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집단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언제나 안간힘을 써야만 한다.” - 니체
우리 뇌는 우리가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반응한다. 그 믿음이 사실에 근거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다른 이들과 행동을 조율하고 싶은 충동을 사회학자들은 흔히 ‘순응 편향’(conformity bias)이라고 부른다. 순응 편향 성향에 따르면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우리를 무차별적으로 끌고 들어가는 지구의 중력마냥 군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우리 본성은 무의식에서 작동하며,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고 인간은 여기서 탈출 불가능한 듯하다. 설명 ‘집단의 선호’라는 것이 완전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뜻을 오해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기대를 잘못 알고 거기에 순응해버릴 위험을 끌어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다수에 순응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집단 환상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사회학자 윌리엄 아이작 토머스와 그의 부인인 도로시가 1928년 제시한 이른바 ‘토머스 정리’(Thomas theorem)는 다음과 같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다.” 우리가 믿는다면, 그러한 믿음에 실질적인 근거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러한 믿음에 따른 결과만큼은 현실화될 수 있다. pp. 24-27. 우리의 사회적 본능은 마치 감정처럼 우리에게 내장되어 있다. 감정이나 사회적 영향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위험하고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p. 33. 집단에 속하는 개인들이 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려야 집단 지성이 올바르게 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선택을 볼 수 있을 때, 그래서 다른 사람 선택을 보고 흉내 낼 수 있을 때, 집단 지성은 순식간에 ‘집단 무지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p. 56.
1841년 스코틀랜드의 언론인 찰스 맥케이가 모방의 연쇄에 대한 책, <대중의 미망과 광기>를 펴냈다. “사람들은 집단 속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가 탐구한 사례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네덜란드의 1634년 ‘튤립 광란’이었다. 네덜란드의 엘리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튤립 구근의 도창적 컬렉션을 절대적 필수품인 양 여기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꽃에는 어떤 내재적 가치도 없었지만, “튤립을 소유하고자 하는 광기는 곧 네덜란드 사회의 중산층을 덮쳤고, 심지어 무역상과 상점 점원들마저도 어느 정도 손을 댈 정도가 되었다’고 맥케이는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한 학자의 추산에 따르면 튤립 광기가 절정에 달했던 1635년, “튤립 구근의 평균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 가격을 뛰어넘었고, 희귀한 튤립 구근 단 하나가 오늘날 돈으로 5만 달러 이상에 거래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맥케이에 따르면, 가격이 요동치다 떨어지기 시작하자 시장의 자신감은 무너졌고, 딜러들은 전반적인 충격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거대한 튤립 열풍은 막대한 튤립 거품 붕괴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 광기가 일시적인 것을 파악한 네덜란드 당국은 선언했다. 이 광란의 정점에서 맺어진 모든 계약은 무효로 선언되어야 한다. pp. 58-59.
이런 식의 사기극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익숙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과연 생수가 정말로 더 깨끗하고 안전한 물이 맞긴 한 걸까?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 지반으로 걸러졌다는 둥, 구름까지 뚫고 올라가는 일본의 명산에서 체취했다는 둥, 숫제 천사의 눈물을 받아왔다는 둥, 온갖 이유를 붙인 고급 생수들은 고작 세 컵 분량에 5달러가 넘게 팔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99퍼센트의 수돗물은 음용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 많은 사람이 생수라고 생각하며 마시는 물은 수돗물이다. 병입되어 판매되는 물 중 절반 이상이 약간의 처리 과정을 거친 수돗물이며, 양대 생수 브랜드인 아쿠아피나와 다사니는 (참고로 이들은 펩시와 코카콜라의 상품인데), 그저 디트로이트시가 제공하는 물을 한번 걸러서 플라스틱 병에 담아 넓은 시장에 판매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병에 들어 있는 물을 생수라고 마실 때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기극에 속는 동시에 거들고 있는 셈이다. 생수를 구입하면 4.5리터짜리 한 병에 평균적으로 1.5달러를 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같은 영의 수돗물을 사용할 때 내는 돈의 2천배에 육박한다.
오늘날의 생수를 둘러싼 현상은 튤립 광란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사실상 거짓말이나 다를 바 없는 무언가에 수천억 달러를 쓰고 있는데, 그런 소비를 별개로 보더라도 그 막대한 플라스틱 병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영향이 실로 엄청나다. 생수 한 잔에는 같은 양의 수돗물에 비해 2천 매나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한편 미국만 놓고 보더라도 플라스틱 생수병의 70퍼센트는 곧장 매립되며 그리하여 토양을 오염시키고 물길을 막는다. 이러한 연쇄 작용 결과 캘리포니아와 하와이 사시 어딘가에는 텍사스주의 두 배 정도 크기를 이룰 정도로 넓은 플라스틱 부유물 군집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pp. 61-63.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비슷한 믿음을 지니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18세기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에 따으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정신적 조화’를 찾고자 한다.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 집단적 정체성이 강화되고, 신뢰, 협조, 평등, 생산성이 강해진다. 소속 집단과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공통의 관점을 형성할 뿐 아니라 비슷한 감정과 세계관까지 갖게 된다. 이는 우리의 핵심적인 가치관을 함양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우리의 삶에 의미가 부여되며 자기 존중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행동과 상호작용이 우리가 속한 집단의 공통적 경험을 확인시켜주기에, 우리 뇌는 갈망하는 행복 호르몬의 분비로 보상을 얻게 된다. 자기 인식이란 우리가 지닌 고유한 특성과 함께 우리가 속한 귀속집단에의 감각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은 우리의 사회적 정체성과 너무도 깊숙이 결부되어 있으며 그래서 우리 뇌는 그 둘을 따로 떼어놓지 못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입장을 정하기 전부터 특정한 관점에 정서적 선호를 드러내거나 호감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순응 편향이 곧잘 작용한다. 귀속집단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결론을 강화하는 것에 불과한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공유하는 감정이 클수록,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귀속집단의 관점에 순응하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이미 특정 귀속집단에 시간과 에너지, 믿음을 투입한 다음이라면, 그래서 그 소속감이 우리 정체성 중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다면, 그 집단의 관점을 우리는 기꺼이 보호하고자 한다. 고통을 무릎쓰고서라도 집단적 관점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귀속집단 바깥에 있는 이를 향해 더 적대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pp. 9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