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믿는다는 것은 우리 행위 가운데 가장 사회적이다. 우리와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유전자를 퍼뜨리듯, 우리는 우리와 마음이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념을 퍼뜨린다. 실제로 우리가 남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들 사고를 바꾸려 한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그들 방식이 우리 관점과 더욱 비슷해지도록 만든다. 숭고한 주장(‘신은 당신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에서부터 평범한 주장(‘신호등에서 좌회전하면 오른편에 우체국이 보일 거예요’)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주장은 말하는 사람 신념과 듣는 사람 신념이 일치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는 때에 따라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예컨대 대표적으로 성공한 거짓 신념은 경제 발전의 망상이다. 부의 생산이 반드시 개인의 행복의 원천일 수는 없다. 가난한 걸인이 부유한 왕보다 더 불행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가난이 더 행복하다는 신념이 전파된다면 시장 경제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지금 가진 것들에 만족하고 산다면 그 경제는 점차 소멸되어 결국 정지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념이 거짓 신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경제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노력할 때만 경제는 성장하는 법인데, 개인은 오직 자신 행복을 위해서만 노력하기에 그들이 ‘생산과 소비가 개인 행복의 필수요소’라는 망상에 빠져야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 여기서 ‘망상’이라는 말이 검은 정장을 입은 몇몇 남성이 어두운 곳에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 이미지를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념이 전파되는 게임에서는 잘못된 신념을 전파시키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가 선량한 대중에게 엄청난 속임수를 쓸 필요는 없다. 비밀 음모 결사단이나 불공평한 법정, 또는 자신 교리를 주입하고 선전하기 위해 교묘한 프로그램을 가진 조작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신념 그 자체가 ‘초복제자(super replicator)’가 되어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그것을 전파하는 일을 스스로 하게 만든다.

 

 

돈과 행복에 대한 신념뿐 아니라 자녀와 행복에 대한 신념도 이런 종류의 거짓 신념에 해당한다. 모든 인류 문화는 그 구성원에게 자녀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가르친다. 미래의 자녀든 현재의 자녀든, 사람들이 자녀를 생각할 때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요람에 누워 있는 아이 볼에 얼굴을 대고 얼러주는 것,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뒤뚱뒤뚱 걷는 사랑스러운 모습, 좋은 대학을 나와 멋진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사탕 하나만 주면 그저 좋아서 안기는 마냥 예쁜 손자 손녀들…

 

 

하지만 자녀를 둔 사람들의 실제 행복을 측정해보면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온다. 부부는 대개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행복의 정도가 떨어지고 자녀가 집을 떠날 때쯤이 되어서야 그들이 처음 누렸던 행복을 회복한다. 우리가 대중지에서 읽었던 것과 달리, 소위 ‘빈둥지 증후군’에서 발견되는 증후라곤 나날이 웃음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행복 패턴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잘 나타난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여성이 어떻게 느끼는지 면밀하게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먹고 운동하고 쇼핑하고 낮잠 자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아이를 돌볼 때 여성은 덜 행복하다고 한다.

 

 

사실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 양육이 엄청나게 고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물론 부모가 되어 매우 보람 있는 순간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엄청 지난 후에나 마지못해 고마운 척하는 아이를 위해 커다란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부모가 되기는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왜 우리는 부모가 되는 것을 매우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우리 사회의 주요 구성원인 주변 사람들과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그들은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을 뿐이다. 다시 말해 ‘자녀는 행복을 불러온다’는 신념은 ‘초복제자’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가족을 버려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녀를 기르고 돈을 벌어들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회 네트워크 매듭으로서, 개인 논리가 아닌 사회 네트워크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고 자녀를 낳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일로부터는 우리가 기대했던 행복을 얻지는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지난 1세기 동안 심리학자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거나 폭력적인 범죄 희생자가 되는 것 같은 비극적인 사건은 피해 당사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속적으로 남긴다고 가정해왔다. 이 가정은 당연시되어 사건을 겪고도 아무런 정서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슬픔 상실’이라는 병리적인 상태에 있다고 진단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슬픔을 보이지 않는 것도 정상일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대다수 사람들은 심리학자들이 가정했던 것처럼 꽃과 같이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나서도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는 탄력적인 존재임이 밝혀졌다. 실제 연구를 보면 유족들은 상당 기간 비통에 잠기지만, 그중 극히 소수만이 만성우울증을 경험할 뿐이고 대부분 사람은 슬픔을 잘 견뎌낸다.

 

 

미국인 절반 이상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강간, 신체적 폭력, 자연재해 등과 같은 트라우마를 경험하지만, 그 가운데 외상 후 병리 현상을 보이거나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자아탄력성은 트라우마 사건 경험 이후에 나타나는 아주 흔한 현상이다’라고 주장한다.

 

 

2.


연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실제로 원하는 대답을 들으면, 자신이 남들로부터 유도해낸 답을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사랑한다고 말해줘’라고 요구하는 말이 그렇게 인기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말해줄 만한 사람을 미리 선택해 놓고, 더불어 그들에게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하고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말을 하게 되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3.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이 존재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실(fact)이라는 단어는 의심 여지가 없고 반박 근거가 없는 현상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실’이란 정해놓은 어떤 기준에 부합하는 증거가 있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 증거 기준을 충분히 높게 잡는다면,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증명이 어렵다. 반면 증거 기준을 충분히 낮게 잡는다면 모든 것이 사실로 인정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에 부합하는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을 판단할 때 불공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내리게 해주는 정보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론을 내리게 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훨씬 엄격한 증거를 요구한다.

 

 

4.


행복감을 느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음악을 듣는 사람은 단순히 음악만 듣는 사람들보다 더 부정적인 정서를 경험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만일 우리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자신 경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연구 결과를 보면,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주의가 산만해지면(이 경우 음악을 듣는 것), 우리 의식적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둘째, 사실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일부러 조작하는 것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위기에 우리 스스로 치사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행복을 비롯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정직하게 얻어진 결론이라고 믿어질 때만 신뢰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의 결과를 즐길 때는 의식적으로 하고, 사실을 조작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한다.

 

 

5.


불쾌한 사건은 단지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그 불쾌함이 줄어든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갑작스런 질병 등과 같은 충격적 경험에 대해 글로 써보는 것만으로도 주관적 행복이나 신체적 건강에 뚜렷한 효과가 있다(병원 가는 횟수가 줄고 바이러스 항체 증가). 그리고 이런 글쓰기를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사람은 글 속에 ‘자기 경험’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 사람들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설명이 불쾌한 사건의 영향을 감소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쾌한 사건의 영향력 또한 감소시킨다는 점이다. (유쾌한 경험을 오래 증폭시키는 방법은 머리 속에 그냥 남겨두는 것이 좋다.)

 

 

6.


쥐와 비둘기 같은 동물들은 제시된 자극에 반응하지만, 사람은 마음속에 표상된 자극에 반응한다. 객관적인 자극은 사람 마음속에 주관적인 자극을 창출해내며, 사람들은 이러한 주관적인 자극에 반응한다.

 

 

7.


우리 뇌는 사실과 이론을 결합하여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내고, 동일 원리로 사실과 이론을 결합하여 과거에 경험했던 감정을 추측한다. 그런데 감정은 풍부한 사실을 남기지 않기에, 우리 뇌는 사실보다 이론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하여 과거 감정을 기억해내려 한다. 그러다 보니 이론이 옳지 않을 경우 우리 과거의 감정을 잘못 기억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성(gender)에 관한 사람들 이론을 보자. 우리는 대부분 남성이 여성보다 덜 감정적일 것이라는 이론을 갖고 있으며, 비슷한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은 정서적으로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여성은 월경 기간에 좀더 부정적인 감정을 보이기 쉽다는 이론을 갖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믿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론이 우리가 우리 감정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실 자체보다 개인 평소 믿음이 과거 기억과 감정 회상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과거 감정을 잘못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미래에 얼마나 행복할지 예측하는 데도 동일 원리가 적용된다. 우리는 생일날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지에 대해서는 과대 예측하고, 월요일 출근 아침에 얼마나 행복할지에 관해서는 과소 예측한다. 그리고 실제로는 이런 예측이 틀렸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런 잘못된 예측을 반복한다. 이처럼 우리가 실제 감정을 제대로 회상하지 못하기에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더라도 그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반복해서 연습하더라도 감정 예측의 오류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8.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실제 경험을 사용하여 자신 미래 감정을 예측하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우리가 ‘내일’ 어떻게 느낄지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오늘’ 어떻게 느끼는지를 보면 된다. 해결책이 이처럼 간단하고 효과적이라면 누구나 자신 방식을 탈피하여 이 방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기대해 봄직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남보다 나를 더 낫게 생각하는 경향은 사실 ‘자신이 남과 다르다’라고 믿는, 보다 더 일반적인 경향성의 표출이다. 때로는 남보다 낫고 때로는 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와 남은 다르다고 믿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얼마나 관대한 사람인지 물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은 관용을 베푼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이지적인지 물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이기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운전하기나 자전거 타기와 같은 비교적 쉬운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을 물어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한다고 평가하지만, 저글링이나 바둑 같은 어려운 과제는 자신이 남보다 더 못한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늘 자신을 남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항상 스스로를 남과 다른 독특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남들이 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남과 다른 어떤 독특한 이유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선택은 그 사람의 특성에 원인을 두지만(그가 문학 수업을 선택한 이유는 원래 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그 선택 대상의 특징에 원인을 둔다(내가 문학 수업을 선택한 이유는 문학이 경제학보다 쉽기 때문이야).

 

 

또한 우리는 우리 결정이 사회 규범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인식하면서도(수업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물어보는 게 창피해서 그냥 있었어), 다른 사람도 사회 규범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다른 사람들은 수업 내용을 다 이해했기에 손을 들지 않았어). 더불어 우리는 우리 선택이 뭔가 좋아하기라기보다는 다른 것을 싫어해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내가 캐리에게 표를 던진 것은 부사를 도저히 참을 수 없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 선택은 늘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믿어버린다(그녀가 캐리에게 표를 던졌다니 그녀를 그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연구 사례는 끝없이 많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굉장히 독특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꼭 우리 자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개개인의 독특성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사회생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누구를 성적 파트너로 삼을지, 누구와 파트너가 되어 볼링을 칠지 등 특별한 개인을 선택하는 문제다. 그러려면 당연히 어떤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특징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의 차이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 배경으로 깔려 있는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실제보다 훨씬 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다양하다고 여기고 자기 자신을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은 감정 영역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자신 감정은 직접 느낄 수 있어도 다른 사람 감정은 표정이나 목소리에 근거해 추론해야만 하기에 종종 다른 사람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강도의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 감정을 파악하지 못할 때도 그들은 우리 감정을 파악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개인이 지니는 다양성과 독특성에 대한 사람들의 강한 믿음이 우리가 타인을 우리 경험의 대리인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주요 요인이다. 다른 사람의 실제 경험을 우리 미래 경험에 대한 대용물로 사용하려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사람 반응과 우리 반응이 대략 비슷할 것이라고 믿어야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감정적 경험이 매우 다양하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 경험을 대용한다는 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결국 다른 사람의 경험이야말로 우리 미래 감정을 예측하는 데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우리가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깨닫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 믿을만한 방법을 거부하고 대신 흠도 많고 오류도 많은 우리 자신의 상상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주목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여러 상황에서 실제로 얼마나 행복해하는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살면서 최소한 세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 것, 그리고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즉 우리는 사는 도시와 동네, 직업과 취미, 그리고 배우자와 친구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런 결정은 우리가 당연시할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까닭에 우리는 인류 진화에서 현재 우리들만이 처음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은 원래 살았던 곳에 그냥 살았고, 죽 해오던 일을 계속했으며, 늘 같은 일을 해오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사회 구조와 지형적 구조가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누구랑 살 것인지를 대부분 결정해버렸다. 따라서 사람들 스스로 뭔가 자유롭게 선택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사람들에게는 엄청남 양의 선택과 결정이 주어졌다.

이 선택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1738년 네덜란드 학자인 베르누이는 자신이 그 해답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결정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효용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베르누이가 말하는 효용이란 뭔가 좋은 것이나 즐거운 것을 의미한다.

결국 선택과 결정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어떻게 느낄지(효용)를 예측하는 것이다. 베르누이의 천재성은 사실 그의 심리학에 있었다. 그는 우리가 객관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갖게 되었을 때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효용)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탁월한 선택이란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행복을 예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많은 사람이 샴쌍둥이는 정상인보다 훨씬 덜 행복할 거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한 몸으로 사는 것은 가치 없는 삶이므로 위험하지만 분리 수술을 선택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결정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의학 역사가는 의학 문헌을 철저히 조사한 뒤, ‘샴쌍둥이가 그 상태로 남아 있고 싶어 하는 것은 널리 발견되는 현상이며, 이것이 그런 쌍둥이들의 보편적인 입장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뭐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행복에 대해 오해를 한다. 우리는 샴쌍둥이가 아니기에 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면, ‘그저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겠지.’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거야.’ 또는 마치 우리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그들은 아직 무엇이 정말로 행복한 것이지 모르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틀렸다고 단정짓기 쉽다. 그럴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종종 종교에 귀의한 사람, 이혼한 사람 또는 심장마비를 이겨낸 사람이 그런 경험 후 인생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들은 그런 커다란 사건을 겪은 후 생각해보니 이전 삶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사람들은 일단 정답을 알게 되면 문제를 매우 쉬운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는 아직 정답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 문제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이것도 몰라?). 사실 일단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는 그 경험을 하기 이전처럼 세상을 볼 수 없게 된다(이 좋은 것을 왜 몰라? 정말 다른 세상이야).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는 순간부터 그 경험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는 렌즈가 되어 우리가 보는 것들을 조성하고 왜곡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서는 예전에 했던 자신 말이 빈약한 경험에서 나온 짧은 판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예전에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그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그 이전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게다가 자신에게 부족한 경험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가난한 사람)이 그 경험을 해본 사람(부자)보다 반드시 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비록 남들이 보기에 우리가 불행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자신은 진실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에 관한 어떤 주장도 누군가의 관점이다. 개인적인 관점이 끼어들지 않은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이기에 우리 자신과 남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 그 말 진위를 평가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2.


우리는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 어디에서 일할 것인지, 자녀는 언제 가질 것인지, 은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지 등 수많은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결정은 대부분 ‘이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떤 느낌일지’에 대한 우리 예상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모습 그대로 미래가 찾아온다면, 우리는 무한한 행복을 느끼고 슬픔은 저 멀리 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 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처음부터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상에는 결점이 있다. 사람들은 미래를 상상할 때 자신 상상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놓치는 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특히 아주 먼 미래의 사건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될 이유를 추상적으로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미래를 그리는 상상 속에는 세부사항이 모두 빠지게 된다.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세부사항이 마침내 눈앞에 닥쳤을 때 우리가 매우 놀란다는 점이다.

 

 

이렇게 미래가 현재와 다를 것이라는 점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은 미래에 대한 상상이 현재에 의해 완전히 창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현재의 생각과 소망, 감정과 전혀 다른 미래를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래를 상상하는 뇌 영역이 동시에 현재를 지각하는 영역과 같기에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한다.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면서 경험하는 정서는 사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우리 정서 경험에 따라 결정된다. 먼저 우리는 미래 일이 현재 일어난다면 어떻게 느낄지 상상한다. 그 후에 현재와 미래가 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 우리 느낌을 조정하는 것이다."

 

 

 

 

 

 


주관적 경험에 대한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통계학자들이 다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이라고 부르는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큰 수와 작은 수의 차이를 단지 큰 수가 작은 수보다 더 많은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양적인 차이만 생각할 뿐, 큰 수가 작은 수에 비해 질적으로 무언가 다른 작용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두 신경세포가 축색돌기와 수상돌기를 통해 전기 신호를 상호 교환하는 현상 자체는 ‘의식’이 아니다. 신경세포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화학물질에 반응하여 또 다른 화학물질을 분비하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장치가 백억 개 모였을 때 백억 개가 단순한 일을 하는 양적으로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렇게 모인 신경세포는 2천 개, 혹은 만 개로는 할 수 없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일을 해냐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식’ 작용이다. 우리 의식은 이런 창발적인 속성을 지닌다.

양자역학도 이와 비슷한 교훈을 준다. 원자 내 입자들은 한 번에 두 개 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 이상하고도 매혹적인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무수한 양의 이러한 입자로 이루어진 물체가 이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고 가정하면, 아마 소들은 같은 시간에 여러 외양간에 동시에 있어야 할 것이다. 소들이 그렇지 않은 이유는 엄청나게 작은 것이 수없이 모여 상호작용을 하면, ‘고착(fixedness)’이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속성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각각 개별 수준에서는 이 고착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더 많다는 것은 단순히 수가 더 많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종종 적은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재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는 이유의 본질에는 미래 우리가 그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자식들처럼, 우리가 낳은 시간의 후손들, 즉 미래 우리도 현재 우리의 수고를 마냥 고마워하지는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마련해준 것들이 ‘미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노심초사하며 막으려고 했던 일을 통해 ‘미래 우리’가 행복을 느낀다면, 미래 우리는 ‘현재 우리’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현재 우리는 미래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할 직업이나 연인을 선택해주고, 심지어 소파 커버까지도 골라줄 수 있을 만큼 이미 미래 우리를 파악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미래 우리는 어째서 현재 우리가 장만해준 긴요한 물건을 창피하고 쓸모없다며 창고에 처박아버리고 마는가? 왜 미래 우리는 현재 우리가 선택해준 연인의 흠을 잡고 승진을 위해 펼친 작전을 개탄하며, 비싼 돈을 들여해준 문신을 더 비싼 돈을 주고 지우려고 하는가? 왜 미래 우리는 현재 우리를 떠올리며 긍지와 고마움보다는 후회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가?

 

 

만약 현재 우리가 미래 우리를 항상 무시하고 외면해왔다면 이 모든 부당한 반응을 이해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만사를 제쳐두고 그들을 뒷바라지 해왔다. 왜 그들은 도움이 될 것 같은 일을 해주면 실망하고, 현재 우리가 그들 안녕을 위해 애써 막으려고 했던 것이 발생하면 오히려 킥킥대며 즐거워하는가? 대체 그들 문제는 무엇인가? 혹시 현재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착시현상을 비롯해서 인간의 착각이 흥미로운 점은 모든 사람이 실수를 범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일한’ 실수를 범한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우선, 인간은 어떻게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미리 상상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을까? 고생물학자와 신경해부학자들은 인류 진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 사건이 지난 3백만 년 동안의 언제쯤엔가 갑작스럽게 발생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구상에 뇌가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약 5억 년 전이다. 그리고 초기 영장류 뇌로 진화하기까지 액 4억 3천만 년의 시간이 걸렸고, 7천만 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 맨 처음 원인(猿人)의 뇌로 진화했다. 그런 다음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어떤 사건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기후 급변에서 조리 기술 등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추정이 있다), 이후 약 2백만 년이 넘는 기간에 뇌가 전례 없는 급속한 성장을 겪으면서 부피가 두 배로 커진 것이다. 이때 1.25파운드였던 호모 하빌리스 뇌가 3파운드인 호모 사피엔스 뇌로 변하게 되었다.

 

 

인간 뇌가 급격하게 커졌다고 해서 뇌 각 부분이 두 배가 되어 이전과 구조적으로는 동일하면서 크기만 커진 새로운 뇌가 탄생한 것은 아니다. 이 급격한 불균형 성장은 전두엽이라는 뇌의 한 영역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전두엽 기능은 일부가 손상된 환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은 전두엽 일부가 손상되면 침착해지는 반면 계획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점이 한 가지 공통점이다. 불안과 계획을 연결시키는 개념적인 고리는 둘 다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래가 없는 시간을 살아가면서 현재에 영원히 갇혀 있는 삶을 우리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는 그러한 상태가 치명적인 뇌 손상으로 발생한, 기분 나쁘며 기이한 비정상적인 상태로 치부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동물세계에서 이런 이상한 존재 양식이 더 보편적이고, 사실 우리가 예외라면 예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과 충만감,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는 바로 미래에 대한 수많은 생각을 멈추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미래를 생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두엽에 그 일을 하지 말라고 설득해야 한다. 마치 심장에 뛰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런 요구는 당연히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왜 우리는 현재에만 머물 수 없는 걸까? 왜 우리는 금붕어조차 간단하게 해내는 일을 못하는 것일까? 현재에도 생각할 일이 많은데 왜 우리 뇌는 고집스럽게 우리를 미래로 끌고 가려고 애쓰는 것일까?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미리 앎으로써, 지금 그 일에 관해 무언가를 할 수 있기를 원한다. 뇌는 우리가 경험할 것들을 통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래를 통제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사실 뭔가를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만족감을 준다. 인간은 통제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이 세상에 왔고, 그 모습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난다. 살아가는 동안 그 어느 한 시점에서라도 통제력을 상실하면 인간은 불행하고 무력하며 희망도 없고 우울해진다. 그리고 이따금 그 이유 때문에 죽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종종 통제할 수 없는 것들도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사실 대부분 사람이 자신 통제력에 착각을 한다. 지난 밤에 벌어진 축구경기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 녹화된 경기를 볼 때는 왜 생중계를 보는 것보다 재미가 없을까? 이유는 게임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아무리 응원을 해도 그 기운이 TV를 뚫고 케이블 시스템을 거쳐 경기장까지 도착한 다음, 공이 날아가는 궤도에 미세한 영향을 주어 골문으로 향하게 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통제력에 대한 착각의 가장 이상한 점은 이런 환상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착각이 우리에게 주는 심리적 이득이 진정한 통제력이 주는 이득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자신 통제력에 대해 크게 착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임상적으로 우울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한 성향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눈앞 현상을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보통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왜 미래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의 기막힌 답변은 바로 통제를 통해 우리가 즐거움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배를 스스로 조종하겠다고 고집한다. 하지만 우리 조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배가 말을 안 듣거나 우리가 목적지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망한 미래와 우리 실제 미래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착시를 경험하고 과거에 대해서도 착각을 하듯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면서 착각을 한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확률과 우연, 불확실성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 상황을 통제하길 원하는 성향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카치 위스키 반 병을 마시고도 자동차를 운전하지만, 자신이 탄 비행기가 조금만 흔들려도 기절한다.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은 우리 자아상과 자존심에 중요하다.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일은 자신 삶을 통제할 방법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적어도 통제하고 있다고 느낄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절망감과 통제력 상실이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질병과도 관련 있다. 모든 통제권을 박탈당한 실험 쥐들은 발버둥을 포기하고 곧바로 죽는다. 병원의 중요한 검사에서 환자에게 검사 순서를 결정하는 무의미한 권한을 주는 것마저도 환자 불안 수준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가 통제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우연을 인지하지 못하고 굳이 패턴을 찾으려는 논의와 관련 있다. 사건이 임의적으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통제를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사건을 통제하고 있다면 그런 사건들은 임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통제하고 있다고 느껴야 할 필요성과 우리가 우연을 인식하는 능력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행운을 능력이라 오해하고, 우연에 의한 사건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우연하게 발생하는 일을 통제하려고 우리 능력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한다.

 

 

사회학 통계 자료에서 규칙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특정 개인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특정한 성과나, 직장이나, 친구나, 재정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연에 의존한다. 가장 단순한 일상적인 노력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서 예상할 수 없거나 예측할 수 없는 힘을 피할 수 없고, 더욱이 그런 임의적인 힘과 그에 대한 우리 반응이 인생에서 우리 경로 대부분을 구성한다. 미래가 정말로 혼돈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면, 사건이 일어난 후에 우리가 그런 사건을 예상할 수 있었어야 했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확실한 사건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비대칭이 존재한다. 그런 비대칭은 볼츠만이 유체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원자 과정을 통계적으로 분석할 때부터 과학 연구의 주제가 되었다. 브라운 운동에서 입자는 춤추는 술고래의 걸음에 따라 움직인다. 술고래의 걸음은 분자들이 공간을 날아다니면서 다른 분자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임의적인 움직임의 경로를 설명하는 수학 용어다. 하지만 아무런 목표가 없는 그런 움직임조차도 어떤 방향으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를 돌이켜보면 분자가 실제 경로를 따라온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분자가 상호작용을 할 수도 있었을 다른 분자들은 많다. 따라서 분자의 경로를 미리 예측하려면 중요할 수도 있었을 모든 분자의 경로와 서로간 상호작용을 계산해야 한다. 그러한 계산은 상상을 넘어선다. 다시 말해서, 분자의 움직임은 지난 후에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지만,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예측은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와 미래의 근본적인 비대칭이 일상생활에서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과거가 명백해 보이는 이유다.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간결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만, 그러한 사건에 대한 논리적 모습은 미래 사건 예측과 상관 없는 과거의 환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사람들은 성공의 우연 역할을 조직적으로 외면한다. 그리고 과거의 실수가 무지와 무능에 의한 것이 틀림없고, 더 많은 연구와 학습을 통해서 통찰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마치 그들의 성과가 항공기 일반석 기내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을 반영하는 것으로 존경한다.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 직업인 역사학자들은 사건이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주장을 경계한다. 사실 역사 연구에서 필연의 환상은 매우 심각한 결과로 이어진다."<춤추는 술고래의 수학 이야기>(까치, 20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도 벌써...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겨울호랑이 2019-11-24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이제 2020년대가 멀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오는군요 ㅋ

북다이제스터 2019-11-25 09:15   좋아요 1 | URL
약 15년 전쯤에 2020년 관련 책 읽은 적 있는데요,
다시 꺼내어 읽어봐야 겠습니다. 얼마나 현실화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