었지만 동시에 서로 연계와 접촉은 줄어들었다. 사회적 자본과 편협성 사이에는 일종의 철칙이 있어서, 관용적 개인주의 성장에 따른 사회적 자본 쇠퇴는 필연적 부수 현상으로 보인다. 결국에 가면 우리는 고통스럽고 자의적인 가치 선택에 직면하지 않을까? 공동체와 개인 중 어느 하나, 자유와 박애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하지만 둘 모두를 가질 수는 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까?”<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2016)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전쟁터가 ‘문화주의’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로 가득하다. 현재 흑인이 열등한 유전자를 가졌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주장은 사회에서 퇴출된 반면, 흑인이 문제가 있는 하위문화에 속해있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말은 흔하게 오간다. 우리는 생물학적 모욕에는 민감하지만 사회학적 모욕에는 둔감하다.

 

 

생물학에서 문화로 전선이 이동한 것은 단순히 의미 없는 용어 변경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실로 심오한 이동이며, 현실적인 여파는 아주 넓다. 우선 문화는 생물학보다 유연하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오늘날 문화주의자가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보다는 ‘관용’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채택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큰 동화 압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동화에 실패하면 훨씬 가혹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피부색이 짙은 사람에게 피부를 희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근거는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아프리카계나 무슬림이 서구 문화의 규범과 가치를 택하지 않는 것은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에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만 듣게 되고 잘못은 자신이 뒤집어쓰고 만다. 관용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는 세계의 문화적 갈등을 해결하고 인류를 결집하는 데는 역부족이다.”<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김영사, 2018)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곳에서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차이를 교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관용(똘레랑스)이 요구된다. 쉽게 변하거나 교정 가능한 차이는 관용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관용은 차이 문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이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게 한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대체로 개인이 선택하고 사적으로 누린다고 간주된다.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각자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다문화주의 교육은, 문화에 자유주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관용 태도가 뿌리 깊은 자유주의 사회는 문화 특수성을 넘어선 공적 유대와 공정함, 정의라는 관점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평등보다 차이를 부각하는 오늘날, 국가가 평등 보장이라는 자신 역할에 태만할수록, 국가는 점차 관용에 더 많이 호소할 것이다. 국가는 평등한 대우와 보호를 관용으로 대체하여, 시민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임무에서 벗어난다. 게다가 관용은 본질적 차이라는 담론을 순환시켜 관용 대상이 관용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순간 국가 폭력이 정당화된다.”<관용>(갈무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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