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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그의 저술에서 영구평화를 위한 3가지 확정 조항을 제출하고, 이들 조항에 대해 그 기초로서 유용한 6가지 예비 조항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예비 조항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평화조약은 장차 전쟁을 위한 자료를 비밀리에 유보하여 체결되도록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쟁 자료의 비밀 유보는 많은 새로운 분쟁의 출발점이며,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단순한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


2. 어떠한 독립국가도 계승이나 교환, 매수, 증여 등에 의해 다른 국가에 획득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지 국가의 도덕적 인격을 양도물건으로 할 뿐 아니라, 평화를 가장 강력하게 위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3. 상비군은 때가 되면 전폐되어야 한다. 인간성이 일반적으로 상비군을 갖지 않아도 되는 데까지 발전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긴 세월을 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성은 이와 같은 상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는 가능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4. 국가의 대의적 거래에 있어서는 어떠한 국채도 발행해서는 안 된다. 자금력이 매우 쉽게 공격 전쟁이 되는 가능성을 낳는 경우, 평화가 심한 위협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5.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의 헌법과 정부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6.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 장래의 평화에 있어서 서로의 신용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대행위, 예컨대 공격국에 있어서의 암살자와 독살자 사용, 강화조약의 파기, 내통의 책모 등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 중이라도 적의 생각에 대한 다소의 신뢰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하면 전쟁은 결코 종결될 수 없을 것이며, 또 적대행위는 섬멸전 결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 예비조항이 지켜진다는 전제 아래 영구평화는 다음과 같은 3가지 확정조항을 기초로 한다.

 

 

1. 어떠한 국가의 시민 헌법도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 이 의미는 입법적 권력은 그 밖의 어떠한 권력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어야 하고, 또 국민 대표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이와 같은 헌법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헌법이 영구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국가 형식이기도 하다. 전쟁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국민 동의가 필요하다면 이렇게 나쁜 유희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국민이 매우 주저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2. 국제법은 자유국가의 연방주의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 국가는 상호관계에 있어서 그 권리가 전쟁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무법상태에서 출발하여 법이 없는 야만적인 자유를 버리고, 강제적인 공법(公法)을 준수하며, 최종적으로는 지상의 모든 국민을 포괄하는 국민연합을 확립해야 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연방 이념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즉, 합리적 영구평화를 지향하며, 따라서 입헌적 헌법을 갖는 이성적 결합의 중심점 역할을 하고, 또 그와 같은 중심점으로부터 국민의 연합을 차차 확대해 가서 마침내 전 세계를 포괄하는 방법으로 점차 실현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세계시민법은 보편적인 후대를 받는 여러 가지 조건하에 있어야 한다. 이 의미는 모든 나라의 시민은 다른 시민에게 대해 입국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여러 외국으로부터 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먼 세계의 지역도 서로 평화적으로, 마지막에는 공공연히 법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를 종국적으로는 세계시민적 헌법에 점차 접근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치가들은 이와 같은 사상을 달성될 수 없고 실현성 없는 꿈이라고 하면서 아마 웃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영구평화 이념은 실재적인 국가 정책과는 모순된다. 칸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와 도덕 사이에는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실은 어떠한 정책보다 낫다. 칸트는 말한다. ‘나는 확실히 한 사람의 도덕적 정치가, 즉 정치 원리를 인정하는 결과, 정치적 원리와 도덕이 양립될 수 있다고 하는 도덕적 정치가를 생각할 수는 있으나, 정치가 이익이 되도록 도덕을 다시 다듬는 정략적 도덕가를 생각할 수는 없다.’ 이것은 바로 비도덕적 정치라 불린다.

 

 

‘먼저 도덕에 따르지 않고는 진정한 정치는 절대로 진보할 수 없다. 설사 정치는 그 자체가 어려운 기술이라 하더라도 정치와 도덕을 일치시키는 것은 결코 기술이 아닌 것이다. 정치가 풀지 못하는 매듭을 도덕이 풀기 때문이다. 통치권은 아무리 큰 희생을 하더라도 법은 인간을 위해 신성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반분하여 (법과 이익의 중간인) 실제적인 조건을 가진 법이라는 중간물을 안출할 수는 없다. 오히려 모든 정치는 법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 대신 정치는 빛나는 단계로, 느리기는 하지만 도달하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단계가 바로 영구평화다.“<칸트철학 입문>

 

 

 

 

 

 

 

 

 

 

 

 

 

 

 

 

 

“드디어 오늘날 인류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가 존재한다. 이 책은 2014년에 쓰였기에 현대사에 상대적으로 밝은 접근법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핵무기의 대량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 이런 양의 되먹임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 국가가 더는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사피엔스>

 

 

 

 

 

 

 

 

 

 

 

 

 

 

 

 

 

“민주주의의 확산과 부의 증가로 이제껏 없었던 평화의 시대를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투원 사망자가 줄어들었고 앞으로 줄어들 것이라 예견하며, 평화의 여건이 진전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인간 진보를 믿고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에게 안도를 주는 비전이다. 폭력이 수행되는 강도와 다양성에 주목해 보면 ‘긴 평화의 시기’는 사실상 영속적인 전쟁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긴 평화의 시대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통계는, 무의미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도덕적으로 미심쩍다. 통계 숫자가 우연에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라는 점도 숫자를 조심스럽게 봐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용기 있는 한 개인이 미사일 위기를 막아내지 못했더라면 (KAL기 폭파 당시 소련의 한 해병이 핵 미사일을 발사하라는 상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핵전쟁이 일어났을 것이고 어마어마한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리라는 예견에 직면하지 못하는 이들은, 절박하게 역사에서 진보의 패턴을 찾으려 한다. 회의와 의심을 스스로 견디기에는 너무나 약한, 이들 이성 신봉자들이 숫자의 주술에 의지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마침 그들을 돕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은 우리 안의 숨은 천사들이 보여주는 숫자들에서 미래의 징조를 읽어 낸다.”<꼭두각시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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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법칙의 통상적인 공식은 인과적인데 페르마의 원리 같은 변분 원리는 합목적적이고, 거의 목적론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야. 의인화를 통해 확대해석을 해도 무방하다면, 빛은 일단 선택 가능한 경로들을 검토하고 각각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야 해. 결국 빛은 자신이 도달할 목적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정보도 갖고 있는거지. 한마디로 빛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는 거야.

 

 

굴절률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인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애기지.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햅타포드(외계인)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야.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해석이지.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지.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돼.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야.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이 없어.

 

 

인류와 햅타포드 모두 동일한 물질세계를 지각했지.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어. 세계관의 궁극적인 상이함이 이런 차이를 낳은 결과였지.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해. 햅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하지. 최소화와 최대화 목적을...” <당신 인생의 이야기>

 

 

 

 

 

 

 

 

 

 

 

 

 

 

 

 

 


"실천적 영역에서 의지규정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감성적 욕망이 하위 욕구능력으로서, 실천이성이 상위 욕구능력으로서 부여된다. 여기서는 오성의 자연개념이 지배하지 않고, 실천이성의 자유개념이 지배한다. 오성과 실천이성은 그러므로 경험의 동일 지반에 있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감히 손상하지 않고 두 가지 서로 다른 입법을 갖는 것이다. 오성은 물(物)을 단지 감성계의 현상으로서만 본다. 실천이성은 물을 물자체로서, 초감성적 세계의 대상으로서 고찰한다. 그러므로 인식과 의욕의 두 영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양자 사이 연결은 가능해야 한다. 실천이성은 그 법칙에 의해 설정된 목적, 즉 도덕률 욕구를 감성계에서 실천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을 결합시키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능력이 반성적 판단력이다. 이 판단력에 의해 우리는 자연을, 자연의 오성적 합법칙성과 실천이성에 의해 부과된 목적과의 일치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을 자유 법칙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을 마치 합법칙적 자연사상(事象)에서 목적이 실천되는 것처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에 대해 합법칙성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오성의 눈을 가지고 고찰한다면 자연은 엄격한 합법칙성으로 생각된다. 실천이성의 빛을 통해 본다면 자연은 도덕률의 실현에 대한 종국목적으로서 규정된다고 생각된다. 반성적 판단력에 따르면 자연의 합법칙성은 자연의 종국목적에 따르는 것이다. 자연은 함목적적이다. 합법칙성 – 합목적성 –이 종국목적이다. 이것이 감성세계로부터 초감성계로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판단력은 이 넓고 넓은 연못 위에 걸린 다리를 나타낸다.

 

 

칸트는 말한다. ‘판단력이란 특수를 보편 하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생각하는 능력이다. 보편(규칙, 원리, 법칙)이 부여되면 특수를 그 밑에 포섭하는 판단력은 규정적이다. 하지만 단지 특수만이 부여되면 판단력은 특수를 위해 보편을 발견해야 하므로, 판단력은 단지 반성적이다.’ 규정적 판단력은 오성에 속하며 이론적 인식에 기여한다. 가령 부여된 직관표상을 우리는 어떠한 범주 아래에 갖고 가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실제생활에 적용하여 말한다면, 가령 법률가에 대해서는 부여된 사건이 어떠한 법률하에 속하는가를 가르친다. 이 경우에는 바로 일반이, 즉 법률이 부여된다. 그리고 특수는 그 밑에 포섭됨으로써 규정된다.

 

 

반성적 판단력은 이와는 다르다. 이 판단력은 개개의 경험에서 출발하고, 개개의 경험에 대해 보편을 추구한다. 그 때문에 독특한 원리를 사용한다. 이 원리는 이 판단력 자체에서 생긴다. 이 원리는 바로 합목적성의 선천적 개념이다. 반성적 판단력은 이 선천적 개념을 자연에 적용하여, 마치 자연의 합법칙성이 종국목적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처럼 판단한다. 그러므로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 현상 속에서 합법칙성을 발견하려고 꾀하는 것이다. 실은 반성적 판단력은 합법칙성을 그 원리에 의해 비로소 자연 속에 넣은 것이며, 그럼으로써 개개의 자연현상의 혼란된 다양이 보편적 개념 밑에서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리하여 반성적 판단력은 체계적 자연인식을 달성시킴으로써 일면에 있어서는 오성을 위해 유용한 것이다. 다른 면에 있어서는 합목적성을 발견하여 세계의 도덕적 궁극 목적을 믿게 하고, 그럼으로써 실천이성도 지지하는 것이다.

 

 

목적론적 판단력은 갖가지 물의 징표를 규정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코 이론적 인식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갖가지 물을 객관적 합목적성의 견지하에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며, 이것에 의해 우리 인식에 있어서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식 방법이 아니라 단순한 평가 방법, 고찰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에 필요한 고찰 방법, 즉 인과적, 따라서 기계적 설명을 거부하는 경우에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라 하는 것은 모든 유기적 조직에 있어서의 경우이다. 무기물에 있어서는, 가령 돌에 있어서는 부분이 전체에 선행한다. 전체는 부분을 점차 합함으로써 비로소 성립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형성물은 기계적으로 설명된다.

 

 

인간의 활동에 의해 성립되는 갖가지 것의 경우에는 전체 표상이 개개의 부분보다 선행한다. 가구점은 먼저 하나의 계획을 세우고, 다음에 개개의 부분을 계획에 따라 제작한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이들 부분은 전체를 위해 합목적적이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이 형성물 전체를 목적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요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생물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적으로 다르다. 생물은 단순한 원인의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가 원이며 결과다. 이것은 바로 생물에 있어서는 기계적 설명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물에 관해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연목적으로서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생물에는 합목적성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로서는 생물의 개개 부분, 따라서 기관은 언제나 기능과 형태에 따라 전체를 통해 정해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 이해된다. 가령 어떤 유기체가 물속에 사는 경우, 그것은 아가미와 헤엄치는 도구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영기관은 동물에게는 합목적적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뜻을, 신적 예지가 이 동물을 위해 계획하였다 – 가구점이 찬장을 위해 계획하는 것처럼... ,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동물을 만들었다고 해석하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판단 한계를 나쁜 의미에 있어서 넘는 것이다. 초감성적 설명 원리는 결코 학문적 인식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생물의 발생과 생존을 순수하게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그것을 합목적적인 것처럼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이 합목적성을 생물속에 갖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전체와 부분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면, 즉 우리는 우리의 개념적 인식 대신에 직관적 인식에 따라서 직감적 오성을 갖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갖가지 유기체도 빠짐없이 직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할 수 있으면 우리에게 있어서 기계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은 일치될 것이다.

 

 

하지만 오성은 다만 부분에서 부분으로 징표에서 징표로 전진하여 겨우 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분이 – 유기적인 것의 경우처럼 – 전체에 의해 제약되는 경우에는 오성은 당연히 전체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결코 생물의 기계적 설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 칸트는 또 ‘오성이 유기체 전체를 인식할 수 없기에 자연의 기구(機構)에 입각하여 유기체 형식은 가능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오히려 유기체 형식을 인식할 수 없는 것뿐이다. 우리는 유기적 존재에 관한 고찰에 있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어디까지나 기계적 원인을 추구해야 한다. 기계적 설명을 단념하였을 경우에 우리는 목적인(目的因)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직접 목적인을 인식할 수는 없다. 목적 개념은 결코 학문적 설명 원리가 아니라, 단지 평가 원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리는 기계적으로 설명되는 여러 관계의 덮개를 제거함으로써 아마 간접적으로 인식될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연 자체의 내면적 근거에 있어서 동일한 물(物)에 있어서의 물리적, 기계적 관계와 목적 관계가 어느 하나의 원리 속에서 관련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칸트철학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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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국가는 자국 위에 결코 지배자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강제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이상, 모든 국가는 상호관계에 있어서는 아직도 자연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이성에 기초를 둔 자연법에 관해서만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법의 전체를 국제법이라 칭한다. 국제법의 기본은 바로 그와 같은 자연상태를 인정하는 것 이외는 없다. 칸트는 국제법의 4가지 기본을 제시한다.

 

 

1. 여러 국가 상호간 외적 관계에 있어서 국가는 본래 무법상태다.
2. 이와 같은 상태는 강자가 옳다는 원칙에 바탕을 두는 전쟁상태다.
3. 그러므로 내정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고, 외적 공격을 방위하기 위해 우리 이성은 내면의 국제연합을 요구한다.
4. 이 연합에 지배적 권력을 갖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협동이어야 하며, 그것은 해소가 예고되고, 또 시간 경과에 따라 갱신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류는 이와 같은 이성에 요구된 상태에 도달한 일이 있었는가? 역사가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여러 국가의 상호 관계를 야만적인 폭력에 의하지 않고 계약에 의해 조정하려고 한 시도는 확실히 많이 있었다. 하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다.

 

 

‘인간 본성은 어디서나 모든 여러 국민 상호간에 있어서와 같이 친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혹은 부를 위해서 한 순간이라도 안전하지 않다. 서로 정복하고, 예속자를 학대하려는 마음이 언제나 존재한다’라고 칸트가 말한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이 사실은 확실히 슬픈 일이다. 그 사실은 우리의 실천이성의 명백한 요구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전쟁은 국가가 야만적인 폭력에 의해 그 권리를 추구하는 자연상태다. 이와 같은 상태는 한 나라 권리가 다른 나라에 의해 훼손되거나 위협받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그러므로 공격을 받은 국가만이 전재의 권리를 갖는다. 이러한 공격은 실제적인 파괴에 있어서 성립되는 것이다. 예컨대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에 침입한다든가, 혹은 다른 나라의 속령을 파괴하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 경우 피공격국은 회복의 권리, 특히 배상권을 갖는다.

 

 

그렇지만 공격은 위협에 있어서도 성립한다. 한 나라가 전쟁을 위한 대군비(大軍備)에 의해, 가령 대방어설비 계획에 의해, 혹은 부대를 국경에 집결함으로써 다른 나라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에 위협을 받은 국가에는 예방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위협은 국가의 무서운 성장력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국가의 성장력은 상호간에 활동적으로 접촉해 가는 국제간 균형을 깨뜨린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균형을 요구하는 국가 권리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권리로부터 균형을 위협하는 국가에 대한 전쟁 권리가 생긴다. 따라서 예방전쟁은 합법적이며, 국제간 권리를 합법적인 방법으로 주장할 수 있는 권력이 성립되지 않는 한, 실천이성 앞에서도 허용되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공격전쟁은 비합법적이며, 철저히 비도덕적이다. 다른 나라의 권리 파괴를 노리는 전쟁은 실천이성의 요구에 모순된다. 실천이성은 전쟁에 의해 파괴된 권리가 지켜지는 경우에 있어서만 전쟁을 시인한다. 그리고 어떠한 국가도 형벌전쟁을 일으킬 권리가 없다. 즉 어떠한 위반을 처벌하기 위해 어느 국민을 공격하는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형벌 개념은 훼손된 법을 전제로 하고, 이 법 준수를 넘어서 생긴 지배적 권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는 독립국가 사이에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실천이성의 요구에 더욱 모순되는 전쟁은 다른 국가를 압제하려는 의도로, 따라서 다른 국가를 도덕적으로 말살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도덕률을 심하게 훼손하는 것은 다른 국민을 전멸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전쟁이다.

 

 

극히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하다. 적이란 부정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은 것이 밝혀진 적의 의지 격률은 그것이 보편적 규칙이 될 경우에는 여러 국민간 평화 상태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구적, 보편적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은 정당하며 도덕적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스스로를 인류 품위가 없는 상태를 세계로부터 배제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입법하는 이성에 어느 정도 협력하게 된다.

 

 

전쟁의 합법성과 비합법성 문제가 실천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위수간의 합법성 문제도 실천이성에 의해 결정된다. 어떠한 교전 국가도 시민에게 방위수단을 허용하여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방위수간은 시민으로 하여금 시민임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방위수단을 허용하기에 국가는 스스로 국가로 간주하는 권리, 국제법에 입각하여 처우되는 권리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교전국은 암살자 및 독살자를 임명하고, 자국 시민을 허위 선전에 이용하며, 이성으로부터 부여된 국제법을 매우 무참하게 훼손한다. 그와 같은 배신행위에 의해 영속적인 평화의 기초를 굳히기 위해 필요한 신뢰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금 풍요한 원리로 되돌아간다. ‘전쟁에 있어서 이성에 요구되는 장래의 평화를 뒤엎는 모든 것은 불의다.’ 정복한 적에 대해 피해에 대한 배상으로서 교부금과 세금을 부담시키는 것은 실천이성 앞에서 허용되는 일이다. 이에 반해 피정복국민으로부터의 약탈은 국제법에 대한 중요한 위반이다. 피정복국민은 싸워야 할 적이 아니며, 적은 정부이기 때문이다.“<칸트철학 입문>

 

 

 

 

 

 

 

 

 

 

 

 

 

 

 

 

 


“칸트에 따르면 이성은 원래 규범적 목표들을 판단하고 목표들 사이의 충돌을 조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극대화시키는 기능적, 도구적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두 측면 사이의 긴장 관계가 계몽주의 사상의 퇴락을 이해하는 열쇠다. 호르크하이머와 이도르는 도구적 이성의 우위가 근대 서양의 행로를 특징짓는다고 주장한다.

 

 

합목적적 행위 관점에서 볼 때 가치 합리적 행위가 불합리하게 보이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함목적 행위란 궁극적 목표의 정당함과 참됨의 여부를 가리지 않고 주어진 목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달성할 것인가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어떤 목표의 정당성에 관계 없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에 대한 측량이 지배적인만큼, 관료행정 영역은 ‘형식적 비인간화’로 가득 차게 된다. 만인이 형식적 규칙에 복속되며 인간적 고려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점증하는 형식적 합리화(합목적 합리화)는 비합리성의 심화를 동반한다. 예컨대 경제 행위에서도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돈벌이 행위는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돈 버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돈벌이 행위는 궁극적으로 비합리적이다. 합리화 과정 속에서 배태된 비합리성은 수단과 목표의 도착이라는 관점에서 해명될 수 있다. 형식적 합리성을 극대화시키다 보면 애당초 수단에 지나지 않던 것이 목표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수단은 차츰 독립적인 가치로 전환하며, 인간과 그의 필요에 봉사한다는 원래의 목표를 망실하게 된다. 합리화 과정은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정교화에만 전념하게 된다.

 

 

점증하는 형식적 합리화가 빚어내는 이성의 도착 현상을 베버는 ‘우리 시대의 운명’이므로 감수해야 하며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본다. ‘끊임없이 불가능한 목표를 지양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가능한 것을 성취할 수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영웅이 되어야만 한다’고 베버는 말한다. 이는 공소적하고 체념적이다.”<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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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자기 이해와는 무관하게 실제로 우리가 존재하는 대로의 인간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대로의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으로서 우리 정체성은 해석에 대해 열려 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들은 우리의 자기 이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들은 우리의 자기 이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들 중 하나를 확신하면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을 닮기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지 우리가 무엇인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당위적으로’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이기적인 생존 투쟁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가 믿고, 그리하여 인간들 간 관계가 이기주의적 원칙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부당하게도 ‘존재’로부터 ‘당위’로 이행한 것이다. 그것은 흄이 우리에게 범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바로 그 논리적 비약이다.

 

 

존재로부터 당위를 연역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소위 ‘자연주의 오류’ ‘자연법 오류’에) 빠진다면 우리는 과학 이론으로서의 다윈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최적자(最適者), 즉 강자 권리인 진화론 주장을 빌려 사회를 조직하는 규범으로 승격시키는, 다윈주의에 대한 정치적 해석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서양 철학사 2>

 

 

 

 

 

 

 

 

 

 

 

 

 

 

 

 

 

 

“존재와 당위가 서로 논리적으로 무관하다는 점에 대한 흄의 지적은 많은 철학자에게 서양 도덕 이론 대부분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졌다. 도덕 철학자 대부분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을 정교하게 제시하고 사용하여 덕에 관한 도덕적 주장들, 인간에 있어서의 선, 도덕적 옳음 등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흄 주장대로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은 인간 능력과 성향 그리고 인간이 실지로 행위하는 방식 등에 대한 사실(事實) 기술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는 존재 명제들이다. 반면에 도덕 판단은 규범적이다. 도덕 판단은 우리 특성이 어떤 것이어야만 하며 또 우리가 어떻게 행위하여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언급한다. 따라서 도덕적 주장들은 당위 명제들이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행위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행위하여야만 하는가와 관련된 또 우리가 어떤 특성을 지녀야만 하는가와 관련된 어떤 것도 도출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바 그대로의 인간은 그가 행해야만 하는 바를 행하지 않고 지녀야만 할 바를 지니지 않을 수도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기술하는 명제로부터 어떤 도덕적 신념이나 도덕적 명제도 도출할 수 없다. 존재/당위에 관한 흄의 구별은 많은 현대 도덕 철학자들이 가치 평가적인(규범적인) 판단과 사실 기술적인(사실적인) 판단을 구별하는 근원이 되고 있다. 현재 철학자들은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사실 기술적인 언명을 하는 것과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여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가치 평가적인 언명을 하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인 간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적 간격은 당위 명제가 사실 명제 의미와는 구별되는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의 결과이며 이러한 차이는 사실 기술적인 명제에서 가치 평가적인 명제를 연역할 수 없다는 점을 함축한다.

 

 

존재와 당위 사이 간격은 또한 사실 기술적인 명제에서 어떤 규범적인 명제라도 귀납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지를, 즉 우리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회의하게 만든다. 연역적인 증명에서는 결론이 언급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이미 전제에 언급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규범적인 명제와 사실 기술적인 명제가 서로 다른 형식의 의미를 지닌다면 어떤 규범적인 결론도 사실 기술적인 전제에 이미 내포되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문제가 그 방향만 바뀌어서 귀납적인 추론의 경우에도 발생한다. 귀납적인 논증에 있어 우리는 특수한 진술의 일반화를 통하여 일반적 진술을 이끌어낸다. 만일 특수한 진술이 사실 기술적이라면 이로부터는 어떤 규범적인 일반화도 이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연역적이고 귀납적인 증명 방식이 우리 믿음을 정당화하는 수단의 전부라고 본다면 흄이 제시한 존재-당위 구별은 어떤 행위는 옳고 다른 행위는 그르다고 또는 어떤 형태의 특성은 선하고 다른 형태의 특성은 그르다는 등의 사실을 인식하는 우리 능력을 의문시하도록 만든다. 인식은 증명 또는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 흄의 구별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규범적인 신념을 사실 기술적인 진리에 근거하여 증명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지가 매우 의심스러워진다. 아니면 규범적인 주장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방법을 생각해내기란 몹시 어려운 듯 보인다. 따라서 존재-당위 구별은 오늘날 우리가 비인지주의라고 부르는, 즉 도덕적 믿음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낳았다. 비인지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옳고 그름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서양 윤리학사>
 

 

 

 

 

 

 

 

 

 

 

 

 

 

 

 

 

 


“데이비드 흄은 국가 및 법에 관해 홉스 및 로크와는 다른 고찰을 하였다. 흄에 의하면 인간의 비사회적, 무법의 사회 상태는 일찍이 존재한 일이 없다. 오히려 인간은 태고로부터 사회적 생활을 하였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는 암묵의 일치에 의해 법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계약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국가도 계약에 의해 기초를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서 역사적으로 발생했다.

 

 

칸트도 결코 홉스, 로크 및 루소와 같이 여러 국가가 실제로 계약에 의해 기초를 두고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흄과 더불어 여러 국가의 성립은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계약 사상을 가치 없는 것으로서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이성에서 생긴 효과 있는 통제적 원리로서 용인했다. 이리하여 국가는 마치 국민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처럼 생각되어야 한다.

 

 

따라서 칸트는 당시 법학 및 국가학을 지배해 온 자연법학파의 지반에 서 있었다. 이미 중세 이래 그와 같은 해석은 싹트고 있었다. ‘실정법과 아울러 우리 이성에 존재하는 법도 존재한다. 이 자연법이 실정법과 국가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이 인간의 자유의지 위에 전적으로 확립되고, 거기에서 성장한 것과 같이 법철학도 인간 자유의지 위에 확립되고 거기서 성장하였다. 자유의지 이념은 인간의 이성에 존재하며, 실현을 열망하고 있으므로 이 자유가 작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인류의 사명이다. 이 상태야말로 법률적 상태, 즉 시민적 사회의 상태이다. 이 상태 없이는 모든 개인은 자기 자유를 남의 자유의 희생 아래 행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일반적으로 각자 자유를 침해하게 된다.

 

 

칸트에 의하면, ‘자유는 인간의 태생적인 유일한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법 또는 모든 이성적인 법은 밑바닥에 있어서 자유라고 하는 유일한 내용을 갖는 것이다. 모든 자연법, 예컨대 평등한 법은 모든 도덕률이 정언적 명법에서 생기는 것처럼 이와 같은 근원적인 법에서 생긴다. 자연법 및 그것과 함께 모든 법철학을 유기적으로 그의 철학에 입각시켰다.

 

 

이성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목적 자체인 것과 같이, 법률 위반도 명령을 범하였다는 다만 그 이유만으로 처벌될 수 있는 것이다. 죄이기 때문에 처벌된다. 그러므로 국가의 형법은 그 궁극적 근거를 실천이성의 명법, 다시 말한다면 형벌의 정의(正義)의 명법에서 갖는 것이다.

 

 

칸트의 해석에 의하면 재판관에게 있어서는 모든 범죄는 범죄를 자기 규칙으로 하는 범죄자 격률에서 생긴다는 원칙이 결정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범죄가 감성적 충동에서 유래한다고 하면 죄는 감성적 존재자로서의 그에 의해 범해진 것이며, 그에게 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재판관은 법과 형벌의 개념에서 요구되는 자유의지 입장에 있어야 한다. 확실히 감성의 영향으로도 돌려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재판관에게는 ‘자연적 장애가 작을수록, 그리고 의무의 밑바닥으로부터의 장애가 클수록 그것에 비례하여 법률 위반에는 더욱 많은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라는 규칙이 타당한 것이다. 재판관은 범죄자의 행위 순간의 심리 상태를 오인하지 않도록 깊이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판결의 기초는 자유의지를 인정해야 한다.“<칸트철학 입문>

 

 

 

 

 

 

 

 

 

 

 

 

 

 

 

 

 

“민주주의의 개인적 사상은 개인이 자연법에 근거한 생득적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에 입각해 있다. 이 사상에 의거하여 민주 정치의 기능은 창조를 하거나 혁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존 권리를 해석해서 적용하는 일이다. 왜 민주주의 전통에서는 정치 단체 내의 소수파 권리가 중요시되고 있는가 하는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사실 다수결은 필요하고 또한 편리한 방법이다. 하지만 소수파에 속한 개인에게도 다수파에 속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생득 권리가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과두 정치의 사상이다. 대중 속에 빠져들기를 원치 않는 선택된 소수의 진취적 기상을 가진 사람들의 사상이다. 근대 사상에서 자연법 역할은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현존하는 권리를 신성화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려는 기도에 대하여는 부도덕하다는 낙인을 찍는 데 있었다. 자연법에 뿌리를 박은 개인 권리에 입각한 사상은 과두 정치이고 보수적인 18세기의 자연적 산물이었다. 이 사상이 인민 주권의 지상(至上)을 선언한 혁명의 격동 속에서 도전을 받고 전도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새로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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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필연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며 부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지옥에 가야 했을까? 모든 것이 필연(신의 뜻)이라면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다. 죄가 없다면 벌도 없다. 벌을 주기 위해서는 ‘우연’이 필요하다. 유다는 우연히 선택된 것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단지 재수가 없었던 것일까?

 

 

사실 세상은 이보다 더욱 영악하다. 세상은 이제 우연을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유다는 자유의지로 예수를 팔아넘겼다. 자유의지는 우연이 아니다. 복권을 뽑기 전에는 모든 것이 우연이지만 일단 결과가 나오면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된다. 유다는 우연히 선택된 것도 억울한데,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비난마저 받아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신이 정한 필연이지만, 처벌이라는 결과의 원인은 나의 자유의지란다.”<떨림과 울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역사적 종교를 비판적으로 연구할 경우, 도덕 기초 이론을 가장 순수하게 포함하는 가장 완전한 종교로서 현재의 종교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연구의 결과, 칸트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얻었다. ‘기독교는 유일한 도덕적 종교다.’ 기독교의 근본 사상은 이성종교의 근본 사상과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의 신앙 교조가) 단지 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는 것이 의무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칸트 이 의무를 그의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 있어서의 종교>에서 완수하고 기독교의 신앙 교조의 순수한 이성 내용을 밝히려고 생각하였다. 계시종교는 이성종교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전제는 이성종교의 체계를 확립하는 일이다. 칸트는 이 전제를 수행한다. 그의 도덕 체계는 동시에 이성 종교의 체계이다. 여기에는 도덕률을 신의 명령이라 생각하는 것이 전제로 되어 있다.

 

 

칸트는 기독교의 근원적 교의에서 출발하여 그 이성 내용을 밝히고, 기독교가 이미 이성종교 또는 도덕체계에 포함되어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기독교 교의에서 해석하려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있어서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밝혀진 것, 또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최초의 인간들(아담과 이브)이 다만 인간성의 선소질(협조적 사랑, 즉 남의 견해를 존중하려는 경향성)을 따르기만 했으면 결코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는 또 말한다. 최초 인간들은 그들의 의지의 충분한 동기로서 하나님의 명령, 따라서 도덕률에 따르지 않고 그들이 도덕적 법칙에 위배되지 않을 때에만 선이 될 수 있는 다른 동기가 있지는 않을까 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의 준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의심한 결과 마침내 도덕적 법칙에 위베되는 감성적 동기를 그들의 의지 결정을 위한 원칙으로 인정하고, 도덕률의 외침을 외면하기까지 한다. 이리하여 악은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이 타락죄는 외부로 나타나는 것이다.

 

 

성서의 유추 도식에 따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완전히 순수이성의 파악과 일치된다. 인간 본성에 있어서는 선을 추구하는 소질이 도덕법 형태를 취하여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이 소질을 그들의 의지 결정에 있어서 받아들이는가 안 받아들이는가, 즉 도덕법을 그의 행위 원칙으로 삼는가 아닌가가 문제된다. 감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이 언제나 충동을 감성계로부터 받는다. 그리고 이 도덕률에 관계없는 충동을 격률로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나타내는 바에 의하면 인간은 실제로는 많은 도덕법에 위배되는 격율을 그의 의지에 도입하고 있다. 이 법칙에 위배되는 격률의 채택은 인간의 타락죄이다. 모든 인간은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은 부도적적 격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인간들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들의 타락죄는 결코 성서가 최초의 인간들에 관해 쓴 것 같은 시간적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시간적 한정도 없는, 단지 이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예지적 행위로서 고찰되어야 한다.

 

 

인간이 자유로이 행동하는 한, 그는 초감성계 일원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의 의지에 악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감성계에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런 시간 한정도 받지 않는 행위다. 그렇다면 개개인이 언제 악의 격률을 자신에게 도입하였는가를 묻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모든 인간이 그들의 가장 어린 시절부터 선을 추구하는 소질과 함께 악에 대한 경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성서는 이 인식 불가능한 일 때문에 비유를 사용하여 이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성서는 그 이상의 것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칸트는 원죄의 교의를 물리쳤다. 우리는 죄를 상속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로운 예지적 행위에 의해 우리들 위에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 해석에 따르면 다음 말이 성서의 진정한 뜻이다. ‘너 자신이 악을 너에게 들어오게 하였다. 너는 너의 성격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너의 행위의 책임은 너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이 원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타락죄는 모든 인간에게 새로 생긴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결부되는 일이다. 원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에의 이 패배상태로부터 탈출하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음의 혁명에 의해 다시금 도덕률을 감성의 동기 위에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적 개선은 외부로부터 도덕을 점차 개혁해 감으로써 밝혀지는 사고 방법의 변화와 함께 시작된다. 기독교는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각자가 보다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도록 실천해야 한다.“<칸트철학 입문>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정론(필연성 학설)에 의하면 인간 행동과 욕구, 사상 등 모든 것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결정론이 참이라면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반면 만약 결정론이 거짓이라면 몇몇 사건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기는 일이 된다. 하지만 우연에 의해 생기는 것은 인간 통제력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경우도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자유 의지에 관한 문제는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기 쉽고,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사람들이 자유론을 그 반대론보다 더 잘 수용하는 이유는 주로 종교에서 발생한다. 자유 의지는 종교와 도덕에 있어 극히 본질적이어서 이 필연성이 없다면 곧 종교와 도덕이 완전히 전복되어야 할 정도다. 말하자면 그 밖의 모든 가정 또한 신이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법칙은 모두 보상과 징벌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보상과 징벌이라는 이 두 동기는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선한 행동을 낳고 악한 행동을 방지하는 기초적 원리로 가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향력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향력은 일상적으로 행위와 결합된다. 상식은 이 영향력을 원인으로 간주하며 내가 확립하려고 하는 필연성의 사례로 보아야 한다.

 

 

신을 입법자라고 생각하고 신이 인간을 그 법에 복종시키기 위해 징벌을 가하고 보상해 준다고 가정되는 한, 이 추론은 신의 법칙에 적용해도 역시 견고하다. 하지만 나의 주장은 신이 주재적인 능력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가증스러움과 흉함 때문에 범죄를 응징하는 자로 간주될 때조차, 인간 행동에 필연적 연관이 없다면 정의와 도덕 형평에 맞게 징벌을 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초에 징벌을 가하는 것이 이성적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미움 또는 분노 따위의 항상적이고 보편적인 개성은 인간 또는 사유나 의식을 타고난 피조물이다. 그리고 무언가 범죄적이거나 불법적인 행동이 미움이나 분노 따위의 정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오직 그 사람에 대한 행동 관계 또는 연관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의지에 대한 자유론 또는 우연론에 따르면 이 연관은 없어져 버린다.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아주 무의식적이고 우발적인 행동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없다. 행동은 바로 그 본성 때문에 순간적이며 또한 곧 소멸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이 그 행동을 수행하는 사람의 성격과 성향 따위에 있는 몇 가지 원인에서 유래되지 않는 경우에, 그 행동은 그 사람에게 고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행동이 선하다고 해서 그에게 명예가 될 수 없고, 그 행동이 악하다고 해서 그에게 불명예가 될 수 없다. 행동 자체는 비난받을 수도 있다. 즉 행동이 도덕성과 종교 따위의 온갖 규칙과 상반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행동은 인물에게 지속적이거나 항상적인 무언가를 낳지 않으며, 또한 그런 성질의 것을 전혀 남겨 두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 행위 때문에 징벌과 보복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유의 가설에 따르면, 사람은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다음에도 마치 갓 태어난 순간처럼 순진무구하며, 사람의 성격은 자신 행동과 전혀 무관하다. 사람 행동은 자신 성격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므로 행동의 사악함도 성격의 타락에 대한 증거로 활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 의견은 이와 상반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오직 필연성 원리에 입각하여 자신 행동에 따라 상벌을 받는다."<인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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