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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술이 시대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말은 마르크스주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마르크스주의와 직간접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그가 속한 시대의 사회 심리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생산 관계를 대표하는 권력 관계는 법률이나 정치 제도뿐 아니라 예술, 문화와 같은 정신적 가치나 사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특히 화가와 주문자 사이 거래 관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거래 관계 속에서 시대의 경제 현실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은 화가의 세계관뿐 아니라 주문자의 세계관을 반영하기도 한다.

 

 

1.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부르주아와 민중 연합으로 구성된 시민군이 바리케이드를 넘어 왕의 군대를 향해 진군한다. 순간 자유 여신이 나타나 시민군 공격을 이끈다. 그림에는 시민군 모습이 하나하나 묘사되어 있다. 양 손에 총을 든 어린 소년 옆으로 노동자와 실크 헤트를 쓴 부르주아, 그리고 학생 모습이 보인다. 그 밖에 누더기를 걸치고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집어들고 나온 남자와 젊은이가 보인다. 주의하라.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묘사되고 있는 대상은 노동자와 거리 젊은이들이다.

 

 

들라크루아는 부르주아 계급이 즐겨 사용하던 신화적 언어를 갖고 부르주아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하려 했다. 이것이 그의 그림이 갖는 패러독스다. 1848년 자칭 시민왕 루이 필리프는 좌파를 위한다는 제스처 일환으로 이 그림을 샀지만, 단 한번도 이 그림을 공식 장소에 걸어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그림은 공개적으로 전시된 적도 없다. 이유는 자신들이 혁명의 주체라고 믿는 부르주아 계급의 예민함 때문에 쓸데없이 이들을 자극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알브레이트 뒤러 <연못 위의 집>

 

 

풍경화를 위한 전제 조건이 마련된 것은 15세기 이탈리아에 이르러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는 개인주의 의식이 발달하고, 수학과 자연과학을 토대로 원근법과 비례론 같은 새로운 예술의 표현 수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인주의 의식 발달은 화가가 자연을 신학의 도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 개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중앙원근법, 공기 및 색원근법 같은 새로운 예술 표현수단은 화가와 자연 사이의 미적 관계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근대적 풍경화는 독일 화가 알브레이트 뒤러와 함께 시작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그림의 감성적 분위기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묘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뒤러 작품에서는 동양화에서나 볼 수 있을 여백이 느껴진다. 하늘과 호수의 수면이 서로 비추고, 그 가운데 고요함이 깃들인다. 화면 앞쪽 왼편 구석의 작은 배가 동양화가 일으키는 명상 효과를 준다. 여기에는 더 이상 노동하는 농부 모습도, 개인의 감성을 간섭하는 정치 질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자유로운 시민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이 보인다.

 

 

3.


하지만 한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배경을 모두 밝혀낸다고 해서 과연 작품을 대할 때 받는 감동이 증폭되는 걸까? 아는 만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때론 아는 것이 보는 것을 방해할 때도 있는 게 아닐까?"

 

 

 

 

 

 


낭만주의자들에게 죽음은 달콤한 것이었다. 죽음은 현실에서 고뇌하는 개체들을 파괴하여 영원한 대자연의 품으로 되돌린다. 이렇게 대자연과의 신비한 합일을 의미했기에, 그들에게 죽음은 동경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인류의 죽음, 즉 파멸을 그린 그림이 유행했다. 지진과 화산, 대홍수, 페스트, 폭풍우 등 파국의 모티브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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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문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감옥이다. 네바강이 발트해와 만나는 지점에 조성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밀물 때는 수위가 높아지는데, 일부러 물에 잠기도록 만든 감방에 한 여인이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의 이름은 타라카노바(Tarakanova)로 결국 감옥 안에서 익사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타 여제의 사생아인 타라카노바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예카테리나 2세가 그녀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밀물 때면 물이 흘러드는 감옥이었는데, 그해에는 바닷물의 수위가 특히 높아져 타라카노바는 감옥 안에서 익사했다고 전해진다. 혹은 익사하기 전에 폐렴으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2.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의 러시아는 무능한 황제와 부패한 귀족들로 인해 민중의 삶은 극도로 궁핍했다. 현재 예수가 있는 황야는 당시 민중들의 삶의 터전과 닮아 있고, 남루하고 초췌한 예수의 모습은 민중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어쩌면 이 그림은 러시아 사회에 던진 마지막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현재 민중은 ‘황야의 그리스도’처럼 극단적인 가난과 굶주림에 놓여 있다는 경고, 만약 그들의 삶을 지금 돌보지 않는다면 그들을 유혹하는 세력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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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그림은 “미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인식 자체를 뒤흔든 사건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하나의 해석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원근법적 인간 사고가 여러 개의 해석도 가능하다는 다원적인 사고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원근법과 음영 등의 기법은 평면에 불과한 캔버스에 마치 입체의 조각이 새겨지거나 깊은 동공이 파인 듯한 효과를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이고 거짓일 뿐이다. 그냥 얇은 종잇장에 불과한 평면 위에 마치 현실처럼 전개되는 3차원 세계는 하지만 실재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우리가 거기서 3차원적 부피와 깊이를 느끼는 것은 우리 환상일 뿐이다. 마네는 이런 거짓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얇은 평면에는 깊이도 있을 수 없고, 조명이 들어갈 여지도 없다. <올랭피아>와 같은 작품은 마네가 온갖 야유와 욕설을 들어가면서 그렸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낯선 그림이다.

 

 

 

 

<올랭피아> 나체화 속의 꽃다발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꽃과 같은 정물화는 정식 그림보다 한 단계 낮은 부차적인 그림으로 여겨졌는데, 그런 하찮은 소재가 고대 화가들의 이상적인 그림인 누드화와 대등하게 그려져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비평가 토르는 ‘여인의 얼굴보다 꽃을 더 중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게다가 마네가 그리고자 했던 그림은 문학에 종속되지 않은 그림, 한 마디로 있는 그대로의 그림이다. 그림을 서사성에 종속시키는 것은 회화의 자율성을 해치는 요인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렸다면 그 그림은 원래 언어로 되어 있는 내용을 단지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림이라는 수단을 이용했을 뿐이다. 회화 자체 목적은 사라지고 문학에 종속된 화면만 남는다. 그림이 뭔가를 의미한다는 것은 언어적인 기능이다. 결국 미술은 문학에 종속되고, 그림 자체보다는 주제가 더 중요하게 된다. 마네는 무언가를 말하는 회화가 아닌 ‘회화의 침묵’을 원했다.

 

 

마네는 읽는 회화를 볼 수 있는 회화로 대체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처럼 그가 그린 인물의 자세는 뭔가를 의미하지 않고, 몸짓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구도는 그 어떤 스토리에 봉사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이래 회화는 실용성이나, 군주 혹은 교회에 너무 많이 봉사했다. 하지만 예술은 합리적 이론이나 앎으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그냥 뭔지 알 수 없는 황홀한 법열의 순간일 뿐이다. 예술은 오만하고 지성적인 학자가 논하는 합리적 이론의 세계, 앎의 세계가 아니다. 마네와 함께 회화는 알레고리(우화)가 되기를 그쳤다. 오랫동안 감동으로 교훈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회화 임무로 여겨졌었다. 정념은 회화의 주제만이 아니라 그 목적성 자체였다. 그림은 관객 영혼을 움직여야 하고, 감정이 생겨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벙어리처럼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 그림 앞에 섰을 때 관객들은 실망하고 분노했다. 바타이유가 보기에 이것이 ‘마네 스캔들의 진실’이었다.

 

 

 

 

 

회화에 적용된 원근법은 르네상스 시대 과학 지식이 미술에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당대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원천적으로 모든 시대 미술은 언제나 그 시대 인식론과 궤를 같이 한다.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 시 지각이기 때문이다. 미술이 인문학에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안된 원근법은 세계를 주체에서 분리시키고 대상화하는 실증적 과학 정신과 일치한다.

 

 

원근법적 사고는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장악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원근법에는 바라보는 주체와 바라보이는 대상이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설정되고, 인간은 주체, 세계는 대상으로 규정된다. 이와 같은 공간적 거리와 대상화 방식을 통해 르네상스 이후 근대까지의 서양 학문이 탄생했다. 철저한 객관성과 실증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서양 학문은 인간을 절대적 주체로 상정하고 대상을 부동의 것으로 고립, 고정시킨 후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부동의 자세로 꼼짝 않고 얼어붙어 있는 대상이 아니다. 모든 대상은 보는 사람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위치와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최근 금융 위기에서 허둥지둥 대응하는 전문가들이나 당황스럽게 사후 진단을 내리는 학자들을 보고, 정교한 경제학 논리, 더 나아가 모든 학문의 논리가 얼마나 허구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인식 대상은 생명체와 같이 매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는 사물인데, 마치 불변의 사물인양 견고하게 고정시켜 연구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 소위 모든 학문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탈근대적인 현대 사회에서 물질세계는 더 이상 원근법적 세계의 견고성을 갖지 못한다. 세계는 유동적이고, 주체인 우리 자신 자리도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유일하게 고정된 하나의 중심이 사라지고, 그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철학과 회화에서 동일하게 진행되고 있는 주체에 대한 회의, 그 출발선상에 마네가 있다. 그는 르네상스의 원근법을 해체하고 미술에 자율성을 도입함으로써 현대의 비재현적 회화의 길을 열어 주었을 뿐 아니라, 포스트 모던적 인식의 가능성도 열어주었다. 마네의 위대성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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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8-12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갈릴레오가 과학을 신학에서 독립시켰다면, 마네는 미술을 문학을 독립시켰음을 북다이제스터님 덕분에 배워갑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13 08:58   좋아요 1 | URL
네, 저는 피카소 그림의 시작이 세잔인 줄 알았는데, 마네란 걸 처음 알았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8-13 09:45   좋아요 1 | URL
세잔도 있었군요...ㅜㅜ 미술 공부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듭니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1607년 초연 당시 일종의 전위음악이었다. 아직 오페라라는 장르가 확립되기 전이라서, 악보는 ‘음악적 우화’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음악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르네상스 가곡인 마드리갈(16세기 르네상스와 초기 바로크 시대 노래로 이탈리아에서 태동하여 영국, 독일 등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17세기 오페라 아리아로 발전했다), 화려한 합창, 생기 있는 춤곡, 현악기, 리코더, 트럼펫, 트럼본, 코르넷 등 이례적인 대편성의 기악 합주… 당시에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을 모두 구사한 수준 높은 드라마였다. 결국 우리가 아는 ‘최초의 오페라’가 된 것이다.

 

 

 

유튜브 추천 음악: <Orfeo Monteverdi Savall> 호르디 사발 지휘,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 공연

 

 

 

카치니와 페리는 연극을 단순한 대사 낭송이 아닌, 시 운율에 따라서 극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으로 공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통주저음(바로크 합주곡의 기초를 담당하는 저음 파트, 쳄벌로와 첼로, 오르간과 첼로가 맡는 경우가 많다) 위에 리듬과 화음을 갖춘 단선율을 노래했는데, 이를 모노디(monody)라고 한다. <에우리디체>는 이런 모노디를 이어서 만든 노래극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성음악이 지배했지만, 가사의 명료한 전달을 중요시하는 모노디는 바로크 시대 노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카치니와 페리는 음악의 감정이론(Doctrines of Affections)을 신봉했다. 음악 힘이 사람 감정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랑과 기쁨, 분노, 증오, 공포 등 다양한 정서는 사람 몸속에 흐르는 체액의 불균형 때문에 생기는데, 음악이 체액 흐름을 자극하여 인간 정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두려움을 표현할 때는 낮은 음역에서 하강하는 선율이 주로 등장하며, 불협화음과 쉼표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기쁨을 표현할 때는 빠른 템포에 셋잇단음표와 화려한 꾸밈음을 많이 구사한다. 여기서 꼭 지켜야 할 원칙은, 노래 하나는 한가지 감정만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카치니와 페리가 실험한 이 방법은 바로크 오페라의 기본 원칙으로 발전한다.

 

 

유튜브 추천 음악: <Caccini Peri Euridice> 니콜라스 이흐텐 지휘, 스케르 무지칼 연주

 

 

 

 

<라 폴리아 변주곡>의 작곡가 코렐리는 바로크 바이올린 음악의 기초를 다진 사람으로, 비발디, 바흐의 협주곡과 소나타(sonata: 울린다(sonatre)는 말에서 유래한 기악 독주곡. 건반과 통주저음의 반주 위에서 독주 악기가 연주하는 트리오 소나타는 근대 소나타의 원형이 되었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바로크 기악곡은 춤곡에 바탕을 두고 발전했다. 조바꿈을 하지 않고 춤곡을 확대하여 작곡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모음곡’으로, 알레망드(독일 무곡), 쿠랑트(프랑스 무목), 사라반드(스페인 무곡), 지그(영국 무곡) 등 춤곡을 모아서 만든 음악 형식이다. 다른 하나는 ‘변주곡’으로, 춤곡을 주제로 제시한 뒤 리듬과 선율에 변화를 주어 재미있게 연결하는 기법이다. 코렐리의 <라폴리아 변주곡>은 바흐의 <샤콘>, 헨델의 <파실칼리아>와 함께 바로크 시대 변주곡의 대표작이다.

 

 

유튜브 추천 음악: <Corelli La Folia Bruggen> 프란스 브뤼헨 리코더 연주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보에가 사람 영혼을 빼앗아간다 하여 연주를 금지한 적도 있다. 소리를 내는 구멍이 아주 작아서 연주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소리가 또렷하고 청아해 다른 악기 소리에 묻히지 않고 잘 들릴뿐더러, 온도가 변해도 음정이 곧게 유지되어서 오케스트라가 조율할 때 오보에를 기준으로 한다. 오보에 연주자는 리드(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소리를 만들어 내는 떨림판. 갈대(reed)로 만든다) 상태를 잘 유지하기 위해 늘 칼로 리드를 다듬는 ‘목공예’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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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고작 2분 동안 짧은 시간에 8개 음표를 변화무쌍하게 활용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바흐의 천재성이 놀랍다. 건반악기 연주 기법의 한계에 도전함으로써 바흐의 건반 음악의 정점이 된 이 작품은 당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을 잘 연습한 사람은 그로부터 얼마든지 혼자서 공부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베토벤은 바흐의 이 곡을 접하고서 ‘이건 시냇물(bach)이 아니라, 바다야!’라고 찬탄했다. 쇼팽은 이 곡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제자를 가르칠 때 최고의 교본으로 활용했다. 한 음악학자는 말했다. ‘만일 큰 재앙이 일어나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된다 해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버곡집>만 남는다면 재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이 바로 이 곡 때문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유튜브 추천 음악: <Bach Well-Tempered Clavier 1 Gulda> 프리드리히 굴다 피아노 연주

 

 

바흐의 중요한 기악곡들은 대부분 쾨텐 시절(1717-1723)에 작곡했다. 쾨텐의 스물세살 젊은 영주 레오폴트 후작은 음악을 매우 사랑했고 바흐를 극진히 우대했다. 재미있는 것은, 쾨텐 궁정이 칼뱅(캘빈)파여서 복잡한 교회음악을 금지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바흐는 자신 천재성을 모두 발휘하여 세속음악 작곡에 몰두했고, 그 결과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등 위대한 기악곡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쾨텐 시절이 없었다면 바흐는 협주곡, 오르간곡 같은 종교음악만 남긴 근엄한 작곡가로 역사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유튜브 추천 음악: <Bach Violin Concerto A Minor 1st mov Chung> 정경화 바이올린 연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모임에서 마흔한살의 한 여인이 소감을 말했다.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생일 잔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태어난 게 축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가 제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오늘 참석했고, 바로 오늘 태아 시절의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살아 있고, 세상에 태어난 게 기쁩니다.’ 참석자들 모두 박수를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고, 그 여인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여인의 기나긴 수난에 경의를 표하며 바흐 협주곡의 느린 악장 <2악장 라르고 마 논 탄토>를 드리고 싶다.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목이 맨 경험이 있습니까? 제가 아는 바흐 선율 중 가장 아름답고, 그래서 목이 메이는 곡입니다.

 

 

유튜브 추천 음악: <BWV 1043 D minor 2nd mov Nishizaki Jablokov>

 

 

 

 


바흐의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 연주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루마니아 출신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는 임파선 악성 종양 때문에 서른세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50년 9월 16일 브장송에서 열린 그의 마지막 연주회는 눈물로 뒤덮였다. 병마와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예정된 쇼팽 왈츠를 다 연주하지 못한 채 쓰러져 버렸다. 안간힘을 써서 일어난 그는 다시 무대 위에 나와 작별 곡을 연주했다. 바흐의 <예수는 언제나 나의 기쁨>이었다.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의 안타까운 마지막 연주, 죽음마저 위로하는 바흐의 위대한 선율에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그의 마지막 연주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마음을 위안하며 눈물짓게 한다.

 

 

유튜브 추천 음악: <Bach Jesus Joy of Man’s Desiring Lipatti> 디누 리파티 피아노 연주

 

 


흔히 바흐의 <커피> 칸타타로 알려져 있는 ‘조용히 하세요! 잡담을 멈추세요!’(1732)는 당시 독일 곳곳에 생기기 시작한 커피하우스의 홍보 행사에서 연주되었다. 커피를 찬양하는 내용을 익살스런 스토리에 담았다.
내레이터 역의 테너가 커피하우스 손님들을 향해 ‘조용히 하세요! 잡담을 멈추세요!’ 외치며 시작한다. 커피에 미친 딸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는 실랑이를 벌인다. ‘커피를 그렇게 마셔 대면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아버지가 협박하자 딸은 굴복하는 체하지만, 결혼 계약서에 ‘커피 맘대로 마시기’라는 조항을 슬쩍 써넣는다. 화 잘 내고 투박한 성격의 아버지는 허둥대는 음악으로, 영리하고 재치 있는 딸의 음악은 상큼하고 명랑한 음악으로 표현했다.
바흐의 ‘세속 칸타타’를 듣다 보니 18세기 독일의 아득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새로 문을 연 커피하우스에 손님들이 북적인다. 사람들이 사랑하고 갈등하는 모습은 동서고금이 다 비슷해 보인다. 바흐 칸타타,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유튜브 추천 음악: <Bach Coffee Cantata Koopman> 콘 쿠프만 지휘,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연주

 

 

 


영국 극작가 존 게이는 1728년 런던에서 <거지 오페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8세기 런던의 거지와 창녀들의 삶을 익살스레 묘사한 이 작품은 영어로 되어 있고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의 전통 선율을 가져다 썼기에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게다가 정부, 귀족 사회, 결혼 제도를 풍자하는 내용이라 관객들을 아주 유쾌하게 해 주었다. <거지 오페라>는 초연된 1728년뿐 아니라, 18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이다.
당시 런던에서 유행하던 이탈리아 오페라는 귀족과 지식인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존 게이는 클래식 오페라와 대중 뮤지컬의 중간쯤 되는 이 작품으로 서민들에게 직접 다가섰고, 그것이 바로 대박의 비결이 되었다. 돈밖에 모르는 영국 지배층과 돈을 위해서 서슴없이 양심을 파는 법조인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거지 오페라>는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의 효시가 됐고, 정확히 200년을 건너뛴 1928년에 <서푼짜리 오페라>의 모태가 되었다. 게다가 <마술피리>, <후궁 탈출> 등 모차르트의 위대한 징슈필(18세기 독일어 오페라로, 구어체 대사를 구사하고 희극적 성격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에 지배적이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반발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에도 그 영향이 스며들었다.

 

 

유튜브 추천 음악: <John Gay Begger’s Opera> 제레미 발로우 지휘, 브로드사이드 밴드 연주

 

 

보통 ‘라르고’라고 알려진 노래는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 서곡에 이어 1막 첫머리에 나오는 아리아 ‘그대의 시원한 그늘’이다. 이 아리아 하나만으로도 헨델은 인류에게 큰 선물을 했지 싶다. 힘들 때, ‘그대의 시원한 그늘’은 위로를 주는 곡이다. 인생이란 기나긴 여정이 늘 아름답고 위대하지는 않지만 어느 한 순간, 한 기억만으로도 인생은 살 만한 것임을 이 아리아가 새삼 일깨워 준다.

 

 

유튜브 추천 음악: <Handel Ombra Mai Fu Bartoli>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노래

 

 

헨델은 오라토리오(‘기도 드리는 장소’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메시아>를 서른두 차례나 직접 지휘했다. 자선 연주의 수익금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이 음악은 굶주린 자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다.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꼬마들을 키웠을까!’라고 당시 한 평론가는 말했다.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 <메시아>를 지휘하던 헨델은 마지막 ‘아멘’ 코러스가 끝나자 쓰러졌다. 헨델은 부축을 받고 무대에서 내려와 바로 병상에 누웠고, 1주일 뒤 일흔네살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치 되었다.

 

 

유튜브 추천 음악: <Handel Hallelujah Choir of King’s College>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합창단

 

 

어떤 악기든 실제로 배운 사람은 그 악기 특성을 알기에 좀 더 정밀하게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해당 악기의 레퍼토리에 관해서도 일반인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다. 피아노를 전공한 친구들과 함께 피아노 연주회에 간 적이 많은데, 그 친구들은 분명히 나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을 들었을 것이다. 음악 칼럼을 쓰는 분들 중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음악을 들을 줄 알 것입니다. 시창, 청음, 연주 테크닉 등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공자의 ‘귀’를 따라갈 수는 없다.

 

 

유튜브 추천 음악: <Praetorius La Volta John Williams> 프레토리우스, <발레>와 <라 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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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미술사 -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
이진숙 지음 / 민음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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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동양인들에게는 서방이지만 서유럽인에게는 동방인 나라. 러시아 역사가 숨 막힐 듯 격변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동안, 러시아인들은 스스로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문했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러시아 문화를 ‘성(聖)과 속(俗)의 대립’이라고 요약했다. 러시아 정교 전통에 근거한 러시아는 성을, 서유럽화된 러시아는 속을 의미한다. 이 두 요소는 사상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슬라브주의)과 서유럽 전통(서구주의)의 대립과 충돌이며, 러시아 정신 세계를 이룬다.

 

 

러시아 문화 천 년은 러시아인들이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 가는 과정이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인 삶이란 ‘진실하게 사는 것 혹은 더욱 중요한 점은 러시아에서 진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지식인과 문화 예술인 모두 이 열망에 충실하게 반응했다. ‘삶과 미술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러시아 미술 자체의 내재적 속성이다. 러시아 미술 작가들이 그토록 미술에 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삶’ 자체였다.

 

 

우리가 컴퓨터 아이콘(icon)을 ‘그림’이라고 여기지 않듯이 중세 러시아 사람들도 이콘(icon)화를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 모습이 저절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을 조그만 교회와 농부 오두막집, 귀족 저택, 차르 궁전에 이르기까지 ‘크리스느이 우골’(아름다운 모서리)이라 불리는 집 안 동편에 이콘화와 촛대가 놓여 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늘 기도를 했다.

 

 

<블라드미르의 성모> 콘스탄티노플 화파, 12세기 초, 목판에 템페라, 트레타야코프 미술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은 숱하게 많지만, <블라드미르의 성모>처럼 이런 슬픔을 담은 그림은 거의 없다. 아기 예수는 이제 막 걸음마를 할 나이지만, 성모는 사랑하는 아들이 서른셋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역사가 이미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중세 예정론적 사고의 표현이다.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 노브고로트 화파, 12세기 후반, 목판에 템페라,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우리의 구세주> 안드레이 루블료프, 1410년경, 목판에 템페라,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끊임없는 전쟁과 질병, 가난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중세인에게 세상은 종말이 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심판의 날에 예수가 세상 불의를 벌하고 의인을 구할 것이라는 믿음은 세상 지배자이자 심판자로서의 예수, 분노하는 예수 상을 만들어 냈다. 예수 분노는 바로 중세 사회의 총체적 위기 징후다. 세상이 순탄해지면 예수 표정도 부드럽게 바뀐다.

 

 

<예카테리나 2세> 드미트리 레비츠키, 1783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미술관

 

 

정통성 문제를 고민한 군주들 구미에 맞는 미술 사조가 바로 고전주의다. 고전주의 주인공은 이상화된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편법으로 왕조에 오른 나폴레옹이나 예카테리나 2세는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러한 미화하는 이상화 작업은 정권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마리아 로푸히나의 초상>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키, 1797년, 캔버스에 유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루이 16세를 처형한 프랑스 혁명은 유럽 모든 군주를 긴장시켰다. 계몽주의는 가장 위험한 사상이 되었고, 정치적 배경이 삭제된 계몽주의적 인물은 ‘개인’으로 남게 되고 정치적 출구가 막힌 계몽주의는 감상주의로 변질된다. 문명 이전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성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는 루소적 인간은 자기 내면 성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 감정적 정조는 바로 감상주의다.

 


그림 속 여인 배경은 신비로운 자연이다. 이렇게 초상화 배경에 부드럽게 표현된 자연을 삽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고전주의 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브로비코프스키만의 독특한 테크닉이다. 올리브 색과 라일라 색, 진주 빛이 도는 은색은 특유의 평화롭고 섬세한, 마치 ‘탈콤한 꿈’ 같은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마치 먼 옛날부터 숲 속에 살았던 님프처럼 신비롭다.

 


약간 기댄 듯한 흐트러진 자세,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듯 직시하는 눈빛은 일반적인 고전주의 초상화와는 다르다. 작가는 그녀 내면에 깃든 본질, 즉 문명 세례를 받지 않은 ‘영원한 여성’을 우리 앞에서 조용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영원한 여성’은 19세기 러시아 귀족과 농노 대립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뒤로하고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 순수한 자연 속으로 돌아가 평온을 되찾고 있다.

 

 

<낚시꾼> 그리고리 소로카, 18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미술관

 

 

그림 <낚시꾼>은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지만, 분위기는 얼음처럼 고요하다. 소로카 세계는 햇살이 비추나 빛은 일렁이지 않고, 강물은 흐르나 물결이 없다. 고요를 넘어 질식할 것 같은 적막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유리처럼 투명하고 단단한 무언가에 갇혀 있는 폐쇄된 공간이다.

 


막막한 느낌을 소로카는 평생 느꼈을지 모른다. 소로카는 농노였고 그의 주인은 결코 그를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 1864년 소로카는 지역 농민 해방 운동에 연루되어 무거운 형벌을 받는다.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지자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림 속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단절감은 소로카가 농노제라는 비인간적인 제도 속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소령의 구혼> 파벨 페도토프, 1851년, 캔버스에 유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그림 맨 오른쪽 거만한 자세의 콧수염 난 사내가 소령이다. 그보다 한발 앞서 방으로 들어간 붉은 옷의 여인은 매파로, 늙은 남자에게 소령이 왔음을 알린다. 늙은 남자는 화면 가운데 고개를 돌리고 뛰어나가는 아가씨의 아버지다. 소령은 지금 구혼을 하러 이 집에 방문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청혼을 거부하고 뛰어나간다. 왜?

 


매파 손의 돈주머니, 그것은 이 결혼이 가난한 귀족 가문과 작위 없는 부유한 상인 가문의 결혼, 즉 당시 유행하던 거래 결혼이었다. 교육받은 미모의 아가씨는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 감상주의 소설에 나오는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다. 이 철부지 아가씨에게 다가온 사랑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건조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상황을 외면한다. 아가씨 어머니가 단호한 표정으로 딸 옷자락을 잡고 만류하는데, 그리 교양 있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발 앞에 떨어진 손수건 한 장, 이 순간에도 아가씨는 ‘낭만’을 잊지 않았다. 아가씨가 문을 쾅 닫고 제 방에 들어가 버려도 소령은 유유히 손수건을 집어 그녀에게 전하리라. 그림 속 인물들은 무엇보다 행동으로 심리를 표현하여 마치 눈앞에서 연극 한 편이 펼쳐지는 듯하다.

 


페도토프의 <소령의 구혼>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가장 보기 힘든 그림이다. 크기도 별로 크지 않은 데다 꼼꼼한 묘사를 즐기려면 그림에 바짝 붙어 봐야 하기에 관람객들에게 둘러싸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가벼운 몸싸움을 하더라도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이다. 페도토프의 인물들은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 문제 속에 빠져 있다. 그들이 모순을 의식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순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이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웃음이 생긴다. 웃고 있지만 단순히 웃을 수만 없는 것이 민중 삶이다. 민중은 행복하지 않지만, 페도토프는 그 불행 앞에서 날카롭게 웃게 한다.

 

 

<미지의 여인> 이반 크람스코이, 1883년, 캔버스에 유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그림 속 여인은 마차 위에서 관람자를 내려다본다. 그림을 어느 높이에 걸든 그녀가 내려다보기에 우리는 경외심을 갖고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차가운 표정의 여인은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전형적인 러시아 미인이다. 그녀는 경멸하는 듯 유혹하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 아름다움과 카리스마에 설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추측만 나돌았다. 그녀는 바로 톨스토이 소설 여주인공 안나 카레리나다. 안나가 브론스키와 처음 사랑을 교감할 때 검정 벨벳 드레스 차림이었다. 마차에 탄 안나는 브론스키가 기다리는 파티장으로 가는 길인지 모른다. 그 길 끝에는 지독한 운명적인 사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후의 만찬> 니콜라이 게, 1863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미술관

 

 

일반적으로 유다 행동은 ‘배신’으로 불린다. 배신이란 어느 한 편의 분명한 정당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니콜라이 게는 독특하게 ‘배신 문제’를 ‘대립과 균열 문제’로 바꿔 버린다. 게의 그림 <최후의 만찬> 속에서 유다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가 외투를 걸치는 모습은 거대한 실루엣으로 표현되어 관람자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자기 앞에 놓인 운명에 침통해하고 있다.

 


유다의 검은 그림자가 일으킨 화면 균열은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균열이라는 ‘라스콜’에서 유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불의한 현실을 단죄하고자 다시 불의를 범한다는 점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유다는 닮았다. 놀랍게도 게의 <최후의 만찬>은 지난 토스토예프스키 소설이 씌어지기 3년 전에 그려졌다.

 

 

<진리란 무엇인가?> 니콜라이 게, 1890년, 캔버스에 유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그림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기름진 풍채의 빌라도는 세속 논리를 대변하고 매마른 육체의 예수는 정신적 논리를 주장하는 모습이다.

 


진리는 현실에서 결코 단선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리에 헌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기득권 유지와 자기 헌신 사이 갈등은 당시 모든 지식인의 고민이었다. 그들은 진정 알고 싶었다. ‘진리란 무엇인가?’

 

 

<수확기> 그리고리 마소예도프, 1887년, 캔버스에 유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9세기 러시아 농노제 폐기법은 농노를 법적으로 없앴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진 못했다. 토지 가격이 너무 비싸 토지를 매입할 수 없었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개혁에 반감을 가진 지주들은 높은 소작료와 임대료를 받아 챙겼다. 러시아 농노제 폐지가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발달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가난한 민중들이 일할 곳은 없었다. 그런데 또 한편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지체한 것은 바로 농노제라는 강고한 틀이었다.

 

 

<청강생> 니콜라이 야로센코, 1883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미술관

 

 

1880년대 초기 야로센코는 좌파 진형의 진보적인 젊은 학생들을 그렸다. 열정과 패기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 헌신하는 새로운 부류의 인물을 그린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 모습을 포착하고 기록하는 것이 화가 몫이라고 생각했다.

 


<청강생>은 신선함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러시아 소설에 흔히 나오는 ‘아마빛 머리’의 소녀는 소박한 학생복을 입고 있지만, 결코 그녀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와 젊음을 억누르지 못한다. 수줍은 듯 표정에서 세상에 대한 낙관과 긍정이 담겨 있다. 무릎 위 가지런히 모든 두 손은 얼굴보다 더 크다. 두 손은 헌신과 신뢰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젊음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은 겸손과 자신이 헌신할 수 있는 열정이다. 그들은 그 손으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것이다.

 

 

<앉아 있는 악마> 미하일 브루벨, 1890년, 캔버스에 유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은 시각 예술인 미술에 어떤 문학적, 철학적, 사회적 내용도 담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러시아 화가들은 인상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상주의 형식이 아무리 새롭다 하더라도 러시아 작가들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명백했다. 러시아의 비민주적인 상황은 작가들이 그림 형식이 아닌 내용에 골몰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와 서유럽 미술의 발전 경로가 달라지는 지점은 ‘이동파’의 등장과 더불어서다. 파리 작가들이 캔버스와 화구를 들고 햇빛 찬란한 야외로 나가 인상주의자들이 되었을 때 러시아 작가들은 캔버스와 화구를 들고 민중 삶으로 들어가 이동파가 되었다. 그래서 러시아 풍경화에서는 나무와 숲 냄새 사이로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 나온다.

 


이렇듯 미하일 브루벨도 인상주의가 아닌 상징주의 작가다. 그림에서 산등성이에 앉아 서글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상념에 잠겨 있는 그림 속 아름다운 청년은 악마다. 그는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 속에서 길을 잃고 돌산 위 잠시 머물러 있다. 천사를 추방하여 악마로 만든 것은 바로 세계 모순과 부조화다. 이 악마는 순수한 악을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과 악이 대립하는 구역질 나는 현실 한계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영웅적인 반항아다.

 


악마는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 양식에서 유행했던 테마다. 19세기 말 급속한 산업화와 현대화는 무덤 속에 있던 ‘데카당스(퇴폐주의)’라는 용어를 부활시켰다. 데카당들은 기존 가치 체계를 전도시켰다. 악마는 세계 모순을 사색하고, 연약한 여인들은 남자를 서슴없이 죽이고 매혹적인 웃음을 짓는 팜므 파탈이 되었다.

 


미하일 브루벨이 형상화한 악마 얼굴은 시대를 통찰하는 영혼의 어두운 고통, 비극적 세계에 대한 가슴 아픈 연민과 반항심이 담겨 있다. 악마 발밑에 있는 꽃 더미는 값비싼 돌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처럼 투명하면서도 혼란스럽고 마법적인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리듬에는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공존한다. 작가는 칼 모양의 주걱으로 꾹꾹 누르듯이 그려서 특유의 크리스탈 결정 같은 필법을 만들어 냈다. 그가 그린 사물들은 마치 값비싼 모자이크처럼 투명하면서도 환상적인 느낌과 역동적인 리듬을 갖게 되었다.

 

 

<여동생과 함께 있는 자화상> 빅토르 보리소프무사토프, 1898년, 캔버스에 템페라와 유채, 러시아 미술관

 

 

상징주의는 비속한 현실을 넘어서는 숨겨진 세계의 비밀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보리소프무사토프 역시 미하일 부르벨처럼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울증은 예민한 예술가들이 진부하고 천박한 현실 잔혹함 앞에서 느끼는 정서 반응이다. 그는 ‘철의 시대’의 더럽고 비루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비극적인 파토스에 휩싸여 있던 브루벨 세계는 격렬한 고통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브루벨이 절망한 그곳에서 보리소프무사토프는 조용히 슬픔을 열어 보인다. 그는 여성들에게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조화에 대한 꿈’을 이루고자 했다. 잔혹한 현실은 남자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칸단스키에 따르면 물질주의 악몽이 영혼을 억압하는 현대 사회에서 모든 예술은 각각 형식이 외적으로는 다르게 보일지라도 동일 목적에 종사한다. 인간 영혼을 감동시키고 정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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