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스크바국은 외국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서구의 방문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모스크바국을 마법의 세계와 비슷한 무엇인가로 묘사했다. 기이하기도 하고, 호화롭기도 하고, 다채롭기도 하고, 그들이 그때까지 보았던 어떤 것과도 달랐으며, 아주 야만적이기도 했다. 외국의 사절들은 호화로운 복장, 특히 모피 옷, 눈에 띄는 회색 수염, 정교한 궁정 예식, 풍성한 연회 그리고 엄청난 음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모스크바국을 떨어져 있는 이상한 세계로 보았던 견해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국 러시아는 키예프 루시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모스크바국 러시아는 종교와 의식주의에 기반을 둔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외부의 어떠한 영향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으며 독선적인 태도를 취했다.



2.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말까지 남부 러시아를 지배했다. 당대에 살았던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이 세운 국가는 최대로 확대되었을 때, 서쪽으로는 다뉴브 강의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는 캅카스를 넘어서 소아시아에 이르렀다.


스키타이인들은 전형적인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황소가 끄는 텐트처럼 생긴 마차에서 생활했으며, 식량으로 삼기도 했던 말의 숫자로써 자신 재산을 셈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탁월한 경기병 부대를 구성했는데, 말의 안장을 사용했으며 활과 화살과 단검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기동력과 치고 빠지기 작전에 기반을 둔 그들의 전술은 아주 효과적이어서, 심지어 강력한 이란 계통의 적수인 페르시아인들도 자신들의 고국 영토에서 그들을 패퇴시키지 못했을 정도였다.


스키타이인들은 남부 러시아에서 강한 군사 국가를 수립했으며, 수 세기 이상 그 지역을 상당히 안정시켰다. 이 시기에 토착 문화는 계속해서 발전하면서, 새로운 접촉과 기회를 통해서 풍요로워졌다. 특히 스키타이인들의 유목민적 성격과 목축 중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흑해 북부의 스텝 지대에서는 농업이 계속해서 번성했다.


3.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는 군주가 비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탁월한 신과 세속적인 정치적 권위와 결합된 교회를 강조하는 종교의 도움을 받아서 다양한 민족들을 단일한 사회로 통합시키고, 자신 및 자신의 왕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을 얻으려고 계획한것이다. 기독교화는 비잔티움과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에 용이하기도 했다.


4.

조금도 과장 없이 러시아 목조 건축은 놀랄 만한 업적이다. 각각 약 6~7미터 길이의 나무기둥을 쌓아놓은 직사각형 꾸조물인 클렛 혹은 스럽은 고대 러시아 목조 건축의 기본이었다.


러시아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에, 비잔티움의 교회 건축 규범을 자신의 목조 건축에 적용시켰다. 교회에서 필수적인 세 부분은 다음과 같이 세워졌다. 항상 동쪽에 있는 성소는 작은 클렛으로 이루어졌다. 회중이 서 있는 교회의 중심 부분은 커다란 이중 클렛으로 건축되었는데, 하나의 클렛은 다른 클렛 꼭대기 위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쪽 편에 있는 또다른 작은 클렛은 프리트보르(pritvor), 즉 독립된 현관 입구를 이루었다. 이곳은 원래 초심자들이 본당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잠시 기다리던 곳이었다. 커다란 클렛으로 된 두 개의 경사면을 가진 높은 지붕 위에는 작은 쿠폴라(cupola)가 얹혀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이러한 단순한 고대 형태의 교회는 오래된 성상화에서 볼 수 있으며, 그중 북부 러시아에 있는 몇몇 교회 -그러나 17세기에 건축된 것들-는 우리 시대까지 전해진다.


교회 건축에서는 다양한 발전이 뒤따랐다. 특히 교회의 지붕은 점점 더 가파르게 되어, 그중의 많은 것들은 쐐기 모양과 비슷해졌다. 하나 혹은 다섯 개의 쿠폴라를 가진 교회를 건축하던 비잔티움의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석재로든지 목재로든지 간에 더 많은 쿠폴라를 선호하는 성향을 보였다. 키예프에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는 13개의 쿠폴라가 있었고, 키예프에 있는 또 다른 교회인 티테에는 25개의 쿠폴라가 있었다.


5.

프랑스는 계속해서 러시아의 적대국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는 대륙의 지배권을위한 최대 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을 패퇴시키고 약화시키기 위해서 투르크, 폴란드, 스웨덴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는 그전부터 동유럽에 있는 이들프랑스의 세 동맹국과 반복적으로 싸움을 벌여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가장 신뢰할 동맹국이었다. 이 두 나라는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러시아에게는 좀더 중요한 사실로서 투르크와 스웨덴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중 스웨덴은 30년 전쟁에 대대적으로 개입한 것을 출발점으로, 독일 지역에서 계속해서 합스부르크 가문 이익에 거스르는 행동을 해 왔다.


6.

푸시킨은 죽은 이후에, 심지어 그의 짧은 생애 동안보다 훨씬 더 독자적인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국민 시인이라는 표현은 푸시킨이 살아 있을 때 고골이 다음과 같이 이미 사용한 구절이었다. ˝푸시킨이라는 이름은 러시아 국민 시인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켜준다.……푸시킨은 러시아 정신이 명백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다.….…그의 내면에 러시아의 자연, 러시아의 영혼, 러시아의 언어, 러시아의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


1880년에 모스크바의 푸시킨기념상의 제막식에서 연설(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이 연설은 황홀감의 울부짖음˝과 마주쳤다)을 했던 도스토옙스키에게, 푸시킨은 정확히 말해서 어떤 국가의 정신이든지 표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러시아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목소리는 러시아 자체처럼, ˝유럽의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우리의 보편적이며 인간적이고 통합적인 러시아의 혼 속에서 유럽적인 권태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예언적인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주장은 완전히 발달된 푸시킨 신화가되었고, 1800년대 후반과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 아주 강력하게 발전되었다.


7.

레르몬토프는 비록 푸시킨만큼 결코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푸시킨의 그늘 속에 가려져서는 안 될 작가이다. 1814년에 태어나서 1841년에 결투를 벌이다 사망한 레르몬토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상당량의 다채로운 문학 작품을 남겨놓았다. 레르몬토프는 푸시킨과는 기질이나 관점이 아주 달랐으며, 러시아 문학계에서 대표적인 낭만주의적 천재에 가장 근접했던 ˝러시아의 바이런˝ 이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끊임없는 반항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반항은 푸시킨의 죽음과 관련하여 러시아 상류사회를 비난하는 그의 아주 멋진 시와 같은 공개적인 의사 표시와, 자신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사적인 문제 모두에서 표현되었다. 레르몬토프는 생애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장엄한 장편시인 「악마(Demon)」를 저술하거나 개작하면서, 차이와 소외의 정신을 상징하는 악마 현상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탐구했다.


나는 희망이 피어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
시선 하나로 그것을 꺾어버리는 자,
나는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 저주받는 자,
나는 내 지상의 노예들을 향한 천벌,
나는 인식과 자유의 황제,
나는 하늘의 원수, 나는 자연의 재앙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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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리더십 - 제4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혁신을 위한 리더의 조건
김진호.최용주 지음 / 북카라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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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업 엑시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개인 정보를 보유하고 있어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려는 기업에 판매한다. 액시엄은 한 사람의 개인 정보를 약 1,500개 항목별로 평생 동안 추적하면서 관리한다. 당신이 어디에 살고 직업이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몸무게, 소비 패턴, 정치 성향, 가족 건강, 휴가 계획까지 속속들이 안다.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거의 모든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약 5억 명의 개인 정보를 보유하고, 연간 50조 건의 거래 내역을 분석한다. 미국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미국 연방수사국이나 미국 국세청보다 훨씬 깊이 있게 조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9·11 테러 당시 19명의 가담자 가운데 11명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액시엄은 일단 특정한 개인의 정보를 취득하면 그 사람에게 13자릿수로 만들어진 번호를 부여한다. 이후에는 모든 정보가 이 번호로 분류·관리된다. 수집되는 정보는 나이, 주거지, 성별, 피부색, 취향, 정치 성향부터 선호하는 휴가지, 기르는 동물, 물품 구매 행태, 교육 수준, 수입, 병력病歷, 재정 상태, 가족 관계, 잡지 구독 여부 등 엄청나게 많다. 액시엄의 장점은 그들이 가진 정보가 소비자들의 오프라인 데이터라는 데 있다. 즉,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정보다.


액시엄은 사람들이 생활에서 남기는 흔적(데이터)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예를 들면 공문서 신청, 신문·잡지 정기 구독, 각종 설문 참여, SNS 활동, 신용카드는 물론이고 보통 5~6개씩 갖고 있는 고객 서비스카드 사용 내역, 부동산 담보 대출 신청, 보험 가입 등을 수집한다. 액시엄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데이터 수집 노하우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개인 정보를 엄청나게 축적해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었다.


엑시엄은 현재 4,000개 이상의 데이터 뱅크를 관리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신용카드 회사 10곳 중 7곳, 미국의 대형 백화점 10곳 중 6곳, 세계 10대 자동차 회사 중 8개 회사도 액시엄의 고객이다. 액시엄의 매출은 2010년부터 약 9억 달러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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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영웅 1인의 성공 신화


둘. 여건과 조건이 다른데 벤치마킹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


셋. 고객 불행을 기반으로 한 성공


넷. 종업원 고용을 우습게 보는 태도


다섯. 결국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배금주의

 

 

 

“카지노 기업인 해리스는 빅데이터 리더십 덕분에 위기에서 세계 최대 카지노 그룹으로 우뚝 섰다. 빅데이터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화려한 카지노 기업도 데이터 분석으로 승부를 갈랐다. 이 이야기는 어려움에 처한 기업이 데이터 분석적인 리더를 영입해 최고 성과를 거둔 사례로 유명하다. 1998년 해리스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서비스 경영을 가르치던 게리 러브먼 교수를 영입했다. 그의 분석 지향 리더십으로 해리스는 승승장구하게 됐고, 업계 라이벌인 시저스를 인수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카지노 해리스는 지역별로 산재된 자사의 카지노 시스템을 통합해 전국적으로 고객들애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데이터베이스를 고객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마케팅 정책에 적극 활용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고객을 인구 통계변수와 지출 이력을 바탕으로 무려 80개의 이질적 집단으로 구분한 뒤 각 집단의 특성에 적합하도록 차별적으로 마케팅을 했다.

 

 

가령 개개인이 잃고 따는 금액을 실시간 추적하다가 어떤 개인이 그의 인내 한계점(영어로는 ‘pain’ threshold라고 한다), 즉 총 잃은 금액이 도박을 중지하도록 만드는 액수에 가까워지게 되면 직원이 접근해 공짜 식사나 쇼 티켓을 무료로 제공해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계속 호텔에 머물도록 유도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직원들에 대한 인센티브나 성과급도 그들이 창출한 매출이 아니라 그들이 봉사했던 고객의 만족을 기반으로 산정했다. 이는 서비스에 만족했던 고객이 다음 해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한다는 데이터 분석 결과 때문이었다.

 

 

심지어 게리 러브먼 교수는 “우리 회사에서 해고되는 사유는 3가지다. 절도, 성희롱, 근거가 되는 데이터 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역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리 러브먼을 영입한 후 고객들이 카지노 해리스에서 도박에 지출한 돈은 약 40퍼센트가 증가했으며, 영업이익도 평균 27퍼센트나 늘었다. 특히 2003년에서 2006년 사이 해리스 주식 가격이 14달러에서 85달러로 약 6배나 폭등했다. 또한 2005년에는 전세계 7개국에서 51개 카지노를 운영중인 세계 최대 카지노 그룹 시저스를 인수한 후 기업명을 시저스엔터테이먼트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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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성향의 낸시 레이건은 마약 문제에 단호하게 ‘노’라고 자신 뜻을 밝히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은 그녀 아이디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마약 문제 원인은 절망적인 사회 상황이거나 동료의 적극적인 권유, 중독 등의 문제이기에 이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의 가치 시스템에서 마약은 단호하게 ‘노’라고 거부할 수 있는 개인의 자제력과 관련된 문제다. 이는 개인의 가치 문제지, 사회 변화나 마약치료센터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자제력 훈련이 결여된 사람, 즉 ‘노’라고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은 비도덕적이고, 그래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보수는 믿는다.

 

 

보수의 자제력 부족 판단은 사람의 기질 문제로 확대된다. 만약 한 개인을 가리켜 ‘그 사람은 가슴속까지 썩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 사람의 비도덕적 행동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기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안다면, 그 사람의 변하지 않는 기질이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도 안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삼진아웃’ 제도가 그렇다. 어떤 사람이 같은 법률을 반복 위반하는 일은 변할 수 없는 기질적 결함이 있으며, 장래 불법행동으로 이끌 선천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본 기질이 ‘가슴속까지 썩’었기에 변화하거나 갱생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진보는 자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감정을 이입해야 한다고 믿는다. 완전한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네가 그 사람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황금률 그 이상이다. 이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당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진보의 감정이입 원칙은, 당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더욱 강한 황금률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을 위해 하려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해주어라’는 의미다.

 

 

진보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감정이입은 인간이 선과 악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 가치를 통해 세상을 보고, 진정으로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당신과 다른 도덕 가치를 가진 모든 사람을 적이나 악마를 대하듯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사람 가치에 대한 존중과 열린 마음이다.

 

 

반면 자기중심적 감정이입을 하는 보수는 자신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만 돕는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 공동체 밖에 있다고 간주할 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 결과 많은 보수는 재난을 당한 이웃(가치를 공유하는 명확한 공동체 구성원)과 다친 외국인 노동자(가치를 공유하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람들)를 구별하여 돕거나 돕지 않는다.

 

 

진보는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을 고양시키려면 자신이 가능한 행복한 상태여야만 한다고 믿는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않는 조건에서 말이다. 타인 감정에 이입하기 위한 헌신이라는 맥락에서 자신을 가능한 행복하게 한다는 점은, 도덕적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입을 촉진하기 때문에 결코 쾌락주의라고 할 수 없다. 진보에게는 자신 행복을 배양하는 것 자체가 도덕적 목적을 갖는 반면, 보수는 행복이 절제와 힘든 노력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여긴다.

 

 

진보는 개인의 비도덕적 행동 원인이 사회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보수 관점에서 이것은 난센스일 뿐이다. 비도덕적 행동은 개인 기질 탓이지, 사회가 원인이 아니라고 보수는 본다. 보수에게는 옳고 그른 것이 명확하다. 중요한 점은 당신이 옳은 행동을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한지 여부다. 기질 문제인 것이다. 만약 극단적 보수주의자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예를 들어, 정의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보수주의 그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고 보수는 생각한다. 대신 그 개인의 광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쁜 사람이야.’ 이 말이 보수에게 유일하고 충분한 대답일 뿐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대답으로 보인다. 사회가 원인이라는 설명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도덕관


1) 자제력 있고 자립적인 사람
2) 보상과 징벌을 지지
3) 같은 가치를 공유한 시민 보호

 

 

진보주의 도덕관


1) 절대적이고 완전한 감정이입
2)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보호
3) 자신 행복의 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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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은 안녕(安寧)의 경험과 관계된다. 도덕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다른 사람의 안녕을 장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거나 안녕을 파괴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방지하는 것과 관련된다. 여기에서 '안녕(well-being)' 이라는 단어 의미를 부분적으로 소개해 보자. 다른 조건이 동등하다면, 당신은 병든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좋은 상태다. 가난함보다는 부유함이, 약함보다는 강함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자유로움이, 버려지는 것보다 보살핌 받음이, 슬픔보다는 행복함이, 결여된 것보다는 온전함이, 지저분함보다는 깨끗함이, 추함보다는 아름다움이, 어둠 속에서보다는 밝음에서 활동하는 편이, 적의에 둘러싸이거나 고립되어 사는 것보다는, 친밀한 사회적 연대감을 안고 공동체 내에서 사는 것이, 당신을 위해 훨씬 좋은 상태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안녕에 대한 경험적 형태들이다.

 

 

 

이처럼 도덕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 간에 가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단어(개념)는 고립되어 독자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단어는 개념시스템에 연관하여 정의되어야만 한다. 만약 보수주의자들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진보주의자가 이해하려 한다면, 먼저 보수주의자들의 개념시스템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익히 들어온 단어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 의미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큰 정부’는 정부 규모가 크다거나 사용하는 예산이 많다는 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의 국방 예산과 교도소 예산 증액을 지적하며 보수주의자들에게 '큰 정부' 라고 이의를 제기하면, 보수주의자들은 비웃는다. 이것은 진보주의자들이 용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여성 낙태를 '반대' 하는 것을 보고, 여성의 선택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진보주의자가 지적하고 항변하는 것도 잘못이다. 여기에서도 진보는 보수주의 사전에 들어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가 같은 사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현상을 그리고 언제나 상대방을 거의 이해자지 못하고 무시하며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설명해준다.

 

 

보수주의자에게 진보주의자 태도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비도덕적이고 어리석게 보인다. 진보는 복지와 교육을 지지하기에 어린이를 도울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도 낙태를 지지하며 태아를 살해하는 입장을 옹호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진보는 어린이 살해범과 같은 범죄자를 옹호하면서 어린이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는 어떻게 범죄자 권리를 보호하면서 피해자를 위한 감정이입을 주장할 수 있을까? 진보는 AIDS 연구와 치료를 위한 정부 예산을 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AIDS를 퍼뜨리는 자유스런 성행위를 허용하여 AIDS 확산을 조장할 수 있을까? 진보는 게이 권리를 보호하는 동성애를 허용한다. 그들은 학교에서 콘돔 공급을 지지하며 10대들의 섹스도 허용한다. 이처럼 진보는 AIDS로 이끄는 행위를 찬동하는 한편으로 AIDS 확산을 중지시키길 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보는 개발을 제한하고 일자리를 없애는 환경보호조치를 지지하면서, 어떻게 노동자를 지원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진보는 기업가를 위축시키며, 세금을 많이 발생시키는 투자를 규제하는 정부조치를 지지하면서, 어떻게 경제 성장을 지지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보수 입장에서 진보는 비도덕적이고, 비꼬였고, 잘못된 교육을 받았고, 비합리적인 그저 멍청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진보 입장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며,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반면, 보수는 인생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가정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들은 자제를 배우고 품성을 쌓아야 한다. 만약 경쟁이 제거된다면, 사람들이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제를 하지 않게 되므로, 이 세상은 경쟁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람들을 위한 모든 것이 풍족하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할 만큼 분배되어, 사람도 더 좋아지리라는 가정은 진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한 세상은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가 되는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보수는 도덕적 자제(힘)를 약화시키는 그 무엇이든 비도적으로 본다. 만약 복지가 노동에 따르는 동기를 빼앗아 간다면, 복지는 비도덕적이다. 진보주의자가 고등학생에게 콘돔을 나눠주고, 마약 사용자들에게 깨끗한 주사바늘을 나누어주는 것은 10대 임신과 AIDS 확산을 낮출 수 없다고 보수는 생각한다. 보수는 10대 섹스와 불법 마약 사용은 자제의 결여임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콘돔과 깨끗한 바늘 제공은 비도덕적이다. 도덕적으로 강한 사람이라면, 섹스와 마약에 대해 단호하게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도덕적으로 약한 사람이다. 도덕적으로 약함은 비도덕의 한 형태고, 비도덕적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

 

 

보수의 도덕적 힘(자제)은 사회계층을 반영하는 그 어떤 설명도 배제한다. 만약 도덕적인 사람이 항상 마약과 섹스에 단호하게 ‘노’라고 외치고, 이 기회의 땅에서 그들 자신을 부양한다면, 실패하는 것은 도덕적 약함이므로 비도적적인 것이다. 따라서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보수는 생각한다. 만약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나태하고, 도덕적으로도 나약한 사람이다. 만약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연 질서에서 낮은 위치에 처한 사람이고, 그러므로 도덕질서에서도 낮은 위치에 처한 사람이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가 왜 이렇게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지 연구하는 분야가 인지과학이다. 인지과학에서 가장 많이 연구하는 대상 중 하나는 상식이다. 일반적으로 상식은 무의식적인 개념적 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상식을 구성하는 요소다. 여기서 무의식이란 프로이트 학파에서 말하는 억압된 무의식이 아니라, 단순히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다. 우리 무의식 시스템은 개념적 비유와 연관되어 있다. 개념적 비유는 한 가지 경험 영역을 다른 것에 비추어 개념화하는 전통 방식이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도덕을 재정적 거래와 회계에 비추어 개념화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다면, 나는 당신에게 빚을 지게 된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호의에 보답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서 도덕을 얘기할 뿐만 아니라, 도덕에 관해 바로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보복 · 배상 · 복수, 그리고 정의 같은 개념은 전형적으로 재정적인 용어 내에서 이해된다.

 

 

사람들은 단어를 ‘단순한 단어'로 - 객관적인 실체에 붙여진 라벨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를 이용하는 방식은 우리 생각이 무엇인지 반영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알려준다. 언어와 관련된 문제들과 아이디어(가끔 비유적 아이디어)는 언어 문제에 의해 표현된다. 그렇기에 도덕적 배경 안에서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는 데는 중립적 개념이란 없고 중립적 언어도 없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몇 가지 착각을 한다.

 

 

첫째, 뉴스 보도는 개념들이 글자 그대로 뜻을 가지며, 초당파적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개념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전형적으로, 특히 도덕과 정치 영역에서는 당파적이다. 둘째, 언론의 언어 사용은 중립적이고, 임의적이고, 글자 그대로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도덕과 정치에서 그것이 진실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언어는 개념시스템에 관련된다. 셋째, 뉴스 보도는 논쟁 지향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정치적 논쟁을 도덕적 기반에서 분리해낼 수 있다는 태도다. 하지만 정치적 논쟁을 도덕적 기반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혹시 가능할지라도 매우 드문 일이다. 넷째, 언어는 중립적이라 가정하기에, 중립적인 용어로 보도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얘기를 보도하기 위한 담론의 형태와 언어 선택은 편견으로 이어진다.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중립을 지킬 수 있다 할지라도,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섯째, 언어는 중립적인 것으로 가정되기에, 단순한 언어 사용이 토론자에게 불리함을 안겨줄 수는 없다는 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도 잘못된 얘기이다.

 

 

예컨대, ‘일(work)’을 보수와 진보 입장에서 각각 보자. 보수 입장에서 봉급은 일에 대한 보상이다. 이에 따라 일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로 확장한다. ‘고용주는 정당한 권한을 갖는다. 고용인은 그 권한의 지배를 받는다. 고용주는 고용인에게 명령할 권한과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징벌 권한을 가진다. 순종은 고용의 조건이다. 고용인이 고용주에게 순종하는 것은 도덕적이다.’ 반면 일을 교환의 객체로 간주하는 진보 입장은 보수와 다르다. ‘일은 교환 가치의 객체다. 노동자는 일의 소유자다. 일의 본질과 가치는 계약에 의해 상호간 동의된다. 봉급은 교환에 관한 동의 문제이지 보상이 아니다. 적절한 보상 규정에 따라 일의 가치가 결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보수와 진보 차이는 일에 대한 개념이 중립적이지 않고 절대적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도덕은 허용된 범위 내에서 허용된 길을 따라가는 행위다. 비도덕적 행동은 허용된 범위를 벗어나, 규정된 길이나 경계를 벗어난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인가된 길에서 벗어나거나 인가된 영역을 벗어나는 행동은 단순한 비도덕적 행동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 행동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생활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일탈은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을 지배하는 목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사회기준에서 그러한 일탈은 보통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며, 보편적이고 성스러운 가치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일탈’한 사람들은 엄청난 분노를 야기할 수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도덕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협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추방되고 고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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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9-16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용어에 대해서도 의미가 이렇게나 다르니, 이들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도 당연하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9-16 19:14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지난 번 쓰신 드워킨은 진보주의 사상 틀을 갖고 주장하기에, 다른 사고방식(보수주의) 개념과 이념적 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설득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이성적, 이론적 설득 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2019-09-16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8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