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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쓸 때는 어떤 내용을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떤 문장을 쓴다고 생각한다.

 

“내용을 쓴다고 생각하면 써야 할 글에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한 문장 한 문장, 문장이 생각을 만들어가게 한다. 첫 문장을 잘 써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 어떤 호흡으로 읽어도 리듬이 살아야 한다.

 

“호흡이 좋아야 글이 명료하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 호흡으로 글을 쓰겠지만 독자들이 모두 그 호흡으로 글을 읽어주는 것은 아니기에, 거기서 자주 오해가 생긴다. 특히 긴 문장을 쓸 때는 여러 가지 호흡으로 글을 읽어보고 낱말의 위치를 바꾸거나 조사를 바꾸어 호흡을 조정한다. 어떤 호흡으로 읽어도 명료하게 읽혀야 잘 쓴 것이다. 구두점을 잘 이용한다. 구두점은 독자를 강제로 쉬게 한다.”

 


■ 상투어구, 상투문을 피해서 글을 쓴다

 

“글을 쓴 다음, 늘 하던 소리다 싶으면 지운다. 상투어구는 생각을 안 하거나 생각을 미진하게 했다는 증거이며,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지우고 다시 쓰다 보면 생각이 변화하고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가짜 생각’과 ‘진짜 생각’이 구분된다. ‘허위의식’이라는 말은 ‘상투적으로 표현되는 의식’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 되도록 의성어, 의태어도 쓰지 않는다.

 

“가능한 의성어, 의태어를 피한다. 의성어, 의태어는 문장에 활기를 주는 듯하지만, 자주 내용의 허술함을 감추어주기에 쓰는 사람까지 속을 수 있다. ‘닭이 울었다’고 쓰면 되지 ‘닭이 꼬기오 하고 울었다’고 쓸 필요는 없다.”

 


■ 팩트 간의 관계를 강제하지 않는다.

 

“접속사 등으로 팩트를 강제로 묶으려 하면 글이 담백함을 잃는다. ‘태극기가 펄럭인다. 오늘은 3·1절이다’ 하면 상황과 인과관계가 모두 전달된다. ‘오늘은 3·1절이기 때문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같은 문장은 독자를 바보로 취급하는 셈이 된다.”

 


■ 짧은 문장이 좋은 문장인 것은 아니다.

 

“짧은 문장으로 쓰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가들이 그런 조언을 하는 것은 짧은 문장이 반드시 좋은 문장인 것이어서가 아니라, 긴 문장을 쓸 만한 내공이 없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생각을 섬세하게 드러내려면 긴 문장이 필요한데, 긴 문장을 잘 쓰려면 자꾸 써봐야 한다. 짧은 문장을 많이 쓴다고 긴 문장을 잘 쓰게 되지는 않는다. 문장을 잘 쓴다는 건 긴 문장을 명료하게 쓸 수 있다는 말과 같다.”

 


■ 형용사의 두 기능인 한정과 수식을 구분해야 한다.

 

“글을 쓸 때, 형용사를 쓰지 말라는 말이 있다. 형용사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수식, 다른 하나는 한정이다. 이 둘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수식 기능의 형용사는 줄일 수 있지만 한정 기능의 형용사를 없애면 모호한 글이 된다. 글을 단단하게 하는 것은 적절한 한정 기능의 형용사다. 표헌에 자신감이 붙게 하는 것도 한정 기능의 형용사다.”

 


■ 속내가 보이는 글은 쓰지 않는다.

 

“글을 쓸 때, 자기 자신을 잘 고백하고 자기 안에 있는 깊은 속내를 드러내면 좋은 글이 된다. 그런데 속을 드러내는 건 좋지만 속이 보이게 쓰면 안 된다. 속을 드러내는 것과 속 보이게 쓰는 건 다르다. 글로 이익을 취하려 하거나 사태를 왜곡하면 속 보이는 글이 나온다. 속 보이는 글은 사실 자기 속내를 감추는 글이다.”

 


■ 한국어에 대한 속설을 믿지 않는다.

 

“한국어는 구두점이 필요 없다거나 한국어는 사물절을 쓰지는 않는다는 등의 한국어에 대한 속설이 많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서양에서도 구두점은 16세기 이후에 쓰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요순시대의 말로 남아 있게 할 수는 없다. 사물절을 쓰지 않는 건 한국어의 어법이 아니라 한국의 풍속일 뿐이다. 모든 풍속이 미풍양속은 아니다. 토속적인 말투를 질펀하게, 실은 상투적으로, 늘어놓는 글들이 있는데, ‘보그 병신체’, ‘박사 병신체’와 맞먹을 ‘토속어 병신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피해야 할 것은 낯선 어투가 아니라 상투적인 어투다.”

 


■ 문장이 가지는 실제 효과를 생각한다.

 

“말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고, 리듬도 좋은데 감동이 없는 글이 많다. ‘작은 눈도 크게 뜨고 좁은 길도 넓게 가자.’ ‘운전은 경주가 아니다.’ 두 개의 문장이 모두 교통안전 표어인데 어느 쪽이 효과가 있을까. 글의 효과와 설득력은 대체적으로 사실성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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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글쓰기 특강 - 생각 정리의 기술
김민영.황선애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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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자 두 명은 왜 그렇게 서평 정의에 집착할까? 서평과 비평 그리고 독후감과 서평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지루하게 반복한다. 책 내용의 7할 이상이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 선생은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는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문학의 효용을 설명한 적이 있다. 글을 쓰는 행위의 가장 큰 매력은 '자유로움'이다.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글쓰기에서만큼은 이 자유를 맘껏 누려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대신 좋은 책들을 더 많이 읽고 독후감이 되었든 리뷰가 되었든 서평이 되었든, 명칭과 개념, 형식이 무엇이든 간에 한 번이라도 더 글쓰기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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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7-04-09 18: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작 책은 그랬군요. 저는 공저자 중 한 분의 서평쓰기 특강을 들었어요. 김현 선생의 문장에 공감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4-09 18:54   좋아요 1 | URL
전 이 책으로 첨 접한 저자들입니다. 짧은 글로 오해와 오독이 있을 수 있습니다. ^^

cyrus 2017-04-10 1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구든지 글쓰기에 대한 정의를 밝히는 일도 개인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7-04-10 19:18   좋아요 1 | URL
네 맞는 말씀이세요. 회의주의자의 모순이 회의‘주의‘ 그 자체인 것처럼요. ^^
 
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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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유시민 작가의 정치, 경제 성향을 조금은 안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필독서로 추천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고 고개가 몹시 갸우뚱해져도 그가 왜 <자유론>을 추천했는지 나름 이유를 가늠해 보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자유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지나친 자유는 개인 고립과 고독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한다. 더욱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사회에서 개인 고립을 극대화하는 이론이다. 사회 연대를 중시하는 유시민 작가가 왜 <자유론>을 추천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이점을 이 책에서 유시민 작가가 직접 밝혔다. 우선 평소 내 궁금증이 해소되어 반갑다.


"자유는 분할할 수 없다. 전면적으로 보장되든가 전면적으로 억압당하든가, 둘 중 하나뿐이다"라고 유 작가는 말하며, 본인은 20년 전부터 "사회자유주의자"를 자처해 왔다고 주장한다. 자유를 분할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회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 진중권 교수도 "'사회자유주의자'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라고 비판"하며, "'사회'라는 개념은 '자유주의'와는 공존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진 교수의 말이 서운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프랑스 혁명 이래 세계 모든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 없다. 모든 개인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1789년 이래 세계 정치사는 이 모순을 화해키려는 일련의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세계는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2015, 김영사)


유시민 작가는 사회'자유주의'자답게 이데올로기보다 "개인의 신성한 내적 본성"을 믿는다. "우리 각자가 지닌 생각이 때론 속박이 됩니다. 물론 살아가려면 세상을 이해해야 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면 생각의 틀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과 사회, 역사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생각의 틀을 '주의'또는 '이즘'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즘'의 노예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그런 '이즘'의 주인이지 노예나 도구가 아닙니다. 어떤 '주의'를 받아들여 사용하면서도 거기 속박당하지 않으려면 타고난 '직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가 직관의 예로 든 것이 '측은지심' '수오지심' 등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리고 약한 것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어 있고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을 알면 부끄러워"하는 것이 타고난 직관이라는 것이다.


저자 설명이 옳을까? 판단은 쉽지 않다. 하지만 혹시 '연민의 정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타고난 '직관'이지만, '어리고 약한 것'을 판단하거나, '무엇인가 잘못'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이데올로기 영향 아닐까? 인류가 프랑스 혁명 이래 오랫동안 조화시키지 못한 자유와 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시민 작가처럼, 앞으로 많은 '사회자유주의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들 해결 방안이 뜬구름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제 답은 내버려 두라는 것 입니다. 그들 생각을 바꾸려고 애쓰지 마세요.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여러분 생각을 바꾸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경우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좋지 않을 겁니다. 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인격체이며 독립해서 활동하는 정보 처리 주체입니다. 이해관계, 경험, 학습, 개인적 성향에 따라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며 똑같은 정보도 다르게 처리합니다. 이미 지니고 있는 인식과 가치관에 잘 들어낮는 정보는 쉽게 수용하지만 날카롭게 충돌하는 정보는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뇌에는 ‘폐쇄적 자기 강화 매커니즘‘이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바꾸고 싶을 때만 생각을 바꿉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대화하는 것뿐입니다. 강요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그 사람의 견해는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그와는 다른 견해를 말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 사람의 뇌리에 지금 가진 생각에 대해 지극히 사소한 의심이라도 품을 수 있게 한다면 그 대화는 성공한 겁니다.

보고서를 쓸 때는 독자 눈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보고서는 보통 윗사람이 읽습니다. 쓰는 사람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시력은 나쁘고, 업무 범위는 넓고, 의사 결정권은 크고, 일반적으로 변화에 둔감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선으로 문제를 살피면서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읽는 사람이 잘 아는 문제는 간단하게, 중요한데 잘 모를 수 있는 것은 자세하게 써야 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적은 사람이라면 원페이지에 가깝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상세보고서에 가깝게 쓰는 편이 현명합니다.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미학적 열정을 표현하는 일이며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데 힘을 보태는 행위입니다.

무엇을 쓰는지는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에 지닌 생각과 감정을 글로 씁니다. 그래서 글짓기가 아니라 글쓰기가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답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틀에 박힌, 진부한, 상투적인 글을 쓰게 됩니다. 또한, 글쓰기는 자기성찰을 동반합니다. 글을 쓰면 자신 모습이 더 잘 보입니다.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글에 나타난 내 모습이 싫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해서 들을 고칩니다. 글만 고치는 게 아니라 제 자신을 고치는 작업입니다.

표현할 가치가 있는 지식, 정보, 논리, 감정, 생각을 내면에 쌓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문장 기술을 배워도 글이 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 글을 잘 쓸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전문 용어나 어려운 이론을 사용해야 할 때는 그 의미를 알아내는 데 필요한 정보를 텍스트 안에 티나지 않게 집어넣습니다.

텍스트 발췌 요약은 글쓰기의 첫걸음입니다. 발췌 요약을 멋지게 하려면 텍스트만 볼 게 아니라 콘텍스트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어떤 대목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텍스트 해석에 달려 있고, 텍스트 해석은 어떤 콘텍스트에 비추어 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텍스트를 발췌 요약할 때는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고 상상하면서 작업하면 좋습니다. 그거 어떤 책이야? 무슨 글이야? 주장하는 바가 뭔데? 그런 질문을 한 사람한테 자신이 읽은 텍스트를 쉽고 간단하고 명확하게 이야기해 준다고 생각하면서 쓰는 겁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제가 10년 동안 읽었던 역사책 가운데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을 발췌 요약한 책입니다. 텍스트 발췌 요약만 잘해도 책을 낼 수 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국가의 본질과 진화 과정을 알고 싶어서 공부하면서 썼습니다. 관련 책을 100권을 하나씩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마다 색종이를 붙여 표시했습니다. 하나라도 색종이가 붙은 책은 따로 추려서 표시한 대목을 발췌했습니다. 발췌한 인용문을 큰 주제로 나누어 관련성이 있는 것끼리 묶은 다음 작은 주제로 또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책의 목차를 만들었고, 엮어 놓은 인용문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생각을 보태 본문을 썼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자료를 찾기 전에 먼저 질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질문을 잘 만들면 글은 이미 절반은 완성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글쓴이의 개성과 색깔은 문장이 아니라 콘택스트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를 반영하는 독자적 해석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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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31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시민 작가 책을 읽으셔서 그런가 이 글은 되게 편하게 잘 읽히네요^^ 쓰신 글 보니 유시민 글쓰기 특강 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습니다?
법처럼 자유와 평등도 사람 간의 일종의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장이라는 요건도 따라 나오는 거고요. 그러므로 자유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사회 플러스 자유주의자라고 한 유시민 작가의 뜻을 이해하겠고 말이 된다고 저는 생각^^ 언어라는 것도 계약적이라 합의가 필요하죠. 중요한 건 필요할 때 만들 수 있다는 것. 이해만 잘 시킬 수 있다면^^; 진중권 교수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맙시다!
유시민 작가가 말하는 직관은 다윈이 진화론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고귀한 특징이라며 제시한 윤리의식과 맞닿네요.
북다이제스터님도 뇌과학, 진화심리학 등 책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성과 감성이 그리 딱 떨어지게 나눠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고양이라디오 2017-01-31 23:34   좋아요 1 | URL
저도 사회자유주의자라는 말이 그렇게 틀린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지 않나요? 상황에 따라 자유가 더 중요할 때가 있고 평등이 더 중요시 되야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ㅋ

굳이 그 둘을 무자르듯이 구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ㅎ;;

북다이제스터 2017-01-31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두 분 말씀에 애시당초 깊이 공감과 동의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사회와 자유, 자유와 평등이라고 생각됩니다. 둘 모두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눈물 겹게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둘이 서로 너무 큰 모순되어 삐거덕거리고 있습니다. 서로 공존하게 대 화합의 대안과 장이 마련될 수 있는 계기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이유를 잘 모르겠다. 저자의 글 모양새가 내겐 읽기 불편하다. 분명, 저자는 글 쓰는데 몹시 신중하고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사노라면’으로 할까 ‘살다 보면’으로 할까, ‘쩨쩨하다’가 맞나 ‘째째하다’인가 사전을 뒤지고 고만고만한 두 단어 사이에서 고민”도 많이 했다. 저자 글은 “공들여 고르고 삭히고 매만진 언어”들이다. 근데 내겐 불편하다. 왜 그럴까? 저자가 공들였다고 보이는 몇 문장들이다.




“글을 쓰면서 여자, 엄마, 노동자라는 집합명사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김지영이라는 고유명사로서의 삶을 지켜내고자 버둥거렸다.”


“네모난 수영장에서 눈부신 바다로 나아간 이십 대, 나에게 글쓰기는 곧 안간힘 쓰기였다.”


“집안이나 조직에서 소통에 애를 먹었다. 가령, 내 말은 시어머니가 듣고 싶은 말로 접수되면서 의미가 변질되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합리적 인식’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로 판단했다."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 글을 쓰고 있으면 물살이 잔잔해졌고 사고가 말랑해졌다.”


“크고 작은 일상의 사건들을 글로 푹푹 삶아내면서 삶의 일부로 감쌀 수 있었다. 어렴풋이 알아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컴퓨터와 나 사이에 들어차는 온기와 안락과 고독은 오월의 아침 햇살보다 감미롭다.”


“그 쓸모없는 시간이 삶을 쓸모 있게 만들어주는 아이러니는 늘 유예되는 진리다.”


“느닷없이 ‘닥친다’는 점에서, 있는 것을 ‘쓸어간다’는 점에서, 이전과 이후의 삶의 풍경과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내가 당한 사건이 삶의 자연재해라는 말은 적합해 보인다. 그게 지진이라면 강도가 약했을 뿐. 집안에 경제적 위기가 와 있었다.”


“부모의 재력, 학벌, 계급에 따라 아이의 삶을 거래하는 말들의 유통에 화가 났다.”


“낮이고 밤이고 온 국토를 삽질하는 게 ‘발전’은 아니듯 자신을 속이는 글, 본성을 억압하는 글, 약한 것을 무시하는 글, 진실한 가치를 낳지 못하는 글은 열심히 쓸수록 위험하다.”




책 단 10쪽 내외에서 간추린 글들이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글인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추상화된 상태가 좀 더 생생하도록 비유와 은유, 의성어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글이 술술 읽히며 아주 아름답기는 한데, 불편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작년 이맘때 읽은 책 <정희진처럼 읽기> 문장들과 비교해 봤다. 그 문장들은 읽기 불편하지 않았다.
















“외로움이 몸에 가득 차서 손목이라도 그어 몸 안의 외로움을 빼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분노는 개인 마음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권력관계다.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당사자 말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무조건 옳거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들 생각 역시 사회 산물이다. 누구의 언어도 투명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적 사고체계에서는 입장, 관점, 시각 같은 개념체계를 부정하고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향한다. 이런 탈정치적 주장이 가장 정치적인 법이다. 게다가 정치성을 표방하는 경우보다 정치적 효과도 크다.”


“사랑한다는 것은 약점이다.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지옥이다. 이 마음 자체가 ‘을’인데 만약 성별, 나이, 계급, 외모 같은 차원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엄청난 노동이다.”


“오해와 재해석은 다르다. 오해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맥락을 삭제한 채 글자만 가져온다. 재해석은 상호 역사를 모두 고려한 개입이요, 생각하는 노동이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의 호소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이 먼저고 규범은 부차적 문제여야 한다. 문화와 윤리, 사회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의 고통을 볼모로 기존 통념을 수호하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악마성이다. 당위적 윤리는 없다. 목적은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되어야 한다.”




얼핏 읽으면 두 저자의 글 모양새가 비슷할 수도 있지만, 정희진 글에는 비유와 은유, 의성어 등이 거의 없다. 글 느낌이 예쁘지도 않다. 어떤 글이 더 편한지 전적으로 내 취향 탓일까? 이유를 알 듯 모를 듯하다.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 - 조지 오웰

우리가 충분히 배우고 우리의 눈과 귀를 충분히 연 경우 언제든 우리 영혼은 더욱 유연하고 우아하게 된다. - 니체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 - 정희진

고통은 해석이다. 우리느 고통 그 자체를 앓는 게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 - 니체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시는 패배자의 기록이다. 승리자의 메시지만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세상에서 마음 붙일 곳 없던 영혼들이 패배자가 지은 말들의 풍경에 기대어 한 세상 숨돌릴 곳이다. - 이장욱 시인

나는 내 사색의 개화를 관찰하고 있다. - 랭보

모르고 있다고 믿었는데 실은 알고 있는 것도 있다. 이 영역이 내가 글을 쓰는 부분이다. - 후후나 요시카치

첫 번째 판단을 바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되는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니체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이다. - 니체

예술작품은 하나의 감각 존재이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한다. - 들뢰즈

질서는 허위다. 숨길 것을 숨기고 난 후의 묵계에 불과하다. - 이수영

누구나 자기 렌즈로 세상을 본다. 내가 외로워야 남의 외로움도 눈에 든다.

고통 그 자체, 여행 그 자체, 불륜 그 자체는 글이 될 수 없다. 어떤 각도에서 어떤 문제를 다루는가, 고유의 관점과 해석이 중요하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대상에서 비범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 안목,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것이 요구된다.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질문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문제의식이 없는 글은 요란한 짐수레와 다름없다. 현란한 수사만 빼곡하고 울림이 없는 글은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다. 두툼한 책이든 한 페이지 글이든 한 줄로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글에 대한 예의다.

‘남‘의 글에서 억눌러놓은 ‘나‘를 보았을 때, 미처 몰랐던 자기 욕망을 알아차렸을 때, 사람들은 그 글을 좋은 글이라고 느낀다. 내가 미처 들쳐보지 못한 마음의 자리를 누군가 살뜰히 드러내주면 덩달아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글을 계몽, 곧 도덕적으로 마무리 하는 것은 위험하다. 상황을 단순화시켜버린다. 감정을 평준화 한다.

글쓰기는 어깨 힘을 빼고 나의 말로 꾸밈없이, 한 문장씩 정직하게 써내려가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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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6-12-09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건 억지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의 차이가 아닐까요? 흘러 나오는대로 써써 다듬은 문장과 억지로 쥐어짜서 어려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그렇게 읽혀지네요.

북프리쿠키 2016-12-09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북다이제스트님
글이 신선합니다.
은유님의 팬으로써 이 글을 읽자니
반감이 들어야 마땅한데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네요.
정희진처럼 읽기도 읽어봐야겠어요^^;

북다이제스터 2016-12-10 10:58   좋아요 1 | URL
은유님 팬분께 조심스러운 리뷰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제 불편함이 무엇일지 이웃님들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정희진 책도 아주 좋습니다. 기회 되시면 꼭 읽어 보세요. ^^

AgalmA 2016-12-10 08: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 소감이지만 은유 작가 표현은 꾸며 쓴 티가 많이 납니다. 공들이고 꾸미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너무 공들이다 보면 처음 느낌을 보존하지 못하고 듣는 사람에게 꾸며 쓴 티를 전달하게 됩니다. 수사는 문장 자체가 아니라 글의 주제와 전체 글을 포괄할 때 빛이 납니다. 문장도 어디서 채우고 어디서 비울지 안배가 필요하죠. 근사한 표현이 넘칠 때 기술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때 작위성이 느껴지죠. 문장과 글 전체 구조가 조화로울 때 읽는 이가 공감하고 수긍하게 되죠. 특히 ˝말들의 유통˝ 문장은 어떻게 보면 참신해 보이지만 가지고 와 붙였다는 인상이 더 강합니다. 그런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문제가 안 되겠지만 북다이제스터님처럼 거슬리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정희진 작가 글 인용하신 거 보니 비유어보다 개념어로 생각이 전개되는 걸 더 좋아하시는 취향도 반영된 듯하네요^^

북다이제스터 2016-12-10 10:56   좋아요 2 | URL
제가 보기엔 책 주제에 적당하지 않은 문체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글이 ˝새로운 지식을 주거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거나 감정을 건드리거나 세 가지 중 하나는 담겨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맞다면 ‘글쓰기가 주제‘인 책에서 ˝감정을 건드리기˝ 문체가 부적합하다고 느껴 제게는 불편했던 거 같습니다. ^^

AgalmA 2016-12-10 12:03   좋아요 1 | URL
우연찮게 간밤에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다 읽었는데요. 북다이제스터님이 리뷰에서 불편함을 드러내셨던 게 생각났어요. 마침 적절한 인용을 해주셨네요. 새로운 지식이나 사유의 지평을 열어주는 역할보다 충격요법처럼 감정을 건드리려는 게 더 돌출적이었다 생각합니다. 작가의 분노? 알겠는데 그런 문체가 과연 그 글에 최적이었나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습니다. 글 성격에 맞춘 문체라기보다 ˝이건 <야전과 영원>에서 얘기했고 다음~˝하는 식의 아타루 성격으로 보였으니 말이죠ㅎ. 역자부터 여러 독자들은 그 문체가 파격이고 뛰어나다 하는데 저로선 그닥^^; 리뷰를 쓸 때 더 종합해볼 생각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2-10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시각이 다릅니다. 은유의 글은 표현을 꾸민 것이기보다 삶을 꾸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가령 글을 써서 그렇게 드라마틱한 효과를 얻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정희진도 현실이 그러 하니 불가피한 면이 있어서이겠지만 모든 것을 여성 운동과 연결지어 논하는 것 같습디다. 문체가 중요하다는 지적은 동의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이해시키고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요?

AgalmA 2016-12-10 12:18   좋아요 1 | URL
삶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니 ˝표현˝을 꾸민 것이라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은유 작가의 전체 글을 보지 않고 저 문장들로만 평가하는 마당이라 좀 생각해 볼 여지도 있는데요.
저 문장들은 내용을 이해시키고 전달하려는 데 적절하지 않은 단어 사용이 많습니다.

가령 ˝집안과 조직˝을 연결해 ˝접수˝, ˝변질˝ , ˝합리적 인식˝, ˝자신의 정서˝ 같은 어휘 등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언어들이 제대로 융합되어 보이십니까. 기계적 연결로 다 겉돌아 보입니다. 그래서 표현 문제를 지적한 것이죠. 말하고 있는 그것이 글의 핵심인데 띄어쓰기, 맞춤법보다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잖아요.

글쓰기 작가로 유명한 걸로 아는데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2-10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동의합니다. 겉돈다는 말씀에요..어떻든 작위적이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양철나무꾼 2016-12-15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대로 전,
사람들이 정희진처럼 읽기를 좋아하던데,
정희진이 힘든 케이스였어요.
언젠가 리뷰를 쓴 일이 있는데, ㅋ~.
(http://blog.aladin.co.kr/745144177/7334343)

세상에 수많은 사람처럼, 수많은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정희진도 좋지만, 은유를 더 좋아하는 독자로서,
님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교 글 참 좋습니다, 꾸벅~(__)

북다이제스터 2016-12-17 19:25   좋아요 1 | URL
˝거창하게 폼잡고 어렵게 얘기하지 않으면, 책의로서의 품위나 격이 떨여져 안 팔리는 법이 있는 모양이다˝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 만큼 글이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공감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
 
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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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는 국내 월간지 <책>과 작년 인터뷰를 했다. “(한국어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는)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이나 시름을 나타내는 ‘여수(旅愁)’예요. 똑같은 의미의 영어 단어를 찾기란 불가능한 것 같아요.” 나도 찾아봤는데 정말 없다. 단지 ‘traveler’s melancholy’라고 나온다. ‘여수’ 느낌이 살지 않는다. 아무튼 데보라 인터뷰를 계속 보면, “(한국문학을 번역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사람들끼리 관계에 관한 문장이에요. 특히 존칭을 써야 하는 높임말이나 호칭들이 매우 복잡한 것 같아요. 친언니가 아닌데도 언니라고 부른다거나 선배와 후배의 호칭들, 특히 회사에서 직급을 나타내는 단어들 있잖아요. 영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이에요. 사실 그런 것들을 번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한국 사회의 모든 상황을 이해해야만 하는 건데 책 한 권에서 그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영어와 한국어의 거리 때문에 원문과 번역문을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았어요”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맨부커 상 수상 이후 BBC와 인터뷰에서는 “훌륭한 한국문학 작품을 번역한다면 번역은 영문학으로도 훌륭한 작품이어야 한다”고 자신 번역관을 밝혔다.

 

 

<채식주의자>의 원본과 번역본 모두 읽어보진 않았지만, 번역자의 인터뷰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채식주의자> 수상은 옮긴이가 원전에 충실했다기보다 영미권 문화와 영어 특성을 상당히 반영했기 때문이다. <번역의 탄생>은 어떻게 하면 영어를 한국어로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소개하는 책이지만, 방향은 데보라 의견과 같다. 저자도 직역보다 의역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제가 원하는 번역 원칙은 직역이 아니라 의역이고, 또 그게 아니더라도, 너무 원어의 사전적 의미로만 번역하다 보면, 오히려 영어 원작이 주는 느낌보다 한글 번역문이 더 무미건조하고 밍밍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어는 한국어보다 추상성과 보편성을 담아내는 데 강하고, 한국어는 영어보다 구체성과 특수성을 나타내는 데 강하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단순한 옮김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이며 예술 활동이란 느낌이 든다. 저자의 한 짧은 번역 문장만 보고도, 예전 번역 좀 해보겠다고 어설프게 나대던 때가 무척 부끄럽다. “There was one famous graffiti artist who should have known better”라는 문장을 저자가 “어처구니없는 낙서를 한 사람이 있었다”고 의역하는데, 이것을 읽고 난 이마를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탁월한 영어 번역은 영어가 아닌 한국어 실력에 있었다. 이와 같은 저자의 탁월한 번역 방법이 책에 많이 소개되어 있다.

 

 

○ One has to reduce the use of wood and metal to protect the environment.
→ (△) 환경을 지키려면 목재와 금속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 (서술어에 딱딱한 명사가 들어가면 부담스럽다.)
→ (O) 환경을 지키려면 목재와 금속을 덜 써야 한다. (사용을 줄여야 한다 → 덜 써야 한다)

 

○ The cold brutally towards humankind must surely have had roots in the subliminal influences of the young Adolf’s family circumstances.
→ (△) 인간에 대한 냉정한 잔혹성은 틀림없이 어린 아돌프의 가정환경의 잠재 의식적 영향에 뿌리가 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번역문은 영어 형용사를 될수록 한국어 부사로 바꿔주어야 한다.)
→ (O) 인간에게 냉정하고 잔인하게 군 것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암암리에 어린 아돌프가 가정환경에서 받은 영향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냉정한 잔혹성은 → 냉정하고 잔인하게, 잠재 의식적 → 암암리에, (서술어 명사의 동사화) 뿌리가 있을 것이다 →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 She looked at them with a wistful smile. (영어에 부사를 너무 많이 쓰면 글이 밋밋해지고 늘어지는 느낌을 주어 잘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 (△) 여자는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글은 동사가 발달하여 아울러 수식하는 부사로 바꿔야 자연스럽다.)
→ (O) 여자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아쉽게 웃었다.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 아쉽게 웃었다)

 

○ If that is the case, I will not press the matter.
→ (△)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일을 강요하지 않겠다. (어미 ‘-면’에 ‘만약’ 의미가 있어서 불필요하다. ‘-겠’에 이미 나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어 ‘나’는 필요 없다.)
→ (O)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일을 강요하지 않겠다. (한글은 어미가 발달하여 의미를 어미로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어미로 주어 의미를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다.)

 

○ This giant dome is fitted with a small flap-window that offers Florence’s loftiest panorama.
→ (△) 이 거대한 돔은 피렌체의 웅장한 자태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작은 들창이 있다. (영어 문장의 사물 시각을 사람 시각으로 끊임없이 바꾸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 (O) 이 거대한 돔에 뚫린 작은 들창으로 피렌체의 웅장한 자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사람 시각 전환에 문장 순차 번역이 도움될 때가 많다.)

 

○ Predators have been observed to avoid attacking brightly coloured species. (영어는 객관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수동태를 많이 쓴다.)
→ (△) 육식 동물은 몸 빛깔이 화려한 동물은 잘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된다. (영어 수동태는 한국어 능동태로 바꾸어야 한다.)
→ (O) 육식 동물을 관찰해보면 몸 빛깔이 화려한 동물은 잘 공격하지 않는다. (능동태 전환에 문장 순차 번역이 도움될 때가 많다.)

 

○ Music blared out from the open window. (영어 부사나 부사구는 일반적으로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 열린 창문으로 음악이 터져 나왔다. (영어 원문에 동사가 하나뿐이라고 해서 한글 번역문에서도 동사를 달랑 하나로 번역해주어야만 충실한 직역은 아니다.)
→ (O) 열린 창문으로 음악이 쿵쾅 터져 나왔다. (영어는 의성어를 동사 하나로 나타내는데 한국어는 부사+동사로 나타낸다. 과감하게 부사를 덧붙여라)

 

○ Only wealthy medieval people took regular baths. (명사가 발달한 영어에 형용사도 풍성하다.)
→ (△) 중세에는 부자만 규칙적인 목욕을 했다. (한국어는 동사가 발달해 부사가 자연스럽다. 영어 형용사는 한국어 부사로 옮긴다.)
→ (O) 중세에는 부자만 꼬박꼬박 목욕했다. (규칙적인 → 꼬박꼬박)

 

○ He took the map lest he should get lost.
→ (△) 그는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되어 지도를 챙겼다.
→ (O) 그는 길을 잃을까 봐 지도를 챙겨 갔다. (어미나 접사를 잘 이용해서 번역문을 간결하게 만들어야 한다. 번역은 단어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 He assigned honour as the mainspring of monarchy. (영어 전치사는 동사에 가까운 뜻을 담고 있다.)
→ (△) 그는 군주제의 원동력으로 명예심을 들었다. (전치사가 들어간 영어 문장을 번역할 때는 동사를 덧붙여주어야 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 (O) 그는 군주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명예심이라고 했다. (군주제의 원동력으로 → 군주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 He replied by defending both Hitler and his approach. (영어는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행동 방식이나 태도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 (△) 그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방식이 모두 옳다고 두둔했다.

→ (O) 그는 히틀러 방식이 옳다며 두둔했다. (서구식 분석문을 한국식 통합문으로 바꾸었다.)

 

 

저자는 단순히 번역을 잘하는 법을 제시할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한글이 왜 읽기 편한지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논란이 될 만한 설명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사 ‘-이/가’와 ‘-는/은’ 차이다. 사실 지금까지 읽은 몇 권의 ‘글쓰기’ 책에서 조사 설명이 전부 달랐다. <글쓰기 달인이 되려면 잘못된 문장부터 고쳐라>의 저자 박찬영은 '-이/가'는 주격 조사지만, '-은/는'은 '-만' '-도'처럼 보조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배고픈 느낌이 들었다"라는 문장은 두 개의 주어 '-는'과 '-이'가 있어 비문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글쓰기 표현사전>의 저자 장하늘은 ‘-은/는’과 ‘-이/가’ 모두 주격 조사지만, 표현 느낌만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은/는’을 사용하면 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을 주며, ‘-이/가’를 쓰면 동적이고 활발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책 <번역의 탄생>를 쓴 이희재는 또 다른 주장을 한다. ’-은/는’은 실제로 이미 아는 대상을 나타낼 때 쓰는 조사여서 영어 정관사 ‘the’를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The policeman motioned to us’는 ‘그 경찰관은 우리에게 손짓했다’가 아니라, ‘그’를 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알지 못하는 대상을 표현할 때는 격조사 ‘-이/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A policeman motioned to us’란 문장은 ‘경찰관이 우리에게 손짓했다’처럼 ‘-이’로 바꿔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리뷰 제목 ‘번역은 정말 예술이다’가 맞을까 아니면, ‘번역이 정말 예술이다’가 자연스러울까? 전자가 읽기 편한데, 내가 쓴 뜻의 ‘번역’은 ‘the translation’인가? 글쎄,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이런 격조사 하나조차 통일되지 않고 논쟁이 분분하니 한글이 정말 어렵긴 어렵다.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1877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천문대장 조반니 스키아파렐리는 화성이 지구 가까이에 왔을 때 망원경으로 화성 표면을 관측하여 지도를 그렸다. 그때 화성 표면에 가느다란 직선들이 교차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canali(단수형 canale)라고 불렀다. 이것은 영어의 channels에 해당하는 뜻이었다. `수로` 내지 `물길`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꼭 인공적이라는 뜻은 없었다. 그런데 영어 번역자가 이것을 운하나 인공 수로를 뜻하는 canal로 옮겼다. canali와 canal이 비슷하니까 무심코 그렇게 한 것이다. 영어에서 channel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물길인 반면 canal은 운하처럼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물길이다. 자연히 화성에서는 고등 문명을 지닌 외계인이 산다는 믿음이 급속히 퍼져 나갔고, 영국의 H. G. 웰스라는 작가는 1898년 화성인이 지구를 공격한다는 내용으로 <우주전쟁>이라는 소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 번역자가 겉으로 드러난 유사성에 현혹되어 canali를 canal로 무심코 번역한 것이 이렇게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단어는 완벽한 번역이 불가능해도 문장은 완벽한 번역이 가능하다.
- 하랄트 바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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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05-26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달인이 되려면 잘못된 문장부터 고쳐라>의 저자 박찬영은 ‘-이/가’는 주격 조사지만, ‘-은/는’은 ‘-만’ ‘-도’처럼 보조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배고픈 느낌이 들었다”라는 문장은 두 개의 주어 ‘-는’과 ‘-이’가 있어 비문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글쓰기 표현사전>의 저자 장하늘은 ‘-은/는’과 ‘-이/가’ 모두 주격 조사지만, 표현 느낌만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은/는’을 사용하면 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을 주며, ‘-이/가’를 쓰면 동적이고 활발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 위 설명은 너무 간략하고 단순해서 은/는/이/가 각각의 차별성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영/장하늘 씨 책에는 더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는지 궁금하네요. 위 단순한 설명대로라면 은/는/이/가를 각각 올바로 가려쓰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혼란스러움만 더 심해지는 듯합니다. 두 분 설명 모두 지극히 요령부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⑴《‘-은/는’은 실제로 이미 아는 대상을 나타낼 때 쓰는 조사》라는 주장과 ⑵《알지 못하는 대상을 표현할 때는 격조사 ‘-이/가’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약간 뜬금없다는 느낌입니다. 제가 이희재 씨 주장의 앞뒤 문맥과 상황을 몰라서 그러는데요. 과연 ⑴과 ⑵가 문법적 효력이나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문법적 효력이나 자격은 보편적이고 일관적이어야 부여할 수 있는 것인데요. 은/는/이/가가 단순히 아느냐/모르느냐를 기준으로 구별되는 조사라는 주장은 은/는/이/가의 폭넓은 쓰임새를 너무 축소하고 옹색하게 만드는 것이라 봅니다. 즉 위 주장 ⑴과 ⑵가 일부 맞는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제한적인 사례에서일 뿐이라는 것이죠. 즉 보편적이고 일관적인 법칙은 아니란 것입니다. 심지어 ⑴과 ⑵의 역관계도 성립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관적이지 않은 것이죠. 해서 이희재 씨의 위 주장은 그닥 문법적 효력이나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5-26 14:01   좋아요 0 | URL
박찬영/장하늘 두 분 모두 약간 더 자세한 설명은 있었던 것 같으나, 요지는 제가 작성한 것이 전부일 듯 싶습니다.^^
이희재 번역자 주장 경우 제가 보기에도 보편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좀 무리가 될 수 있는 설명이 듯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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