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 - 길가메시에서 하버마스까지 흐름을 꿰는 서양 철학사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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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르크스

”흔히 이윤은 상품 제조 원가에 덧붙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관행일 뿐 실제 이윤이 생기는 원리와 무관하다. 무엇보다 그 논리는 상식적으로도 허점이 있다. 사회에서는 누구나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다. 그러므로 이윤이 상품 원가에 보태지는 것이라면 자본가가 생산자로서 얻는 모든 이득은 소비자로서 잃게 된다. 사회 전체로 볼 때 판매의 총액과 구매의 총액이 같아지므로 이윤이 생겨날 구석이 없다.


이런 모순이 빚어진 이유는 이윤을 생산 관점에서 보지 않고 유통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윤이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 이미 상품과 생산된다고 말한다. 물론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았으므로 아직 이윤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이윤의 원천인 것은 사실이다. 생산 과정에서 생산된 이윤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서 존립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잉여가치 생산이다. 또한 자본주의 착취가 이루어지는 메커니즘도 바로 잉여가치에 있다.


마르크스 유물론은 19세기에 팽배한 이성 중심주의 자유의지론에 일침을 가했다. 데카르트가 인간 이성을 해방시킨 이후 철학적 추세는 모든 것을 이성 중심주의로 해석하고 인간 자유의지를 극대화했다. 그 정점은 바로 칸트와 헤겔이다. 하지만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며 ‘인간은 자신 의지와 독립적인 불가피한 관계’ 속에 있다고 볼 때 마르크스 입장은 이성과 자유의지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곧이어 등장하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과 맞물리면서 현대 철학의 기본 전제를 이루게 된다.


그보다 더 현대적인 사상의 궤적은 자본주의 분석 근간을 이루는 가치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성 중심주의의 전통적인 사상이라면 아마 질적인 측면, 즉 사용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었을 게 틀림없다. 사용가치는 근대의 특성인 개인적 차이를 드러내지만 교환가치는 개성을 무시하고 그저 가치를 양으로만 환원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교환가치 자체를 추구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성이 떨어져 나간 데 이어 인간 자체도 중심에서 탈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상상은 20세기 구조주의 인식론의 예고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교환가치 개념은 실체적 사고에서 관계적 사고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개별 상품이라는 실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나, 교환가치는 상품 자체보다 상품으로 표상되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 - 이를테면 생산 과정에서의 분업, 유동 과정에서의 시장 -를 포함하며, 이것이 상품의 더욱 유의미한 측면이다. 가치는 경재학 용어 해당하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마르크스 교환가치는 스피노자가 자연을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양태 개념을 도입하여 관계적 사고로 파악한 것을 연상시킨다.


14 공리주의

정치에서 흔히 보는 경우지만 야당 논리는 늘 복잡다단한 데 반해 여당 논리는 언제나 단순 명쾌하다. 권력 쥔 자가 머리를 복잡하게 굴릴 필요가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 철학은 난해하고 정교한 마르크스 철학과 달리 소박하다고 할 만큼 단순하다. 이른바 공리주의를 주창한 벤덤이 그렇다. 그는 많은 사람이 행복을 느끼면 그게 바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쾌락이고 불행은 고통이다. 칸트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도덕을 필연의 법칙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벤담은 칸트의 노력을 가볍게 일축한다. 도덕에 무슨 원인이 있는가? 그저 결과가 좋으면 도덕적일 뿐이다.


벤덤은 쾌락을 얼마든지 과학적으로 지수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행복은 성적순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공리주의는 인간주의와 관련지어보면 묘하게도 역설적이다. 비인간적(유물론)이라는 비난을 받는 마르크스 사상은 사용가치를 양화하지 못한다는 인간주의 입장을 취했지만, 벤담의 ‘인간주의적’ 공리주의는 실상 비인간적인 계량화를 통해 쾌락을 재단하고자 한다. 경제학자들이 이른바 한계효용이라는 얄팍한 개념을 만들어 인간 욕구를 지수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언뜻 생각하면 행위 동기를 따지는 칸트의 윤리학보다 벤담의 도덕은 결과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더 유용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은 개인적으로는 부도덕한 짓이지만 한 번의 거짓말로 많은 사람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경우라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도덕은 편법에 불과하다. 공리주의는 유용성과 실용성을 강조하기에 행복과 쾌락이라는 원래 목표에도 어긋날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사회 소수이자 경제 약자인 장애인을 사회에서 돌볼 이유가 없다.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를 양화시키는 것과 동일하게 쾌락을 순전히 양으로만 환산하는 벤담의 관점에서는 질적으로 다른 쾌락의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특히 공리주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질적으로 높은 쾌락, 이른바 고급문화의 지평이 사라진다. 양적인 관점만 앞세운다면 단기적으로는 고급문화가 타격을 입고 장기적으로는 문명 진보가 멈춰버릴 것이라고 존 스튜어트 밀은 말한다.


14 세상에 열려있는 창문

목적론이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설명이 가능한 건 필연이고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우연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원래 목적론은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목적에 비추어 설명하면 결과가 원인이되는 순환론, 동어반복 성격을 탈피할 수 없다.


현상에서 목적을 빼면 생성만이 남는다. 현상은 목적을 향해 접근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연으로 점철된 변화의 과정이며, 무한한 생성의 흐름이다. 그리고 모든 생성은 창조다. 생성의 연속적 흐름에서 생명과 물질이 창조된다. 생성이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강조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실증주의자들이 그런 상식을 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연속성이란 시간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살아 있는 것은 생명의 흔적을 시간에 남긴다.’ 그런데 실증주의는 시간 차원을 완전히 배제하고 주체가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착각한다.


지성은 인식 대상을 구분하고 분리해서 고립화한 뒤에, 즉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든 뒤에 관찰하고 분석한다. 19세기 자연과학의 발달,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그런 지성의 힘이 최대한 발휘된 결과였다. 베르그송은 지성이 인간의 불행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럼 지성이 아니라면 생명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본능이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본능은 단순한 추동이나 욕망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는 본능의 최고 상태를 직관이라고 본다. 본능과 직관은 대상을 통째로 파악한다. 물질처럼 낱개로 구분되는 대상이라면 모르되 생명처럼 연속적으로 흐흐는 대상이라면 그대로 바라보는 게 올바른 이해가 아닐까?


이성의 시대를 지배했던 경험론과 합리론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둘 다 분석을 인식 수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었다. 분석의 특징은 대상을 실체화한다는 데 있다. 실체화하면 일단 이해하기는 쉽다. 대상을 배경과 맥락에서 분리해 오로지 대상 자체만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대상에 관한 명확한 앎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대상을 실체화하면 항상 대상들 간의 관계가 문제시될 뿐 아니라 운동이 왜 일어나는가를 별도로 설명해야 한다. 특히 다른 대상과 관계 속에서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런 분석적 방법은 대상에 관한 고립된 앎조차 준다고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상호 연관된 대상, 운동하는 대상을 연관된 그대로, 운동하는 그대로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그 방법이 바로 직관이다. 직관은 실체의 개념 대신 과정과 생성으로 대상을 바라보도록 해준다. ‘사물이나 상태는 우리 마음이 생성 속에서 포착한 표상이다. 모든 사물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운동만이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운동은 실체의 움직임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항상 주어(실체)와 술어(움직임)를 병립시킬 수밖에 없었고, 주체-대상, 주관-객관의 이원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직관은 주어와 술어가 뭉뚱그려진 전체를 통째로 인식할 수 있으므로 이원론의 덫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흔히 사회 존속과 발전을 위해서는 ‘모범 시민’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베르그송에 따르면 그것은 ‘닫힌 사회’에 안주하고자 하는 발상에 불과하다. 직관이 분석보다 중시되며, 철학이 과학을 안내하는 창조적인 사회를 생성하기 위한 과정은 바른 생활의 시민들이 담당할 수 없다. 그보다는 변화를 꿈꾸는, 기존 사회 질서에서는 ‘일탈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몫이다.


인간의 본질이란 없다. 인간은 마치 빈 그릇과 같아서 그 내용물에 따라 정의되는 존재다. 다른 누구도 나를 대상화해 정의할 수 없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 스스로를 고정불변으로 정의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이 실천 속에서 스스로 규정하고 해석하는 존재다. 수천 년 동안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숱하게 가정되고 정의되고 수정되었던 인간 본질, 본성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신의 피조물이다? 이성적 존재다? 성선설? 성악설? 다 쓸데없는 소리다. 존재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가정하고 있으니까.


인간은 응고화된 실체가 아니므로 그 자체로는 정의될 수 없다. 베르그송은 인간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생명을 고체화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인간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 같은 존재다. 그것도 창문이라는 실체와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음’이라는 상태로 존재한다. 본질이 없다는 말은 뿌리가 없다는 말과 통한다. 자체의 실체적 근거가 없기에 인간존재는 불안을 숙명처럼 안고 살 수밖에 없다. 이 실존적 불안은 막연하면서도 생생하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기분 나쁜 불안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섬뜩하다’고 표현한다. 이 섬뜩한 불안을 잊기 위해 인간은 거기서 도망치기 위해 허구적 근거를 만들고 그것에 집착한다. 특정한 규범을 세우고 그것에 순응하는 방식 - 예컨대 종교에 의지하는 삶 -이 도피의 사례다.


그런 도피는 인간인 이상 누구나 짊어질 수밖에 없는 실존적 부담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도적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것을 ‘타락’이라고 부르며, 일상생활에 파묻힌 ‘평균적 인간’으로 남으려는 태도라고 비난한다. 그에 따르면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 일반에 대한 관심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자세야말로 인간존재 본연의 모습이다. 하이데거는 평범한 사람에게도 실존적 윤리를 요구한다.


15 언어

20세기 철학자들은 더 이상 참된 앎, 즉 진리 같은 게 있다고 믿지 않았다. 진리가 존재하려면 우선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본질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런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 철학에서는 선 같은 윤리학의 주제, 아름다움 같은 미학의 주제를 다루었고 선과 아름다움의 본질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생각은 정반대로, 우리가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의 실제 사례들을 본 탓에 거꾸로 본질 같은 것을 추상하게 된다고 말한다. ‘아무리 많은 종류의 게임들을 모두 고려한다 해도 모든 게임이 공통적인 것, 즉 ‘게임 일반’과 같은 단일한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엇갈리면서도 겹치기도 하는 일련의 유사성은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가족 유사성’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본질 같은 개념을 추상하게 된 이유가 언어 구조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았다. 결국 언어다!


인식론의 한계가 언어의 한계로 전화된 근본적인 이유는 철학적 사유를 이성과 의식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성과 의식은 자기 완결적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 비합리와 무의식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비합리와 무의식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그 형이상학 체계 안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언어가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유 관계에서 전통적 형이상학은 대체로 사유가 언어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상식적으로도 생각을 먼저 하고 그것을 언어로 정리해 표현한다는 발상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언어가 무의식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무의식은 경험의 차원에 속하지 않고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으므로, 언어는 사유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식 통제를 받지 않으므로, 언어는 사유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유를 낳는 근원이 된다.


라캉은 ‘무의식이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 말은 무의식이 체계적이라는 것과 더불어 언어 자체가 무의식이라는 것을 뜻한다. 사유가 선행하고 사유의 내용을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수단이 언어라는 전통적인 언어관은 전복된다. 언어가 주체를 규정한다. ‘내가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드러난다’라는 것이 바로 라캉 입장이다. ‘아, 말도 말대로 못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말도 맘대로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각도 맘대로 할 수 없다.


16 구조주의

무의식, 특히 사회적 무의식(구조)을 어떻게 인식할까? 개인의 무의식이 농담, 실수, 꿈을 통해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듯 사회구조도 특별한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다. 사실 구조는 언제나-이미 드러나 있으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탓에 평소 당연시되고 넘어갈 따름이다. 구조가 명백히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알리바이, 즉 부재증명의 원리를 사용하면 된다. 우리는 드러난 것을 보는 데 익숙하고 숨은 것을 보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드러난 것을 숨기면 숨은 것이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의 문법에서는 당연시되는 게 당연시된 상태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만 감독이 원하는 장면에 관객 주의를 모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배경에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누구도 보지 않지만 누구도 보지 않게 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따라서 당연시되는 것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숨은 것을 찾아내고 당연시된 것을 의문스럽게 여기는 구조주의적 관점이 없으면 진정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숨은 것을 포착하려면 정교함이 필요하다. 선진사회가 누구의 눈에도 쉽게 보이는 경제성장이나 사회적 인프라의 구축보다 장애인이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더 중시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진보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가진 좁은 지역 너머에 실제로 인간이 축적해온 무한한 풍요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런 입장은 과거에 이루어진 것을 과소평가함으로써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을 얼뜯는 셈이다’라고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말한다.


17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사회관계를 은폐하고 위장하는 기능을 한다. 기업의 중간 관리자는 자본가가 아니라 엄연한 노동자 신분인데도 자본가 입장을 대변하고 때로는 다른 노동자를 탄압하는 역할을 자임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으로 기능하는 사례다. 대부분 사장이 될 가망이 없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이나 리더십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는 것도 마찬가지 사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도 아니고 ‘의식’도 아닌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주체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를 근절하려는 수단도 달라져야 한다. 전통적인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투쟁이 병행되어야 하며,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의 공동 전선이 필요하다. ‘진리는 겉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끝없는 해석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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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8-04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중간유통단계가 축소되었지만, 이윤율의 하락과 이윤량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의 거대화는 가속화되는 현상을 본다면, 마르크스 이론에서 말하는 이윤의 원천이 생산단계에서 나온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5 18:30   좋아요 1 | URL
노동가치론은 여전히 논란이 많은 이론인 것 같습니다. ^^
 
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 - 길가메시에서 하버마스까지 흐름을 꿰는 서양 철학사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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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가신 저자를 추모하며...
더 많은 글을 남기셨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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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버트런드 러셀과 성리학


"후대 관점에서 전 시대를 비판할 때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 역사를 볼 때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무역거점을 놓고 한반도를 경영했다는 주장이나, 한반도가 그곳을 창구 삼아 일본을 지배했다는 주장은 둘 다 터무니없는 말이다. 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없었을 때, 두 나라에 걸쳐 존재했던 고구려라는 고대 국가를 놓고 서로 자기 나라 역사라고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지적인 분야도 마찬가지다. 해당 시대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학문 내용만 문제 삼으면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할뿐더러 그 비판도 결국 후대에 똑 같은 방식으로 비판 대상이 된다. 버트런드 러셀이 2500년 서양 철학사를 저술하면서 자신 철학적 토양인 분석철학 관점에서 과거 철학을 비평한 것은 그의 명성을 무색하게 하며, 왜 그 저작이 서양 철학사의 고전으로 꼽히는지 의아하게 만든다(국내 번역서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것은 러셀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마저 의심하게 한다). 그것보다 더 고전에 속하는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수백 년 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곳곳에서 ‘논하여 가로되’라는 문구 아래 자신의 진부한 유교 사관에 바탕을 둔 민망한 비평을 달고 있는 것도 문제다.

 

 

1127년 요나라에 이어 북방에 새 주인인 된 여진족은 송나라의 수도를 빼앗았다. 남송의 지식인들은 북방의 바람이 거세진 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천하는 머잖아 중화의 질서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이데올로기에 철학 옷을 입혔다. 그 중 한 명이 성리학을 주창한 주희였다. 이기론의 이는 바로 중화 세계고, 기는 오랑캐 세계다. 그렇지만 이가 만물의 근본이지만 기도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다. 천하에 중화의 ‘문명 민족’만 홀로 살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기는 천변만화하지만 이(理)에 존재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이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비록 중원이 오랑캐 손에 넘어갔지만 결국 세상 만물 이치에 따라 다시 한족이 주도하는 중화 세계의 품에 돌아오리라는 의미가 성리학의 이기론이다.

 

 

주희가 바랐던 ‘성리학의 나라’는 엉뚱하게도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한반도 조선에서 실현되었다. 조선은 무늬만 왕국(王國)이었을 뿐 사실상 사대부들이 학자-관료 집단으로 실권을 장악한 체제였다. 이들이 왕을 꼭두각시처럼 다루기 위해서는 조선 왕을 중국 황제의 일개 제후로 간주할 수 있는 중화적 질서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10. 흄


흄이 보기에 자아는 환상의 발명품이다. 우리가 가진 지각들은 서로 별개인데도 연상 작용에 의해 마치 연속성을 지닌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고 그 결과 동일한 자아라는 환상이 생긴다. 즉 자아는 우리 습관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20년 전 태어난 아이가 지금은 다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다. 아이 부모는 이 아이가 그때 태어난 그 아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당연히 여길 만한 근거는 어디 있을까? 흄에 따르면 그 동일성은 어구이며,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착각한 결과다.

 

 

사물의 동일성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는 인상을 관념으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인상 자체는 본래 순간적일 뿐 지속적이지 못한 데 반해 – 따라서 인상의 경우에는 동일성 여부를 따질 필요조차 없다 – 관념은 인상에서 비롯되었으나 때로는 인상과 유리된 채 지속되기에 허구로 빠질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관념뿐인데도 우리는 관념의 지속성을 대상의 지속성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또한 흄은 인과관계도 없다고 말한다.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자연계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가 많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사건들의 순서가 그럴 뿐이지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은 없다. 하지만 우후면 죽순이요, 풍비면 박산인데, 왜 그걸 허구라고 말할까? 물론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흄은 실재의 세계에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 관계를 필연성으로 인식하는 우리 관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실재의 인과관계 자체가 아니라 관념들의 관계일 뿐이다. 누구도 관념 관계를 가지고 곧장 실재 문제를 언급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우리 지식은 관념에 관한 지식이지 실재에 관한 지식이 아니다. 비록 그 관념이 실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실재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

 

 

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서로 별개인 사건을 인과관계로 인식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느 존재에서 다른 존재를 추리하는 것은 우리 상상력에 작용하는 습관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관념과 언어 범위 내에서 원인과 결과를 논하는 것까지 흄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흄은 찬동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을 실재 세계에까지 적용하려는 것은 말하자면 문법으로 자연법을 분석하려는 격이다. 흔히 원인과 결과의 법칙성이 세계 속에 존재하고 인간은 그것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오히려 인간이 그런 법칙성을 인위적으로 ‘발명’한 것이다.

 

 

11. 루소


루소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선거란 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들은 의회 의원을 선거할 동안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그들은 곧바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프랑스 절대주의에 반대하고, 사회계약론을 주창하고, 스파르타와 마키아벨리를 높이 평가하고,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루소 성향이 어떤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그의 정치사상은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에 가깝다. 비록 민주주의를 기본 토양으로 하지만, 루소는 강력한 지도자를 받들고 공동체 이념에 튼튼히 뿌리를 내린 국가 체제를 선호한 듯하다. 그가 말하는 일반 의지에서 그가 그토록 반대하는 절대주의 색체가 묻어 나오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루소가 꿈꾼 나라는 현대 미국이 취하고 있는 대통령 중심제에 가깝다.

 

 

12. 아우구스티누스


신앙과 자유의지 관계에는 모순이 있다. 만약 신이 전능한 존재라면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한다. 또 모든 일을 다 안다면 신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모든 일이 신이 기획한 대로 전개된다면, 곧 필연적이라는 의미이므로 인간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진다.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자신 행위에 대해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죄인을 비난하거나 징벌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결국 신은 전능하지만 사리에 맞지 않는 존재이거나, 합리적이지만 무능한 존재라는 결론이 나온다.

 

 

전능하면서도 사리에 맞지 않는 신의 개념이 나온 이유는 신의 일에 시간 개념을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신이 어떤 목적을 먼저 상정한 뒤 인간과 세계를 창조했고 그 후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게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했기에 모순이 빚어진 것이다. 아우수스티누스는 신과 세계를 확실히 구분한다. 신이 세계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 외부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취하면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을 시간적인 의미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신은 시간을 초월하므로 모든 것을 아는 신의 예지는 ‘나중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의 예지와 인간 자유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논리적인 차이, 즉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물론 신은 처음부터 인간을 자신 행위에 책임을 지도록 창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의 의도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필연성의 제물이 아니며 언제나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해법은 신이 전능하고 세계를 창조했으면서도 막상 인간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신은 인간과 세계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없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인간 생활은 신과 무관하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이제 신은 세계 바깥에 팔짱을 낀 채 유리구슬 속의 인간 세상을 들여다보는 존재가 되었다. 어쨌든 얼기설기 꿰 맞춘 덕분에 인간 고유 영역인 자유의지는 보존되었다. 신의 존재나 역할과는 별도로 인간 이성에 관해 탐구할 바탕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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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뿌리도 없고 가지도 없는 철학자였으니 그의 사상이 피상적이고 괴팍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신은 세계의 창조자도, 진정한 주인도 아니며, 세계의 다양한 사태에 개입하는 존재도 아니다. 신은 그저 무한성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신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만약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의해 약간이라도 영향과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신의 무한성을 해치게 되므로 자기모순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고대 신화의 신들처럼 촐랑거리지도 않고 그리스도교의 신처럼 열정적이지도 않은 신, 그리고 인간을 압도하지 않으며 그저 무한하고 초연하게 존재하는 자연이다. 즉 비인격적인 신=자연은 아무것도 기획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법칙과 필연은 어떤 초월적 존재의 의도나 의지가 아니라 언제나-이미(always-already) 존재하는 제약이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 이외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공들여 신=자연을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스피노자가 그런 난해하고 신비주의 색체가 진한 이론을 전개한 이유는 실체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 개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실체라고 간주한 정신과 신체, 물체는 실상 실체가 아니라 모두 양태에 불과하다. 우리는 실체 자체를 인식하는 게 아니라 실체 속성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속성이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체의 측면이며, 양태와 마찬가지로 속성도 하나의 실체에서 여럿이 나올 수 있다.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은 양태일 뿐 실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두 개 이상의 실체도 존재할 수 없다. 속성이 다른 실체는 서로 상대의 성질을 부정하게 되므로 실체로서 계속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실체가 아닌 양태일 뿐이다. 반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실체가 바로 신이다.

 

 

스피노자가 실체=무한자=유일자=신=자연의 등식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실체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도다.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의 보편자, 데카르트의 실체는 모두 기본적인 정의에서는 옳지만 모두 다수 실체를 가정한다는 문제가 있다. 세계 속에 그렇게 많은 등가적 실체들이 빼곡하게 존재한다면 운동과 변화가 불가능해진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가 겪었던 자가당착인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스피노자의 기획이 어떤 의도인지 분명해진다. 실체를 최소화시키고 실체 대신 양태 개념을 도입해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그의 기획은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온 실체적 사고를 버리고 관계적 사고로 이행하려는 시도다. 바꿔 말하면 철학적 사유에서 실체를 배제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철학을 내내 괴롭혀온 신학을 철학에서 말끔히 떼어내었다. 신학이라는 개가 더 이상 시끄럽게 짖어대지 않도록 커다란 고깃덩이를 던져준 격일까?

 

 

철학의 탄생 이후 수천 년 동안 철학은 뭔가를 밝히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뭔가는 항상 고정된 대상이었고 실체였다. 예컨대 ‘세상 만물의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초기 철학 물음,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스토아철학의 물음 모두 모종의 실체 혹은 실체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였고 ‘신앙과 조화를 이루려면 이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세상 만물 보편자는 실재하는가, 아니면 이름뿐인가’라는 중세철학 물음도 역시 실체적인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처음으로 실체를 한구석에 처박아버리고, 양태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적 물음을 구성했다.

 

 

인간이 자연을 규정하고 대상화하는 관계라고 본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의 자연은 인간을 자연 일부로 포함한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곧 자연이므로 인간은 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신처럼 신이 자신 형상을 본떠 인간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유한자는 유일한 무한자인 신=자연 안에 잠재하는 가능성이 발현된 결과로 생긴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신은 비록 만물을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만물의 근원이며, 신은 세계 자체라기보다는 세계를 조직하는 이치, 섭리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인간은 비록 신의 피조물이지만 여타 존재들과 다른 특권적 피조물이었다. ‘하느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세기> 구절처럼 자연은 인간의 ‘먹을거리’로 신이 마련해준 것에 불과했다. 그리스도교 특유의 인간 중심주의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이르바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인간이 아무런 특권도 갖지 않으며, 자연 속 다른 존재보다 더 존엄하거나 덜 존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의 관점을 탈피해 자연 관점을 취할 것, 다시 말해 수브 스페키에 아에테르니타티스, 즉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것을 권한다. 어떤 면에서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인간 활동이 환경을 악화시켜 인류 문명이 파괴된다 해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인간 아닌 다른 생물의 터전이 될 테니까.

 

 

스피노자는 ‘관념의 순서와 연결은 물체의 순서, 연결과 동일하다’라고 말한다. 흔히 사유는 정신적인 속성이고 연장은 물체적인 속성이라고 말하지만 이 두 가지 속성이 같은 실체에 내재한다고 보는 것은 곧 외부 사물과 내부 관념 간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존재하는 것은 실체 하나뿐이다. 우리는 이 실체를 사유 관점에서 인식할 수도 있고 연장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은 늘 정신과 물체, 관념과 존재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했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인식 태도일까? 혹시 너무나 익숙해져서 자연스러워진 것은 아닐까? 원래 인간은 외부 존재를 대상화시키지 않고 합일하는 방식으로 인식했는데 언제부턴가 아(我)와 비아(非我)를 분리하게 되었고 그런 태도가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기에 용이하다는 생각에서 점차 그것을 체화시킨 게 아닐까? 적어도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관념과 물체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스피노자는 어떤 대상이든 물체로서 이해할 수도 있고 관념으로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물론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은 짖지 않듯이, 그리고 홍수라는 관념이 재앙을 가져오지 않듯이, 사물과 관념은 존재론적으로는 다르지만 ‘인식론’적으로는 구분되지 않으며, 굳이 구분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참된 지식이란 관념적 지식이다. 감각은 우리 신체의 제한된 부분이 자연과 접촉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에 불과하므로 자연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주지 못한다. 그에 비해 관념적 지식은 사물의 모든 속성, 즉 연장, 운동, 경도, 크기, 모양 등을 알게 해주며, 나아가 연역을 통해 또 다른 관념들도 얻게 해 준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관념적 지식보다 한 차원 높은 지식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직관적 지식이다. 관념적 지식은 아무리 타당한 것이라 해도 상대적인 타당성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상 자체에 관한 적합한 지식은 줄 수 있어도 대상을 주변 맥락과의 연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도록 해 주지는 못한다. 이에 비해 직관적 지식은 대상을 전체 체제 속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물론 문제는 있다. 말이 쉽지 이런 지식을 실제로 얻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인식론적 낙관주의를 견지할 만한 근거가 있다. 그는 ‘진리는 그 자체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참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자신 생각이 참되다는 것을 알며, 자신 앎이 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진리는 허위보다 본래 ‘우성인자’라는 말인데, 일단 심정적으로 믿고 싶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지나치게 독단적인 발상인 듯도 싶다. 하지만 진리 속에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없다면 결국 진리를 말하는 모든 이야기는 돌고 돌 뿐이고 그 과정에서 궤변만 양산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 말은 낙관적이면서도 상당한 용기를 담고 있다. 신을 끌어대지 않고 ‘맨 정신으로’하는 말이기에 더욱 그렇다. ‘모든 것이 물에 흘러가버려도 오직 진실만은 남는다’는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한 말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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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회의주의


"사실 회의주의는 그리스 고전 철학의 본류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한 너 자신을 알라며 노골적으로 외치고 다녔으니 당연히 지식에 반기를 들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도 이데아론으로 현세 지식을 깔아뭉갠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부정한 것은 회의주의자들에게 더욱 단단한 근거를 주었다. 플라톤의 인식론에서 이데아 개념만 떼어버리면 결국 참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회의주의 원조 격인 피론은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옳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대체 어디 있느냐고 따졌다. 도덕과 종교는 마치 뭔가 대단한 내적 가치 기준이 있는 척 가장하지만 실은 사람들의 생활 습관에 불과하다. 객관적 진리의 확실한 기준 같은 건 없다. 누구나 자기 생각에 불과한 것을 이론으로 포장해 제시할 따름이다. 피론 제자인 티몬(Timon, 기원전 320? ~ 기원전 230?)은 엄정한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알려진 연역법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한다. ‘무릇 연역은 자명한 원리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런 원리를 과연 발견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늘 다른 것에 의해 증명되어야 하는데, 이런 방식은 결국 무한한 순환 논증을 낳을 뿐이다.’

 

 

객관적 진리에 집착하는 한 지식은 모조리 헛소리일 뿐이다. ‘진리를 묻기 전 누가 진리를 묻는지 물어라.’ 이런 니체의 반지식적 입장은 2천 년 전에 배태된 것이다. 카르네아데스는 신 같은 건 없다고 일침을 날렸다. ‘만약 신이 있다면 무형의 존재이든가 유형의 존재일 것이다. 신이 무형의 존재라면 감각을 통해서 지식을 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신의 존재를 결코 알 수 없다. 반면 신이 유형의 존재라면 다른 사물들처럼 생성과 소멸이 있을 테고 변화를 겪을 텐데, 그런 성질은 영구불변이라는 신의 속성에 맞지 않는다.’

 

 

신이 없다니. 그렇다면 뭘 믿고 뭘 위해 살아야 하나? 해결책은 두 가지밖에 없다. 신에 의존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거나, 아니면 묵묵히 고통을 견디거나 둘 중 하나다. 앞의 방법을 선택한 사람이 에피쿠로스다. 쾌락이 인간을 행복의 나라로 안내한다는 에피쿠로스 주장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려면 한 가지 커다란 공포를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공포다. 죽음이라는 게 인간 앞길에 도사리고 있는 한 근본적인 행복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에피쿠로스는 특히 종교란 죽음을 더 두렵게 만들 뿐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신이 없어도 행복에 이를 수 있듯이 종교가 없어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종교를 배제한 채 죽음을 설명하고 그 공포를 떨치는 방법은 바로 유물론 입장을 강화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토대로 죽음이란 단지 감각과 의식이 없는 상태일 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내세에까지 살아남아 고통을 겪을 영혼이란 없다(영혼이 없어진다면 종교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를테면 죽음이란 태어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죽음도 하등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면 신을 섬기고 종교를 원하고 영혼 불멸을 믿으면 결코 죽음의 공포를 떨칠 수 없으며, 행복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7. 신플라톤주의


이처럼 타락한 현실에서는 때론 관념이 훌륭한 도피처가 될 수 있다. 플로티노스가 주관주의와 신비주의에 경도되고 낡은 플라톤의 관념론을 채택한 동기는 거기에 있었다. 플로티노스는 영혼이 물질이라면 지적 활동이 어떻게 가능하겠냐고 묻는다. 그러므로 물질에서 영혼이 나오는 게 아니라 반대로 영혼이 물질을 만든다. 자연을 만든 것도 역시 영혼이다. 그는 이것을 세계영혼이라고 불렀다. 인간 영혼이 신체를 만들고 신체 여러 부분을 관장하듯 세계영혼은 자연의 여러 부분을 종합하여 하나의 유기체처럼 가능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영혼은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존재 3가지 가운데 서열 3위에 불과하다. 사실 영혼이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이유도 상급의 존재가 영혼에 일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존재는 정신, 즉 누스(nous)다. 누스는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다. 영혼이 누스를 본받아 물질과 세계를 창조한다. 가시적인 세계를 만드는 영혼이 개별자라면 영혼을 움직이는 누스는 바로 예지적인 세계, 즉 이데아다. 실제로 플로티노스는 영혼과 누스를 말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답습한다고 믿었다. 개별자가 이데아의 모방이듯 영혼은 누스의 모방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또 한 가지를 덧붙이는데, 플라톤 철학과 그리스도교를 잇는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한다.

 

 

서열 1위의 존재,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완전하고 궁극적인 존재는 일자(一者)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비록 영원불변의 성격을 지니지만 단일한 존재는 아니다. 거의 개별자의 수만큼 많은 이데아가 존재하는 셈인데, 그에 비해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격이 다르다. 일자는 말 그대로 일체의 형용을 불허한다. 일자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밖에 없다고 플로티노스는 주장한다. 일자는 찬양과 찬미의 대상일 뿐 설명과 형용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어느 것과도 관계하지 않는 절대 지존이 곧 일자다.

 

 

일자가 누스나 영혼에 영향을 주는 방식은 작용이나 창조가 아니라 ‘유출’이다. 작용이라면 원인과 결과를 논하는 인과성의 원리가 적용될 테고, 창조라면 모종의 결핍이 있기에 생겨나는 변화라고 보아야 할 테지만, 유출은 순수한 본질에 의한 산출이다. 일자는 창조의 의도를 가지지 않았으나 세계는 일자에 의해 창조되었다. 플라티노스는 이처럼 플라톤의 일원론적 이원론을 완전한 일원론으로 정비했다.

 

 

일자는 다른 모든 존재를 파생할 만큼 완벽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존재다. 일자에서 파생된 존재를 비존재(非存在)라고 부른다. 물질은 역설적이게도 비존재다.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물질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라기보다는 일자를 제외한 모든 것, 일체의 불완전한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불완전은 완전을 모사하고 지향한다. 비존재는 존재를 꿈꾸고 사랑한다. 하지만 찰나적으로 일자와 합일을 이룰 수는 있어도 완전한 합일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의 이론은 일자와 합일을 이룰 가능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낙관론이며, 죽어야 완전한 합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관론이다.

 

 

플로티노스 이론으로 유일신의 당위가 마련되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인격신의 이미지다. 인격신이어야만 인간이 에덴동산을 나온 이래로 가장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가 될 수 있었다. 초기 교부 철학자들이 신플라톤주의에서 여러 가지 신학적 내용을 취한 것은 당연하다. 일자는 우주의 절대자로서 사실상 그리스도교의 신과 같다. 일체의 욕망도, 영혼도, 이성도 쓸데없고, 오로지 신의 품으로 귀의하려는 의지만 중요하다.

 

 

로마제국의 혼란기를 살았던 플로티노스를 마지막으로, 이오니아에서 시작된 고대 철학은 문을 닫았다. 결과론적 해석이지만 그 과정은 그리스도교를 낳기 위한 오랜 과정이었다. 자연철학으로 시작한 그리스 세계 철학은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넘어갔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인간 이성이 최대한 끌어올려진 뒤부터 신을 영접할 준비를 시작했다. 로마 시대에 들어서는 구세주로서의 신이 탄생했고, 그 신이 남기고 간 종교는 로마제국 힘이 약화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힘을 키웠다. 신을 얻기 전까지는 철학이었지만, 신이 내린 뒤부터는 철학이 아니라 신학의 문패를 걸어야 한다. 바야흐로 인간이 발명한 신이 거꾸로 인간을 규정하는 중세시대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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